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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스데반 황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 23:1-10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의 세 친구들은 결국 전통과 초등 학문과 세상 철학과 신비주의 및 인본주의, 그리고 인간 체험에 근거한 지혜로 복음의 사람 욥을 공격하였지만 욥은 복음의 지혜에 굳게 서서 주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함과 정직함, 그리고 경외함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 친구의 간교한 미혹에 악한 충동을 받는 대신에 믿음으로 대항하면서 주 하나님께 충성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심지어 욥은 소발이 그가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고 정죄하며 저주하는 것을 듣고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현실에서 그들의 인과응보 원리가 전혀 맞지 않는 증거들을 제시했습니다. 즉, 욥은 의인도 억울한 고난을 당한 채 인생을 마무리할 때가 있고, 악인도 죽는 날까지 형통한 채 인생을 마무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러자 소발은 그의 논리와 주장이 송두리째 무너진 것을 느끼며 다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의인도 없으며 따라서 자신에게도 중보자가 필요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보자는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죄 사함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를 얻도록 하는 대속자라는 사실까지 깨닫게 되면서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담은 복음을 언급했습니다.
[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3-26)
이처럼 욥은 자신의 믿음의 온전함을 주장하며 그의 의가 되시는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합니다. 그는 정경 66권 전체를 가진 우리처럼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하신 대제사장의 복음을 정확하고 정교하게 고백하지는 못했지만 구약의 초기 시대에 이 정도의 복음적인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성령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욥에게 함께 하신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욥의 변론이 끝나자 곧바로 엘리바스가 그의 마지막 발언을 합니다. 이 공격이 그의 마지막 공격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빌닷이 매우 짧은 마지막 공격을 가함으로 세 친구의 공격은 멈추게 됩니다.
자, 엘리바스가 떠들기 시작합니다. 그는 욥이 무서운 죄악을 저질렀다고 확신하고 욥의 죄목을 열거하기 시작합니다. 마귀에게 조종 당하는 사람의 특징은 아무런 근거없이 선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근거 없는 오해와 추측으로 욥을 마구 정죄한 뒤 있지도 않은 그의 죄악을 나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해의 늪에 빠지지 않기 바랍니다. 증거가 없으면 아직은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기 바랍니다. 수군거리는 말을 듣고 내 멋대로 소설을 쓰지 않기 바랍니다. 한 사람의 오해와 헛된 소문으로 한 가정이 무너질 수 있고 거룩한 교회가 무너질 수 있으며 심지어 한 나라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오해는 마귀에게 조종 당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어리석음 중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오해라는 것도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랑은 신뢰입니다. 끝까지 오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욥을 오해한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노골적으로 욥을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를 지었다. 사람의 선한 행동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있느냐? 사람의 지혜가 하나님께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느냐?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되겠느냐? 네 행위가 온전한들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있겠느냐?”(참조, 욥 22:1-3)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시겠느냐? 그것이 아니라 네가 이렇게 고통 당하고 저주스런 재앙을 당하게 된 것은 네 죄악이 극히 크고 끝이 없기 때문이다”(참조, 욥 22:4-5).
그리고 엘리바스는 욥의 죄악을 매우 구체적으로 나열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엘리바스가 나열한 죄악들은 한결같이 거짓말들이었습니다. 엘리바스가 상상 속에서 지어낸 거짓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마치 실제로 욥이 죄를 지은 것처럼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망상에 빠진 이유는 교만과 미움과 질투에 속아서 욥을 비판하려다 보니 결국 자신의 상상 속의 오해를 실제처럼 착각하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리석은 악인들은 거짓말을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자기가 한 거짓말을 사실로 착각합니다. 지금 엘리바스가 이런 증상에 빠져 있습니다. 이는 마귀에게 조종 당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자, 엘리바스가 스스로 망상에 빠진 채 확신에 차서 떠드는 거짓말을 들어봅시다. 그는 욥의 죄목을 조목조목 열거합니다. 그 죄목들은 욥이 권력과 재력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다는 것입니다.
