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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교사』의 빛과 그림자
7십대 중반을 넘어선 노인이 신촌 지하철역에서 내렸다. 그는 많은 인파에 섞여 왼쪽 북편 출구를 찾아 계단을 올랐다.
신촌 현대백화점 건너편에 있는 법무법인신촌 사무소가 들어 있는 한 빌딩의 옥외 엘리베이터 탑승구 앞에 들어섰다. 3층을 눌렀다. 노인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 첫째 방에 자리하고 있는 고교동기인 김 변호사 집무실로 들어섰다.
“헌진이가 오랫만이다, 언제 올라 왔어” 김 변이 앉은 채로 반갑게 맞이한다.
“그 동안 별일 없지, 김 변은 건강이 좋아 보인다”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요즘 몸 컨디션이 좋아, 그런데 진아, 이번에 모교 발전기금을 모으는데 니도 돈 좀 보태지 그래”
만나자마자 돈 얘기를 듣게 되자 좀 거북했다.
동기들을 잘 구슬이는 김 변의 원활한 성품과 적극적인 리더십을 아는 나는 그다지 언짢지는 아니하였다.
김 변은 헌법재판소 판사직을 10년간 연임하고 퇴임 후 지금은 이곳 빌딩 3층에 '법무법인 신촌'이란 간판을 걸고 사무실을 내고 있다. 김 변은 오래 전에 인천지방법원장을 끝으로 공직을 퇴임하여 변호사 생활을 하였다. 법조계에서는 유능한 법률가로 알아주는 인물이다 YS가 정권을 잡은 후 대통령이 지명하는 헌법재판관에 임명되었다.
노인은 김 변을 쳐다보며,
“경열회 소식지를 보니 우리 열우(10회동기)들이 많은 돈을 보태고 있던데--, 김 변이 총대를 매고 있어서 그랬구만, 그런데 나는 형편도 못되지만 모교를 위해 돈이 있어도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무슨 이유가 있는 모양이 구나”
“니는 잘 모를 기다. 4-5년 전이지 싶다. 우리 갱고가 고교평준환가 뭔가 때문에 서울대합격자가 한둘밖에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 나와 동문 몇몇이 주동이 되어 모교를 부산 센텀시티로 옮기자는 운동을 벌인기라,”
“그런 일이 있었나”
“그렇구마, 결국 부산 거주 선배 동문들과 모교 교장 등이 구덕산 골짝의 명물인 '원형교사'를 두고 옮길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지, 어떻게나 화가 나든지 나는 모교 학적부에서 내 이름을 빼라는 편지를 갱고 교장에게 보냈던 일도 있었단 말이야”
“니 말 듣고보니, 갱고 이전 문제로 시끄러운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만, 니가 그 중심에 있은 줄은 모랐다”
“그 뿐만 아니고 부산 코모도호텔에서 이 문제로 총동창회 임시총회를 할 때다. 부산의 이전 반대패들에게 내가 맥살을 잡히고 있을 때 나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이전 반대파들과 한바탕 몸싸움까지 벌인 사실도 있었다 아이가”
“그런 일이 있었구마” 노인은 의아스레하는 김변을 보고
“김변, 니가 10회에서 발전기금 모금 운동에 총대를 메고 있었구마”
“그래 나설 사람이 있나 세금 거두는 궂은일인데”
“저번에 들은 께네 갱고가 자율공립고등학교로 바뀌었다카데--, 이제 옛 명성인 찬란한 옥(교가의 한소절)을 되찾겠네”
“그런데 하루아침에 성적이 어디 좋아 지겠어”
“자율공립고란 교장도 공모하고, 학생은 학군에 관계없이 응시하고 또 교장은 자유로 좋은 선생도 모셔올 수 있고, 또 동창회에서 발전 기금도 많이 모아 후원하면, 옛 명성을 되찾지 않겠나 싶구마.”
김 변과 나는 가끔 바둑을 둔다. 바둑판을 책상 밑에서 꺼내 차탁자 위에 올려놓고 마주 앉았다.
여직원이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나간다.
“한잔 들어” 커피를 한 목음 마셨다.
김 변한테는 바둑 다섯 점을 깔고 석전을 벌이는데 내가 지는 회 수가 많다.
그날도 내리 세 번을 지고 마침 점심시간이라 부근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헤어졌다.
그 이튿날 고향 집으로 돌아 온 노인은 편지통에 있는 유인물과 편지를 꺼내 들고 방으로 들어 왔다.
노인은 객지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합천읍으로 내려와서 산지가 한 6-7년 되던 때이니, 지금부터 4-5년 전으로 2007년쯤인가 싶다.
그는 고향에 내려와 살려고 양친의 묘소가 있는 합천읍 서산리 안계마을 뒷산 아래쪽에 20평 쯤 되는 남향의 판넬 집을 꾸며놓고 혼자 기거하고 있다가 그 집은 헐하게 팔고 바로 옆에 150여 평의 대지를 장만하고 서른 평 정도의 2층 벽돌집을 지었다. 2층 칠팔 평 전부를 침실 겸 서재로 꾸며 그가 기거하고, 아래층은 아들 식구를 객지에서 불러들여 살게 하였다.
대 봉투에 든 유인물은 갱고 본부동창회에서 보낸 회보였다.
2층 서재로 올라 온 노인은 회보를 책상 위에 던져놓았다. 회보가 든 흰 봉투를 보니 신촌에서 김 변호사와 나눈 갱고발전기금 얘기가 생각나고, 갱고를 살려보겠다고 한 때 열정을 쏟을 때의 일들이 문득 떠오른다.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쿵쿵 나더니 문을 열지 않고
“할아버지 저녁요” 하는 손자의 말을 듣고 내려가 저녁을 먹고 난 후 50여 평 되는 마당에 나가 몇 바퀴 돌았다. 2층 서재로 올라와 침대에 올라 편안한 자세로 리모콘으로 TV를 켠다.
박근혜와 시진핑 한중 정상의 성명서를 놓고 종편 조선TV에서 안면이 있는 패널과 내가 좋아하는 앵크 남녀가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성과에 관하여 주고 받드니 시간이 다 됐는지 남자 앵커가 거수경례를 하고 물러간다. 나는 거수경례를 하는 앵크의 이름이 지금 기억되지 않지만, 대담 중 재치 있는 대화로 인해 웃는 순진한 모습이 좋았고 방송이 끝난 후 거수경례로 시청객과 국민에게 인사하는 태도가 믿음직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의 김정은의 모습이 내 머리에 떠오른다. 한중 두 정상회담 관경을 북한의 김정은은 보고 있을까, 두 정상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궁금했다. 또 김정일의 둥글둥글한 모습도 또 떠오른다. 그런데 정일 정은 두 부자 뒤에 전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이 빙긋이 웃고 있는 희미한 그림이 망막에 떠오른다. 노인은 보기 싫은 사람이라 골치가 아픈지 TV를 꺼버린다.
침대에서 내려 노인은 노트북이 놓여 있는 책상 쪽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아직도 뜯어보지 아니한 경고회보가 노트 북 옆에 노여 있다. 컴을 열었다. 네이버의 머리기사에 노무현의 NNL 대화록 문제로 여야가 공방을 벌인다는 뉴스가 한창이다. 그런데 노무현이 부엉이 바위에서 왜 뛰어내려 자살하였을까하는 의문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렇지 노무현--, 2007년 10월 평양에 가서 만수대의사당을 관람하면서 방명록에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 주권의 전당』-2007.10.2 대한민국대통령 노무현- 이라고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보는 자리에서썼다 한다. 100%찬성만 있는 한국으로 치면 국회 의사당인 만수대의사당을 방문하여 방명록에 하필이면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 주권의 전당'이라 고 기재 칭송하다니--, 정말 북한의 인민이 행복할까 생각하니 기가 막힌다.
그런 노무현 대통령인데 NNL를 포기했느니 아니 했느니 시비할 건더기가 어디 있겠나. 삼척동자라도 짐작할 뻔한 일을 두고 국회가 시간을 낭비하다니 분통이 터진다. 노인은 흥분을 가라 안 치고 노무현대통령이 평양으로 달려간 2007년의 모습을 컴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올려본다.
2007년의 가을 어느 날 그날도 노인은 저녁 9시 뉴스를 켜니, 노무현 대통령이 10월 2일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가 승용차로 평양 개성 간 고속도로를 거쳐 평양에 도착하였다고 야단이며, 김정일 위원장은 4·25문화회관 앞에서 노 대통령을 영접하였다는 그림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10월 3일에는 남북 정상이 회담을 열었고, 10월 4일에는 6·15남북공동선언을 기초로 하여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문'(약칭 2007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하였다고 앵크가 열심히 보도 했다.
노무현 김정일 관련 뉴스와 그림이 계속되어서 식상한 그는 TV를 꺼버렸다. 그리고는 잠시 눈의 피로를 풀려고 눈을 감자,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 뒤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는 그림이 또 되살아났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김정일과 김대중이 합의한 6.15공동선언은 남북 두 김씨가 죽이 맞아 주한미군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북한 김정일의 연방제 통일방안에 김대중이 동의해 준 것이며, 김정일의 적화 통일을 위한 수순에 협력한 선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선언대로 이행하면 대한민국은 공산화된다.
검찰과 법원은 이 선언이 북의 연방제(赤化)통일방안을 합법화한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또 이 선언은 국가보안법을 사문화(死文化) 시켰으며 종북 세력과 북한공작원들에겐 반역행위를 마음 놓고 펼칠 수 있도록 한 면죄부가 되었다 생각하였다.
그는 이 선언이 빌미가 되어 지금은 친북 좌파들이 고기가 물을 만난 듯 활보하며 모든 조직과 단체의 구석구석에 침투하여 똬리를 틀고 국가반역의 일을 꾸미고 있다고 통분해 왔던 것이다.
이유는 그뿐만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제2연평 해전에서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가 북한경비정의 포격에 맞아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고 이에 응전하다가 윤영하 대위를 비롯하여 6명의 젊은이가 아까운 목숨을 잃은 것도 김대중 대통령이 명한 1997년의 교전규칙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 해군교전규칙에 의하면, 적군이 출몰해 오면 우리 군은 먼저 경고방송을 하고 다음 시위기동을 하며 다음 차단기동(밀어내기 작전)을 하고 그 다음 경고사격을 거친 후 마지막으로 조준격파 사격을 하라 라고 되어 있다고 했다. 간단히 말하면, 북의 총알을 먼저 맞고 나서 응전하라는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불행을 당한 후 교전수칙이 바뀌었다. 적이 출몰하면 먼저 기동을 하고 다음 경고사격을 한 후 조준격파 사격을 하라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노인은 이 나라 대통령인 김대중이 우리 군을 보호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적인 인민군의 목숨을 더 아끼는 대통령이라 여겨 왔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전사자의 시신이 누워 있는 분향소에 참배하여 전사자의 영혼과 부모형제를 위로 격려 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동경으로 날아가 월드컵 결선 경기를 관람한 사실에 대한 격분이 5년이 지난 그 때까지도 응어리져 가슴을 아프게 해 왔던 것이다. 더욱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을 다녀와서 국민 앞에 한 말이 내가 평양에서 김정일과 만나 얻은 제일 큰 성과는 국민에게 앞으로는 절대 전쟁이 없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자신이 방북하여 얻은 제일 큰 성과였다고 국민 앞에 자랑을 늘어놓고 흡족해 했다.
