[김명섭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반도]
임진왜란은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히데요시의 도발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침공
임진왜란은 16세기 세계에서 둘째로
사상자가 많았던 전쟁이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왜 대륙을 침공했는지에 관한 정설은
아직 없다.
일본 통일 이후 남아돌던 군사력의 배출,
1591년 아들 쓰루마쓰의 급사에 따른 보상심리,
명나라와의 무역 문제 등이 거론되어 왔다.
일본 주재 예수회 선교사 프로이스(Luís Fróis)는
히데요시의 개인적 공명심에 주목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월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
이 전투에서 평양성을 연합군이 탈환하면서 일본군은
한성으로 밀려난다.
유럽 예수회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복하려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유교 성리학적 유대가 강했던 조선과
명에 패배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
16세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기록한 프랑스 종교전쟁처럼 이 전쟁의
배후에도 관념의 충돌이 존재했다.
현세(現世)나 후세(後世)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생사를 건 전쟁으로 이어졌다.
관념의 차이는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명칭들에 반영되어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나 만력조선역
(萬曆朝鮮役·만력제 시대의 조선전쟁)이라는
명칭은 조선과 명(明)나라의 유교 성리학적
관념을 반영한다.
베이징의 황제, 즉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질서를 평화로 보는
관점이다.
전쟁을 일으킨 왜(倭)는 1635년까지 존속한
북원 몽골이나 만주의 여진족과 마찬가지로
난적(亂賊)에 불과했다.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분로쿠노에키
(文禄の役·분로쿠 시대의 전쟁)라고 부른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천하질서관은
거부되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히데요시를 가리켜
“저 대물(大物)은 명과 인도를 정복하라고
명령하더라도 거절하는 일은 없을 기성(氣性)”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히데요시가 조선에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고 했던 것은
단순한 핑계가 아니었다.
어떤 경우든 조선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요구였다.
예수회와 오다 노부나가의 그레이트 게임
16세기 포르투갈이 개척한 항로를 통한
교류는 일본인들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
유럽에서는 1517년 기독 개신교의 새로운
교리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판을 통해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가톨릭은 프랑스 종교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유럽 전역에서 종교전쟁은 1648년까지 지속되었다.
전직 군인이었던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가
1540년 창립한 예수회(Societas Iesu)는 절대 청렴,
절대 순복의 정신으로 가톨릭이 유럽에서 상실한 것
이상의 교세를 유럽 이외 지역에서 만회한다는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오늘날 아메리카는 유럽보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을 갖게 되었다.
----일본의 다이묘(지방영주)들의 친척과 측근 소년들로
구성된 ‘천정견구소년사절단’이 1586년 밀라노를 방문한
직후 이 소식을 보도한 독일 신문. 1582년 유럽에 파견돼
펠리페 2세, 그레고리우스 13세 교황 등을 알현한
천정견구소년사절단은 8년 뒤 일본에 돌아와 유럽 문명을
소개한다.
(윗줄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 인솔자를 맡은 포르투갈인
디에 고드메스키타신부, 일본인소년사절단만쵸이토,
미구엘 치지와, 마르티노 하라, 줄리앙 나카무라---
< 위키피디아 >
예수회 창립 회원이었던 하비에르(F. Xavier)는
1549년 규슈에 상륙했다.
그의 상륙은 1543년의 조총(鳥銃) 전래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가톨릭을 통해 군사화된
일본의 종교 조직들을 견제하고, 새로운 문물을
수용했다.
일본의 기리시단(吉利支丹, Christian)은
1583년 200개 교회 약 15만 명, 1591년
20만 명에 육박했다.
노부나가의 부하 히데요시는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과 필리핀 마닐라의
에스파냐인들을 통해 세계 정세를 파악했다.
1579년 명나라 만력제(萬曆帝)는 마카오에
있는 포르투갈인들이 왜구들을 비호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1576년 마닐라를 거점으로 명을
침공하는 계획이 세워졌었다.
에스파냐의 왕이자 포르투갈의 왕인
펠리페 2세의 마닐라 총독 산데
(Francisco de Sande)는
수천 명의 에스파냐인들에 더해서 명나라
내의 반도(叛徒)들과 일본인들을 동원하고자
했다.
히데요시도 1586년 3월 예수회 신부 코엘료
(Gaspar Coelho)에게 대륙 침공을 위해 포르투갈의
배와 승무원을 요청했다.
