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유사 권제3 탑상 제4(三國遺事 卷第三 塔像 第四)
洛山 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낙산사의 두 보살 관음 정취와 조신)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昔義湘法師 始自唐來還 聞大悲眞身住此海邊窟內 故因名洛山 盖西域寶陁洛伽山 此云小白華 乃白衣大士眞身住處
석의상법사 시자당래환 문대비진신주차해변굴내 고인명락산 개서역보타락가산 차운소백화 내백의대사진신주처
故借此名之
고차차명지
齋戒七日 浮座具晨水上 龍天八部侍從 引入崛內 參禮空中 出水精念珠一貫給之 湘領受而退 東海龍亦
재계칠일 부좌구신수상 용천팔부시종 인입굴내 참례공중 출수정염주일관급지 상령수이퇴 동해용역
獻如意寶珠一顆 師捧出 更齋七日 乃見眞容 謂曰 於座上山頂 雙竹湧生 當其地作殿宜矣 師聞之出崛 果有竹從地湧出
헌여의보주일과 사봉출 갱재칠일 내견진용 위왈 어좌상산정 쌍죽용생 당기지작전의의 사문지출굴 과유죽종지용출
乃作金堂 塑像而安之 圓容麗質 儼若天生 其竹還沒 方知正是眞身 住也 因名其寺曰 洛山 師以所受二珠 鎭安于聖殿而去
내작금당 소상이안지 원용려질 엄약천생 기죽환몰 방지정시진신 주야 인명기사왈 락산 사이소수이주 진안우성전이거
後有元曉法師 繼踵而來 欲求瞻禮 初至於南郊 水田中 有一白衣女人刈稻 師戱請其禾 女以稻
후유원효법사 계종이래 욕구첨례 초지어남교 수전중 유일백의여인예도 사희청기화 여이도
荒戱答之 又行至橋下 一女洗月水帛 師乞水 女酌其穢水獻之 師覆棄之 更酌川水而飮之 時野中松上 有一靑鳥 呼曰
황희답지 우행지교하 일녀선월수백 사걸수 여작기예수헌지 사복기지 갱작천수이음지 시야중송상 유일청조 호왈
休醍醐和尙 忽隱不現 其松下有一隻脫鞋 師旣到寺 觀音座下 又有前所見 脫鞋一隻 方知前所遇聖女乃眞身也
휴제호화상 홀은불현 기송하유일척탈혜 사기도사 관음좌하 우유전소견 탈혜일척 방지전소우성여내진신야
故時人謂之觀音松 師欲入聖崛 更覩眞容 風浪大作 不得入而去
고시인위지관음송 사욕입성굴 갱도진용 풍랑대작 불득입이거.
*공부합시다. 湘 강이름 상, 窟 굴 굴, 蓋=盖 덮을 개. 아마, 대개(추측, 상상하는 말) 寶陁洛伽山(보타락가산) 관세음보살이 잇다는 산, 陁 비탈질 타, 白衣大士 白衣菩薩, 당 송 이후 민간에서 신앙되던 33종류의 관세음보살의 하나, 항상 흰옷을 입고 연꽃에 앉아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齋戒(재계) 부정한일을 멀리하고 심신을 깨끗이하는 일, 열심히 불도를 닦는 일, 齋 재게할 재, 座 자리 좌, 晨 새벽 신, 龍天八部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신장 天, 龍, 阿修羅, 迦樓羅, 乾闥婆, 緊那羅, 摩睺羅迦를 이름, 侍從(시종) 남의 시중을 드는 사람, 崛 우뚝 솟을 굴, 參禮 예식, 제사 등을 관여하는 일, 貫 꽬 관, 獻 드릴 헌, 顆 낟알 과, 捧 받들 봉, 湧 샘솟을 용, 塑像(소상) 찰흙으로 만든 모형, 儼 의젓할 엄, 繼蹤(계종) 뒤를 이음, 繼이을 계, 踵 발자취 종, 瞻 볼 첨, 郊 성밖 교, 水田 물을 대어 벼를 재배하는 땅, 刈 벨 예, 稻 벼 도, 禾 벼 화, 戱 놀 희, 月水帛 여성이 생리 때 샅에 차는 헝겊 따위로 만든 물건, 穢 더러울 예, 覆 뒤집을 복, 棄 버릴 기, 醍醐(제호) 정법, 불성을 이름, 和尙 수행을 많이 한 중, 鞋 신. 짚신 혜, 覩 볼 도, 謂 이를 위 隱 숨을 은
옛날 의상법사(義湘法師)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바닷가 어느 동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낙산(洛山)이라 이름지었으니, 이는 서역에 보타락가산(寶陁洛伽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산을 소백화(小白華)라고도 하는데,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것을 빌어 이름을 삼은 것이다.
