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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에즈라가 율법서를 펴고 주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느헤미야기의 말씀 8,1-4ㄱ.5-6.7ㄴ-12>
그 무렵
1 온 백성이 일제히 ‘물 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
2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룻날이었다.
3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4 율법 학자 에즈라는 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
5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6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7 그러자 레위인들이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 주었다.
백성은 그대로 서 있었다.
8 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9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10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11 레위인들도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며 온 백성을 진정시켰다.
12 온 백성은 자기들에게 선포된 말씀을 알아들었으므로, 가서 먹고 마시고 몫을 나누어 보내며 크게 기뻐하였다.
✠ 복음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1-12>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거절당하면 더 좋은 이유: 평화가 되돌아오기에>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여러 가지로 당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은 특별히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묵상해보겠습니다.
평화를 전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과 평화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기쁜 소식이 그것을 전한 사람에게 되돌아옵니다.
이 말은 기쁨과 평화가 곧 행복인데 기쁨과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전하는 사람은 더 평화롭고 기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많은 사람이 받아들여 회개할 때 더 기쁘지 않을까요?
어떻게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더 평화롭고 기쁠까요?
전에 들었던 것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성 프란치스코가 행복에 대해 한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형제여,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가?
잘 먹고 마시는 것?
혹은 감명 깊은 설교로 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
그런 것이 아니라네.
내가 어느 집 문을 두드려 그 집 주인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좀 주시오.’라고 할 때 그 사람이 나를 문전박대하면 그것이 행복이라네.
그러면 나는 문을 다시 두드려 똑같이 청한다네.
그러면 그 사람은 나에게 구정물을 퍼부을 것이라네.
이것이 행복이라네.
그러면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청한다네.
그러면 그 사람이 몽둥이로 나를 때리겠지.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네.”
그때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내가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면 그것이 기쁨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은 오히려 복음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 멸시와 모욕, 고통을 당할 때가 더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아, 그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해서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습니다.
대학 1학년 때 무턱대고 돈을 벌어보겠다고 용역회사에 연락하였습니다.
용역회사에서는 조금 편한 곳으로 경험이 없는 저를 배정해 주었습니다.
오전의 일은 비계라고 불리는 공사장 쇠파이프를 나르는 일이었습니다.
긴장되고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사고가 났습니다.
쇠파이프를 들면서 세워져 있는 비계에 제 얼굴이 상처가 난 것입니다.
눈 아래에서 턱까지 길게 상처가 났습니다.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어차피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이라 목장갑이 시뻘게질 때까지 피를 닦아가며 일을 하였습니다.
점심 때 저의 모습을 본 감독은 “아이, 경험자 좀 보내라니까 맨날 이런 초보를 보낸다니까!”라며 용역회사에 투덜댔습니다.
얼굴이 찢겨 피가 나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후에는 지하실로 내려가 물을 퍼내는 일을 혼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벌어본 돈이 5만 원이었습니다.
용역회사에 갔더니 거기에서 만 원을 뺐습니다.
그리고는 연고를 사서 바르라며 2천 원을 다시 주었습니다.
그 상처는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3년은 갔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번 막일을 했습니다.
그러며 저는 평생을 노동 현장에서 돈을 벌어 우리를 가르치셨던 아버지의 노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저는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만약 너무 쉽게 공사장에서 돈을 벌고, 그래서 아버지가 우리를 키우기 위해 받은 고통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그만큼 감사하고 평화롭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 잘 표현된 예수님 수난의 영화를 볼 때는 그 느낌이 더 깊이 다가옵니다.
그때 느끼는 것이 무엇일까요?
‘평화’입니다.
아이의 행복은 부모에게 사랑받는 것에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 좋은 업적을 이뤄냈을 때보다는 그런 업적을 이뤄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확신을 가질 만큼 사랑을 믿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하는 아이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주님은 우리에게 업적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행복은 내가 이뤄내는 성취에 있지 않고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증가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받지 않은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도 복음을 전하며 박해받고 멸시받고 천대받고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되니 마음의 평화가 배가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인들은 주님께 ‘고통과 멸시’를 청했던 것입니다.