그렇게 선언한지 2년도 채 안되어 연평도 제2해전을 북이 도발 했다는 것이었다.
2007년 당시 이런 생각에 굳어 있는 노인에게는 노무현대통령이 임기를 몇 개월 남겨놓지 않는 형편에 평양 간다는 뉴스는 나라를 김정일에게 팔아먹으려 간 김대중 대통령보다 더하면 더했지 뒤지지 않는 빨갱이 대통령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노인은 옛 기억을 덮어두고 현실로 돌아 왔다. 침대에 올라가 편안하게 몸을 누이었다. 벌써 벽시계가 세벽 2시를 알린다.
흥분하다보니 잠이 천리 밖으로 달아났다. 그는 이불을 뒤치다가 다시 컴퓨터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헤매다가 저장해둔 정치 쟁점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남북이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하는 골치 아픈 문제를 이제 좀 잊어야지--, 잊지 않고 속을 썩이면 나만 손해라고 생각하며 인터넷을 열었다.
노인은 잠시 생각한 끝에 십여 일 전에 경고의 어떤 후배가 동창회 홈페지에 올린 금연(禁煙)관련 기사를 본 기억이 나서 댓글을 올려보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노트북에 복사 저장해둔 한글 폴더를 열었다.
후배가 올린 금연에 대한 글을 찾으려고 저장된 목록의 제목을 쭉 훑어 내려간다. 작은 글씨라 초점이 흐릿하고 글들이 아물아물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돋보기를 썼지만 뚜렷하지 않고 글자가 흐릿하다.
안경을 바꾼 지가 5-6년 전인데 또 높은 도수로 바꿔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나이는 정직하다’는 속담이 거짓이 아니란 생각이 떠오른다.
목록을 훑어보던 중 ‘김 0호 후배께’란 제목이 눈에 띄어 열었다.
모니터에서 잠시 눈을 떼고 일어나 노인은 잠을 쫒아보려고 옆쪽 벽면에 나있는 창문을 열었다. 초 가을의시원한 바람인데 다소 차갑다. ‘김 0호 후배께’란 제목을 먼저 읽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행여 찬바람에 감기가 들 가 염려되어 창문을 닫았다. 잠시 눈을 감고 김 0호 후배에게 편지를 쓸 당시를 회상해본다. 기억이 아리송하여 종잡을 수 없어 눈을 뜨고 모니터 화면을 주시한다. 김 O호 후배가 3년 후배인 것은 기억이 난다.
편지를 쓰면서 일부러 사투리로 지껄였기 때문이다. 모니터에 떤 편지를 읽는다.
「김 0호 후배께!」
격려 한마디 참말로 고맙구마. (무엇 때문에 후배가 나를 격려했는지는 얼핏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갱고에 뒷문으로 빠지자 말자 니는 앞문으로 들어 섰구마. 참말로 옛날 이바구다 그자. 너거들이 공부한 그 원형교사 안 있나 우리 성가들이 쌔가 빠지게 맹글어 농께네 바로 밑은 1년, 그 밑은 2년 그리고 너거들은 3년 내내 공짜배기로 손 안대고 코풀듯이 공부 했다 아이가. 후배 니 글을 대하니 참말로 반갑기 거지 없구마. 그라고 니캉 내캉은 보통 인연이 아잉기라. ‘재주는 곰이 하고 돈은 중국 놈이 뭉는다’ 카디마능--, 너거들은 이 행님들 덕분에 그 원형교사에서 일학년부터 삼학년까지 풀코스로 재미 봉기라. 오뉴월 하루 빛이 무섭다 캔능데, 거기 오데고. 너거들은 그 때 편안하게 공부하면서도 벽돌 맹글고, 돌바구 줏어 나른다고 골빙덜었던 이 성님들 생각을 ‘귀떨어진 싸래기’ 만큼이라도 했는지 궁금하구마--. 지금 니캉 내캉 세살 차인께네 니도 나처럼 얼굴에 주름 골이 파여 있을 끼고, 이 행님처럼 아랫도리 중앙청 요물이 축 늘어져 형편이 말이 아이제--, 내말 맞재, 안 그렇타 카면 거짓말이지 시푸다,
그런데 보래!
20회 구 O홍이란 후배가 이 갱고 재경동창회 홈페지에 ‘묵고 살만하면 갱고 좀 살립시다’ 하는 제목으로 올린 글을 내가 본기라. 그렇잖아도 요새는 어제 오늘 숨쉬기가 다른데, 난데없이 20회인 그 달구진 후배의 글을 본 후에는 내 기력이 아침저녁 다르게 표나게 힘이 줄어든다 킁께--. 구 후배 말에 의하면 현 모교는 걷어차 뿌리고 치마 바람이 쎈 오매들이 수타 있는 다른 고급 아파트 지역으로 옮겨야 공부 잘하는 인제가 나올끼라 카능 뭐 그런 주장을 폈는데, 그 말이 어찌나 타당한지 나한테 큰 감동을 준기라---.
사실이지 한국의 오매들은 이 시상에서 어느 나라 오매들 보다 제일로 교육열이 높다 카는 거는 니도 알끼구마, 그런 오매들이 고급 아파트 지역에 수두루 빽빽한기 아이겠나. 그래서 구덕산 골째기에 있는 갱고는 아파트가 적은 지역이어서 피해를 보는 기 당연하다는 말잉기라.
구가 성을 한 그 후배를 TV에서 많이 봉 것도 같고 이름도 귀에 떠오를똥 말똥 아리쏭한데---, 좌우지간 방송계에서는 좀 이름께나 날린 놈이 틀림없다 싶은 기라.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글발이 야무딱 지덩구마. 그 칭구가 원형교사 이바구를 하면서 똑똑한 인제도 못 맹글면서 교사만 덩거러면 무슨 소용있노--, 공부잘 하는 놈들을 무슨 수를 써더라도 잘 가르치고 키우는 핵교가 장땡인기라 카는 주장이지--. 지금 손을 써지 아느면 갱고란 '앙코업능 풀빵'처럼 껍데기만 덩거런 3류고교로 내리 쳐박힐끼라카능 대강 그런 이바구잉기라. 정말로 그 글을 보고 나능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 된기라.
그래서 나능 꼼꼼하게 생각해 봤다 컹께.
졸업 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적어도 내가 누고, 내가 낸데’ 카면서 큰 소리 친 것도 갱고 출신이 라는 자긍심 하나로 살아 왔는데--, 요로콤 갱고가 빈 쭉쟁이가 된 사실을 몰랐고 착각 속에 살아온 기 부끄러번 기라.
서울대학교에 한 놈도 들어가지 못할 때도 있고 많아 봤자 두서너 놈 밖에 없다 카는 사실을 미처 몰란 기 억울하다 거 말잉기라. 어쨋등가네 구가 성을 가진 그 후배의 송굿 같은 주장에 대한 답 글을 쓸라 컹께 아무따나 갈깃다가는 체면 구길 것 같고 해서 아직 답글을 쓰지 못하고 있구마. 나도 갱고의 추락에 대해 곧 한마디 갈길랏고 지금 단디 체비하고 있구마.
후배 김가야 ! 행님 세실이 좀 길제---, 객지 10년 사이는 친구라 안커더나 내말 맞제 거자. 칭구야!, 우리는 ‘비렁빠개 똥칠하자. 시건든다’는 말이 있지마능 우리는 갱고 동문 중에 대 선배 쪽에 안 끼나 말이다. ‘선배란 뭐꼬, 선배란 저거도 선배는 선배아이가’ 그 말이다. 그런깨네 젊은 후배들한테 질끼 오딘노. 기죽지 말고 열심히 살자! 그 말이다.
칭구 김가야! 이런 말 있데이.
우리는 ‘하루’라 카면 보통 아침부터 밤까지를 말하제, 그러나 유태인들은 반대로 생각한다 앙커나, 그들은 해질무렵부터 ‘하루’가 시작된다고 생각능기라. 탈무드라는 유태인들의 고전에 보면, 위 ‘하루’ 문제를 랍비(유태교의 성직자)들이 풀이하기로는 ‘시작이 밝고 끝이 어둡기보다는 캄캄할 때 시작하여 밝을 때 끝나능기 엄칭 낫다’고 그렇게 가르친다 카더만.
이런 하루를 한평생이라고 치면, 니캉 내캉 또래는 이제 인생 중심의 출발점에 서 있능기라. 우리 함께 2-30대 후배들 보고 ‘너거들은 다덴 황혼이고, 70을 바라보는 우리능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는 팔팔한 청춘인기라’ 요로콤 생각을 바꾸고 어깨 쭉 피고 폼 좀 잡아보자 거말이다. 알겠제---, 칭구 김가야! 용서하오. 모처럼 컴에서 귀한 또래를 글로 만나니 너무 반가워서 나오는 대로 사투리로 지껄였다오. 올 사투리로 쓰니 재미가 깨소곰 같구마. 안녕- . 노인은 인터넷 여기저기를 유영하였다.
편지 내용을 훑어 본 후 노인은 생각한다. 그 무렵 갱고 출신이고 10년이나 후배인 언론계 중진인 구 O홍 후배가 요즘 모교인 갱고가 대학 진학률이 형편없는 것을 개탄하여 갱고 재경 동창회 홈페지에 '갱고 살리자' 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을 보고, 자신이 3회 후배인 김씨 성을 가진 친구에게 띄운 글임을 알았다. 여기 까지 읽은 후
노인은 20회 구O홍 후배의 글을 찾아보기위해 인터넷으로 돌려 재경경고 홈페지 게시판을 크릭했다. 제목을 죽 훑어간다. 옳지 찾았다.
등록자는 구 O홍, 등록일 2007-03-07 11:11 이고, 제목은 ‘이러고도 어디서 갱고'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라는 글이다.
구 후배가 -통탄하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좀 길지만 인내하고 읽어 주십시오-. 라고 밑에 토를 달았다.
“....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우리 경제가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경고 동문들을 비롯한 우수한 인재들이 각 분야에서 Chief Officer로서 구슬을 꿰어 보배를 만들어 내는 동력을 제공한 결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은 재경동창회 회장님이 2007년 신년 인사 중에 재경 동문들에게 한 말씀 중의 한 구절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 경제가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경남고 출신과 같은 '우수한' 인재들의 힘이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각계각층, 요소요소 마다 용마(갱고의 상징)가 없는 곳이 없었고 늘 그들은 주위를 압도하는 발군의 실력으로 이 나라의 성장과 발전을 이끌어 왔습니다.
구덕산 수원지의 정기(精氣)를 받은 경고의 사람들은 빛나는 눈동자와 슬기로운 두뇌로 이 사회의 밑바탕이고 기둥이 되어왔습니다.