여기에서 의상이 재계한 후 7일 만에 앉았던 자리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龍天八部)의 시종들이 동굴 속으로 안내해 들어가, 공중을 향하여 예를 올리니 수정으로 만든 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었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물러나오니,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쳐서 이것도 같이 받아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나서 비로소 관음보살의 참 모습을 보았다.
관음이 말하였다 “네가 앉아 있는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곳에 불전을 짓도록 하여라” 법사가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여기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모습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대나무가 도로 없어지므로 그제야 비로소 관음의 진신이 살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법사는 그 절의 이름을 낙산사(洛山寺)라고 하고, 자기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놓고 그곳을 떠났다.
그 후에 원효법사(元曉法師)가 뒤를 이어 와서 여기에 예를 올리려고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자 논 가운데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장난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자, 여인도 장난삼아 벼가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법사가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경 수건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를 불러 말했다.“제호 스님은 그만 쉬십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숨고 보이지 않았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이르러보니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또 전에 보았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으므로 그제야 전에 만난 여인이 관음보살의 진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말했다. 법사가 신성한 굴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을 보려고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後有崛山祖師梵日 太和年中入唐 到明州開國寺 有一沙彌 截左耳在衆僧之末 與師言曰 吾亦鄕人也
후유굴산조사범일 태화년중입당 도명주개국사 유일사미 절좌이재중승지말 여사언왈 오역향인야
家在溟州界翼嶺縣 德耆坊 師他日若還本國 須成吾舍 旣而遍遊叢席 得法於鹽官(事具在本傳) 以會昌七年丁卯還國
가재명주계익령현 덕기방 사타일야환본국 수성오사 기이편유총석 덕법어염관(사구재본전) 이회창칠년정묘환국
先創崛山寺而傳敎 大中十二年戊寅二月十五日 夜夢 昔所見沙彌到窓下曰 昔在明州開國寺 與師有約
선창굴산사이전교 대중십이년무인이월십오일 야몽 석소견사미도창하왈 석재명주개국사 여사유약
旣蒙見諾 何其晩也 祖師驚覺 押數十人 到翼嶺境 尋訪其居 有一女 居洛山下村 問其名 曰德耆
기몽견낙 하기만야 조사경각 압수십인 도익령경 심방기거 유일녀 거락산하촌 문기명 왈덕기
女有一子 年才八歲 常出遊於村南石橋邊 告其母曰 吾所與遊者 有金色童子 母以告于師 師驚喜
유여일자 년재팔세 상출유어촌남석교변 고기모왈 오소여유자 유금색동자 모이고우사 사경희
與其子尋所遊橋下 水中有一石佛 舁出之 截左耳 類前所見沙彌 卽正趣菩薩之像也 乃作簡子 卜其營構之地
여기자심소유교하 수중유일석불 여출지 절좌이 유전소견사미 즉정취보살지상야 내작간자 복기영구지지
洛山上方吉 乃作殿三間安其像(古本載梵日事在前 湘曉二師在後 然按湘曉二師爾□於高宗之代 梵日在於會昌之後
락산상방길 내작전삼간안기상(고본재범일사재전 상효이사재후 연안상효이사사국어고종지대 범일재어회창지후
相去一百七十餘歲 故今前却而編次之 或云 梵日爲湘之門人 謬妄也)
상거일백칠십여세 고금전각이편차지 혹운 범일위상지문인 류망야)
그 뒷날 굴산조사(崛山祖師) 범일(梵日)이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렀는데, 왼쪽 귀가 잘려진 한 어린 중이 여러 승려들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법사에게 말했다. “저 또한 신라 사람입니다. 내 집은 명주(溟州) 경계인 익령현(翼嶺縣) 덕기방(德耆坊)에 있습니다. 법사께서 고향에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제 집을 지어주십시오.”
