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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키리 작전 - 슈타우펜버그 대령
국가와 민족을 파멸로 몰고 가던 히틀러를 제거하려다 희생된
크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대령의 약력과 아쉬운 실패로 끝난
발키리[Valkyrie] 작전을 소개한다.
슈타우펜버그 대령은 이번에 한국을 방문했던 탐 크루즈가
분한 영화의 주인공이다.
슈타우펜버그는 구 독일 제국이 망하지 않았다면 백작으로
불렸을 남부 독일의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부 독일
프랑크후르트 인근 에팅컨의
그리프슈타인성에서 거주했었고 광할한 영지를 소유해왔다.
그는 1907년 이 성에서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둘은 쌍둥이었고 자신도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쌍둥이 형제가 어릴 때 사망해서 혼자 자라게
되었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대령
부상당하기 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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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은 대대로 내려온 독실한 카톨릭 가문이라서 그 역시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는 어릴 시절 문학이나 미술등의 낭만적인 분야를
인생 진로로 생각하고 유명한 시인 스테판 죠르게를 사사하고
시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6년, 일생의 방향을 180도로 돌려 군인이 되기로 하고
사관 후보생으로 군에 입대했다.
승마는 슈타우펜버그의 취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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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그는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임관하였다.
그는 동료들이나 교관으로부터 머리가 비상하고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끄는 매력과 동료들의 갈등을 잘 봉합해주는
탁월한 조정의 능력이 있다는 호평을 받았다.
임관하던 해, 역시 바바리아 지방의 귀족 가문인 니나 폰 레르첸펠트과
약혼하고 1933년 결혼하게 된다.
둘 사이에 아들을 세 명 딸을 두 명 낳게 된다.
슈타인버그가 처형 될 때 니나는 막내딸을 임신하고 있었다.
니나는 집단 수용소에 수용 된 후 출산했다.
1933년은 히틀러의 나치스가 혼란한 독일 정국을 교묘히
파고들어 선거에 의해 정권을 잡은 해였다.
그 뒤 민주 선거는 독일이 패망하고 민주화 될 때까지 다시는 없었다.
히틀러에 의해 독일은 일당 독재국가가 되었고 재무장을 하고
멸망의 전쟁 쪽으로 가게 된다.
슈타우펜버그는 처음에는 재무장을 하고 독일 경제를 살려낸 히틀러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히틀러가 극단적인 일당 독재 쪽으로 흘러가자 서서히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나치스의 강연회에 참석하라는 강요를 받고 참석했다가 중간에 연설장에서 걸어 나가 버려서 그의 나치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하게 들어내기 시작했다.
슈타우펜버그의 유서깊은 귀족 집안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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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슈타우펜버그는 수재 장교들이 입학을 허락받는 독일 베를린의 육군 대학에 입학하여 1938년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위로서 독일 참모본부에 보직되었다.
이미 이 무렵, 과격한 히틀러는 그가 권력의 정상에서 광기의 호전성을 들어낼 무렵부터 군부내에서 그의 제거를 목표를 하는 움직임이 서서히 움트고 있었다.
그 첫 모의 멤버가 독일군 정보 책임자 Hans Oster, 전 독일군 총참모장 Ludwig Beck, 독일군 서부군 사령관 Erwin von Witzleben원수등이었다. 민간인으로서 정치인 출신인 Kreisauer Kreis이 가담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내면을 모르고 전격전으로 폴랜드를 점령했던 그에게 쏱아지는 국민들의 인기와 독일 핵심 군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대화 수준에서 끝나고 말았다. 첫 시도는 전쟁이 독일의 뜻대로 잘 안되어 가던 1941년도에 싹텄다.
한편 슈타우펜버그는 밖으로는 인접국 침략을 밥 먹듯하고 안으로는 유태인들을 탄압하는 히틀러에 대해서 내심 점점 반감을 키워 갔다.
그의 깊은 종교적 신앙이 인명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저열한 민족이라고 유태인과 집시들, 그리고 심지어 점령국 국민들까지도 아무렇게나 죽이는 히틀러를 도저히 용서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유태인 학살이 극에 달해가자 내부의 반감을 히틀러 제거와 나치당 타도를 생각해보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다가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일단 감정을 접고서 6사단 참모 장교로서 폴랜드와 프랑스에서
전개한 주요 작전마다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여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1940년 5월 31일, 그는 모든 독일 군인들이 갈망했던 철십자 훈장[아이언 크로스]을 수여 받았다.
훈장 수여 후 독일 육군의 최고 수뇌부로 전직하게 된다 대소전이 발발하자 그는 병참장교로서 스탈린그라드 전역에 참전한다.
