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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진도 팽목항. 약 100일 전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아들ㆍ딸의 이름이 적힌 노란 리본이 나부꼈다.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내렸다. 한적했다. 아직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11명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바다 앞을 서성였다. 그 이후 기적처럼 가족을 석 달 만에 바다에서 건진 사람들은 팽목항을 떠났다.
100일 전 팽목항은 참담함만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아들ㆍ딸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부모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진도체육관은 이들의 집이 됐다. 팽목항 한 가운데에 ‘구조자∙생존자 명단’ 게시판이 놓였다. 삶과 죽음이 공존했다. 바다에서 한 명씩 인양될 때마다 옷차림과 신체 특징 등이 적힌 종이가 나붙었다. 수백 명의 부모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이가 수학여행을 떠날 때 입고 나간 옷가지와 갈아입을 옷들을 떠올리며 생사를 확인했다. 시신 위에 덮힌 흰 천을 살짝 열어봤다가 낯익은 옷과 손 그리고 얼굴을 발견하고는 털썩 주저앉아 정신을 잃는 사람이 늘었다. 사고 다음 날인 4월 17일 사망자는 10명이었다. 19일에는 사망자가 3배(36명)를 넘었고, 22일엔 10배(123명)를 넘었다. 구조는 없고, 시신 인양만 있었다. 그렇게 100일이 흘렀다. 팽목항 게시판엔 이제 더 이상 ‘시신 확인’ 종이가 붙지 않는다. 밖에서 들리는 소식이라곤 6월에 발견된 시신이 40일만에 유병언(73∙사망)씨로 확인됐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뿐이다. 자원봉사자 대부분이 돌아갔다. 항구와 체육관 앞 천막도 빈자리가 많아졌다. 100일이 지난 팽목항은 쓸쓸하다.
세월호가 마지막 항해를 떠나기 전날인 4월 15일 오후 8시, 수학여행을 앞둔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8반 아이들이 담임선생님과 만든 카카오톡 채팅방이 쉬지 않고 ‘띠링, 띠링’ 울렸다. “뭐 챙겼냐?” “내일 교복입고 여행을 다니는 거냐” “내일 갈 때 매점이나 털고 가야겠다”는 아이들의 글에서 고2의 들뜬 마음이 묻어 나온다.
오후 5시. 아이들은 인천여객터미널에 모였다. 출항 1시간 30분 전. 아침부터 깔린 짙은 안개에 항구의 모습이 어렴풋했다. 서해 5도로 떠나려던 배들은 줄줄이 발이 묶였다. 한 학생은 가족에게 문자를 보냈다. “안개 때문에 배가 못 뜨고 있어. 수학여행에 못 갈 것 같으니 밥 좀 해줘요.”
그 시각 인천항 하역장. 항운노조 소속 근로자들은 세월호에 계속 짐을 실었다. 185번째 차량이 마지막으로 올라갔다. 세월호 선적 승인 차량 수는 97대다. 컨테이너까지 포함해 총 2142t의 화물이 실렸다. 세월호 최대적재량(1077t)의 2배였다. ‘과적 때문에 배가 위험할 수 있다’는 걱정이 세월호를 모는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나왔지만 인천~제주를 오가는 배는 그렇게 돈을 벌었다. 승객보다 돈 되는 짐이 우선인 듯 했다. 화물은 배의 좌우 균형을 따질 것도 없이 마구잡이로 실렸다. 과적한 배는 만재흘수선이 바다 밑으로 내려가 안 보였다. 선미가 심하게 잠겼다. 선수와 선미의 균형을 맞추고 배를 전체적으로 높여야 했다. 1등 항해사 강원식(42)씨는 배 하단에 있는 ‘밸러스트 탱크’의 평형수를 뺐다. 가라앉은 선미를 위로 띄우기 위해 뱃머리 쪽 밸러스트 탱크엔 억지로 평형수를 채워 넣었다. 운항 중 높은 파도로 배가 쏠릴 때 균형을 잡아주는 ‘생명수’인 평형수가 청해진해운에게는 ‘과적 눈속임용’이었다. 3등 항해사는 선적량을 허위 보고 했다. 이날 세월호의 운항보고서에 적힌 화물 선적량은 실제의 3분의 1인 657t. 해운조합 운항관리자는 실제 화물이 얼마나 실렸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짐은 제대로 묶이지도 않았다. 컨테이너 지지대는 모서리 4군데에 모두 설치돼 있어야 했지만 세월호는 2곳밖에 없었다. 다른 잠금 장치와 고정 장치는 없거나 고장 난 게 많았다. 밧줄로 컨테이너를 둘러 묶은 게 전부였다.
