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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을 읽었다. 마하트마 간디의 자서전 《간디 자서전(원제: 나의 진실실험 이야기, An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은 한 위대한 성인의 완벽한 승리 기록이 아니라, 수많은 실패와 부끄러운 과오(49%)를 딛고 '진실'이라는 51%의 긍정적인 자아상을 찾아 나아간 처절한 '셀프 혁명'의 기록이다. 이 책 역시 "사람은 자기 이미지 이상으로 성공할 수 없다", "단 1%의 패배가 나를 장악하게 두지 마라", 그리고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내부로부터의 혁명》과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하게 연결되는 책이다. 간디가 자서전을 통해 세상에 던진 핵심 메시지를 정리해 보자.
1. 1%의 부끄러운 패배를 숨기지 않은 '정직함'; 일반적인 영웅들의 자서전은 자신의 성공과 위대함을 포장하지만, 간디는 정반대였다. 그는 자신의 가장 어둡고 부끄러운 과거(1%의 패배감과 도덕적 오류)를 세상에 고스란히 고백했다.
* 어린 시절 몰래 고기를 먹고 도둑질을 했던 기억, 아내를 향한 병적인 질투와 성적 집착, 심지어 아버지가 임종하시는 순간에 방에서 아내와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느라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평생의 죄책감까지 가감 없이 털어놓았습니다.
* 하지만 간디는 이 부끄러운 과거라는 1%의 패배가 자신의 남은 인생 전체(자아상)를 장악하도록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를 '진실을 찾기 위한 실험의 과정'으로 인정하고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2. 고장 난 레코드를 멈춘 '아힘사(비폭력)'와 '사티아그라하(진실에 대한 헌신)'; 고장 난 레코드끼리 만나면 대화가 단절되고 교착 상태(데드락)에 빠진다. 역사 속에서 억압(영국)과 반발(인도 폭력 혁명)은 서로 폭력이라는 고장 난 레코드를 무한 재생하며 피의 악순환을 만들고 있었다.
* 간디는 이 파멸의 루프를 깨기 위해 '비폭력(Ahimsa)'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레코드를 들고나왔습니다.
* 상대방이 폭력으로 도발할 때 같이 폭력으로 맞받아치면 상대의 프레임에 갇히게 되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차분하게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간디의 방식은 영국의 무력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우리가 배운 '단호한 대화법'을 국가적 차원의 저항 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3. 《내부로부터의 혁명》의 완성: 영국보다 먼저 자신을 이기다. 간디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외적 혁명)하기 전에, 인도인 개개인이 도덕적으로 각성하고 스스로를 존중하는 '내적 혁명(셀프 혁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 그는 "단지 영국인들을 몰아내는 것은 주인만 바꾸는 것일 뿐 진정한 해방이 아니다.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이기심을 극복할 때 비로소 진짜 독립이 온다"고 말했습니다.
* 콘래드 힐튼이 호텔을 사기 전부터 호텔왕의 자아상을 가졌듯, 간디는 인도가 독립하기 전부터 이미 내면에서 '자유롭고 당당한 인도인의 자아상'을 먼저 완성했던 것입니다.
간디는 평생 무소유로 살며 늘 대륙을 걸어서 순례했다. 앞서 나눈 '피스 필그림(평화 순례자)'의 대선배였던 셈이다. 그가 그 모진 탄압과 단식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끝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내면에 굳건한 '51%의 진실과 긍정의 힘'이 면역계처럼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저자는 조혼이 나쁘다고 주장한다. 조사해보니 출산은 18세이후에 안전하고 29세까지가 좋다고 한다. 저자와 같이 13세에 결혼하는 것은 적어도 출산에는 좋지 않다. 그렇다고 30대의 만혼은 물론 독신도 좋은 것은 아니다. 33 영국변호사는 어렵지 않았고 시험도 쉬워서 3년만에 취득하고 귀국했지만 일을 구하지 못해 2년간 고생하다 남아공에 취업한다. 하지만 1등실에서 인종차별로 쫒겨난후 대중운동가로 변신한다. 65 수줍었던 그가 신뢰를 얻었던 이유는 사익이 아닌 인도인 나아가 유색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위생향상과 영어습득을 위해 교육을 통해 소득을 늘리게 하면서 남아공 인도사회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또한 소송보다 합의와 분납을 중재함으로서 역시 법조계에서도 신임을 얻었다. 이는 그가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89
그는 소송을 마치고 귀국하려 했지만 송별연에서 인도인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입법이 추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를 막기위한 조직이 결성되고 그가 지도하기로 했으며 보수는 필요없지만 운동기금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하여 남아공에서의 생활이 연장되었다. 93 인도 토후국(Princely States)의 왕들인 마하라자(Maharaja)와 나वाब(Nawab)들에게 복장 제한이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까닭은 영국 민간행정부(영국령 인도 정부, British Raj)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 권위와 위계질서를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특히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여왕(Empress of India)으로 즉위한 이후, 영국은 인도 왕들의 복장에 대해 엄격한 공식·비공식적 규칙과 제한을 두었다.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영국의 상전(상위 권력)임을 명시하기 위해; 영국령 인도 정부는 인도 왕들이 영국의 국왕(또는 여왕)보다 돋보이거나 대등해 보이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
* 왕관(Crown) 착용 금지: 인도 왕들은 서구식 형태의 '왕관(Crown)'을 쓸 수 없었습니다. 오직 대영제국의 군주만이 최고 권력의 상징인 왕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인도 왕들은 전통 머리장식인 터번(Turban)이나 파그리(Pagri)에 보석을 장식하는 것만 허용되었습니다.
