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창시절이나 군생활동안 체벌은 일상이었고 요즘 기준으로 하면 가혹행위 수준이었다.
가장 단순한 것으로 엎드려 뻗치는 자세이다.
물론 여기에서 변형된 깍지를 낀다든지 팔굽혀 펴기를 하는 것은 일반적인 수준이었고
공간이나 상황에 따라 선착순, 한강철교, 김밥말이, 원산폭격 등이 있었다.
야간 취침시간에 불려나가 연병장을 도는 빵빠레도 마찬가지다.
자다 일어나 집합하는것만큼 무서운게 또 없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팬티바람으로 집합이다.
그리고 연병장을 계속해서 돌기 시작한다. 단, 그냥 도는게 아니라 말 그대로 돌면서 돌아야 한다.
앉아서 재주를 넘으면서 굴러가야 하는것이다.
연병장을 두바퀴 정도만 돌아도 구역질이 나오고,
나중엔 굴러가는게 아니라 지구를 떠받쳐 드는 듯한 기분이 난다.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의 방중을 성사시키면서 핑퐁외교를 이끌었던,
월남전의 파리 평화회의 공로로 북베트남의 레둑토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던(래둑토는 거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리한 북진이 오히려
중국의 개입을 불러와 한반도 통일의 기회를 놓쳤다는, 다소 대담한 분석을 내놨다.
키신저 전 장관은 최근 펴낸 저서 ‘세계질서’(World Order)에서
“미군이 한반도의 가장 좁은 목인 평양-원산 라인에서 진격을 멈췄으면
북한 전쟁수행 능력의 대부분을 궤멸시키고 북한 인구의 90%를 흡수해
통일 한국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며 이같은 평가를 내렸다.
미군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을 넘어 북진,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으나 위기의식을 느낀 당시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세가 바뀌었다.
키신저 전 장관에 따르면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은 당시 중공군을 총지휘하고 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미군이 평양-원산에서 멈춘다면 중국은 당장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키신저 전 장관은 “그러나 마오쩌둥은 미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이를 중국에 대한
‘봉쇄’전략으로 인식하고 군사개입을 결정했다”며 당시 미국이 보다 전략적인 사고를 하지 못했음을 시인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38선 이북으로 미군이 진격해도 중국이 개입할 수 없을 것이며
설사 개입하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넌 100만명의 중공군은 미 해병 1사단을 궤멸 직전으로 몰아가는 등
그의 판단을 벗어난 위력을 보였다.
수세에 몰린 맥아더 장군은 만주에 20여발의 핵폭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소련의 보복 핵공격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됐다.
위의 기사를 보면서 원산폭격이라는 체벌이 생각났다.
원산은 한반도의 중요한 요충지였고 송도원 해수욕장 등이 있는 명승지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원산은 핵개발기지였다고 한다.
원산은 천연자원이 풍부해 군수물자생산에 최적의 기지였는데다가
전세계에서도 질좋고 풍부한 우라늄등 광산자원이 넘쳐 군수전략기지로 최적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좋은 조건을 갖춘 원산에 핵개발기지를 세웠고 많은 군사시설을 투자했고.
미군이 후퇴때 이 기지가 북한으로 통째로넘어가면 위험하다고 판단 엄청난 포격으로 초토화시켰던 곳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원산폭격이다.
그래서 체벌의 명칭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한여름에 원산폭격 얼차려를 받다보면 땀이 흘러 눈으로 들어가 따끔거렸고
모기의 공격에도 속수무책이었다.
열중쉬어 자세에서 손이 풀어지면 엉덩이를 발로 차였고 고주백이(죽은 나무 밑동과 뿌리 부분)
처럼 넘어가야 했다.
역사는 가정이 없다.
설령 가정을 한다해도 이런 걸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