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힘을 생각한다.
박래여
수영장에서 친척 형님을 만났다. 정초도 지났고 우연한 만남도 좋아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요즘 대부분 음식점이 저녁 장사는 5시를 넘겨야 한다. 막간을 이용해 가보고 싶었던 관정 이종환 생가로 향했다. 방문객을 위해 문이 열려 있었다. 고향인 용덕면에 이종환 생가를 지을 당시 의령군과 연계되어 말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삼영화학의 총수였던 관정 이종환은 지난해 타개했다. 백 살을 살다 간 인물이다.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을 설립하여 후배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이종환 생가는 고대광실이다. 나무로 지은 기와집은 단장 중이었다. 일꾼 서너 명이 나무기둥과 문살, 서까래에 오일스텐을 바르고 있었다. 집은 크고 웅장했다. 돈이 없으면 지을 수 없는 기와집이었다. 건물에 관심이 없던 나는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 역시 돈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아기자기한 정원을 기대했던 나는 실망을 감출 수 없다. 창덕궁 부용정을 재현했다는 관정헌 정자와 연못, 연못 구석에 떠 있는 배 한 척, 누가 초대받아 저기에서 뱃놀이를 했던 것일까. 연못물은 녹색이었지만 무지갯빛 잉어가 떼를 지어 다녔다.
의령에는 걸쭉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다 열거할 수 없지만 몇 사람을 꼽으라면 삼성 이병철, 삼영 이종환, 백산 안희재, 의병장 곽재우, 고루 이극로, 더불어 숲의 신영복 문학가를 떠올린다. 그들을 생각하며 몇 십, 몇 백, 몇 천 만원을 호가하는 분재와 나무들 숲을 거닐었다. 어떤 분야에서 별이 되는 인물은 의지도 강해야 하지만 도전정신과 미래를 보는 안목도 있어야 가능하다. 또한 인재를 발굴하고 키우고 아우르는 것도 타고난 능력이리라. 관정 이종환, 그는 기부 왕으로 불렸다. 서울 대학에서 세워준 거대한 송덕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개인의 영달이 가문의 영광이 되고 사회에 공헌하는 길을 봤다.
이종환 생가를 나와 솥바위를 바라보며 생선구이 집으로 향했다. 한동안 들리지 않았던 생선구이 집 젊었던 사장의 머릿결이 백발이다. 세월은 눈 깜짝 할 새 간다는 말을 곱씹어 본다. 서비스를 하던 여인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어 반가웠다. 그녀도 나를 안다. 오랜만에 봤지만 나이티도 안 난다며 계속 이 집에 있었냐고 물었다. 7개월 정도 떠났다가 다시 왔단다. 반찬그릇이 비면 푸짐하게 다시 내 오는 인정이 고마웠다. 생선구이와 갈치조림을 시켰다. 싱싱한 생선은 접시가득 수북하게 나오고 도톰한 갈치는 입에 살살 녹는다.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생선을 뜯고 갈치조림을 먹었다. 여전히 맛있었다.
문득 호주 선생님 생각이 난다. 아들이 호주에 갈 때 도움을 주셨던 시인이셨다. 부부가 해외 문학상을 받으러 한국 나오셨을 때 뵈었다. 생선구이 집에서 저녁을 대접했었다. 선생님은 호주에 돌아가서도 이 집 생선구이 맛이 기억난다고 했다. 한국 나오면 또 먹자는 말씀도 하셨지만 다시 뵐 수 없었다. 지금은 한국 나들이도 쉽지 않을 것이고, 마음을 내 고국에 나와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니 촌부인 나를 만나러 오기도 힘드실 것이다. 늘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사는 나를 기억이나 하실까. 선생님 덕에 아들은 호주에서 2년을 생활하다 돌아왔고 남은 학기를 마치고 대안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한지도 몇 년이 지났다. 노인의 길을 걸어가는 나처럼 선생님도 노인으로 살아가고 계실 것이다. 건강하시길 빈다.
어둠살이 내렸다. 생선구이 집을 나서며 모든 사람이 별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은 별이 되어도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 생각하면 불행한 삶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름 없는 촌부로 살아도 행복하다고 했다.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면 행복한 삶이 될 것이다. 불이 켜지는 거리, 별이 반짝이는 자리, 지극히 평범한 삶이 지극히 특별한 삶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형님을 집 앞에 내려드리고 어둠살 깊은 산속 집으로 돌아왔다. 보리가 펄쩍펄쩍 튀어 오르며 반기는 집, 집안에 불을 밝히자 집보다 먼저 숲이 깨어난다. 바람은 외로움을 쓸어내고 불빛은 은은하게 꽃으로 핀다. 자연의 힘은 돈의 힘보다 세고 아름다웠다. 남에게 자랑하고 보이기 위한 집이 아니라 내 애정이 머무는 내 집이기 때문이리라.
202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