행복의 크기는 곧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크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들의 영광이 아닌 고통에 동참해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다 멸시와 고통을 당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나를 향해 가졌던 마음을 알게 되고 그러면 그만큼 평화와 행복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평안에 머무는 길은 그분의 십자가 고통에 머무는 것뿐입니다.
알바니아 예수회 사제인 ‘안톤 룰릭’ 신부님은 서품을 받자마자 공산정권에 의해 평생 감옥에서 모진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해 성탄절 밤에 그분은 당신의 고통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추운 겨울 맨몸으로 매달려 구타를 당하여 울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 오셨음을 깨닫고 큰 위로와 평화, 기쁨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첫해 성탄절의 체험이 40년이 넘는 동안 감옥살이를 기쁘게 견뎌낼 힘을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다니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조금이라도 체험해 본 것이 참 행복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이해하는 마중물이 될 때만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고통의 깊이는 그것이 만약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면 행복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행복을 전합시다.
그리고 거부당하고 멸시당하고 무시당할 때 기뻐합시다.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말과 행동 지켜주시고 온갖 악 피하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혀 삼가토록 보살피시어 시비에 말려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 눈 조심토록 지켜 주시어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성무일도의 찬미가 일부입니다.
온갖 악을 물리쳐 이겨야 하고, 헛됨에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몰라서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의지가 약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큰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고 하시며 헛됨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넉넉해야 무슨 일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여장을 꾸리고 인사치레를 하는 것에, 그리고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이를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락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파견받는 제자는 파견된 곳에 전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소돔이나 띠로, 시돈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하느님의 저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경고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결국 그 지역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파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헛된 것에 빠지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시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나 없이 나를 내신 하느님께서는 나 없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도 자칫 그릇된 신심에 빠져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중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은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삶은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주장에 빠지는 그들에게는 겸손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치가 없고,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분열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받을 것입니다.”
(집회 15,17)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에서든지 생명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저 주면 주는 대로 기쁜 얼굴로 감사하며 먹어야겠습니다>
제자 선발과 교육을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목 실습 현장으로 파견하십니다.
마지막 특별 훈화 말씀에는 복음 선포자가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와 사명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단은 12 사도뿐만 아니라 72 제자까지 꽤 수효가 많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로 치면 12 사도는 주교단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72 제자는 사제단에 가깝습니다.
교부들은 바르나바라든지 소스테네스, 마티아, 타대오 등이 72 제자단에 포함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 선포자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루카복음 10장 2절)
또한 언제나 지체없이 길 떠나야 하는 복음 선포자는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제자들은 돈이나 물건에 신경쓰지 말고 언제나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며 복음 선포에만 전념하라는 당부입니다.
말씀 선포자는 절대 장사꾼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자들은 평화를 전하는 사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단 평화를 비는 인사는 아버지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평화의 자녀들만이 그 인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정말이지 특별한 당부가 이어집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사를 나누는 마음까지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선포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방해되는 인사치레를 삼가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명이 떨어졌을 때는 거기에 최우선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복음 선포자는 어딜 가든 절대로 민폐 끼치지 말 것을 부탁하십니다.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주는 음식을 먹어라.”
복음 선포자들은 어딜 가든 신중하고 조신하게 처신해야 됩니다.
얻어 드시는 주제에 짜니 맵니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남의 집에 가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저 주면 주는 대로 기쁜 얼굴로 감사하며 먹어야겠습니다.
안주면 안 주는 대로, 그러려니 하고 다른 고을로 발길을 돌려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 관상과 활동>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
(시편 1,2-3)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끝날이자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대부분의 성인이 그렇지만 성 예로니모 역시 파란만장한 생애였고, 그 고난과 시련의 와중에도 80세 장수를 누리셨으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시종일관 진리 탐구의 치열한 삶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업적도 놀라울 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제외한 누구도 예로니모 성인과 견줄 사람은 없었다 합니다.
