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신> 수평적 시각의 시 / 임보 (시인)
로메다 님, '봄이 왔는데도 봄 같지 않다' 더니 바로 그런 날씨군요. 남도에는 산수유와 매화꽃이 피고 있다는 화신이 있지만 서울 우이동(牛耳洞) 운수재(韻壽齋) 뜰의 매화는 여린 꽃망울을 움켜쥐고 있을 뿐, 봄비를 맞더니 이제 겨우 몇 개의 꽃망울을 열어 보이는군요.
로메다 님, 우리는 피어나는 꽃이나 혹은 자연의 풍광을 망연히 바라다볼 때가 자주 있습니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수평적 시각이란 주체(관찰자)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의지를 배제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는 자세입니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세계[대상]를 관조하고 완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 즉물적(卽物的) 자세(=즉물시)
대상이 주체의 밖에 존재하는 사물일 경우입니다. 대상을 욕망 실현의 목적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담담히 포착하여 제시하는 태도입니다. 소위 사물시(事物詩)라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사물 자체의 절대적 가치를 존중하려는 것입니다.
[예시 6]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달 안개 물 소리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물 소리
범영루(泛影樓) 뜬 구름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 소리 - 박목월 / 「불국사」 전문
달밤의 불국사 정경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대상을 세속적 가치관에 의해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다. 서술자의 개인적인 감정도 극도로 억제되어 있습니다. 마치 담담한 한 폭의 풍경화를 대한 듯합니다. 이처럼 어떠한 목적 의식도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여 제시한 작품을 즉물시라고 합니다.
나) 즉심적(卽心的) 자세(=즉심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 주체의 내면 세계인 경우입니다. 주체의 심리 상태를 객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적 화자의 심층심리를 그대로 포착하여 표출합니다. 초현실주의에서 시의 기법으로 제시한 소위 '자동기술법'에 의해 생산된 작품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예시 7] 사막의 눈 하얀 갈밭 사이 나비 등을 넘는 구름의 솜 내음 눈빛 자오선을 타고 오는 고향 눈 없는 싸이렌 소리 잔주름 말라리아 바다의 숲 반달 으깨지는 어머니 문 속에 벽 없는 방 까만 먹물 숨 막히는 아침 발가락에 찌걱거린다 - 송상욱 / 「고향」 전문
[예시7]은 어떠한 논리적 질서에도 의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지와 이미지들 사이에 어떠한 인접성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질서한 상념(이미지)들을 그대로 배열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혼돈한 내면 세계를 그대로 기사(記寫)한 작품을 앞의 즉물시에 대하여 상대적으로즉심시라고 명명해 봅니다.
다) 유희적(遊戱的) 자세(=무의미의 시)
유희적 자세는 시 행위를 궁극적으로 말장난―언어의 유희로 보려는 경향입니다. 이러한 작품은 유희 이외의 어떠한 목적 의식도 배제하려고 합니다. 지상적 상황을 의도적으로 깨뜨리어 관습적 의미를 제거함으로써 낯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대상의 형태를 파괴하거나 대상들간의 관습적 관계를 뭉개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뒤엎고 논리를 초월하여 절대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주체의 의도가 작용하기는 하지만 지상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어떤 목적 의식도 없습니다. 소위 무의미의 시, 절대시, 비대상시 등으로 불리는 것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예시 8] 구름 발바닥을 보여다오 풀 발바닥을 보여다오 그대가 바람이라면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를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의 하얀 눈을 보여다오 - 김춘수 「들리는 소리 2」 부분
현실적으로 우리가 접해온 지상적 상황이 아닙니다. 구름과 풀에 발바닥을 붙이고, 별에 겨드랑이를 부여해서 대상을 괴기스럽게 우그러뜨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낯선 사물들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대상과 대상과의 관계도 일상적 논리에 의해 접속되기를 거부합니다. 절대 유일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셈입니다.
로메다 님, 오늘의 얘기도 좀 골치 아픈 내용이지요? 머리를 들어 먼 산을 보십시오. 이제 봄비를 맞았으니 개나리 진달래 등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날 것입니다. 욕심만 버리고 바라본다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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