이윽고 조사는 승려들이 많이 모인 곳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염관(鹽官)에게서 법을 얻고,(이 일은 본전에 자세히 실려 있다.) 회창(會昌) 7년 정묘년(丁卯 847)에 귀국하자 먼저 굴산사(崛山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전하였다.
대중(大中) 12년 무인년(戊寅 858) 2월 보름밤 꿈에 전에 보았던 어린중이 창문 밑에 와서 말했다. “옛날에 명주 개국사에서 법사와 함께 약속하여 이미 승낙을 받았는데, 어찌 이렇게 늦는단 말입니까?” 조사는 깜짝 놀라 깨어 사람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 경계에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 아래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이름을 물어보니 덕기(德耆)라고 하였다. 그 여인에게 여덟 살 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항상 마을 남쪽 돌다리 주변에서 놀았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노는 아이 중에 금빛이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조사에게 말했다. 조사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는 다리 밑에 가서 찾아보니 물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는데 꺼내 보니 왼쪽 귀가 없어진 것이 전에 만난 어린 중과 똑같았다. 이것이 바로 정취보살(正趣菩薩)의 불상이었다. 이에 대나무 조각으로 절을 지을 곳을 점쳐보니 낙산 위가 제일 좋다고 하여서, 여기에 세칸짜리 불전을 짓고 그 불상을 모셨다.(고본(古本)에는 범일의 일이 앞에 있고, 의상과 원효의 일이 뒤에 있었다. 그러나 살펴보니, 의상과 원효 두 법사의 일은 당나라 고종 때이고, 범일은 회창(會昌) 이후의 일이니, 그러니 연대가 서로 170년의 차이가 난다. 지금 앞뒤를 바꾸어서 책을 꾸몄다. 어떤 이는 범일이 의상의 문인이라고하지만 잘못된 말이다.)
後百餘年 野火連延到此山 唯二聖殿 獨免其災 餘皆煨燼 及西山大兵已來 癸丑甲寅年間 二聖眞容及二寶珠
후백여년 야화연연도차산 유이성전 독면기재 여개외신 급서산대병이래 계축갑인년간 이성진용급이보주
移入襄州城 大兵來攻甚急 城將陷 時住持禪師阿行(古名希玄) 以銀合盛二珠 佩持將逃逸 寺奴名乞升奪取
이입양주성 대병래공심급 성장함 시주지선사아행(고명희현) 이은합성이주 패지장도일 사노명걸승탈취
深埋於地 誓曰 我若不免死於兵 則二寶珠 終不現於人間 人無知者 我若不死 當奉二寶 獻於邦家矣
심매어지 서왈 아약불면사어병 측이보주 종불현어인간 인무지자 아약불사 당봉이보 헌어방가의
甲寅十月二十二日城陷 阿行不免 而乞升獲免 兵退後掘出 納於溟州道監倉使 時郎中李祿綏爲監倉使
갑인십월이십이일성함 아행불면 이걸승호면 병퇴후굴산 납어명주도감창사 시랑중이록수위감창사
受而藏於監倉庫中 每交代傳受
수이장어감창창중 매교대전수
至戊午十一月 本業老宿祗林寺住持 大禪師覺猷奏曰 洛山二珠 國家神寶 襄州城陷時 寺奴乞升 埋於城中
지무오십일월 본업노숙지림사주지 대선사각유주왈 락산이주 국가신보 양주성함시 사노걸승 매어성중
兵退取納監倉使 藏在溟州營庫中 今溟州城殆不能守矣 宜輸安御府 主上允可 敎夜別抄十人 率乞升
병퇴취납감창사 장재명주영고중 금명주성태불능수의 의수안어부 주상윤하 교야별초십인 졸걸승
取於溟州城 入安於內府 時使介十人 各賜銀一斤米五石
취어명주성 입안어내부 시사개십인 각사은일근미오석
그 뒤 백여 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졌으나 오로지 관음과 정취 두 성인을 모신 불전만은 그 화재를 면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다 타버렸다. 몽고의 병란이 있은 이후 계축년(癸丑 1253) 갑인년(甲寅 1254) 연간에 두 성인의 진용과 두개의 보물 구슬을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겼는데, 몽고 군사들이 몹시 급하게 쳐들어와서 성이 함락될 지경이었으므로 주지선사 아행(阿行)(옛 이름은 희현(希玄).)이 은으로 만든 합에 두 구슬을 넣어 가지고 도망가려고 하자 절에 있는 노비 걸승(乞升)이 이것을 빼앗아 땅 속 깊이 묻고 맹세하였다. “내가 만일 병란에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두 구슬은 끝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못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만약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두 보물을 받들어서 나라에 바칠 것이다.”