1941년, 히틀러 제거 계획이 대 소련 전선인 동부전선에서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또 다시 싹 트기 시작했다. 주모자는 앞의 정보 장교 Oster중령과 새로 합류한 대소전[바바로사 작전] 최고 사령관인 복크 장군의 참모인Henning von Tresckow대령이었다.
Tresckow 대령은 늦게 참여했지만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는 히틀러 제거를 위한 비밀 조직을 발 빠르게 만들어갔다. 다음 해 1942년 까지 그의 히틀러 제거 음모 조직은 완성이 되었다. 그들이 포섭한 사람 중에 베를린 주둔 부대 사령관 E Olbricht장군이 있었다. 이사람의 포섭은 중요했다. 히틀러의 제거 뒤 계획하고 있던 쿠데타를 위해서 그의 부대 역할이 절실하였다.
그는 포섭 공작의 일환으로 불만이 히틀러에게 불만이 많았던 슈타우펜버그 중령을 포섭했다.
그들은 자주 만나며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정신병자 말살, 그리고 점령지에서의 주민 노예화 정책에 대한 히틀러의 비인도주의에 대해서 불만등을 서로 털어놓으며 교감을 쌓아갔다.
여러가지로 그의 사람됨을 알아본 그는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조직이 있음을 그에게 알려주고 동참을 권고했다.그는 물론 이에 동의 하였다.
히틀러가 하는 짓이 점점 걷잡을 수 없이 광포해지자 슈타우펜버그는 그때 군부에 이미 떠돌기 시작하던 히틀러가 미쳤다는 소문이 맞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는 미친 히틀러의 제거만이 독일 민족을 구할 있다고 믿었다.
1942년 그의 동료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전해져 온다. “그래, 히틀러의 최고 사령부에는 그 짐승 같은 것을 쏴 죽일 인간이 한 명도 없단 말인가!”
그는 그의 동료 장교들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해결책은 그를 죽이는 것인데... 난 그럴 준비가 되어있다고.”
슈타우펜버그는 1943년 중령으로 진급하고 아프리카의 튜니지아 롬멜 아프리카 군단 소속 10 팬저 사단의 작전 장교로서 부임하게 되었다.
1943년 대공세를 취한 연합군의 맹공세로 튜지지아에 있던 독일 10 팬저 사단 사령부를 이전해야만했다.
슈타우펜버그는 사막으로 새로운 사령부 자리를 알아보려 나갔다가 적기의 공습을 받았다.
이 폭격에서 슈타우펜버그는 가까스로 죽음을 비켜냈지만
중상을 입었다. 그는 왼쪽 시력과 오른 쪽 손을 잃었다. 그리고 왼손의 두 손가락도 잃었다.
그가 문헨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는 동안 그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히틀러의 제거를 자신이 스스로 해치우기로 결심하게 된다. 히틀러 제거 계획은 이미 22명의 장군들을 가담자로 확보해 놓은 뒤였다. 한편 1943년 3월 13일,그의 동료 Tresckow 대령은 동부 전선을 방문하고 베를린으로 돌아가던 히틀러의 전용기에 폭발물을 설치했으나 폭발물이 터지지를 않았다.
슈타우펜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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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를 처치하기 위한 실제적인 결행은 슈타우펜버그가 재활 치료를 거의 끝나고 독일 육군 본부에 보직을 받고, 히틀러에 의해서 일찌감치 숙청되었던 벡크 장군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구체적인 안은 히틀러의 암살과 바로 발키리[Valkyrie]전 계획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켜서 게슈타포와 SS부대를 중립화하고 전군을 장악 한 뒤에 군정을 실시하고 연합국에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한다. 이 히틀러 제거와 쿠데타 음모에 가담한 독일군 장군만도 22명이나 되었다.
슈타우펜버그는 일기장에 썼다.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의 양심 앞에 이번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번 거사는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 히틀러는 극단적인 악마이기 때문이다.”
암살 같은 살인 행위를 금지하는 그의 종교적 가르침을 거슬려야 하는 고민이 담겨져 있는 자기 다짐이었다.
1944년 7월 1일 슈타우펜버그는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그리고 예비병으로 구성된 예비군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E Olbricht장군의 군사령관 후임인 Fromm 장군도 이미 히틀러 제거 음모에 묵시적으로 가담한 동지였다. 즉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체 하면서 슈타우펜버그의 거사에 협조했다.
발키리 작전의 이 담당 부대는 베를린 시 중앙에 있는 Bendlerstrasse에 있었다. 부대 건물은 지금도 독일 국방성의제 2청사로 사용하고 있으나 앞 거리는 슈타우펜버그의 거사를기념해서 슈타우펜버그 거리로[ 'Stauffenbergstrasse']명명되었다. 건물안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
이 연병장이 슈타우펜버그 대령이 처형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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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비군은 연합군의 폭격이나 기타 전쟁의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국가가 혼란을 통제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발키리 [Valkyrie]전 계획을 수립해 놓은 상태였다.