오후 8시. 짙은 안개로 출항 예정시간이 1시간 30분 지났고 세월호는 기다렸다. 가시거리 800m. 출항 승인에 필요한 1km에 미치지 못했다. 아이들은 여객터미널을 구경하고 편의점 등을 돌아다니며 지루함을 달랬다. 카톡 단체 채팅방에는 “아 오늘 출발은 하나...여기서 자고 내일 바로 출발해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오후 9시. ‘부웅~’ 출항을 알리는 세월호의 고동 소리가 울렸다. 안개는 여전히 짙었지만 해운조합은 “출항 승인이 떨어졌다”고 했다. 기상상태를 점검하는 인천항만청과 출항 승인을 내리는 인천해경이 모두 “항구를 떠나도 좋다”고 했다.
세월호는 밤안개를 뚫고 서해바다의 물살을 갈랐다. 단원고 아이들 325명을 비롯해 476명의 승객이 세월호에 탔다. 인천대교를 지나고, 오후 10시쯤 갑판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아이들의 휴대전화 카메라에 화려한 불꽃이 담겼다. 밤이 그렇게 지났다. 10시간의 항해. 세월호는 평소보다 빨랐다. 16일 오전 6시 52분 계기판 바늘은 시속 38.3km를 가리켰다. 오전 7시 28분부터 8시까지는 최고 속도(시속 39km)까지 올라갔다. 들뜬 마음에 밤잠을 설친 몇몇 아이들은 객실 밖으로 나와 아침 바다를 구경했다.
오전 8시 30분. 세월호는 전남 진도 맹골도 인근 해역에 진입했다. 맹골도와 주변 거차도 사이에 있는, 길이 6km의 물길 ‘맹골수도’였다. 이 곳 물살은 최대 시속 11km 정도로 국내에서 두 번째로 빠르다. 베테랑 선장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위험지역이다.
하지만 세월호는 진도 해역에 들어서기 전 진도VTS(해상교통관제센터)에 ‘진입 보고’를 하지 않았다. 교신이 없으면 확인 교신을 보내야 할 VTS도 세월호에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조타실에선 3등 항해사 박한결(25•여)씨가 운항 지시를 하고 있었다. 위험지역 운항을 총괄해야 할 선장 이준석(69)씨는 선실에 있었다. 8시 49분. 제주도로 가려면 이 지점에서 병풍도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정해진 항로다. 3등 항해사 박씨가 조타수 조준기(55)씨에게 말했다. “우현 145도.” 변침 각도를 5도 더 꺾어 방위각 145도를 맞추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조타수는 15도를 꺾었다. 부정확한 지시와 미숙한 조타가 빚은 실수였다. 배는 급격히 균형이 무너졌다. 시속 8km의 조류가 기운 배를 쏠린 쪽으로 더 밀어냈다. 엉성하게 묶인 갑판 위 컨테이너가 배의 왼쪽으로 ‘쾅, 쾅’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놀란 아이들은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순식간에 바닥이 기울어 벽에 몸을 기대야 했다. 침대 난간을 잡고 버텼다. 짐들이 쏟아졌고, 캐비넷이 넘어지며 몇몇 아이들이 그 밑에 깔렸다.