갑인년(甲寅 1254) 10월 22일에 성이 함락되어 아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 걸승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적의 군사가 물러가자 땅에서 파내어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이때 낭중(郎中) 이녹수(李祿綏)가 감창사였는데, 이것을 받아 감창고 안에 보관해 두고서 매번 교대할 때마다 서로 전해 주었다. 무오년(戊午 1258) 11월에 이르자 본업의 늙은 중 기림사(祗林寺) 주지인 대선사 각유(覺猷)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낙산사의 두 보물 구슬은 국가의 신령스런 보물인데 양주성이 함락될 때 절의 종 걸승이 성 안에 묻어두었다가 적군이 물러간 뒤 파내어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 군영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명주성도 지킬 수 없사오니, 마땅히 대궐의 창고로 옮겨 모시는 것이 마땅할 줄로 아옵니다.”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야별초 열 명을 시켜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두 보물 구슬을 가지고 대궐로 와서 잘 모셔두었다. 그때 사자로 갔던 1열 명에게도 각각 은 한근과 쌀 다섯섬을 주었다.
昔新羅爲京師時 有世逵(達)寺(今與敎寺也)之莊舍 在溟州捺李郡(按地理志 溟州無捺李郡 唯有捺城郡 本捺生
석신라위경사시 유세규(달)사(금흥교사야)지장사 재명주날이군(안지리지 명주무날이군 유유날성군 본날생
郡 今寧越 又牛首州領縣 有捺靈郡 本捺已郡 今剛州 牛首州今春州 今言捺李郡 未知孰是)
군 금영월 우우수주영현 유날령군 본날이군 금강주 우수주금춘주 금언날이군 미지숙시)
本寺遣僧調信爲知莊 信到莊上 悅太守金昕公之女 惑之深 屢就洛山大悲前 潛祈得幸 方數年間 其女已有配矣
본사견승조신위지장 신도장상 열태수김흔공지녀 혹지심 루취낙산대비전 잠기득행 방수년간 기여기유배의
又往堂前 怨大悲之不遂已 哀泣至日暮 情思倦憊 俄成假寢 忽夢金氏娘 容豫入門 粲然啓齒而謂曰
우왕당전 원대비지하수이 애읍지일모 정사권비 아성가침 홀몽김씨낭 용예입문 찬연계치이위왈
兒早識上人於半面 心乎愛矣 未嘗暫忘 迫於父母之命 强從人矣 今願爲同穴之友 故來爾 信乃顚喜 同歸鄕里
아조식상인어반면 심호애의 미상잠망 박어부모지명 강종인의 금원위동혈지우 고래이 신내전희 동귀향리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규(달)사(世逵(達)寺)(지금의 흥교사(興敎寺))의 장원이 명주 날리군(捺李郡)에 있었는데.(『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면, 명주에는 날리군은 없고 다만 날성군(捺城郡)만이 있었다. 본래는 날생군(捺生郡)인데 지금의 영월(寧越)이다. 또한 우수주(牛首州)의 영현(領縣)에는 날령군(捺靈郡)이 있는데, 본래는 날이군(捺已郡)으로 지금의 강주(剛州)이고, 우수주는 지금의 춘주(春州)이다. 여기서 말하는 날리군은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본사에서 승려 조신(調信)을 보내서 장원을 맡아 관리하게 했다, 조신이 농장에 와서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좋아하여 깊이 마음에 품게 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남 몰래 그 여인과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던 중 몇 해 뒤에 그 여인에게 배필이 생겼다. 그래서 조신은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면서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그리워하는 마음에 지쳐서 잠깐 잠이 들었다. 홀연히 꿈속에서 김씨 낭자가 기쁜 얼굴로 문으로 들어와서는 환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마음속으로 사랑해서 잠시도 잊은 적이 없지만 부모님의 명에 못 이겨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다가 이제 부부가 되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에 조신은 넘어질 듯 기뻐하며 그 여자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計活四十餘星霜 有兒息五 家徒四壁 藜藿不給 遂乃落魄扶携 糊其口於四方 如是十年 周流草野 懸鶉百結
계활사십여성상 유아오식 가도사벽 려곽불급 수내락백부휴 호기구어사방 시여십년 주류초야 현순백결
亦不掩體 適過溟州蟹縣嶺 大兒十五歲者忽餒死 痛哭收瘞於道 從率餘四口 到羽曲縣(今羽縣也) 結茅於路傍而舍
역불엄체 적과명주해현령 대아십오세자홀뇌사 통곡수예어도 종솔여사구 도우곡현(금우현야) 결모어로방이사