* 영국 훈장 착용법 강제: 인도 왕들이 영국의 스타 오브 인디아(Star of India) 같은 훈장을 수여받았을 때, 이를 착용하는 방식과 위치까지 영국의 예법을 엄격히 따르도록 제한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대영제국의 하위 신하(Vassal)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였습니다.
2. 공식 의례(Durbar)에서의 서열화; 영국 부왕(Viceroy)이 주재하는 공식 대의회나 축하 행사(델리 더바, Delhi Durbar)에서 인도 왕들의 복장은 일종의 '유니폼'처럼 규제되었다.
* 왕들의 의복 화려함이나 보석 장식의 범위는 영국 정부가 규정한 '예포 발사 횟수(Gun Salute)'에 따른 서열과 철저히 연동되었습니다.
* 서열이 낮은 토후국의 왕이 서열이 높은 왕이나 영국 관료보다 지나치게 화려한 복장을 입어 권위를 침해하는 것은 묵인되지 않았습니다.
3. '서구화'와 '동양적 전통' 사이의 강요된 딜레마; 영국은 인도 왕들이 완전히 서구화되는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독립적인 왕처럼 보이는 것도 원치 않았다.
* 군복 착용의 제한: 인도 왕들이 영국식 장군 군복을 입을 때는 반드시 영국의 통제를 받는 군대 체제 하의 계급에 맞춰야 했습니다.
*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적 유지: 영국은 서구 대중과 인도 민중에게 "인도 왕들은 화려하지만 전근대적인 동양의 군주로 이들을 다스리는 것은 영국"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어 했기에 공식 석상에서는 양복 대신, 보석이 박힌 전통 의상(Sherwani 등)을 입도록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인도 토후국 왕들의 복장 제한은 단순한 패션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는 나라를 다스리는 왕일지 몰라도, 결국 대영제국 군주와 영국 부왕의 아래에 있는 신하이다"라는 식민지적 지배 구조와 위계를 시각적으로 명확히 지키게 하려는 영국의 정치적 통제 수단이었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해 독립적이지 못한 상태에는 항상 적용되는 우주원리이기도 하다. 137
간디는 3등열차와 무료숙박소로 인도전역을 여행했다. 빈민경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사해보니 인도 전역을 3등 열차(인도 철도 기준 3A 등급 또는 Sleeper class)로 이동하며 무료에 가까운 숙박소를 이용하는 것은 이론적·현실적으로 가능하지만 극심한 체력적 소모와 사전 예약 전쟁을 감수해야 한다. 인도 전국을 한 바퀴 도는 여정을 기준으로 예상되는 방법, 비용, 그리고 시간을 정리해 보자. 인도 열차의 '3등'은 크게 에어컨이 나오는 3A(AC 3-Tier)와 에어컨이 없는 침대칸인 SL(Sleeper Class)로 나뉜다.
* 추천 (3A): 인도 전역을 장기 여행할 때는 안전과 최소한의 쾌적함(침구 제공, 에어컨)을 위해 3A 등급을 타는 것이 좋습니다.
