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로 장르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 축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울타리가 여전히 튼튼함을, 그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즉 멜로 장르는 세계 변혁에의 열망을 키우지도 않고 체제 전복의 불온한 사상을 갖고 있지도 않다. 우리 사회의 보수화에 기여하는 장르가 멜로다.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 세계의 바깥으로 지평선을 넘어가지 않는다. 많은 갈등과 아픔이 있고 시련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체제 내의 고통일 뿐이다. 결국 멜로 장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여전히 안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준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운 미장센이다. 한 컷 한 컷은 매우 뛰어난 미장센으로 정성껏 찍혀져서 때로는 인물들보다 화면구성이 더 돋보이일 정도다. 또 감성적 이야기는 구질구질하게 눈물을 강요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사건을 훑고 지나간다. 9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김영하의 각색 작업 참여는, 영화의 일상성을 회복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생기 있는 연출과 감성에 호소하는 각본은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90년대 말의 대표적 멜로 영화인 [편지]나 [약속]의 뒤를 이어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할 것임을 예고해 준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불치병인 알츠하이머병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름다운 기억을 조금씩 잊어가면서 죽음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수진이의 고통스러움이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수진 역할을 맡은 손예진의 연기에서 결함을 찾아볼 수 있다. 손예진은 단정하고 고전적인 외모와 발랄하고 가벼운 신세대적 분위글 동시에 갖고 있는 배우지만, 수진이의 고통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는 과정에서의 울림 있는 연기는 부족하다. 일상의 발랄함과 자연스러움은 뛰어나게 표현하고 있는 그녀는, 그러나 기억을 잊었다가 다시 회복해가는 과정에서의 가슴 찢어지는 고통스러움을 표현해내는 데는 턱없이 역부족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수진이의 망각/현재의 흔들림에 있다. 가장 가까운 기억인 현재의 남자에 대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옛 남자에 대한 기억만을 갖고 있던 수진이가, 철수의 작업 연장도구를 보고 그를 처음 만나던 때, 그리고 그 뒤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가슴 아픈 장면은, 놀람 이상의 뼈저린 고통이 표현되기보다는 그냥 놀람의 순간으로만 묘사되어 있다.
또 각각 고통스러운 과거를 가진 수진과 철수가, 그들의 상처를 극복해가는 과정이 섬세하게 다루어져 있지 않다. 가령 패션 머칭다이저로 일하는 수진이는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직장 상사인 유부남을 사랑했다가 그에게 버림받고 경찰서까지 끌려갔던 기억을 갖고 있고, 철수는 술집 마담으로 있는,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그러나 수진이의 상처는 흔적이 드러나 있지만, 철수의 상처는 너무 축약되어 있고 비약되어 있다. 철수 어머니 역할을 맡은 김부선의 위치가 애매하다.
또 수진과 철수가 포장마차에서 사귀귀로 하는 순간의 감정 묘사도 비약이 심하다. 우리들은 왜 각각 고통스러운 상처를 갖고 있는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쉽게 서로에게 이끌리게 되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없다.
이재한 감독의 두 번째 작품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미국을 무대로 방황하는 젊은 인생들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표현했던 [컷 런스 딥]과는 다르게, 주류 상업 질서의 틀 안에서 기획되고 생산되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상업적 만남에 실패했지만, [컷 런스 딥]은 감성적인 미장센과 힘있는 내러티브로 재능 있는 젊은 감독의 출현을 신고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재한 감독은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데뷔작의 우울한 풍경은 모두 잊어버린다. 이야기의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해도,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감싸고 있는 것은, 분명히 주류 질서의 회복이다. 그것은 철수를 처음에는 공사장 노가다, 즉 막노동꾼으로 등장시켰다가 곧 건축사 시험에 합격해서 유능한 건축사로 신분 상승시키는 데서 드러난다. 이것은 비판받아야 할 위장적 제스처다. 처음부터 그런 신분계층의 차이를 드러내지 말든가, 그렇지 않으면 계층적 갈등에 대한 적확한 지적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런 계층적 신분적 갈등은 교묘하게 무마되고 감추어져 버린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알츠하이머 병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60이 넘은 노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진 이 병, 흔히 치매라고 알려진 이 병을 앓고 있는 주인공이 이제 막 결혼한 20대의 젊은 신부라는 것도 의외다.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그런 사례의 보고가 있고 가능한 일이아라고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 곁을 떠나는 일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처음으로 눈물 연기를 보여주는 철수 역의 정우성이 보여주는 멜로 연기는, 약간 감상적이고 조금 넘치는 느낌이 있지만 우리들의 시선을 충분히 사로잡을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