“너 욥, 너는 전당포를 운영하며 가난한 자들의 형제까지 볼모로 잡고 헐벗은 자들로부터 옷마저 빼앗았지. 너는 가난한 자들을 발가벗겨 거지를 만들었어. 자네는 참으로 인색하고 무정하고 잔인한 사람일세. 자네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지 아니하였고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어. 자네는 자네가 누리던 권세로 남의 토지를 빼앗았고 남의 등을 쳐서 착취하여 부자가 되었지! 자네가 누렸던 부귀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어서 쌓아 놓은 것이었어!”(참조, 욥 22:6-9).
이렇게 확신하며 욥의 죄악들을 나열한 후 그는 증거를 댑니다. 그 증거는 욥이 하늘의 재앙을 당해 망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었느니라”(욥 22:10-11).
이렇게 있지도 않은 죄악을 조목조목 나열한 엘리바스는 이제 욥이 한 말을 가지고 공격합니다. 아마도 엘리바스를 비롯한 이 세 친구에게 가장 타격을 준 욥의 말은 그들의 허접한 신학 논리를 허무는 현실적인 증거를 담은 말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욥이 소발과의 대화에서 강력하게 발언한 말은 엘리바스와 그의 친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첫째는 욥기 12장 6-10절입니다.
[
6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7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8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10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욥 12:6-9)
즉, 욥의 주장은 악인이 이 세상에서는 형통하기도 하고 거꾸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하게 살아가는 의인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 재앙을 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은 인간의 지혜와 논리로 파악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소발과의 두 번째 대화에서 욥은 세 친구의 허접한 신학 논리를 무너뜨리는 강 펀치를 날렸습니다.
[
7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8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9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10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11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12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13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14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15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16 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
](욥 21:7-16)
엘리바스는 이런 강 펀치를 맞은 후 약이 바짝 오른 상태에서 욥이 한 말을 기가 막히게 왜곡시켜서 공격합니다.
[
12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 별이 얼마나 높은가
13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14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15 네가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16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터는 강물로 말미암아 함몰되었느니라
17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18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
19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죄 없는 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20 우리의 원수가 망하였고 그들의 남은 것을 불이 삼켰느니라 하리라
](욥 22:12-20)
엘리바스는 욥이 악인을 비난하며 한 말을 욥이 한 말로 오해하고 억지를 부리며 공격합니다. 어쩌면 오해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오해한 것처럼 말했을 것입니다. 욥은 21장 15절에서 “악인이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마치 그 말을 욥의 주장이라고 밀어붙이며 공격한 것입니다.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욥 22:13),
즉,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을 가리켜 인간의 일을 인식하지 못하시는 분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욥은 하나님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하는 것은 악인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욥 21:15).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욥이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악인의 길은 반드시 멸망이라! 악인들은 반드시 망한다”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터는 강물로 말미암아 함몰되었느니라”(욥 22:16).
엘리바스의 또 다른 공격은 더욱 악한 데, 그것은 욥이 악인을 빗대어 말한 것에 더하여 욥이 실제로 말한 것을 섞어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욥을 악인으로 만듭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욥 22:17-18).
이는 욥이 말한 진의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을 욥이 말한 것처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일은 정확하게 뱀이 하와를 미혹할 때 한 짓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를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창 2:17)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 바꾸기는 예수님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한 짓이었습니다.
[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이것이 예수님의 진의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의를 제자들은 정확히 알게 됩니다. */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 2:13-22)
하지만 유대인들은 미움과 증오 속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사람들도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되 가장 크게 왜곡시킵니다.
[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막 14:55-59)
훗날 유대인들은 스데반 집사를 죽이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 6:10-15)
엘리바스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나온 이러한 간교함은 오직 어둠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이단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즉, 그들은 단편적인 진리와 자기들이 지어낸 거짓을 섞어서 자기들의 어둠을 믿도록 만듭니다. 그것이 지금 엘리바스가 복음의 사람 욥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한 가장 간교하고 악한 방법인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말합니다.
“너 욥아, 너는 하나님을 대항하고도 삶의 축복을 누리고 삶의 안정을 얻는 악인이 있다고 했지? 그런 사람은 얼마나 악인이겠느냐? 그런데 그러한 악인이 누군지 알겠어? 바로 너 욥이야! 바로 네가 그러한 자와 똑 같은 놈이야. 너는 이들이 안전하다 하지만 내가 보니 바로 이렇게 말하는 자들마다 너처럼 망했다.”