그리하여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인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계속된 성경의 라틴어 번역으로,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 예로니모의 불가타 번역을 공식적인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성 예로니모의 언급에서 보다시피 얼마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말씀 공부에 전념한 삶인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로써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살았던 성인이었습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은 그대로 성 예로니모의 심중을 대변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금보다 순금보다 더욱 값지며, 꿀보다 참꿀보다 더욱 달도다.”
(시편 19,8.9.11)
새삼 주님의 말씀은 인간의 본질이며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원적 답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말씀이야말로 영혼의 식이자 약입니다.
말씀 공부와 실천을 통해 치유되고 주님을 닮아감으로 참나의 실현이요 구원입니다.
그러니 성 예로니모처럼 주님의 제자들은 말씀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교황님께서 미리 발표하신 내년에 있을 ‘세계 통교의 날’ 담화문 주제도 단 한마디, “들어라!(Listen!)”입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교는 말씀과 들음의 종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인 축일을 지낼 때마다 참 많이 배우고 깨닫습니다.
똑같은 성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꽃들처럼 색깔과 향기, 모양과 크기가 다 다릅니다.
성 예로니모는 마치 사막의 선인장처럼 가시가 많은 참 까칠한 성인이었고, 사제가 될 마음이 없었기에 사제로 미사를 드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합니다.
그러나 그의 하느님을 찾는 구도 여정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막에서 5년간의 은수 생활, 말년에는 30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수도 생활에 전념하면서 오직 말씀 탐구에만 전념했습니다.
성인의 방은 십자가와 성경과 외투와 깔판 하나로 참으로 단순한 본질적 삶이었음을 봅니다.
말 그대로 모두로부터 초연한 하느님만으로 충분했던 무소유의 가난한 삶이었습니다.
성덕의 잣대는 열렬한 하느님 향한 사랑입니다.
성 예로니모의 이런 진리 탐구의 열정도 결국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일치인 관상의 친교는 활동의 선교를 통해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복음 선포의 선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요 그에 앞선 관상의 일치입니다.
바로 미사 후의 파견이 이를 입증합니다.
전례와 삶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느헤미야서의 집회 장면은 그대로 미사의 구조인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학자이자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은 온 백성에게 타이릅니다.
다음 말씀은 교회의 미사전례에 참석한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날마다의 오늘이 거룩한 날이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은 우리의 힘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만남의 기쁨으로 인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관상의 일치는 파견을 통해 복음 선포의 활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당신에 앞서 파견하십니다.
친교의 관상과 선교의 활동은 우리 제자들의 영적 삶의 리듬이기도 합니다.
다음 주님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귀한 가르침을 배웁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우리 삶의 자리가 관상과 활동의 복음 선포의 현장입니다.
예나 이제나 영전 전투 치열한 삶의 현장입니다.
이리떼 세상에 양들처럼 파견되는 제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최소한의 간소한 삶과 소유가 아닌 존재의 본질적 삶이 주님의 제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무소유의 정신에서 샘솟는 평화입니다.
정주의 환대를 통해 복음 선포의 삶을 살아가며 수도원을 찾는 이들에게 주님의 평화를 선물하는 우리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형제들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9)
텅 빈 가난한 영혼 안에서 샘솟는 평화입니다.
평화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요 저절로 치유의 구원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들은 말씀의 사람이자 평화의 사람임을, 하느님 나라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기쁨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살아야 합니다.
선교의 활동에 앞서 주님 안에서 공동체의 관상적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 전례에 자주 참여하지 못하드라도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의 관상적 일치를 통해 날로 내적 삶의 깊이를 더해 가면서 이웃과도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나누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 말씀에서 생명의 샘을 찾고 구원의 양식을 얻어, 더욱 풍요한 본질적 깊이의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 말씀을 찾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
(예레 15,16)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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