1586년 예수회 신부 산체스(Aloso Sanches)는
필리핀 주둔 에스파냐인들과 본국에서 지원되는
약 1만2000명, 인도인 약 5000명, 그리고
일본인들로 구성되는 정복군을 구상했다.
이 계획은 같은 해 4월 마닐라 총독과 주교들의
지지를 받아 본국에 건의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패배한 뒤 유럽에 더 골몰했다.
히데요시의 새로운 세계 인식과 망념(妄念)
예수회 선교사 발리그나노(Alessandro Valignano)는
예수회 신부들이 정치 활동에 관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런데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탁발 선교에도
부정적이었다.
그런 방식은 유럽 문명에 대한 무시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발리그나노는 유럽 문명을 일본에 보여주고,
예수회의 선교 성과를 유럽에 알리고자 했다.
기리시단 다이묘(지방 영주)들의 친척과 측근
소년들로 구성된 천정견구소년사절단
(天正遣歐少年使節團)이
1582년 2월 유럽에 파견되어 펠리페 2세,
그레고리우스 13세 교황 등을 알현했다.
8년 뒤인 1590년 7월 귀국한 사절단은 이듬해
3월 히데요시를 만났고, 유럽에서 가져온 책,
천체관측기, 지구본 등과 함께 유럽 문명을
소개했다.
1587년 히데요시가 가톨릭 금교령을 선포한
지 4년 뒤의 만남이었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사절단원들은 명나라가 넓다고 해서 강한
나라는 아니라고 보았다.
아메리카나 아프리카가 더 넓다고 해서
에스파냐나 이탈리아보다 더 강한 것이
아니듯이 국력은 영토나 인구의 크기로만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럽 문명과의 조우를 통해 새로운
지리정치적 인식을 갖게 된 히데요시는
16세기 세계 최대 규모의 상륙 전쟁을
일으켰다.
그의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수도인 베이징에 거소를 마련하고 누군가를
(그곳에) 앉혀둔다. …
가능한 한 천축(天竺·인도)까지 빼앗는다.”
히데요시의 부채에 그려져 있던 지도는 조선
중후기에 유행했던 천하도(天下圖)에 비해
훨씬 정확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조선의 저항과 명의
대응을 과소평가했다.
평민 출신으로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낸
영웅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히데요시의
이름은 침략 전쟁의 대명사가 되었다.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이나
신성로마제국을 끝낸 나폴레옹처럼 되지도
못했다.
결정적으로 히데요시는 전쟁의 명분을 제시하지
못했다.
근대 국제법이 성립되기 이전이었다 하더라도
왕릉 도굴, 민간인 살해 및 납치, 도자기 약탈 등
더러운 전쟁을 7년 동안 이어갔다.
히데요시가 1598년 9월에 죽자 전쟁은
끝났다.
유라시아대륙 반대편에서 명나라 정복을
꿈꾸던 펠리페 2세도 불과 닷새 전인 9월 13일
숨을 거뒀다.
전쟁 이후 조선에서 더 강해진 유교 성리학
16세기 말 명의 만력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기 전에 파병하여
조선반도에서 싸우는 것이 상책이었다.
조선왕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와의 유교
성리학적 유대도 두터웠다.
----조선 후기 창덕궁, 창경궁과 그 주변을 그린 동궐도.
그림 가운데 위쪽에 있는 대보단은 임진왜란 당시 구원군을
보내준 명 황제에 감사하는 의미로 1704년 만들어졌다----
< 고려대 박물관 >
19세기 말까지 쇄국을 고집하다 망국을
초래했던 유교 성리학에 대한 21세기의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조선은 유교 성리학에 기대서라도
나라를 지켜야 했다.
바다에서 일본군의 병참선을 끊었던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나 행주대첩을 이끈
충장공 권율(1537∼1599)의 충군애국(忠君愛國)
정신도 유교 성리학에 기초한 것이었다.
구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들이 양명학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성리학에 대한 조선의 집념은
유별났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유교 성리학적 관념의
재생산이 필요했다.
명나라가 멸망한 지 1주갑(周甲, 60년)이 되는
1704년(숙종 30) 조선왕실은 왕궁 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임진왜란 당시 구원군을 보내 조선을 다시
만든 만력제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감사하는 제단이었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사필귀정77
참으로 신선한 관찰이다.
