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황후 고씨는 그의 아버지가 高揚으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용성으로 이주하면서 고구려를 떠나 북위로 이주하였다.그리고 6대 효문제시기에 그의 어머니인 문명황후 풍씨에 의해서 발탁되어 궁중에 머물러 결국 효문제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어 후에 7대왕 선무제가 되는 탁발원각을 낳고 딸 장락공주도 낳는다. 그러나 효문제가 수도를 용성에서 낙양으로 옮기는 도중인 496년 暴薨(갑자기 죽다)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암살이란 의미인것이다. 왜 그녀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까? 그 답은 馮昭儀가 나이 어린 선무제를 양육할 욕심으로 그녀를 죽였다는것이다 그리함으로서 황제주변 모후(유모등...)들이 차후 정권과 가까워지게 되고 두고두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게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죽음을 당한후 후에 즉위한 그의 아들 선무제에 의해 이장되고 태황태후로 추존되었다.
어느 저서에 따르면 선비족이 세운 북위에서는 태조 도무제(탁발규,386~409)때 부터 보위를 이을 태자의 어머니를 죽이는 풍습이 이어졌다는데 세자의 친어머니와 외척이 조정을 어지럽히는것을 방지하기위한 특단의 조치로 실제 친모의 수렴청정이 근절되었다고 전해진다. 효문제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고 급격한 한족화를 시행하게 되자 그의 황태자인 탁발원순이 반기를 들어 그의 아버지의 정책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후에 효문제는 그의 아들을 독살하게되고 차후의 황태자 지위에 고조용의 아들인 탁발원각이 내정되자 퐁소의가 차후 선무제의 친모인 고조용 즉 文昭皇后高氏 의 친족들이 조정을 어지럽힐것을 우려하여 그녀를 살해하게 되는것이다.
풍소의는 효문제의 정실황후였던 효문폐황후(효문제가 전쟁에 나갔을때 불륜으로 인해 페위됨)가 그녀의 언니였으며 그녀 역시 효문제와 결혼하여 효문유황후가 되었는데 그런 그녀가 선무제를 아들과 같이 기르길 원했으며 그녀는 효문제와의 사이에서 후사가 없었기에 고조용을 죽인것도 결국 그녀의 권력욕으로 보아야 한다. 그후 그의 아들 선무제는 효문제가 자신의 후사인 선무제를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보정대신에게 위임했던 권력을 구테타를 통해 보정대신으로 부터 환수받고 북위조정과 관련이 크게 없었던 고구려 출신 외척으로부터 겹사돈을 맺으면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고 자신에게 반대세력을 제거해가는데 잘 이용하였다.
고용은 그녀의 고종사촌이기도한 선무제의 귀빈으로 있다가 황후자리에 올랐다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그리하여 다른 후궁이 낳는 아이에 대해 강한 경계를 한것으로 알려졌다 선무제의 아들 8대 효명제는 고용의 아들이 아니라 한족인 胡氏가 낳은 아들로 子貴母死의 관습으로 인해 선무제로 부터 배척 당해 살아왔기에 선무제의 황비가 된 고용은 향후 보위를 잇는 효명제 친모 胡씨의 권력을 끊기위해 그 율법을 빌미로 호위군에게 호씨를 죽이도록 명했으나 호씨는 빼돌려져 살아나게 되었고 後에 이와 관련되어 고씨가문은 효명제에 의해 숙청되고 宣武皇后高氏도 호황후에의해 폐위되어 강제로 요광사의 중이 되었다가 호황후의 명령에의해 살해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