* 비용 (기차표): 대도시 간 장거리 이동(예: 뉴델리 ↔ 벵갈루루, 약 2,000km) 시 3A 티켓은 약 2,200 ~ 2,400루피(한화 약 3만 5천 원 ~ 4만 원) 수준이기에 인도 전역을 주요 거점 위주로 크게 한 바퀴 도는 총 철도 이동 거리를 약 8,000~10,000km로 잡는다면, 순수 기차표 값으로만 약 10,000 ~ 12,000루피(한화 약 16만 ~ 20만 원)가 소요됩니다.
* 주의사항: 인도의 예산 친화적인 침대칸은 몇 주 전에 매진되는 경우가 흔하므로, [IRCTC 공식 홈페이지](https://www.rr.irctc.co.in/)나 외국인 전용 쿼터(Foreign Tourist Quota)를 통해 반드시 최소 수주일 전 사전 예약을 해야 정식 침대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 완전한 '0원' 무료 숙박은 제약이 많기 때문에, 철도청이 운영하는 초저가 시설을 섞어 쓰셔야 현실적이다.
* [다람살라(Dharamshala / 아슈람)](https://www.google.com/search?kgmid=/m/0j65lnw): 인도의 수많은 힌두교 사원이나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구호·공동 숙박소인 '[다람살라]' 혹은 '[아슈람]'은 종교적 여행자나 순례자에게 무료 또는 기부금(수십~백 루피 수준)만 받고 잠자리를 제공합니다. 다만 외지인(특히 외국인)에게는 개방 조건이 까다롭거나 엄격한 통금, 종교적 규칙(채식 강제 등)이 따릅니다.
* [시크교 사원(Gurudwara)](https://www.google.com/search?kgmid=/m/02l7zq): 델리의 방글라 사힙(Bangla Sahib)이나 [암리차르의 황금사원] 같은 대형 시크교 사원에서는 종교와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여행자에게 무료 숙박(Dormitory)과 무료 식사(Langar)를 제공합니다. 안전하고 깨끗하지만 늘 인파로 붐빕니다.
* 철도청 도미토리 (IRCTC Retiring Rooms): 확정된 기차표(PNR)가 있다면 이용 가능한 IRCTC 역내 도미토리(Dormitory)가 최고의 대안. 완전 무료는 아니지만 12~24시간 이용료가 100~200루피(한화 약 1,600원 ~ 3,200원)로 매우 저렴하며, 역 내부에 있어 치안이 좋고 이동이 편리합니다.
직장인식의 빠른 여행이 아닌, 기차 안에서 자고 이동하는 배낭여행 기준의 현실적인 예산이다.
| 항목 | 예상 소요량 및 비용 | 비고 |
| 소요 시간 | 최소 45일 ~ 60일 (약 1.5~2달) | 인도는 워낙 넓고, 3등 열차는 연착(Delay)이 일상적이라 이동에만 수일씩 걸립니다. |
| 교통비 | 약 16만 원 ~ 20만 원 | 3A(3등 에어컨 침대칸)로 인도 전역 대순환 기준. |
| 숙박비 | 약 0원 ~ 5만 원 미만 | 사원 무료 숙박 및 기차역 초저가 도미토리 혼용 기준. |
| 식비 및 기타 | 약 20만 원 ~ 30만 원 | 사원의 무료 급식(Langar) 및 기차역 플랫폼 현지식(Thali 등) 해결 기준. |
| 총예산 | 약 40만 원 ~ 65만 원 내외 (비행기 값 제외) | 순수 인도 현지 체류 및 기차 이동 비용만 산정한 금액입니다. |
돈을 극단적으로 아끼는 여행은 가능하지만, 에어컨이 없는 슬리퍼(SL) 칸이나 무료 사원 숙소 위주로 장기간 이동하면 도난 위험(치안), 위생 문제(물과 음식으로 인한 배탈), 누적되는 만성 피로로 인해 중도 하차할 확률이 매우 높다.