임진왜란은 사서3경, 공자왈 맹자왈로
허송세월하며, 스스로의 힘을 키우지 않고
무위도식한 무능한 지배층이 자초한 인재다.
메타부스
김명섭교수의 글 좋네요.
박종인기자님의 글과 잘 융화가 되어 아귀가 맞음.
조선과 명. 일본. 왜란. 성리학과 일본의 진화....
술퍼맨
일본 최초 통일을 거의 달성했던 오다노부나가를
뛰어넘는 도요또미 히데요시로 기억되고 싶어서는
아닐까요?
그런 관점에서 중공의 습근평이도 등소평이나
모택동이를 뛰어넘는 물건으로 기억되고 싶어
대만침공에 나설 겁니다
튀프꼬취
임진왜란을 성리학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좀 논리가 자연스럽게 받기가 힘드네요.
임진왜란은 히데요시가 자신의 정권의 보존
차원에서 관심을 외부로 돌리고자 했다는 것이
일본 역사학자들이 말하든데요.
하사불성
문과가 무과에 당하는 거지.
지금도 북한을 종이로 막자는 놈들이 천지다.
lhylkhkys
그렇게 당했으면 실사구시 부국강병으로 가야지
성리학 강화하여 죽은 명을 이어 받은 명분론으로
정신승리로 간 것을 잘한 짓이라 할수 없지요.
사상마련
수박 겉핥기 수준의 글이다. 도대체 논점이
뭔가?
성리학의 개념부터 이해하고 쓴 것인가?
조선은 명분론적 사대론에 빠져 국혼을 잃어
버린 정신적 장애자였다.
freedom
성리학은 입으로만 떠드는 학문이다.
서양과학처럼 가설과 실험으로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다.
지금 좌파들이 과학을 무시하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떠들고 있다.
광우뻥 사태와 후쿠시마 원전방사능나왔다고
호들갑 떨면서 지금은 미국가서 햄버거 맛있게
먹고, 일본에 잘 들 놀러간다.
성리학적 접근은 나라 망하게 한다.
과학적 접근을 해야 한다.
동방의나라
조선을 망하게 한 성리학은 아이러니하게
충효를 강조하기에.. 임진왜란때는 의병과
이순신의 등장을 만들어 국난을 극복했지만
조선말에는 오히려 국가에 반하는 동학, 의병과
외부세력의 등장은 성리학의 당쟁과 피폐해진
허약한 체력의 조선은 맥없이 무너진다.
성리학의 자체는 좋지만 현실감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현실인데... 조선의 기회는 대항해시대
조선도자기로 세상의 부를 가질수가 있었는데?
결국 일본은 전쟁에는 졌지만 조선에서
끌고간 조선도공으로 전셰계에 막대한 부를
창출한다.
당시 최고의 무역 상품은 향신료와
도자기였으니....
사랑과 평화
그런데 재미있는게 성리학적 잔재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곳이 북한이다.
국가를 중심으로 사회 공동체의 윤리규범을
제시. 그런데 그 윤리규범 중심에 김일성 일가가
자리 잡았으니 문제지.
YAVUUZ KHA****
이런게 진정한 기사가 아닐까.
철저한 분석을 통한 사료 해석.
기사다운 기사였네요.
자유공정정의
성리학을 공부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는 나라를
침략해 죽이고 피를 뿌리는 자는 싸이코패스
임이 분명하다.
아마 히데요시의 싸이코패스 점수 30점은 능히
넘을듯하다.
정신병자는 절대 역사에 언급될 수는 있을지언정
역사의 물 줄기를 바꿀 수는 없다.
예안이
그 성리학을 안 이에야스는 그. 성리학을.
이용해서 조선을 망하게 했다 장기간을 걸쳐서
말이다
단기전에는 그 힘이 무척 세서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장기전은 성리학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대상의 학문이나 모든 것은 변화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자체는 변할 수 없기 때문에
망할 수 밖에 없다.
우린 그것을 알아라 한다.
지금 미국 사상과 중러 공상당 사상이 들어오고
그 역사가 제법 되었다.
그렇치만 변화 하지 않으면 성리학 꼴이 될 것이다.
그 꼴 나면 가장 고통 받는 층은 국민이 될 것이다.
나의 사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