이렇게 욥을 공격한 엘리바스는 자기 의와 지식을 드러내는 상투적이고 종교적인 충고를 남긴 후에 말을 맺습니다.
“악인 욥아! 이제 하나님과 다투지 말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자네가 다시 복을 받을 게야.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 돌아가게. 그리고 자네 악행을 당장 버리고 자네 장막에서의 불의도 끊어 버리게. 재물에 대한 탐심을 철저하게 버리고 보화를 티끌로 여기며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처럼 여기게.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실 것이야. 그러면 자네는 전능자를 기뻐하며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게 될 것일세. 그 후 자네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일세. 그러면 자네가 서원한 것을 갚으면 되는 것이야. 그 다음에는 자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자네 길에 빛이 비칠 것이야. 이제부터 사람들이 자네를 낮추거든 그저 내가 너무 교만했다고 말하게. 그러면 하나님께서 겸손을 보이는 자네를 구원하실 걸세. 비록 자네가 많은 죄악을 지었더라도 내 말을 듣고 죄를 고백하고 죄악을 버리고 겸손하게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일세. 하지만 이런 회복을 위해서는 자네 손이 깨끗해야 한다네. 그래야 건지심을 받을 수 있어. 그러니 당장 자네가 범한 더러운 죄악들을 고백하고 회개하란 말일세!”
엘리바스는 욥을 오해한 상태에서 끝까지 상투적인 허접한 신학으로 욥을 회유합니다. 어떻게 이리도 위선적이고 악하고 교만하고 완고한지요!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리에 서서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을 정죄하고 그의 말을 왜곡시키고 윽박지르고 회유하는 간교함을 보이는 엘리바스! 그는 위선적인 거짓 신앙을 보여주는 가짜 신자로서 복음을 전혀 모르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바스의 말에는 하나님과 화목하는데 있어서 중보자에 대한 필요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고 바꾸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절대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부패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을 고쳐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신학은 그저 실체가 없는 엉터리 신학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과의 화목의 길을 벌써 찾았습니다. 그는 중보자이시며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봅니다. 그분만이 부패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알고 그분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대속자이신 중보자 안에서 욥은 하나님과 화목하고자 합니다. 욥은 알고 있습니다. 그 길 외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자,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바울의 삶을 기억해 봅시다. 그때 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주께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고 옥에 가두던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참된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8-10).
이렇게 끔찍한 엘리바스의 간교한 말을 다 들은 욥이 대답합니다. 욥기 23장입니다.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우리는 욥기에서 ‘원망’ 또는 ‘반항’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 (시히)를 앞에서 다루었습니다. 즉, (시히)는 짜증이나 분노가 담긴 불평불만의 원망인 (라간) 또는 (이자프)와는 그 의미가 크게 다른 것을 확인했습니다. (시히)는 뭔가를 어쩔 수 없이 골똘히 생각하는 상태로서 ‘묵상’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염려’로도 번역되며 ‘원망’으로도 번역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원망’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끝없는 고민과 근심을 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태에서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02편 1절은 (시히)를 ‘부르짖음’으로 번역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욥기에서 (시히)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쓰인 곳은 9장 27절, 10장 1절, 그리고 오늘 본문인 21장 4절, 그리고 23장 2절, 이렇게 네 번 나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즉,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너무나 가혹하게 다루심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시히) 상태에 있게 되었고 그래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시히) 상태에서 고민하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답변을 간절히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욥 23:3, 8-9, 4-5)
욥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 나의 진심과 행동에 대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보고 싶구나.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싶으며 또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명할 말을 늘어 놓고 싶구나. 하나님과 만나서 대화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나를 정당화 시킬 수 있고 하나님께 나를 이해 시킬 수 있을 텐데. 그때 하나님께서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이 있다면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을 텐데!”
그리고 갑자기 욥은 대속자 중보자를 기억하며 외칩니다.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욥 23:6-7).