반드시 철도청 공식 앱을 통해 미리 3A 등급 티켓을 선점하고, 무료 숙소 정보는 사전에 해당 지역 시크교 사원 위치를 동선별로 꼼꼼히 파악해 두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141
그는 아버지와 같이 자신을 키우고 배우게 해준 형에게 편지를 썼다. 앞으로는 저축을 보내지 않고 남아공 인도인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형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임종에 가까와서야 사과의 편지를 썼다. 그가 남아공에서 귀국할 때 인도인들이 송별기념으로 준 금붙이에 대해 거류인을 위해 기부했던 것을 아내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이해하게 된 것과 동일했다. 즉 사익이 아닌 조금 더 큰 의미의 가족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간디는 가족이 아닌 신을 위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155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마라"라는 말은 인간의 잘못과 그 사람의 본질(존엄성)을 분리하여 바라보아야 한다는 인류의 오래된 지혜를 담은 명언이다. 이 말은 종교, 철학, 법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지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 말의 유래;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을 성경 구절로 오해하지만, 성경에 정확히 이 문구로 기록된 곳은 없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424년 그의 서한(Letter 211)에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되, 그들의 흠결은 미워하라(Cum dilectione hominum et odio vitiorum)"라고 표현한 것이 원형으로 꼽힙니다.
* 마하트마 간디: 현대에 이 문장을 널리 알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간디는 1929년 그의 자서전에서 "죄를 미워하는 것은 좋으나, 죄인을 미워하는 것은 신을 미워하는 것과 같다"라며 비폭력 저항 운동(사티아그라하)의 핵심 사상으로 삼았습니다.
2. 철학적·인간 중심적 의미
* 행동과 인격의 분리: 인간은 누구나 환경적 요인, 순간의 어리석음, 혹은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죄(잘못)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 격언은 그가 저지른 '악행'은 단호히 심판하고 미워해야 하지만, 그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존재 자체'까지 악으로 규정하여 증오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 교화와 구원의 가능성: 인간을 원천적인 악인으로 낙인찍어 버리면 변화와 반성의 기회를 박탈하게 됩니다. 죄인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을 덮어주자는 방종이 아니라, 그가 반성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교화)을 열어두자는 인도주의적 관점입니다.
3. 현대 사회에서의 딜레마; 현대 사회, 특히 강력 범죄나 흉악 범죄를 마주할 때 이 격언은 종종 거센 비판과 논쟁의 중심에 선다.
* 피해자의 고통 외면: 범죄로 인해 삶이 파탄 난 피해자와 유가족의 입장에서는 죄와 죄인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사법 정의가 피해자의 감정을 충분히 치유하지 못할 때, 이 말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위선적인 말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 정의와 자비의 균형: 법학에서는 이 개념을 받아들여 가해자에게 감정적인 보복을 가하는 대신, 법에 명시된 정당한 처벌(정의)을 내리되 복역 후 사회 복귀(자비)를 돕는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노력합니다.
이 말은 결코 "죄를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엄격하게 책임을 묻되(죄를 미워함), 그 과정이 맹목적인 증오나 사적인 보복으로 흘러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다짐에 가깝다. 정의를 실현하는 순간에도 우리 내면의 인간다움과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무거운 경구다. 159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가 창시하고 실천한 비폭력 저항 운동의 철학이자 실천 방법이다. 이 단어는 산스크리트어의 두 단어가 결합한 것이다. 사티아(Satya): '진리' 또는 '진실'을 의미 + 아그라하(Agraha): '붙잡음', '고수', '열망'을 의미. 따라서 사티아그라하를 직역하면 '진리에 대한 고수' 또는 '진리의 힘(Truth-Force)'이라는 뜻이 된다.
1. 핵심 철학; 간디에게 진리는 궁극적인 실재이자 신의 다른 이름이었다. 사티아그라하는 단순한 정치적 투쟁 수단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도덕적·영적 원칙에 기반한 세계관이다.
* 철저한 비폭력 (아힘사, Ahimsa): 사티아그라하는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말이나 생각의 폭력까지도 철저히 배제합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 그리고 스스로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상대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 행위와 행위자의 분리: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마라"*라는 말처럼, 사티아그라하는 상대방을 타도해야 할 '적'이 아니라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는 인간'으로 본다. 상대방을 굴복시키거나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각성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것입니다.