기울어진 세월호는 오른쪽 위로 J자를 그리며 올라갔다. 과적으로 무게중심이 엉망이 된 세월호는 이미 균형을 잡을 수 없는 통제 불능 상태였다. 쏠린 균형을 잡아 줄 평형수도 모자랐다. 세월호는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오전 8시 52분이었다.
단원고 최덕하군은 위기를 직감했다. 곧 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119에 신고 전화를 걸었다. “살려주세요. 배가 침몰하는 것 같아요.” 전남소방본부는 해경에 연락해 “구조선과 헬기를 투입해달라”고 요청했다.
세월호 선원들이 긴급 교신을 한 건 3분 뒤인 오전 8시 55분이었다. 하지만 사고 지역을 관할하는 진도VTS가 아니라 세월호의 목적지인 제주VTS에 첫 교신을 넣었다.
“지금 배가 넘어갑니다. 배가 움직일 수 없으니 해경에 연락해주십시오. 빨리 와야 합니다.”(선원)
“현재 상황이 어떻습니까. 인명피해는 없습니까”(제주VTS)
“확인 불가합니다. 선체가 기울어져 이동 불가합니다”(선원)
세월호와 제주VTS의 교신이 시작되던 오전 8시 56분, 선내 안내 방송도 흘러나왔다. 그런데 탈출 지시가 아니었다. “선내에 계신 위치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잡을 수 있는 봉이나 물건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상상도 못했던 상황에 놀란 아이들은 안내 방송을 따랐다. 한편으론 불안한 마음도 생겨났다. 한 학생은 “이런 상황에서 막 그러지 않냐? 안전하니까 가만히 있으라고?”라며 의아해했다. 그러자 친구가 “그러면 지들끼리 다 나가고”라며 맞장구를 쳤다. “지하철도 그렇잖아. 안전하니까 좀만 있어달라고 했는데, 진짜로 좀 있었는데 죽었다고. 나간 사람들은 살고”라는 얘기를 했다.
그러는 사이 세월호와 제주VTS의 교신은 계속됐다. 제주VTS는 해경과 진도VTS에 세월호의 위급 상황을 알렸다. 그 사이 금쪽 같은 11분이 흘렀다.
객실에 흩어져 있던 단원고 학생들과 교사들은 서로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다. 오전 9시 5분, 연극부의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이 울렸다. “우리 진짜 죽을것 같다, 사랑한다, 살아서 만나자.”
1분 뒤인 오전 9시 6분. 세월호는 진도VTS와 첫 교신을 시작했다. “세월호, 세월호 여기 진도연안VTS 귀선 지금 침몰 중입니까?” 사고가 난 지 14분이 지난 뒤였다. 선내 안내 방송도 다시 나왔다. “단원고 학생 여러분과 선생님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은 순순히 따랐다. 누군가 “구명조끼 입으란 거는 침몰되고 있다는 소리 아니야?”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때, 다시 스피커가 울렸다. “다시 한 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은 아이들에게 배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했다. 이런 방송을 지시한 사람은 이준석 선장이었다는 사실이 이후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학생들은 안내 방송을 따랐다. 침몰해가는 세월호 객실에 있던 아들, 딸의 마지막 전화를 받은 가족들도 “안내 방송에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다급하게 조언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이렇게 부모의 가슴에 통한을 남겼다.
배안 곳곳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조선은 도착하지 않았다.
“현재 침수 상태가 어떻습니까”(진도VTS)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선원)
오전 9시 13분, 인근을 항해하던 유조선 둘라에이스호가 침몰한 세월호에 접근했다. 6분 뒤 진도VTS는 다른 주변 배에도 상황을 전파했다. “현재 세월호는 탈출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 승객이 탈출하면 최대한 안전하게 구조바랍니다” 세월호는 다급한 목소리로 질문을 반복했다. “해경이 구조차 오고 있습니까?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단원고 이다운군은 아버지 이기홍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배가 기울어졌어. 배가 침몰중이야” 7분 가량 이어진 통화는 갑자기 끊겼다. 이씨는 “배가 가라앉다니 무슨 일이냐”며 휴대전화로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들은 끝내 읽지 못했다.