경남고! 그래서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뛰는 이름인 것입니다.
회장님! 그리고 선후배 동문 여러분! 그런 경남고가 지금 어디로 갔습니까?
혹시 경남고란 씨가 말라서 그 작물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무슨 소리냐고요? 부산엔 온 천지가 경고판이고 말깨나 하는 경고 출신자가 쌔삐까린데 무슨 말이냐고요?
그렇겠지요. 서울 및 경향각지 등 뿌린 씨 중 그나마 여물게 열매를 맺은 곳은 부산에서만 볼 수 있었으니 그렇겠지요.
그런데 경고 씨는 부산 토질이 아니면 맥을 못 춥디다.
더구나 토양이 까다롭고 기후마저 거칠고 경쟁이 치열한 서울에선 언젠가부터 경고 씨가 자라지 못했습니다.
씨가 없는데 잎이 어디 있고 가지가 어디 있으며 열매는 더욱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희한하게도 서울엔 다른 씨앗들이 득시글 득시글 잘 자랍니다. 브니엘고라고 하는 옛날 부산 골짜기 밭에서 나온 씨 한 알은 “법무장관”이라고 하는 큰 꽃밭에 우뚝 서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옛날 시궁창에서 피는 꽃이라고 침 뱉고, 발로 밟고, 마구 꺾어 던지던 꽃들이 서울에서 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꽃들은 옛날 경남고처럼 군무(郡舞)를 추고 있습니다. 부산상고라는 꽃은 이미 임금초가 되어있지요.
그런데 회장님의 신년사엔 경남고의 퇴락에 대한 절박함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11년 전인 1996년, 무너져 가는 경남고가 안타까워 ‘경고 살리기’를 위해 학력 향상을 외치며 모교를 이전하자고 동문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었습니다.
홈 커밍 데이 때 모교를 찾은 동문들은 그 자랑스런 우리의 모교가 어느새 변두리 3류고로 전락해 있는 현실을 접하고 충격과 분노를 곱씹으며 눈물이 뒤범벅이 된 소주잔을 기울이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 해 경고의 대학입학 성적이 서울대 합격 ‘제로’였습니다.
고대, 연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교교정에서 만난 우리의 사랑스런 후배들은 어찌된 셈인지 한결같이 중학생처럼 초라해 보였습니다. 요즈음은 잘 먹여 키워서 아이들도 발육이 좋아 키 큰놈도 많을 텐데 죄다 작아보였습니다. 못 먹고 자랐기 때문인가요?
학교로 가는 산복도로는 옛날에는 잘사는 대신동 이었는데 이제 보니 모두 손바닥만 한 집들뿐이고, 그나마도 한 구멍으로 들어가면 수십 가구가 함께 사는 ‘벌집’이 수두룩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좋은 자원(학생)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학교 주변 지역에서 학생을 뽑아야하는 고교평준화 정책 아래 경남고는 우수한 성적의 학생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란 가물에 콩 나기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우선 부모들이 아이들 공부에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관심을 기울일 형편도 시간도 없어보였습니다. 그 잘난 고급아파트는 한 동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5층짜리도 없었습니다.
그 해 몇몇 동문들이 글도 쓰고 호소도하면서 경남고 살리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갱고살리기의 근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학력을 키워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고 그래서 중앙무대로 나와 큰 인재가 되도록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리 궁리해도 현재의 학교 위치에서 현재의 교육 방법으로는 경고가 재기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운동 후 10여년이 지난 2007년 현재의 경고 위상이 해답을 주었고 6년 이후의 오늘의 경고 위상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경남고는 자원이 좋은 터밭으로 옮기는 길 뿐이라는데 많은 동문들의 견해가 일치하였습니다. 그것은 서울의 명문고들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했던 것이 “경고옮기기운동” 이였습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모교 학력복원 운동은 일부 선배동문들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찬란한 경남고가 구덕산과 원형교사와 얽히고 맺힌 전통을 버리고 떠날 수 없다“ 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모든 조건이 무르익었던 그 시절 선배님들의 ’불호령‘은 모교의 발전적 계획을 짓밟고 원점으로 되돌렸습니다.
그래서 서울 등 객지에 나와 있는 경남고 용마들은 해마다 줄어들었습니다.후배들은 선배들이 그 동안 쌓아놓은 명성을 빼먹으며 겨우겨우 경남고의 명망을 이어왔습니다. 이제 서울에선 정치, 경제, 법조, 언론 ,학계 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경남고 인물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미 있던 경남고 인맥들은 이제 거의 소진되어 가고, 새로 들어오는 후배는 없어 경남고는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쩌다 언론계 후배로 “46회”라는 한 친구가 들어왔습니다. 평준화 이후의 산물입니다. 우리 용마 팬클럽 회원들은 경악하였습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언론고시를 뚫고 들어왔는지, 우리는 그 후배를 “천연기념물”로 명명하며 얼싸 안았습니다. 도대체 서울에라도 올라와야 기댈 언덕을 찾아나 보지, 서울에 올라오기조차 못하고 있으니 각 분야에 경남고 후배가 들어오길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한해에 서울대에 한명도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일 뿐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 퇴학 맞은 학생이 전학하는 곳이 경남고”라고 하는 소문이 떠돈다는데--, 이대로 참아야 합니까?
모교 옮기기를 반대했던 선후배들도 경남고가 3류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그 때 모두 공감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전통’ 때문에 학교를 옮기지 않기로 했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학교 살리기에 노력을 했어야 마땅하지 않았습니까? 반대하시던 선배님들과 동창회는 십여 년 간 무슨 노력을 하셨는지, 후배들은 궁금합니다.
후배들은 해마다 입시철이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고 모이기만 하면 경고살리기를 해야 한다고 부산의 선배와 학교 측을 성토하곤 했지요. 지난해도 올해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던 중 등장한 것이 부산의 ‘센텀고 부지’입니다. 정말 하늘에서 내려준 소중한 기회라 여겼습니다. 정,관 언론계 등 여러 동문들이 연일 머리를 맞대고 숙의해본 결과 센텀시티로 경남고를 옮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이전을 위한 여론 수렴에 들어갔습니다만 이번에도 부산의 몇몇 선배 동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좌절직전에 이르렀습니다.
반대하신다면 무슨 대안이라도 내어 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동안 강구하신 묘안이 있으시면 떳떳하게 제시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번에 센텀시티로 가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를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 경남고의 지금 부지는 만 5천 평인데 센텀은 5천 평이다.
* 대신동 쪽에도 아파트가 많이 들어선다.
* 좋은 환경을 버리고 센텀으로 간다는 것을 반대한다.
* 야구를 해야 하는데 센텀엔 운동장이 너무 좁다.
라는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재경동창회 회장님의 신년사에 또 아래와 같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제 61회 청룡기 우승이라는 또 하나의 금자탑을 쌓는 뒷바라지를 제대로 할 수 있었고, 기별 대항 야구대회, 용마 산악회, 기우회, 테니스회 그리고 Golf 대회 등 여러 가지 취미 클럽 행사들도 빠짐없이 성황리에 진행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과의 배경에는 우리 동문들의 모교에 대한 노력의 결과.......”라며 운동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동문회야 주로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는 것이 최상의 목적이므로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임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실력이 부족한 학생들의 학력을 높이기 위해 경남고를 센텀시티로 옮기자고 하니까 야구할 운동장이 없어 안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경남고가 ‘공부’로 알려진 학교인지 ‘야구’로 알려진 학교인지, 그 정체성이 정말 헷갈려서 어리둥절해집니다.
그리고 우리 모교인 경남고가 지금 부산에서 조차 최하 꼴지의 학교란 것에 정말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으시는지 도 궁금합니다. 총동창회든 재경동창회든 적어도 현재 최고의 현안이 경고의 3류 고로의 전락방지라면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한 뭔가 입장이 있어야하고 대책이 있어야하고 구체적으로 의견 수렴하는 노력이라도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어 하는 말씀입니다.
전통의 경남고를 옮길 수 없다고 하시는 분들께 묻습니다.
경기고, 경기여고, 서울고, 숙명여고, 휘문고, 중동고, 사대부고 등등 이들 서울의 명문들이 부산의 우리 경남고보다도 전통이 짧아서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했을까요?
그들은 이미 서울 4대문 안이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충원할 자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아파트 촌 한가운데로 모두 옮겨가서 그들은 지금도 옛 명성을 그대로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들 학교 어느 곳도 야구할 만큼 충분한 넓이의 운동장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은 학교들이 최첨단공법으로 건설됩니다. 학생들이 첨단 과학과 함께 생활하고 학습할 수 있도록 학교를 첨단시설로 지을 지언 정 야구운동장을 갖추려고 넓은 땅을 찾아가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지금은 그런 추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신동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면 언제 쯤 입니까? 그런 계획이 있다면 미리 공개라도 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아파트가 들어서기를 기다릴 때가 아니란 거지요.
경남고 살리기는 한 시가 급합니다. 아파트 설립계획은 어디서 나온 얘기인지 꼭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러 곳에 문의를 해보니 경남고 주변은 아파트를 지어도 환경적· 상업적· 교육적 인센티브가 없어 사람들이 몰려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는 부산에 계신 동문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경남고 살리기 와 관련해서 사정을 잘 모르는 전 동문들을 위해 참고로 공식적으로 확인된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여건에 관하여
* 경남고는 현 위치에서 특목고나 자율사립고로의 전환 가능성이 전혀 없다. (당시에는 자률시립고제도는 있어도 자률공립고제도는 없었음)
* 외국어고와 자율사립고는 사립이어서 근원적으로 안 되며, 과학고로의 전환은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경남과학고등학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고등학교가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 부산 서구재개발 사업(서구 3,000세대, 부민동 등 재개발 계획)정도로는 학생 증가요인이 없으며, 그나마 부민동 재개발 계획은 아직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서구는 재개발을 아무리 하더라도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은 늘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합니다.
* 또 서구 인구가 점차로 줄어들고 있어 현재도 경남고 신입생의 절반은 사상구에서 오며, 앞으로 인구가 계속 줄면 서구소재 고등학교 1개는 없어질 것이며, 그 대상이 성적 최하위인 경남고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산시교육청에서 부산의 장영실과학고를 경남고 자리로 옮기고 경남고를 폐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이전 대상지역에 대하여
* 부산시 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있어 부산시내 고등학교 증설은 없으며, 그래도 인구가 늘고 있는 해운대구가 유일한 대상지입니다.
* 그 외, 감만동지역은 고등학교 신설계획이 없으며,
* 신항 예정지인 명지 쪽은 7-8년 후 고등학교 2개교가 들어설 예정이나 불확실하며, 들어선다 하더라도 학교부지는 4,000평 정도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앞으로 학교부지는 4,000평을 넘어서지 못함)
* 따라서 센텀고등학교 부지 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 센텀고등학교 부지에 관하여
* 센텀시티의 고등학교 신축부지가 4,300 평으로 다소 부족하나 부지 옆으로 800 평가량의 사유지(공원용지)와 5,000 평가량의 건교부 소유의 조그만 동산이 있어 이를 활용할 경우 실제로 10,000여 평을 이용하는 학교용지로 볼 수 있고
* 학교 옆으로 동해남부선과 4차선 도로가 지나가나, 이는 현대 건축 기술로 충분히 소음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 운동장이 협소하여 야구부 육성에 지장이 있다는 염려에 대해서는 부산시교육청에서 해강중학교 옆 운동장을 야구부 연습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면 되고.
