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대두
일련의 암살자 집단이 새로운 함정 진수식을 마치고 귀궁중이던 쟝1세 일행을 습격한
1167년,..
미디블은 새로운 세력구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간의 패권다툼은 양측에 어마어마한 소모를 가져왔다.
50년간의 공방전으로 양국은 피폐되었고, 국경을 지킬 힘을 잃어갔다.
프랑스는 남부 아라곤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었지만,
독일은 곳곳에서 발생한 반란과 이틈을 놓치지 않고 이빨을 들이댄
헝가리,폴란드, 이탈리아 군에 의해 소국으로 전락하는 굴욕을 맛보아야만 했다.
"결국 50년간 우리가 피를 흘린 이유는 저 그리스 인 만큼이나 약삭빠르기로 소문난 이탈리아 인들을
위해서였단 말인가" 라고 탄식했던 하인리히 대공을 말을 빌지 않더라도 패권다툼의 최후 승자는
결국 이탈리아 임이 확실해졌다.
이탈리아는 양국간의 전쟁으로 인한 고통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군대를
진군, 서유럽의 끝을 관통해버리는 1087년 이래 최대의 영토 국가가 되었다.
포루투칼, 스페인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고
스페인군에 의해 북유럽으로 쫓겨갔던 알모하드에도 기회는 찾아오고 있었다.
후방을 교란하던 이집트와의 휴전,
스페인 주력군이 포르투칼 반란군과의 4차에 걸친 전투에서 모두 패배한 것이다.
한편, 1161년의 암살자 습격에도 쟝1세는 무사했다.
암살배후는 밝혀지지 않으나 세간의 이목은 모두 스코틀랜드로 향하고 있었다.
노르웨이 회전
의심의 눈초리를 돌리기 위한 제스처일까? 1168년 샤를 대공은 또다시
독단적으로 노르웨이를 침공한다.
스코틀랜드의 수비군으로는 오직 쟝1세의 2남 샤를왕자 만을 남겨두고 왠일인지
항구를 부서버린 후 였다.
노르웨이 202000 대군을 상대로 한 샤를의 용병단은 236000만,
양측 도합 538000 대군이 맞붙은 전투였다.
여기서도 샤를은 제1차 선봉진들에게 무조건 돌격을 명한다.
노르웨이의 바이킹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전력의 80프로였던 농민부대로는 고급전투기술을 갖춘 용병대를 이기기란 무리였다.
102500명의 전사자를 내고 결국 항복해버린 노르웨이군, 샤를대공에 의해 모두
노예가 되는 운명을 맞았다.
쟝1세의 최후
같은 해, 스코틀랜드에서 반란군이 궐기했다. 카톨릭 인이 아닌 같은 무슬림들에 의해서였다.
위기에 빠진 샤를 제2왕자를 구하기위해 쟝1세는 직접 출병을 시도했다.
엘시드와 리슐리는 출병을 말렸으나 쟝1세는 자식의 죽음을 방관할 수 없었다.
쟝1세는 자신이 이기지 못하면 성으로 후퇴할 테니 1년후에 준비해서 출병해줄 것을 부탁했다.
엘시드와 리슐리는 준비가 끝나는대로 왕을 구출할 것을 맹세한다.
쟝1세와 샤를 왕자가 합류한 것은 링크스였다.
그들은 죽기살기로 반란군을 뚫고 성으로 후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엘시드와 리슐리는 1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1170년 쟝1세는 씁쓸한 웃음을 날리며 샤를 왕자와 함께 성을 나와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다.
단 한명도 살아남지 않은 최후였다.
쟝1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수는 없으나 리슐리와 엘시드는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지경이었다.
1169년 국왕의 문서를 위조한 일련의 암살부대와 밀사가 리슐리 경을 습격해서 반역죄로
일가족 전체를 몰살시켜버렸다.
엘시드 또한 스코틀랜드 출항을 위한 함선을 갖추는 동안 암살자의 습격을 받아 큰 상처를 입고
숨어야만 했다.
숙청
왕의 죽음이 알려지자 샤를은 즉시 왕의 장자 앙리왕자를 왕위에 앉힌다.
앙리 왕자 즉 앙리1세는 샤를대공의 꼭두각시 인형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해졌다.
샤를 대공에 의해 실라국의 공주들은 샤를의 하수인들에게 바쳐지다시피 궁을 떠나야 했고,
반 샤를 파였던 정규군 대다수가 해산되고 감금, 처형되는 운명을 맞았다.
또 선왕의 복수전은 커녕,
샤를 대공에 의해 막대한 뇌물이 오간 결과 스코틀랜드 반란군들이 정규군으로
편입되고 말았던 것이다.
영국침공을 위해 샤를 대공은 동맹을 깨야만 했다.
기회는 1178년 찾아왔다.
한때 알모하드를 북아프리카로 몰아내던 스페인이 결국 알모하드에게 멸망당한 것이다.
영국은 즉각 십자군을 알모하드에 보냈고, 샤를 대공은 자연스럽게 영국과의 동맹을 청산할
구실을 얻게 된다.
노섬브리아 회전
1179 프랑스 십자군이 노섬브리아에 상륙했다.
이제 실라의 대규모 침공군이 영국령 노섬브리아를 공격할 것이 자명해졌기 때문이다.
1180년 드디어 브리타니아 정복을 목표로 샤를의 대군이 움직였다.
실라군 73000과 프랑스,영국 연합군 69800이 맞붙은 것은 노섬브리아의 험버강 북쪽 평원지대였다.
샤를은 역시 전원 돌격을 강행했다. 처음 군세는 실라군의 우세가 뚜렷했다.
그러나 옆 숲속에서 매복해있던 영국군이 밀려오면서 전세는 연합군에 유리해져갔다.
이를 극복한 것은 샤를의 돌격이었다. 샤를은 몸소 칼을 빼들고 똑바로
영국군 지휘관과 프랑스 지휘관이 있는 곳을 중앙 돌파했고, 곧 모든 대군이 샤를의 뒤를 따랐다.
결국 영국군 지휘관이 도망치고, 프랑스 지휘관이 전사하므로
실라군의 승리로 끝났다.
서유럽의 강호들을 상대로 거둔 첫번째 승리로 실라국이 떠들썩할 무렵,
도버해협에 파견되었던 해군들이 영국군에게 전멸당했다는 소식이 실라원을 발칵 뒤집어 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