세월호는 진도VTS와 계속해서 교신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객실 승객들에게 “대피해야 한다”는 방송은 하지 않았다. 진도VTS마저 오전 9시 25분에 “인명탈출은 선장이 직접 판단해서 결정하라”고 했다.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은 그렇게 흘러갔다. 마지막을 예감한 한 학생은 “엄마, 내가 말 못 할까 봐 보내 놓는다. 사랑한다”고 메시지를 쓴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영문을 모르는 엄마는 “나도 사랑한다 아들”이라고 답장을 보냈지만 아들은 엄마의 메시지를 읽지 못했다.
오전 9시 30분 목포해경 소속 123정(100t급)이 세월호를 발견했다. 사고 이후 38분 만에 도착한 첫 해경 선박이었다. 123정은 세월호와 30km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구조정이 도착했지만 아이들은 바깥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배 안에 있던 아이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오전 9시 41분, 김시연양은 기도를 남기고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 잘 있겠죠? 선상에 있는 애들이 무척이나 걱정됩니다. 진심입니다.
부디 한명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수학여행) 갔다 올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4분 뒤인 오전 9시 45분 박예슬양이 촬영하던 동영상엔 구조 헬기 소리가 담겼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누군가 “엄마 보고 싶다”며 울먹였다. 선내 안내 방송이 다시 나왔다. “구명동의에 끈이 제대로 묶여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라”고 했다.
그리고 1분 뒤인 오전 9시 46분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은 세월호를 버리고 해경 123정으로 탈출했다. 끝내 승객들에게 탈출하라는 얘기를 하지 않고 자신들만 달아났다.
예슬양과 친구들은 50도 이상 기운 배 안에 그렇게 남겨졌다. 바다 쪽으로 기운 선실은 유리창 너머로 뿌연 바닷물이, 그 반대편 비스듬히 기운 창으로는 하늘만 보였다. 객실 곳곳에서 짐과 집기가 쏟아졌고 아이들이 다쳤다. 세월호에서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던 아이들은 기울어가는 배 안에서 휴대전화에 영상을 남겼다.(JTBC 보도 ‘세월호에서 온 편지’) 이 영상들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가 됐다. 아이들의 편지엔 선내 방송을 비롯한 당시 상황이 그대로 담겨있어 사고 상황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됐다.
아이들과 함께 바닷물에 잠겼던 휴대전화는 아이들 손에 들리거나 주머니에 담긴 채 물밖으로 건져졌고 전문업체가 파일을 복구하자 예쁜 얼굴이 나타났다. 가족들은 아이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해달라며 JTBC에 이 영상 편지들을 건넸다.
정부는 중앙재난안전대책 본부를 가동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고 당일인 4월 16일 오전 10시 “단 1명의 인명피해도 없도록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사고 해역에 헬기와 인근 어선들이 속속 도착했다. 오전 10시 1분엔 해군 링스헬기가, 9분 뒤엔 유도탄 고속함 한문식함(450t)이 도착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객실 안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에게 달려가 ”얘들아, 빨리 탈출해“라고 외치지 않았다. 세월호 안에 갇힌 사람들과의 연락은 오전 10시 17분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끊어졌다. 헬기와 해경 구조정은 선장과 선원들을 구한 뒤 바다로 뛰어들거나 갑판으로 나온 승객들을 구할 뿐이었다. 사고 발생 2시간만인 오전 11시, 세월호는 물속에 잠기며 뱃머리만 뾰족하게 남았다. 세월호는 오전 11시 20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로 침몰했다. 그 배 안으로 들어가려는 구조대원은 없었다. 사고 이후 2시간 30분. 대한민국은 304명을 그렇게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