* 당초 남녀 공학으로 계획을 하였으나 남자고등학교로 계획변경 하면 가능합니다.
* 학군은 ‘해운대학군’과 ‘동래학군’의 가운데 위치하여 양학군의 장점을 다 누릴 수 있고
* 센텀지구는 부산의 벡스코와 인접하여 해운대 신시가지 지역에 상류층 주민이 점차 이주하고 있어 부산의 대표적 주거지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 조기 결정의 필요성
* 현재 경남고와 중앙고 모두 이전할 의향이 없음을 부산시교육청에 통보하였으나, 다른 학교에서 더 이상 이전 할 가능성이 있는 학교부지가 없다는 것을 알 경우 센텀부지로 이전을 조기 결정할 수 있습니다.
* 따라서 빨리 결정하여 학교 신축할 때부터 시설을 동창회에서 지원하여 우수학교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노인은 위 글을 보고 새삼스럽게 가슴이 찡하게 감동을 받는다.
다시 글을 읽는다.
구 후배는 결론을 내린다.
동문 선후배님들께 간곡히 호소합니다. 경고 살리기, 경고 옮기기가 누굴 위한 것입니까? 우리들의 후배들을 위한 것입니다. 경남고의 이름은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시다. 모교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경남고를 위해 무엇이라도 한 일이 있는지, 내가 경남고 이전을 반대할 만큼 모교에 기여한 것이 있는지, 모교의 미래를 위해 혹시 내가 걸림돌은 아닌지를 말입니다.
어떤 동문은 이렇게 얘길 했다고 합니다. “그래, 옮기고 난 뒤에 서울대 입학 3명에서 5명으로 늘어나는 정도로 이전효과라고 할 수 있나”고요.
서울대학교가 전부가 아닐 것입니다. 총체적 수준이 부산 72개교 중 꼴찌에서 상위로 회복되는 것이 급선무겠지요. 이렇게 하락한 경남고가 하루아침에 일류고가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학교는 열중시엇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회를 놓쳐 만약 다른 학교가 센텀으로 이전해서 일류고등학교가 된다면 그 땐 어떻게 하실 것인지요?
경남고를 살려야 합니다. 동창회가 앞장서고 우리 동문들이 전부 나서 경고 살리기를 해야 합니다. 어께 띠를 두르고 가두캠페인을 하더라도 경고에 좋은 인재를 모으고 좋은 인재를 배출토록 해야 합니다.
긴 호소의 글이다.
노인은 위 10회 후배인 구 O홍의 애절한 호소가 가슴에 파고들어 감격에 차 서 눈물이 날듯했던 일을 기억한다..
구 후배는 경고 이전지역이 해운대 쪽 센텀시티 임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 무렵, 노인은 의기투합 하는 갱고 출신이 아닌 서울 태생의 김 O원이란 젊은 친구가 있었다. 그는 기자협회 L 회장 등 몇몇 언론계 사람들과 친교가 두텁고 이름 있는 정치인들과도 잘 알고 있는 제법 난 놈인데, 이곳 합천까지 찾아 주었다.
노인은 김 군을 합천.뎀 부근의 송가네라는 주점으로 데리고 가서 동동주를 주고받으며, 정담(情談)을 나누던 끝에 "혹시 MBC의 구 O홍이란 사람이 어떤 분이냐고" 고 물었더니,
"아니 이 선배! 선배는 그 분이 MBC 9시 뉴스 앵커로 활약한 분인데 잘 모른단 말이요" 하며 반문하는 것이었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하니, 그 친구가 대뜸 하는 말이 "이선배 벌써 치매가 왔소" 하고 은근히 비웃는 것이었다.
김 군의 촌평만으로도 구 O홍 후배가 예사 인물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자기를 두고 치매 운운하는 바람에 다소 기분이 잡쳐 "뭐시라 카노" 하고 경상도 머슴애의 저돌적 일갈(一喝)을 한 후, 이미 경고. 넷을 통해 알고 있는 정보를 동원하여
"일마야 그 분이 지금은 MBC 경영본부장인가 하는 중책을 맞고 있고, 몸이 좀 안 좋아 최근에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 한 것도 내가 알지마능, 얼굴이 어찌 생긴건지 그게 알송달송 하여 니한테 물응긴데 난데없이 치매는 와 들먹거리노" 하고 반농(半弄)조로 취중(醉中) 반격을 가하였다.
노인은 큰소리쳐 놓고도 속으로 요즘, 내가 다른 사람과 대할 때 일언(一言) 일구(一口)를 유의하여 뜯어보면, 적절한 단어를 쉽게 찾아내지 못하여 중언부언 하며, 했던 말을 또 하기도 하고, 조리 있게 의사전달을 하지 못하여 상대로부터 반문을 받기도 하는 때가 더러 있음을 스스로 느낄 정도다.
어떤 때는 며칠 전에 소개받은 사람을 다시 만났으나 기억을 하지 못하고 ‘초면에 반갑습니다’ 하는 결례를 저지르는 등, 한심한 자신을 가끔 보아 온 터인데, 이 친구도 그런 내 언행을 못 봤을 리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두고 치매라 운운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지적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되 삭이면서도 혹시 치매의 징조가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런 김 씨 후배가 준 자극이 작용하였든지, 노인은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TV에서 본 듯한 어떤 인영(人影)의 잔상이 안막을 스치는데, 둥글납작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하며, 품격이 있음직한 잘 다듬어진 환한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그 주인공이 M-TV의 구 후배가 아닌가 하고 나름대로 짐작해 보았다.
그러나 이런 자기 대뇌의 잔영(殘影)이 실물과 동인(同人)인지 아닌지 속단할 수 없어, 한번 구가 성을 가진 후배와 직대면(直對面)하여 확인하지 않고는 내 치매증에 대한 자가진단을 내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 어차피 '갱고살리기´ 문제도 구씨 후배가 재의해둔 터이고, 또 낙향 촌노 이지만 열손가락 수만큼이나 앞선 선배로서 한번 면담을 청하면 문전에서 박대하지는 않을 것이란 기대가 있어, 일차 상경할 작심이었다.
다행이 구 후배가 또 ‘이래서 갱고 아이가 (2)’ 라는 제목으로 넷에 띄운 글 읽어보는 가운데 이심전심이라더니, 못난 선배인 나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초청 글까지 올려주었다. 이를 보고 노인은 철없는 아이 같이 구 후배와의 만남을 생각하며 들떠 있었다.
그 때까지 노인에게는 ‘갱고’란 물상은 자부심의 원천이었고, 당연히 번잡한 생활 속에 정서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심적 물상이었으나, 경고의 급락을 안 후로는 ‘고무줄 터진 팬티’처럼 허전하고 불편했다.
그러나 구 후배의 말 같이 서울대학에 입학하는 졸업생 수가 제로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노인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책상 서랍에서 안약 인공누액제 제이레인을 꺼내어 양쪽 눈에 넣었다.
다시 2007년으로 달려간다.
위 글을 읽고 노인은 생각에 골몰했다. 민주정치의 실행근본이 무엇인가. 경쟁. 타협. 책임. 효율 등의 원리로 되어 있지 아닌가. 그 중 ‘경쟁’ 원리를 살펴보면, 일차 상대가 있어야 경쟁 관계가 성립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평준화 지역 내에 있는 각 학교는 서로 간 경쟁 상대이다. 또 경쟁 당사자나 제3자에게 각 학교별 대입성적을 공개하여 실력 차이를 확인시켜줌으로서 실력이 낮은 학교는 높은 학교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높은 학교는 추월당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이런 동기유발의 이론이 바로 경쟁원리가 아닌가. 이런 격차의 인식(認識)과 경쟁원리를 차단하는 고교 평준화 정책은 어떤 변명을 해도 올바른 교육 정책이 아니란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평준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당국이 지원하는 예산의 평준화나, 우수교사의 적정 배정, 수업의 양적 규제 등으로 다스릴 것이지 진학률을 공개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더구나 진학률 집계 비교표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비공식 집계조차 금하는 조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 일선 교육담당기관들이 당국의 진학률 공개금지의 일방적 하향지시에 대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있다는 것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런 정책 하나를 보더라도 획일적 교육 시스템으로 인한 경쟁력 감소, 우수성 저해, 교육권 침해, 국민의 알권리 박탈 등 가장 비교육적 비민주적 과오를 교육 당국이 평준화란 미명하에 당당하게 벌이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고 학생 개개인의 능력과 정서 함양을 가로 막는 우민정책 (愚民政策)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리고 교육자인 선생들은 어떤 수준을 목표로 수업을 진행하며, 교육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에서는 어떤 기준으로 학교와 교사들을 평가하며, 이를 교원 인사 등에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또 노인은 행정 정보공개 원칙을 내세우고 있는 정부가 이를 수 있는가 분개하면서, 마지막으로 정공법을 쓸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그는 경남고등학교 교무실에 전화를 걸어 무조건 경고 출신 교사가 있으면 바꾸어 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누구냐고 묻기에 "재경경남고동창회 회장입니다" 하고 중압감 있는 직함을 사칭하였다. 그랬더니 하 모씨라는 갱고29회 졸업 윤리담당 교사가 전화를 받았다. 사실은 10회 선배라고 솔직히 해명하고 구 후배가 제안한 갱고살리기운동에 관하여 설명한 후에 먼저 2007학년도 경고졸업생 서울의 일류대학 진학 율부터 문의 했다.
후배 하 교사는 작년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진학통계 역시 낼 수 없어 알 수 없다. 제도적으로 한 학생이 여러 대학을 지망 할 수 있어 이중 합격 등의 경우가 있음으로 정확한 일류 대 합격자 수도 파악되지 않는 실정이다. 라는 변명을 듣고 대입성적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결국 갱고출신 선생으로부터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짐작 하건데 구 후배의 주장처럼 우리 모교가 3류 고등학교 수준으로 전락하여 있음은 확실한 듯하였다.
그 무렵 또, 구 O홍 후배는 또 아래와 같은 글을 넷에 올렸다
『이선배님』
큰사(knsa.재경동창회 홈피)게시판을 훑어보시는 것만도 빠듯 하실텐데 금쪽같은 시간과 설득력 있고 재밋는 글을 용마펜클럽홈페지에까지 할애해 주셔서 용마펜 크럽 회장과 회원들을 대신해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 높은 연조에도 인터넷 유영(遊泳)을 즐기시고 힘 있는 글까지 올리시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갱고라서 IQ가 좋아서 그런가.