* 고통의 자발적 감내: 사티아그라하를 실천하는 사람(사티아그라히)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대신, 투옥, 단식, 폭행을 당하는 등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억압자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2. 사티아그라하 vs 소극적 저항 (Passive Resistance); 간디는 서구에서 말하는 '소극적 저항(적극적 대항 능력이 없어 마지못해 부당함에 따르지 않는 것)'과 사티아그라하를 엄격히 구분했다.
| 비교 항목 | 소극적 저항 (Passive Resistance) | 사티아그라하 (Satyagraha) |
| 행동의 주체 | 약자들의 무기 (무력이 없을 때 선택함) | 강자들의 무기 (엄청난 영적·도덕적 용기가 필요함) |
| 폭력의 가능성 | 기회가 오면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음 |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을 절대 금지함 |
| 내면의 감정 | 상대방에 대한 증오나 적개심이 섞여 있음 | 오직 사랑과 선의에만 뿌리를 둠 |
3. 역사적 영향과 유산; 간디는 1906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도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정책에 맞서기 위해 사티아그라하를 처음으로 고안하고 실행했다. 이후 인도로 돌아와 영국 식민 지배에 맞선 인도 독립 운동의 거대한 원동력으로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역사적 캠페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 참파란 사티아그라하 (1917년): 인디고(남색 염료) 강제 재배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인도의 본토에서 벌인 간디의 첫 대규모 농민 운동입니다.
* 소금 행진 (1930년): 영국의 소금 독점법에 저항하여 약 390km를 걸었던 이 행진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영국령 인도 정부의 근간을 흔들었습니다.
4. 세계적인 확산; 사티아그라하는 20세기 전 세계의 수많은 민권 운동과 자유 투쟁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간디의 '진리의 힘'을 받아들인 대표적인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Dr. Martin Luther King Jr.) 목사
*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별) 철폐를 이끈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대통령
*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의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 의장
요약하자면, 사티아그라하는 "진리와 정의에는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이 있으며, 도덕적인 개인은 단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고 오직 불의에 협조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거대한 권력의 억압을 이겨낼 수 있다"는 평화적 저항의 극치다. 181
마하트마 간디가 1918년 인도 아흐메다바드(Ahmedabad) 방직공장 파업을 해결한 결정적인 방법은 자신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사티아그라하)'과 중재를 통한 타협이었다. 이 사건은 간디가 인도 정치 무대에서 감행한 첫 번째 정치적 단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1. 사건의 배경: 임금 삭감 갈등
.1917년 아흐메다바드에 페스트(흑사병)가 유행하자,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임금의 최대 80%에 달하는 '페스트 보너스'를 지급했습니다.
. 전염병이 잠잠해진 1918년 초 공장주들이 이 보너스를 일방적으로 중단하려 하자,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살인적인 물가상승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격렬히 반발했습니다.
. 노동자들은 50%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으나 공장주들은 20%만 제안했고, 결국 대규모 파업으로 이어졌습니다.
2. 간디의 중재와 임금 요구액 조정; 공장주와 노동자 양측의 신뢰를 모두 받고 있던 간디는 중재자로 나섰다.
그는 양측의 입장을 면밀히 검토한 후 물가상승률과 공장주의 이익을 모두 고려해 "35% 임금 인상"이라는 합리적인 타협안을 제시하고 노동자들에게 비폭력 파업을 지속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3. 해결의 열쇠: 비폭력을 위한 '단식 투쟁'. 파업이 2주 이상 장기화되면서 생계가 막막해진 노동자들 사이에서 대열이 흔들리고 폭력적인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간디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무기한 단식을 선언했다.
• 노동자들을 향한 경고: 비폭력(아힘사)과 사티아그라하(진리 파지)의 정신을 잃고 폭력을 쓰거나 사기가 꺾인 노동자들의 연대감을 다시 결속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 공장주를 향한 도덕적 압박: 간디는 공장주들과도 두터운 친분이 있었기에, 존경받는 지도자인 그가 굶어 죽어가는 모습은 공장주들에게 엄청난 심리적·도덕적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4. 결과: 사흘 만의 타협과 극적 타결. 간디가 단식을 시작하자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간디의 건강을 염려한 공장주들은 결국 한발 물러섰고, 노동자들 역시 평화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단식 사흘째(3일) 되는 날, 공장주들은 간디가 제시했던 '35% 임금 인상'안을 전격 수용했고, 파업은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인도 노동 운동 역사에서 노동자와 자본가가 폭력이 아닌 도덕적 각성과 평화적 중재(중재위원회 구성)를 통해 갈등을 해결한 기념비적인 선례가 되었습니다.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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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
현대사의 조명탄 간디 *함석헌 35; 옮긴이의 말 47; 머리말 49
1 성장의 시간
2 어둠의 땅 , 남아프리카
3 나의 일은 인도에 있다
4 사티아그라하, 끝없는 진리의 실험
5 구원과 투쟁, 다시 민중 속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