夫婦老且病 飢不能興 十歲女兒巡乞 乃爲里獒所噬 號痛臥於前 父母爲之歔欷 泣下數行 婦乃皺澁拭涕 倉卒而語曰
부부노차병 기불능흥 십세야아순걸 내위리오소서 호통와어전 부모위지허희 읍하수행 부내추삽식체 창졸이어왈
40여 년을 함께 살면서 자식 다섯을 두었다. 하지만 집은 다만 네 벽뿐이고 끼니조차 제대로 댈 수 없었다. 결국은 마침내 꼴이 말이 아니게 되어 식구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를 두루 돌아다녔으니, 옷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몸뚱이조차 가리기 어려웠다. 마침 명주(溟州) 해현령(蟹縣嶺)을 지날 때 15살 난 큰 아이가 갑자기 굶어 죽어서 통곡을 하면서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우곡현(羽曲縣)(지금의 우현(羽縣))에 이르러 길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부부가 늙고 또 병이 들었으며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열살난 여자 아이가 밥을 빌어다 먹는데 다니다가 마을의 큰 개에게 물려서 아프다고 소리 지르며 앞에 드러누우니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다 부인이 눈물을 훔치고 갑작스럽게 말했다.
予之始遇君也 色美年芳 衣袴稠鮮 一味之甘 得與子分之 數尺之煖 得與子共之 出處五十年 情鍾莫逆 恩愛綢繆
여지시우군야 색미년방 의고조선 일미지감 득여자분지 수척지난 득여자공지 출처오십년 정종막역 은애주무
可謂厚緣 自比年來 衰病歲益深 飢寒日益迫 傍舍壺漿 人不容乞 千門之恥 重似丘山 兒寒兒飢
가위후연 자비년래 쇠병세익심 기한일익박 방사호장 인불용걸 천문지침 중사구산 아한아기
未遑計補 何暇有愛悅夫婦之心哉
미황계보 하가유애열부부지심재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이라도 당신과 나누어 먹었으며, 옷 한가지도 당신과 나누어 입어 함께 했지요. 집을 나온 지 50년 동안 정이 맺어져 친밀해졌고 사랑도 굳어 졌으니 두터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쇠약해져 병이 더욱 심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심해지는데, 남의 집 곁방살이에 변변찮은 음식도 빌어먹을 수가 없게 되어 이집 저집으로 구걸을 다니는 부끄러움이 산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데도 보살필 경황이 없는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紅顔巧笑 草上之露 約束芝蘭 柳絮飄風 君有我而爲累 我爲君而足憂 細思昔日之歡 適爲憂患所階 君乎予乎
홍안교소 초상지로 약속지란 유서표풍 군유아이위루 아위군이족우 세사석일지환 적위우환소계 군호여호
奚至此極 與其衆鳥之同餧 焉如隻鸞之有鏡 寒棄炎附 情所不堪 然而行止非人 離合有數 請從此辭
해지차극 여기중조지동뇌 언여척란지유경 한기염부 정소불감 연이행지비인 이합유수 청종차사
信聞之大喜 各分二兒將行 女曰 我向桑梓 君其南矣 方分手進途而形開
신문지대희 각분이아장행 여왈 아향상재 군기남의 방분수진도이형개
젊은 얼굴과 예쁜 웃음은 풀잎 위의 이슬과 같고, 지초와 난초 같은 향기로운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가 같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있어서 누가 되고 나는 당신이 있어서 더 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지난날의 즐거움을 생각해보니 그것이 바로 우환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여러 마리의 새가 다 함께 굶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보면서 짝을 그리워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붙는 것은 인정상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가고 멈추는 것은 사람에 달린 일이 아니며,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명이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 말을 따라 여기서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두 아이씩 나누어서 장차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여인이 말하였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세요.”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이별하고 길을 나서려는데 꿈에서 깼었다.