“거기서는”은 중보자가 계신 하늘 법정입니다. 그곳에서는 믿음에 온전하고 정직한 자가 하나님과 변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욥은 거기에서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고 외칩니다. 이는 오직 중보자에 대한 욥의 믿음이 의롭다 함을 얻는 복음인 것입니다. 즉, 지금 욥은 그의 죄 문제가 대속자로 인하여 해결될 것을 확신하고 외친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조금도 의심할 필요없이, 또한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지금 당장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어디서 하나님을 당장 만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공의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살아계신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은 나의 죗값을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치러주셨고 나아가 그의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 14:5-7)
그러므로 누구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때에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무한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로 가지 않는 자들은 누구든지 예외 없이 멸망을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그러면 욥은 어떻게 그의 구원을 이토록 확신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고난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중보자요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보며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소망을 버리지 않고 그를 신뢰하리라 이 소망이 (또는 이 믿음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욥 13:15-16, 스데반 황 역)
이처럼 욥은 하나님이 그의 믿음과 소망을 보시고 그를 인정하고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이미 신앙으로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욥의 확신입니다. 이러한 확신을 위해 욥은 기도로 주의 약속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작은 허물에 대한 모든 용서 역시 그가 드려온 번제가 상징하는 중보자로 인해 가능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번제에 대해 믿었고 나아가 중보자를 마련해 주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진실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욥 16:19)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3-26).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 19:27).
이러한 복음 안에서 욥은 욥기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놀라운 깨달음을 또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성화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신자는 고난 가운데 믿음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순금 같이 온전한 자로 나오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욥은 지금 자신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는 그분만이 아시는 귀한 뜻이 있음을 철저하게 믿습니다.
[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 23:13-14)
그리고 욥은 믿음의 절정에 이른 상태에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삶에는 많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주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정하신 것들이다. 그리고 그분이 정하신 뜻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내 계획, 내 생각, 내 뜻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 뜻과는 달라도 하나님 계획, 하나님 생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은 나의 생각보다 훨씬 높고 크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되지 않는 (시히) 상황 속에서도 그 분의 주권에 나를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
40: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사 40:13-14; 사 55:8-11)
이처럼 내 뜻을 하나님께 관철 시키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임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마침내 반드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의 원칙에 따라 주의 음성, 곧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신자들이 참된 자유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복된 비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뜻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 뜻을 하나님 앞에서 관철시키기 위해 기도의 열심을 내거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설득하고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지금 벌어지는 사건 및 상황이 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주의 크신 뜻이 있을 줄 믿고 불평보다는 인내로, 그리고 감사로 이 모든 환경과 사건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시히)의 상황에서 참고 인내하며 믿음의 온전함을 지키렵니다. 도와주소서”라는 마음 자세입니다.
그리하면 욥의 고백처럼 고난의 상황에서, 억울한 (시히)의 상황에서 순금 같이 되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분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너무나 값진 보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이를 위해 (시히) 상태에서 더욱 주의 걸음을 따라야 하며 마음을 정하고 다른 길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더욱 주의 명령을 지키고 주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귀히 여겨야 합니다.
[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욥 23:11-12)
이렇게 믿음으로 인한 엄청난 신앙 고백을 외친 욥은 24장에서 다시 고통이 진행되는 현실을 바라봅니다. 현실은 아직 바뀐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다룬 24장을 요약하면, 욥은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불의를 해결하지 않으시는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반드시 하나님은 악인들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어찌하여 전능자는 공의로운 심판의 때를 지금 당장 나타내지 않으시는가 그를 아는 자들이 어느 때까지 그 날을 보기를 바라며 기다려야 하는가!”
그러면서 욥은 악인들의 삶은 거품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의 모든 소유는 그들의 죄악의 증거들이요 저주의 증거들일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뭄과 더위가 흰 눈을 물로 만들고 나아가 그 물마저 마르게 하는 것처럼, 이러한 악한 자들은 그 존재마저 어느 날 ‘신속히’ 사라질 것입니다. 즉, 죽음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이 세상에서 강해 보일 지라도 순식간에 죽음과 함께 멸망할 것이요 곡식의 겨같이 잘려 날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주의 공의로운 심판이 이르기까지는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는 부조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어느새 죽음을 지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욥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더욱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그의 영의 도우심으로 죄를 멀리하며 의로운 삶과 성품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우리 주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욥처럼 순금 같은 신자들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5-9)
오늘도 부조리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낙담하거나 (시히) 상태에서 시험에 들지 마시고 어떤 상황에서든 계속 인내함으로 믿음의 경주를 힘차게 달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