좋은 참고가 되는 말씀 계속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선배님께서 저의 글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셨는데 정말 관심을 가져주시고 공감하신다니 고맙고 다행입니다. 일찍 리플을 했었어야 했습니다만 제가 지금은 경영본부장(理事)으로 딴 짓을 하다 보니 나라 안팎으로 쏘다닐 일이 많아서 미처 큰 결례를 한 것 같습니다. 용서 하십시오. 그리고 한번 나들이 하십시오.
후배들이 진심으로 모시겠습니다. 재밋는 대화가 될 것 같습니다. 공감하시는 "경고 살리기"에 대해서도 많은 선후배들과 진지한 토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건강하십시요.
노인은 구 O홍 후배의 글을 보고 아래와 같이 갱고출신 펜클럽의 홈피에 아래와 같이 실었다.
귀 펜-크럽(갱고출신 언론인 모임) 컴 광장에 못난 선배가 감히 뛰어들었소. 많이 듣든 이름의 구 O홍 후배의 글을 재경 홈피에서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소.
고향 및 갱고 후배인 김 O봉군이 [오노스럽다]라는 칼럼을 중앙일간지 ‘ㅈ일보’에 올려, 숕. 트랙에서 앞서가는 우리선수를 기묘한 반칙으로 무너뜨리고 우승을 차지하는 미 선수 '오노'를 빗대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수단이라도 가리지 않는 비열한 인간형을 지칭하는 ‘오노스럽다’ 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는 글을 올렸기에 잘 훑어보았소.
작은 마을 길 건너 이웃에서 꼬마 김 O봉군을 재롱스럽게 보아 온 터였는데, 벌써 언론계의 중진으로 한몫을 하고 있다하니 못난 선배의 마음 뿌듯하오. 이 컴 광장을 통해 김 군에게도 안부를 전하는 바이오.
후배의 "갱고살리기" 글이 갱고인이란 자존심 하나로 뻐기며 살아온 나인데 '고목에 핀 꽃처럼' 뿌리가 썩어 있는 줄도 모르고 착각 속에 살아온 것을 깨우쳐 주었소. 내 자신이 한심하기도하고 분하기도 하오.
구 후배의 제안에 대하여는 다음 다시 글을 올리겠소.
용마 펜-크럽 회원들의 건필이 언론계를 뒤흔들고 사회의 길잡이가 되기를 부탁드리며 똑똑한 후배가 계속 뒤이어 충당되기를 우리 함께 노력해요.
못난 선배가
이런 갱고 넷의 자유계시판과, 펜 크럽 넷에서 주고받고 한 긴 시간의 과정을 거치면서 특히 위 56회 이름 모를 후배가 갱고 홈페지를 통해 띄워 준 부산지역 고등하교의 서울대 합격 비교표를 보면, 아래와 같다.
한국과학영재학고(37 전국4위), 경남과학고(16) 장영실과학고(15), 해운대고(8), 가야고(7), 동아고(6), 건국고(4), 부산여고(4), 혜광고(4), 해동고(3) 다대 고(2), 경남고(1), 부산고(1), 대동고(1)
정말 기가 맥힌다.
그렇게도 알고 싶어 노력한 경고 대입진학률을 경고 갓 졸업한 후배가 알려주었는데도, 수개월이 지나도록 내가 고마움을 전하지 못하였으니,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노 선배라고 무척 원망하고 있을 것 같았다.
노인은 컴을 통해 이런 과거의 일에 대한 그림을 뒤적거리다가 명상에서 깨어났다.
지금은 새벽 2시, 노인은 앞 유리창 너머의 깜깜한 밤을 응시하다가 유리에 반사된 자신의 늙은 얼굴을 본다. 고등학교 시절 그 곱든 얼굴이 다 어디가고 줄음 진 얼굴이 어른 그린다.
다시 눈을 감는다. 위 56회 후배의 동안을 그려보며, 그 또래인 어린 갱고 시절로 기억을 더듬어 간다. 노인은 그 당시 워드에 저장해둔 ‘갱고 악동’이란 제목의 글을 찾아내기 위해 수필 방 폴더에들어가서 ‘갱고 악동’ 이란 제목을 찾아 클릭하였다. 모니터에 문장이 뜬다. 눈으로 읽어 내려간다.
초여름의 햇님이 자기 몫을 다한 시점, 나는 거실 통 유리 오른편을 통해 서쪽 산 능선에 물든 낙조를 보면서 작년 이맘때에는, 붉게 타오르는 황혼이 가뭄으로 멍든 농심을 조롱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탈색된 은 희색 햇빛 너울이 지친 듯 서산마루에 단조롭게 걸려 있다. 촌부들은 잦은 봄비로 물 걱정을 덜고, 농사일에 신들린 양 얼굴이 밝고 몸놀림이 여유롭다.
서서히 어두움이 감도는 설렁한 서산 언저리에, 내게 모교 입시률을 알려 준 고마운 동안(童顔)인 56회 후배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 그 잔영 뒤에 오버랩 되어 피어오르는 내 모습이 반세기전 고교 시절로 되돌아간다.
너 댓 되는 갱고의 악동 친구들과 천방지축으로 뛰놀면서, 철없이 저질렀던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떤 한 사건이 아련하게 되살아나 망막을 통해 뇌리로 초롱초롱하게 이어지는 그림이다.
며칠 전 고3선배들을 학교에서 퇴출시키고 2학년인 우리가 고 3으로 승격 할 때이니, 아마 3-4월경 어느 화사한 봄날인 성싶다.
2학년 2반 급장을 맡고 있는 키가 큰 최형백, 발치기를 잘하는 기술적 싸움꾼인 최상현 그 친구는 머리가 좋아 수학 과학 등은 언제나 최고 수준의 점수를 받았다. 유난히 어깨가 넓고 보빠이 같이 팔이 길고 근육질이 발달한 야구 선수였던 이웅열, 부산여교 교장 아들인 방일호 그리고 나 이 다섯 친구 외에 또 못 땐 놈이 있었으니 그 놈은 이마에서 코 잔등으로 아름답게 이어진 예쁜 선의 코를 가진 김종학 이다. 그 친구는 얼굴 생김새와는 반대로 손을 보면 마치 거인의 손 같이 뼈마디가 굵고, 주먹을 쥐면 내 주먹의 두 배는 됨직 했다.
이 친구는 2학년인대도 3학년 선배들에게 친구를 대하듯 ‘어이’ '해라'하고 주고받는 별난 놈이었다. 3학년생인 깡 두목 작은 명식이와 서로 가깝게 지내는 친구 사이라서 3년생 선배라도 종학이를 건드리지 못한다고 생각되는데 종학이의 말은 다르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쓰기시로'라고 하는 별명이 붙어 있고, 영주동이나 중앙동 남포동 거리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건달이기 때문에 3학년도 겁을 낸다는 것이다.
종학이가 가당찮은 놈임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사례를 들면,
당시 갱고에 입학한 일 학년 전 학생들에게는 어릴 때 홍진을 앓듯 빼 놓을 수 없이 집단으로 겪어야하는 뿌리칠 수 없는 의식이 있었다. 2학년의 힘깨나 쓴다는 친구들이 적당한 날을 정하여 일 학년 생 전원을 농구장에 집합시켜 놓고, 한 시간 동안 기압을 주는 전통의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몸통 받혀 자세로 엎디게 한 후 자칭 ‘어깨’라는 몇몇 선배가 소위 정신 훈화를 하는 것으로 의식이 시작된다.
주로 농땡이들인 그들이 내어 뱉는 호령은 그저
"이새끼들아, 앞으로 행님들을 뽄 받아 훌륭한 갱고인이 될끼가 안될끼가" 하면 엎드린 채 일년생들은
"예, 선배님을 본받아 훌륭한 갱고인이 되겠심니더" 하고 복창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 행님들의 훈시대로 실천하려면, 책을 멀리하고 여학생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일에 열중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이런 과정에서 재수 없는 놈은 무릎을 땅에 됐다는 이유로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한방 얻어 맡게 되는 것이다. 아마 몽둥이세례를 받은 친구가 두 손의 열손 까락을 두 번 꼽는 숫자는 족히 되었다고 짐작된다.
지금도 이런 저질 전통이 계승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 행님들의 훈시를 잘 지킨 친구가 있다면, 아마 3류 대학이나 재수 신세를 면치 못하였을 게다. 그러나 비록 3류 대학을 나왔다손 치더라도, 지금의 잣대로 가늠 하면 더 풍부한 삶을 경험한 노련한 인물이 되어 만년을 풍요롭게 그리고 지도력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친구가 없잖아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종학이가 그 런 인물의 표본이다. 그는 사회에서 상류층에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는 재주꾼이었다.
이런 숭고한 전통 의식에 종학이 혼자만은 열외로 집단 제물(祭物)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민주주의 평등 원칙이 이 괴질의식에서 보듯 나의 재학 3년 동안 갱고의 요람에 '옥의 티'처럼 흠집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공부에는 뜻이 없고, 매점 뒤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눈에 거슬리는 후배들을 끌어다 놓고 공갈 내지 물리력을 가하여 가끼우동을 뺏어 먹거나, 기집애 꼬시기를 주특기로 하는 놈팽이 선배들이니 훈시가 조리가 없고, 어법에 맞지 않음은 당연하다.
가끔 길에서 예쁜 여학생과 나란히 데이트를 하는 선배가 누구인지 자세히 보면 바로 이름께나 오르내리는 위 선배임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여학생들이, 갱고 어깨란 소리가 머슴애 중 머슴애를 지칭한다고 착각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지금에사 돌이켜 보면, 갱고 울타리 속에 일어났던 자질구레한 그런 일들도, 달콤하고 아름답게 그리워지니, 인생의 삶이란 결코 과거의 고통, 불행, 절망 등이 오늘의 것으로 재현되지 않음을 느끼면서, 현재의 삶의 질을 인생 전부의 삶의 가치인양 평가절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선현들의 말씀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오늘의 불행이 반드시 내일의 불행으로 이어지지 만은 않는다는 진리를 깨우칠 수 있다. 지금 다소 어렵고 고통에 빠져있는 후배들이 있다면, 먼 훗날 못난 선배 또래가 되어 되새겨 보면, 한없이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사무쳐온다는 사실을 믿어주길 바라네.
이런 나를 포함한 위 여섯 갱고 악동 2년생들이 당시 고 2에서 고 3으로 지위가 승급되는 야릇한 감상과 흥분에 젖어 다소 우쭐한 마음에 들떠있던 어느 날, 우리 여섯 악동이 합동으로 저질은 엄청난 한 사건이 있었으니---, 갱고 선생님들이 가장 금기시하는 집단 폭행을 부산사범 3년 졸업생 몇몇을 상대로 일으키고 만 것이다.
고3으로 최고 학년이 된다는 것은 특히 고교생들에겐 최상층 신분을 마치 싸워서 쟁취한양, 어깨에 힘이 솟고, 해방감에 들뜨게 하였다.
교내에서는 선생님들 외엔 고3을 무시할 만한 인물이나 계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순종하는 후배나 졸개들이 갱고란 인적 집단 속에 가득하다는 포만감을 갖게 하고, 이런 기분이 잠시 동안 이성을 마비시키지 않았나 싶다.