殘燈翳吐 夜色將闌 及旦鬚髮盡白 惘惘然殊無人世意 已厭勞生 如飫百年辛苦 貪染之心 洒然氷釋
잔등예토 야색장란 급단수발진백 망망연수무인세의 이염로생 여어백년신고 탐염지심 쇄연빙석
於是慚對聖容 懺滌無已 歸撥蟹縣所埋兒塚 乃石彌勒也 灌洗奉安于隣寺 還京師 免莊任
어시참대성용 참척무이 귀발해현소매아총 내석미륵야 관세봉안우린사 환경사 면장임
傾私財 創淨土寺 懃修白業 後莫知所終
경사재 창정토사 근수백업 후막지소종
꺼질 듯한 등불은 희미한 빛을 토하고 있었고 밤도 이제 새려고 한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온통 하얗게 세었고 망연자실하여 세상일에 뜻이 없어졌다. 이미 괴로운 생애에도 싫증이 났고, 마치 한평생 고생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이에 관음보살의 상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해현에 아이를 묻었던 무덤을 파 보니 돌미륵이 나왔다. 물로 씻어서 근처의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서 농장의 소임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다 쏟아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고 부지런히 선업을 닦았다. 그 후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 수가 없다.
議曰 讀此傳 掩卷而追繹之 何必信師之夢爲然 今皆知其人世之爲樂 欣欣然役役然 特未覺爾 乃作詞誡之曰
의왈 독차전 엄권이추석지 하필신사지몽위연 금개지기인세지위락 흔흔연역역연 특미각이 내작사계지왈
快適須臾意已閑 暗從愁裏老蒼顔 不須更待黃梁熟 方悟勞生一夢間
쾌적수유의이한 암종수리노창안 불수갱대황량숙 방오노생일몽간
治身臧否先誠意 鰥夢蛾眉賊夢藏 何似秋來淸夜夢 時時合眼到淸凉
치신장부선성의 선몽아미도몽장 하사추래청야몽 시시합안도청량
논평하여 말한다. 이 전기를 읽은 후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보니, 어찌 조신의 꿈만이 그러하겠는가? 지금 모두가 속세의 즐거움만 알아 기뻐하기도 하고 애쓰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해서 그러할 뿐이다. 그래서 가사를 지어서 경계한다.
잠시 즐거운 일 마음에 맞아 한가롭더니, 근심 속에 남모르게 젊은 얼굴 늙어 졌네. 모름지기 좁쌀 밥이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지니, 고달픈 인생 한낱 꿈과 같음을 깨닫게 된다네.
수행이 잘 되고 못 되고는 성실한 마음에 달렸는데 홀아비는 미인을 꿈꾸고 도둑은 재물을 꿈꾼다네. 어찌 가을날이 되어야 맑고 깨끗한 꿈을 꾸리오,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淸凉)의 세상에 이를 수 있어야지~~...
일 정
|
아는것은 많은것 같은데 이야기 할려면 아는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서양에서 온 서학인지 역사인지? 사막 어느곳의 신화나 설화와 역사 공부을 하는것 만큼 우리나라의 역사도 아주 중요하오니 공부 하도록 합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 (유홍준 저, 창작과 비평사) 199 Page 동해 낙산사의 영광과 상처 편에 소개 되었던 내용을 원문과 함께 옮겨 보았읍니다.
윗 글에는 선지식 및 문장가들이 인용하여 사용하는 천하의 명문이 여러곳 있읍니다.
"공부합시다" 라고 한문 및 문구와 뜻풀이도 같이 올릴려다 원문과 해석만 올렸읍니다.
원문은 삼국유사(일연 지음, 이민수 옮김, 을유문화사)도서를 참고 하였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