이 같은 분위기에 휩싸인 위 악동들이 보수동 세무서 앞에 있는 털보 할배 단골집에서, 입에 착 달라붙는 젠자이(단팓죽)를 사서 한 그릇 씩 비우고, 갱고 정문 앞에 있는 일호 집에서 부여고생들과 단체 미팅이 약속되어 있어 그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검정 다리를 건너 오른편으로 돌아 부산사범학교 후문을 지나칠 즈음, 7-8명 정도의 검은 교복에 머리를 탐스럽게 길러 뒤로 넘긴 학생 무리가 교문을 나서며 보수동 쪽으로 방향을 잡고 마주 걸어오는데, 그들과 서로 부딪힐 정도로 스쳐가게 되었다. 이때 자칭 건달인 종학이가 솜을 가득 메워 어깨를 만든 곤색 구레바 상의 안에 그의 발달된 실물 어깨에 힘을 주며 사범졸업생 하나의 어깨부위에 의도적으로 부딪히며,
"야! 너그들은 왜 머리를 하이칼라로 했노, 고등학생이 아이다 말가" 하며 시비를 걸었다. 고의적 일격을 당한 사범 졸업생은
"일마야, 도대체 니가 눈군데 남이사 머리를 기르던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고, 모재기 뒷 봉알만 한 새끼가" 하며, 몇 발자국 물러나서 만약의 경우 싸움을 붙어 보겠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사범생들은 교생이란 자격으로 재학 중 실습을 나가기 때문에 3학년 중반쯤부터 머리를 기르는 모양이었다.
바로 옆에 서있던 나는 종학이가 벌이는 시비를 보고 이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구나 하고 거동들을 살피는데, 종학이가 인냉(시비 건다는 말을 당시는 일본말인 인냉으로 사용하였음)걸고 있는 바로 그 옆쪽의 어깨가 벌어진 한 학생이 종학이를 때리려는 자세를 취하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것을 내가 본 것이다.
하기야 사범 패거리들은 목깃에 갱고 뺏지를 단 우리들을 보고, 있는 집 부모의 애정으로 자란 유약하기 짝이 없는 약골들이라 여겼을 것이고, 또 가녀린 몸매나 예쁘장하게 생긴 쌍 판을 보아도 싸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 것 같다.
나는 순간적으로 종학에게 한방 먹이려는 놈의 얼굴을 향해 재빠르게 원투를 먹였던 것이다.
갱고에서는 내가 권투를 제법 하는 아이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다. 내가 권투부에 들어가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내 일격에 움찔하며 종학이가 머뭇거리는 순간, 한 학생이 종학의 면상을 겨냥하여 주먹으로 사정없이 갈겼다. 상대로부터 기습을 당한 종학은 코피가 나는지 그 큰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너그들은 오늘 골로가는 날이다"하며, 때린 놈을 향해 오른 손으로 한 대 먹이니 ‘퍽’ 소리가 남과 동시에 상대는 ‘억’ 하고 길바닥에 쓰러졌고, 발치기 잘하는 상현이는 양발치기로 다른 한 놈의 턱을 올려 차고 또 한 놈을 향해 땅위에서 붕 뜨는가 싶더니 몸을 한 바퀴 회전하며, 이단 옆차기로 다리를 날렸는데, 표적물이 살짝 피하자 그 만 헛발질하여 남의 집 현관 유리창을 와장창 박살내고 말았던 것이다. 마침 그 날이 사범학교 졸업식인지 학생들이 새까맣게 몰려나오는 것을 본 우리는 누가
“삼십육계 놓자" 하자, 긴급피란의 신호를 간파하였던지
“저놈들 잡아라" 하는 소리가 귓전을 흔들었다, 반사적으로 악동 일행은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혼신을 다하여 한 사오 분 간 검정다리를 지나 개울 쪽으로 도망가다가 바로 왼편으로 죽 뻗어 있는 길로 접어들었다.
숨이 벅차 도주를 중단하고 한숨 돌린 후에 뒤쪽을 살펴보니 따라오는 사람이 없어 안심하고, 서로 통쾌한 기분을 잠시 만끽하였다.
형백이가
“충무로 쪽으로 가다가 도청으로 방향을 털어 다시 동대신동 수원지 쪽으로 올라가 일호 집으로 가자 알았제” 고 제안하자 그렇게 하기로 동의하였다.
사실 우리는 머리를 기른 사범생을 보고 괜히 비위가 거슬렸던 것은 사실이다. 또 그들이 3년 뺏지를 단 것을 보고, 집단 기압을 주던 우리 행님들이 생각나서 가슴 속에 잠재성 악감이 외적 에너지로 발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짧은 접전 끝에 중과부적이라 우리는 후퇴를 했고, 아군의 피해는 항상 싸움꾼으로 자찬하든 종학이의 코언저리가 시퍼렇게 부어 멍이든 정도였다.
옆에 가던 웅열이가 종학에게 다가가더니
"꼴좋다, 니 예쁜 코 삐뚜러지면 우짤끼고" 하고 농을 걸자,
"야이 자석아! 헌지(나 헌진을 칭함)가 먼저 센때이(먼저 치는것)를 논깨내 그 노마 새끼가 나를 때린거 아이가" 하더니,
그래도 싸움꾼의 푯대를 낸다고
"내 한방 먹고 그 놈 열십자로 땅바닥에 벌렁 나자빠지능거 너거들 바앗째, 글마는 아마 병원 신세 좀 지야 될끼구마"
그러든 중 보수동 큰 길이 보이는 사거리쯤에서 사방을 살펴보니 여러 사람이 세무서 앞 큰길로 달려 지나가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직감적으로 우리를 추격하는 사람인가 싶어 내가
"저 사람들 보이나 이상하다" 하자 종학이는 핸조카(군화)끈이 풀렸는지 몸을 숙여 다시 조이는 것이다.
여차하면 달아날 준비를 하는 것이리라.
이 때 앞쪽에서 흩어져 오던 젊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자
"이 새끼들 여기 있다" 하고 고함을 치자 사방에서 벌 때 같이 몰려오며 우리를 덮치려고 하는 것이다.
갑자기 공포심이 엄습하는 것이다. 누가
"형백이 집에서 만나자"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 옆에 있던 웅열이와 나는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어떤 골목길이 있어 그리로 달려 들어갔는데 막다른 골목 이었다. 우리 키의 두 배나 됨직한 높은 담장이 앞에 막아섰다.
그러나 어떻게 점프를 했는지 모르지만 둘이는 쉽게 뛰어넘어, 남의 집 뒷마당에 떨어졌다.
집 주인인 아주머니가 빨래를 널고 있다가 우리 둘의 무단 침입을 본 것이다.
두 소년의 월담에 놀라기보다도 어떻게 저 높은 콩크리트 담을 조그마한 소년들이 가볍게 넘어 온단 말인가 하듯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너그들 남의 집 담을 넘어 우짜자는 기고, 혹시 깡패들 한테 쫒기는거 아이가" 하고 오히려 걱정해 주는 것이었다. 아마 주인 아줌마는 갱고 제복과 뺏지를 먼저 보고 안도 한 것 같다. 나는
"잠간 숨겨 달라"고 했고, 친절한 아줌마는 방으로 들게 한 후, 우리 신발을 어디 다 숨겨두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에 갱고란 간판은 그 악도 선으로 보일 만치 영향력이 대단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주머니가 잠시 바깥에 다녀오더니, 바깥 골목 주위에 별다른 기색이 없다고 하기에 둘이는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남긴 후에 부민초등학교 뒷골목을 지나 서대신동 3가에 있는 형백이 집으로 갔던 것이다.
그 집에 도착하여 그 의 공부방으로 들어서니, 언제 왔는지 형백이, 일호, 상현이가 와 있었다.
웅열이와 내가 오지 않아 걱정을 했다고 했고, 자기들도 정신없이 뛰다보니 보수동 큰길을 가로 질러 세무서 뒷길을 거쳐 산 밑 골목을 달려오다 동대신동 시장, 서대신동 골목 시장 통을 지나 형백이 집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종학이가 오지 않는 것이다.
서로가 걱정으로 가슴을 태우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다.
받아보니 종학이가 건 전화였다.
"일마야 니 우찌 된기고" 겁에 질린 듯 형백이 말하자.
"사범핵교 교무실이다. 여기 있는 거 보면 모르겠나 생포됐지"
"뭐, 잡힛다 말이가, 뚜디리 맞지 않했나"
"체육 선생한테 종아리를 몇 대 맞았지만 까딱없다"
"그러타 카몬 우리들 이름 다 불었나" 드디어 가장 두려웠던 궁금증을 물었다.
"다 이바구 했다마"
"일마야, 다른 사람은 모르는 학생이라 카고, 그래서 이름도 모른다 컬거 아이가"
"글마들 뿐만 아이고 구경하든 사람들까지 똑 같든 교복을 입고 있는 한 패라는 것을 다 밨다커는데 우째 거지말 할끼고"
이제 우리는 낭패가 났다고 탈기를 했고, 신기한 모험담으로 즐겁던 방 공기가 갑자기 침통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매섭고 쌀쌀한 훈육 담당 주 선생의 노기 띤 얼굴이 떠오르고, 유난히도 학교의 긍지를 내세우시는 교감선생의 흥분한 모습이 우리 앞에 엄습해 오는 것이다.
검은 불행의 장막을 피할 길 없는 불상한 소년들이 되어버렸다.
참담, 절망, 공포가 따로 없고, 우리가 바로 체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는 계속 된다.
"일마야, 우째 잽히고 있노, 니 병신 축구 아이가" 하고 형백이 내 밷자,
"야 이자석아, 양반은 주구도 개히엄 안친다 안커더나, 내를 나놓코 너거마 도망치 부리놓코 무라커노, 동낀 놈이 썽낸다 카디마는 너거가 거맞잽이네"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오히려 여유롭다.
적지에서 포로인 주재에도 저렇게 큰소리치는 것을 보니
좌우간에 종학이가 간 큰 놈이라 감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두서너 시간이 지난 후에 종학이가 포로 신세를 면하고 석방되어 돌아 왔다.
방으로 들어서자 말자, 웅열이 한마디 한다.
"잘란놈, 부상병에다 생포까지 당했으니, 거래노코도 큰소리 치기는"
"우짰던 우리 여섯을 글마들이 똑똑히 본기라서 이름을 불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가"
게다가 갱고에서 사범학교로 전직한지 얼마 되지 않은 체육선생에게 붙들려 더욱 낭감 했다는 것이다..
일호가 한마디 입을 연다.
"내일 학교로 통보가 오겠제"
"내일 연락한다 커데"
"우리집에 오라칸 가스나들 우짜면 조켔노"
"이차판에 가스나는 무슨 가스나" 상현의 말에
"일호야 전화 걸어 다음으로 미루거라" 웅열이가 말한다.
"알았다" 일호는 전화기 앞으로 가서 다이알을 돌린다.
내가 말했다.
"우리 이를 끼 아이다. 오를 저녁에 주 상호선생한테 찾아가서 자초지종 이바구하고 자수하자"
"그래 그기 좋다. 무조건 하고 살려 달라 커자" 종학이가 동의한다.
그날 저녁 캐익과 정종 한병을 사들고 동대신동 2가에 있는 주 선생 집을 방문했다. 여럿이 몰려 찾아 온 우리들을 보고, 방으로 들게 한 후
"너거들 무슨 사고 친거 아이가, 눈치 본께 그런데---"
정말 추리력이 대단한 선생님이라 생각된다.
"참으로 용케도 아십니더" 종학이가 응답했다.
그 다음은 미리 약속된 대로 내가 사건의 전말에 대해 자초지종을 고백했다.
다만 우리가 먼저 시비를 건게 아니고 사범 졸업생들이 싸움을 걸어 왔고, 종학이가 먼저 수십 명 되는 때 거리의 한 놈으로부터 선수로 얻어맞아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이 그들을 상대하여 대항했는데 잘못하여 남의 집 현관 유리를 깨기도 했고, 그 놈들 중 두서너 명을 때리고 발로차서 길가에 눕히기도 했다고 아뢰었다.
그런데 주 선생은 이외로 술과 캐잌의 약효를 받았는지 너그러웠고, 한편으로는 약골인 경고 2년생들이 타 고교 3년의 많은 수자에 굴복함이 없이 용기와 기지를 발휘하여 그들에게 피해를 주고 이쪽은 경미한 부상을 당하였다니, 정말 대견하다는 듯 한 감회에 젖었나 보다 하고 우리는 느꼈다.
소귀의 성과가 충분히 발휘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안도했다.
이런 주 선생님의 기분을 간파한 종학은 그 큰 주먹을 주선생 앞에 내어 밀고 이 주먹 한 대로 상대를 길바닥에 눕혀버린 무용담을 널어놓고, 현상이가 양발치기로 공중을 휭하니 날아 손오공처럼 재주를 부린 것을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너거들 운제 싸움을 배웠노, 갱중(경남중)에서는 배울 기회가 없었을 텐데" 주 선생이 말하자
우리가 모두 갱중 졸업이라는 사실까지 꽤 뚫고 있는 것을 보고, 역시 명성에 걸 맞는 훈육선생이구나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싸움이야 어디 배워서 잘합니꺼, 선천적으로 타고나야지요" 종학이 말한다.
"다른 애들은 다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인데--, 종학이 니는 성적이 꼴뱅이든데, 갱고는 무슨 재주로 붙었노, 참 신기하데이" 하고 반농조로 비꼬자
"그래도 궁민핵교 댕길때엔 일등 했심더"
"일마야 궁민핵교 댕길 때 일등안 핸 갱고생이 오딘노" 주 선생의 답을 듣고, 우리는 모두 웃었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주 선생은 너무 걱정 말라하고 우리를 돌려보냈다.
그 무서운 주 선생이 알고 보니 너무나 인간적인 따스한 분이라고 느꼈다.
이튿날 등교하자 교무실에서 호출이 왔다.
우리 여섯은 교무실 교감 선생님 앞에 횡으로 섰다.
갱고에 이런 별종들은 일찍이 없었다는 것이다.
뚜꺼운 표지로 된 출석부를 모로 세워 우리들 머리를 차례로 때리는데 무려 한 사람 당 열 번은 배급받은 것 같다.
입에 거품을 날리면서 퇴학시키느니, 부모를 모시고 오라느니, 갱고 명예를 어떻게 회복 할 것이냐 느니, 미꾸라지 몇 마리가 온 개울물을 더럽히느니, 하며 무려 20여분이나 분노와 격분에 찬 공격을 한 후에야, 교련선생 방에 가서 꿇어 앉아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주 선생은 간밤에 우리들로부터 들은 이 건에 대한 자수의 변(自首辯)과 아침에 사범학교 측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접수된 사건 내용에서 핵심 부분에 차이가 나고, 그 사건 전말(顚末)에 대한 실체적(實體的) 진실이 사범학교 측 통보에 있음을 확인하였음인지 전날 밤의 너그러웠던 모습이 다소 냉기가 도는 듯 변해있었다. 그러니 혼자 덮어둘 일이 아님으로 교감에게 이 사건에 대한 사실관계를 소상하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악동들은 사범 측에서 종학이를 훈방한 후 제 삼자인 목격자들의 증언까지 수집해 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 실수였다.
반면, 교련 선생은 이외로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다.
우리가 척은 해 보였기 때문일까.
"우짜끼나, 뚜디리 맞고 들어온거 보다는 뚜디리 패고 들어오는기 백번 나은기라" 하시는 것이다.
그는 갱고에도 이런 기질을 가진 멋진 놈들이 있다는 사실이 호뭇하여 따스하게 대하여 주는 것 같았다.
그날은 종일 교련선생 방에서 일어섰다 앉았다, 두 다리를 폈다가 오무렸다, 목운동이나 허리운동도 하면서 보냈다.
좁은 공간이지만 별 지루함이 없이 기집애들과의 자미 있었던 경험들을 킬킬대며 주고받았다.
그리고 향후 대책에 관한 의견도 진지하게 나누었다.
하교 시간이 되자 교감선생이 주 선생을 대동하고 우리 악동의 임시 구치소인 교련선생 방으로 들어섰다.
우리 모두를 횡으로 세워 놓고,
"너거들을 '무기정학'에 처하기로 결정이 났다. 행실을 본다카먼 영낙없이 퇴학 처분 깜이지마능 담당 훈육 선생의 건의도 있고, 너거 단임 선생들도 너거들의 행우지가 그러키나 엉마이 아이다고 하도 걸싸서 그런 관대한 결정이 난기 다행으로 알거라. 그러나 집에 노는 거이 아이고, 매일 수업 시작카기 한 시간 전에 핵교 와서 이 방에 꾸러앉아 있다가 수업 종이치면 너거 교실로 차자가서 수업을 받고, 쉬는 시간에 또 이 방에 와서 꾸러 있다가 수업 종이 울리면 공부하러 가고 그리고 마주막 수업 끝나면 또 여기와 꾸러있다가 선생들과 같이 집으로 가야 하는기라 알겠쩨" 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그런 후 교련선생을 보고 "황선생은 아푸로 야들 단디 챙기시소" 하고 돌아갔다.
우리에겐 그런 교감의 선처가 고맙기 보다는 불만이었다.
'정학' 처분이란 교칙을 위반한 학생에게 등교를 못하게 하는 벌이고, 일정 기간이 정해진 것은 유기정학이고, 기간의 정함이 없이 등교를 못하게 하는 것이 무기정학인데, 엄청난 사건의 죄인들을 퇴학이 아니고 겨우 무기정학처분을 했으면 교칙대로 집에서 쉬라고 해야 정당한 학교의 처사가 아닐까..
그런데 우리를 계속 학교에 나오도록 하고, 게다가 수업시간 외는 꿇어 있다가 해질 무렵 선생님들과 함께 하교시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스승이 제자에게 야비한 짓거리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악동들은 그 때, 그런 학교의 처분이 내려지기 전, 교련선생 방에서 정학결정이 내려지면 가차 없이 서울의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자고 합의 한 바가 있었다.
집에서 노는 기간에 함께 서울무대로 진출하여 일차 서울 구경을 하고, 다음 전학을 위한 수순을 밟자는 것이었다.
어느 학교로 갈 것인가 논쟁도 구구했다.
경기고와 서울고는 아예 받아주지 않을 것이니, 용산고나 중앙고, 배재고 등이 입에 오르내렸다.
교감선생이 우리 악동들의 상경 나들이의 좋은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는 불만이 가슴에 일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튿날 일찍이 등교하여 책가방을 교실에 두고 교련선생 방으로 가는데, 우리 반의 이 기동 군과 마주 쳤다.
"헌지 니 요세 욕보제"
집단폭력 사건이 벌써 전 학교에 퍼졌는지 등굣길에 만난 친구들이
"너거들 무기정학이라 커더니 핵교는 왜 나오노" 하고 묻든 생각이 났다.
기동군이야 말로 찐짜 싸움꾼인 악동이다.
"말 마라라 형펴이 나까무라다"
"무기정학인데 핵교는 말라꼬 나오라카더노"
"빤한거 아이가, 우리를 욕보이자는 거 아이까이"
기동이는 한발 다가서더니
"그게 아이다마, 그 매구같은 주 선생이 너거들을 집에 놀라다 보면, 서울 쪽 고등학교로 전학 갈 궁리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런 조치를 했다카는 이바구를 들었다 아이가"
사실 기동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집단으로 전학을 가면 소문이 나고 왜, 서울로 전학을 갔을까 하는 궁금증은 증폭되어 경고생은 모를리 없을 것이다. 전학 간 학생들이 집단 폭력 사건을 일으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그래서 서울 쪽으로 전학을 갔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져 드디어는 갱고의 명예를 실추시킬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 경쟁고인 부산고 선생들로부터 ‘교육 잘 시킨다더니, 깡패학생을 맨들었구만’ 하는 비웃음을 받아 교장 교감 등 선생들의 긍지에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을 예방하기 위한 궁여지책의 결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니 지금 오데가노" 하고 기동에게 묻자
"오늘 조회날 아이가 이발소에 가서 한데 빨란다"
"니 는--"
"유치장에 간다마"
"일마야 유치장이 오딘데---"
"교련선생 방이다."
"잘덴네, 교련선생은 멋재이 아이가"
기동이 뿐만아니라, 다른 3년생들도 우리악동에게 동정을 보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도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조회시간에 교련선생 방에 거의 자유방임적 구속을 당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주 선생이 지름이 2-3 센치 되고, 길이가 1미터 반이 넘을 성 싶은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우리는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그 뒤에 기동이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따라 들어오는 것이다.
기동이는 2학년 초인가 아니면 1학년 말인가 쯤에 M시 M고등학교에서 전입해온 학생이다.
그 이전 M시 M상고에서 편입한 고 재용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학교대표 축구선수였고, 그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M시 전체에서 '고뿔다구'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다(건달) 였다는 것이다.
그 외 한 대진란 친구도 M시 M고등학교에서 먼저 전입해 와있었는데 이 친구 역시 고등학생들 중에서 갋을 수 없는 건달이었다는 것이다.
갱고가 타지에서 소문난 깡으로 이름을 날린 친구들을 정식 입학시험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학년 중간에 왜 입교시키는지 당시에 의아스럽게 생각하였다.
어린 나의 생각에도 기부금을 많이 내었거나 특별한 권력을 가진 부모의 영향력일 것이다. 라고 막연하게 짐작하였다.
기동이가 처음 전학 와서 등교한 날, 아직 학급배정을 받지 않았는데 나는 이상한 현상 두 가지를 목격한 것이다.
M교에서 편입한 대진이와 M상고에서 편입한 '고뿔다구'가 기동에게 찾아가서 온갖 아양을 다 떠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3년생인 농구선수요 가다인 남씨 성을 가진 선배 일당이 교실 서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매점에 기동이를 호출해 갔다는 것이다.
나도 호기심으로 학업도구를 산다는 핑계로 가 보았더니 3년생 일단이 매점 뒤편에서 기동이를 꿇어 앉혀놓고 집단 린치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쓱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다카디마능 니놈이 갱고에 잘왔다"
하며, 남씨 선배가 몸통 받쳐 자세로 있는 기동이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야구방망이로 사정없이 내려치는 것이다.
"아야야--내죽네---"
또 퍽, 퍽.
"그 때 정말 잘못했심더, 한번만 용서해 주이소"
정말 너무한다 싶은 생각을 하며 구경하고 있는데,
내 얼굴에 불이 번쩍 하는 것이다.
"일마야 무슨 구깅이고, 니도 죽을래"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교실로 돌아 왔다.
내 얼굴에 빨갛게 손자국이 나있는 것을 본 종학이가,
"헌지 니 매점 갔다가 빰다구 한 대 마잤구마"
"남선배 너무한거 아이가, 선배라는 사람이 후배를 그렇게 마구잽이로 개패듯 해도 된단 말인가" 하자. 종학이가 받아서.
"기동이가 안있나 사실로치면 우리보다 한해 윗 학년인데, 학생으로서는 도저히 거냥 넘기지 못할 어떤 죄를 저질런기라, 아마 M시 전체가 벌집 쑤시듯 활칵 뒤집힌기라"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어떤 나뿐죄를 짓길래 말이고" 하자.
"일마, 니 같은 알라는 몰라도 되는 일이다, 이바구 하는 데 초치기능" 하더니 계속하여
"그러나 다행히도 말이다, 기동이는 법조계 이름 있는 아부지의 기맥힌 노력으로 갱고에 편입해 왔고, 저거 아부지한테 갱고에만 보내주면, 정말 착한 학생으로 바끼겠다고, 서약서까지 썻다 안커나"
기동이는 M시 전체 학생이 두려워하는 M교의 조직 패를 이끌어 오면서도 '갱고'생이 되는 것이 최고의 소망이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M고도 만만찮은 명문인데도 말이다.
종학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을 이어간다
그러나 기동이는 3년생인 남 선배 일당으로부터 반죽음의 린치를 당할 것인데, 그 이유는 M시에서 개최한 언젠가의 농구선수권 대회에 갱고 대표로 참가한 남 선배 일당이 M고등학교 대표격 가다(건달)인 기동이 일당에게 숙소에서 불려나와 ‘갱고가 그리 대단하냐, M고보다 잘란기 무시있노’ 하고 걸고넘어지는 억지 시비에 휘말려 죽도록 얻어터진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있나 당시에 남 선배도 갱고에서는 몇 째 가는 소문난 어깨 아이디나, 그래서 원정 온 농구부 칭구들 보는데 체면도 있고 해서 이판사판이다 하고 똥 폼을 잡았능기라. 그런데 뭐시 휙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온다 시픈데 기동이의 몸디와 왼쪽 주먹이 남 선배 오른 쪽 턱을 갈긴능데 그 큰 남 선배가 전붓대처럼 꼳꼳하게 길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안크나”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신이 났는지
“쌈은 기동이 빤찌 한방에 쇼부가 난기라 그말이다, 기동이 글마 대단하제--, 그러니 남 선배가 얼씨구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카디마능 잘됐다카면서 오늘 손 좀 본다카능 소문을 내가 들었다 아니가”
종학이는 계속하여
“남 선배는 기동이패의 한 놈이 업고 인근 병원의 응급실로 갔고 수십 분이 지나고서야 깨어났는데 치료비를 기동이가 벌써 주고 사라졌다커능기라, 좌우지간 멋재이 아이가” 하는데 수업종이 우렸다.
나는 남 선배가 기동이를 미친 듯 몽둥이질 하면서
“내가 원수를 언제 갑나 하고 꼬나고 있었는데, 하늘이 도운기라” 하든 말이 이해가 되었다.
우리가 구치된 교련선생 방엔 숨소리가 나지 않고, 공포가 감돌았다.
주 선생은 먼저 기동이를 보고
“기동이 니놈은 조회도 안나오고 이발소에서 아침부터 코구멍에 영기피운다꼬 정신이 없던구만, 니놈은 오늘 재수없게 용케 내한테 걸렸는기라, 이제 맛좀봐라”
하면서 몽둥이가 기동이의 펑퍼짐한 언덩이에 떡방아를 찍는 것이다. 퍽, 퍽, 육중한 소리가 나자
“아이구 내죽네 한번만 살려주이소”
“뭐시라 커노” 또 바람을 날리며 퍽, 퍽, 퍽,--.
“아이구 내 죽심더 다시는 안그를께예 한번만 용서해주이소. 예 선상님”---.
주 선생의 몽둥이 상하왕복 회 수는 주름 잡아 삼십 번 이상은 돼지 싶었다. 몽둥이에 가속도가 붙어 더욱 모질게 기동의 어덩이에 내려 밖는 운동의 제2법칙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다음차례는 우리 악동이다 싶어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공포에 저려 있었는데 천만 다행으로 기동이 하나로 주 선생 몽둥이는 그 역할을 마쳤다.
사실 집단폭행을 저지른 중죄인인 우리악동은 형벌을 면하고 끽연을 한 경범죄인 인 기동이만 가혹한 물리적 체형을 받아 우리 모두는 기동이에게 미안하여 몸 둘 바를 몰랐었다.
최근에 M시에서 기동이를 만나 소주잔을 나눌 때, 먼저 생각난 일은 50여년을 지났는데도 기동이가 그 매질을 당하면서 비굴할 정도로 주 선생에게 잘못 됐다고 빌어대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터지려고 하는 것을 참았고, 한편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맨 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대폿값은 내가 객지인데도 억지로써 지불하니
“일마야, 여는 내 고향인데 무슨 그런 빕이 있노”
당연히 2차는 기동이가 푸짐하게 썼다.
나는 술이 좀 거나한 기분에
“친구야”
“일마야,와”
“니가 갱고 간판이 그렇게 조터나”,
“일마가 술 첸나, 갑제기 갱고는 와 덜미기노, 갱고야 내 한평생 자랑아이가, 사실 내가 갱고란 말은 소뻑다구 고음국 우라 묵듯이 두고두고 울가 먹은 기라” 하며 그 때를 생각하는지 눈을 지그시 감는다.
당시 내가 기동이 같이 이름께나 있는 건달이라면, 건달패 보스의 권위를 위해서도 친구들 보는 앞에서
“아이구 살려주이소” 하며, 주선생에게 애걸복걸 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라 생각하며 빙긋이 웃어주었다.
교련선생 방에서 4-5일 간 체형 없이 들락날락 하다가 무기징역형이 사면되어 우리 일당은 풀려났다.
이상이 ‘갱고 악동’ 제목의 글다.
노인은 피로한 눈에 또 안약을 넣었다.
우리 같은 갱고 악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갱고 역사 이래 전무후무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발치기 명수 상현이는 서울 공대를 나와 불이무역에서 자동계기수입 무역으로 당시공업화 바람에 돈을 많이 모았으나 불행이도 40대 초반에 유명을 달리했고, 그 다음 웅열이는 국제그룹에서 총수 맞 사위인 친구 한 O구와 열심히 일을 하다가 병으로 알아 누었는데 그 때 친우 장명제로부터 전화로 웅열이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해와 타계 전에 병문안을 한바 있다. 그리고 내가 인천 계양구 선출직 공직에 있을 때 그 유명한 종학이와 조선 호텔 커피숖에서 여러 번 만나 정의를 나누었는데 한동안 모임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최근에 한 친구에게 물었더니 얼마 전 그가 타계하였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종학이는 그렇게 건달로 학창 시절을 풍미하였으나, 사회인이 되고서도 제계나, 정계에서 조정 역에 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인생을 굵게 멋있게 산 표본의 인물이었음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도 종학이에 관하여 궁금한 일이 있다.
내가 공직에 있을 때 종학이와 조선호텔 커피 숖에 만났다.
“헌진아, 청와대 비서실 김 실장을 니가 잘 알제”
“그래, 내 고향 후배이고, 내가 김의 특보도 좀 했다 아이가”
“그라모, 니가 내 소개를 한번 잘해도”
“뭐라꼬 소개 해 달라꼬”
“돈도 많고 사내다운 친구라고--, 니가 알아서 잘 해다오”
“알았다, 니하고 같이 밥한끼 하도록 이바구 해 볼게”
그런 얘기를 나눈 지 보름도 지나지 아니하였는데 청와대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고 해서 받았다.
“형님, 청와대 접니다”
“우짠 일이고”
“형님 종학이 선배 잘 알지요”
“그래, 안그래도 니하고 밥이나 한끼하자고 해서 말 할려고 했는데”
“내하고 몇 번 만났십니더”
“종학이는 제법 머리가 좋은 친구인데 대단한 재주 꾼이다”
“김 선배가 형님을 잘 안다고 해서 알아보려고 했습니더”
“우리 한번 만나지”
“제가 시간 나면 미리 연락하겠십니더, 안녕히 계십시오”
나에게 소개 해달라고 했는데 언제 김 실장과 가깝게 되었는지 긍금하였다.
그 의문을 품은 지 5-6년이 지났는데 종학이도 김실장도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똑똑한 사람을 하나님은 빨리 불러 가시나 보다.
뒤 늦게 종학이의 죽음을 알게 된 나는 고인과 유족 앞에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종학이와 나는 대구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고, 악동 멤버는 아니지만 고인이 된 전 경일군과 종학이의 남포동 건달로서의 암투 그리고 나와 셋이 얽힌 자미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또 미국에 있는 유 동웅군과 앞서간 울산의 이 상원과 방일호와의 재학 시절 이야기, 그리고 타계한 고향 친우 황 현태, 초등학교부터 형제같이 지낸, 이민섭 교수, 그리고 갱고 졸업 후 가장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함께한 이 창복과의 관계 등 숫한 추억거리를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그 친구들과 지내온 세월이 너무나 행복하다.
지금은 새벽 4시, 이런 글을 쓰게 실마리를 준 갱고 이름 모르는 56회 후배에게 감사를 보낸다.
노인은 비로소 책상위에 노여 있는 흰 봉투인 용마 회지를 뜯었다.
경남중고 발전기금이 2013. 3. 25일현제 62억원 정도 모금됐다는 집계가 나와 있었고, 특히 내 눈에 띄는 것은 구덕산 골짝에 자리한 모교의 원형교사 ‘덕형관’ 을 근대건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한 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는 기사가 나와 있다.
원형교사건설의 첫 삽은 경열회가 팠기 때문에 더욱 감회가 깊다.
그렇다면, 경열회의 일원인 우리 경남고 악동들도 경고 ‘집단폭력무형문화재’로 등록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노인은 피로한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갱고 원형교사의 빛과 그림자』가 자률공립고등학교 지정으로 빛은 찬란하게 남고 암울한 퇴락의 그림자는 걷어지기를 바라며 노인은 동이 틀 무렵 침대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