이 발키리 작전은 이미 히틀러의 재가가 받은 바 있었다. 히틀러의 암살과 함께 주모자 그룹은 부대는 이 작전 계획을 활용하여 군대를 동원할 예정이었다.
이 자리는 그에게 히틀러에게 브리핑을 할 수 있는, 히틀러 암살을 결행할 수 있는 절호의 보직이었다. 그는 불구가 된 지체 장애자로서 신체 수색을 당하지 않고도 히틀러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가 있었다.
히틀러, 오른쪽이 전후 전범으로 처형된 카이텔 원수
맨 왼쪽이 슈타우펜버그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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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종전의 여러 암살 시도가 실패했던 쓴 경험 때문에 그는 이번에 틀림없이 직접 히틀러를 자기 손으로 처치하기로 했다.
슈타우펜버그는 동프러시아 라스텐부르그의 깊은 숲에 있는 늑대굴[wolfsschanze]이라 불리던 최고 휘소에서 열리던 전시 최고회의에 참석하는 기회로 서류 가방으로 위장한 시한 폭탄을 장치하여 히틀러를 암살하기로 하였다. 히틀러는 전시중 내내 이 늑대굴이라는 곳에 틀어박혀서 수도인 베를린 총통관저에도 잘 오지를 않았었다.
그를 처치 할 곳은 이 늑대 굴뿐이었다. 그는 7월 11일과 7월 15일 거사를 꾀했지만 여의치가 않아 연기했다. 히틀러 암살은 7월 20일 감행되었다. 그는 비행기로 라스텐부르그의 늑대굴로 가서 히틀러를 암살하고 바로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나치스 정부를 타도하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날 그는 계획대로 늑대굴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서 시간을 보낸 뒤 가지고 간 서류 가방 위장 시한 폭탄을 작동시키고 그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안전한 거리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완전 파괴된 회의실. 독일 루프트바페 사령관 괴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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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은 정확히 12시 42분에 폭발하였다. 그러나 슈타우펜버그가 놓아둔 가방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한 옆 사람 하인즈 브란트 대령이 그 가방을 발로 더 옆으로 밀어 놓아 버려 폭탄이 두꺼운 목제 테이블 다리 뒤에서 터졌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 굵은 테이블 다리는 몇 미터 앞의 히틀러를 보호해주었다.
회의실이 대파되고 한사람의 속기사 포함해서 네 사람이 죽고 일곱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러나 정작 목표인 히틀러는 고막이 터지고 좌반신에 화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엉망이 된 히틀러 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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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우펜버그 대령은 들 것에 히틀러의 외투로 덮힌 사람이 운반되어 나오자 그는 히틀러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그의 부관과 함께 즉시 비행장으로 달려가서 하잉켈 111폭격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이제 쿠데타 거사의 깃발만 올리면 되는 순간이었다.
회의장 자리 배치도 1번이 히틀러, 24번이 슈타우펜버그자리
그리고 22번 위 붉은 네모가 폭탄이 있던 자리, 붉은 동그라미들이
폭발로 죽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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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4시 30분에 베를린으로 도착해서 본부로 달려가 보니 거사는커녕 이미 폭발 결과에 대한 정보가 일부 흘러 들어가서 히틀러의 죽음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여러 가담자들이 주저와 불안으로 쿠데타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혼란을 극복하고 발키리 작전을 발령해서 상황을 틀어쥐었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히틀러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이 이미 주모자들 사이에 다 떠돌아서 쿠데타에 등을 돌리거나 배신을 할 준비를 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슈타우펜버그와 벡크 상장, Olbricht장군, 그리고 몇몇의 동조자들은 단지 몇 시간 동안만 베를린을 통제 했을 따름이다. 이미 히틀러가 안 죽었다는 뉴스가 라디오를 타고 전 독일에 퍼진 상태였다.
밤 9시에 쿠데타는 이미 실패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의 중요한 동조자들, Tresckow대령이나 Ouster중령등 몇 명이 이 때부터 자살로 끝을 맺었다.
두 시간 뒤인 11시에 슈타우펜버그는 히틀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바꾸고 그를 체포하러온 Otto Ernst Remer 소령 부대로부터 도주하려다가 성한 한 팔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자정이 넘은 12시 30분에 그는 발 빠르게 배신한 프롬이 급히 개정된 형식적인 군사재판에서 다른 세 명의 주모자와 함께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줄타기를 하다가 역시 처형된 프롬
히틀러가 특별히 인심을 써서
교수형이 아닌 총살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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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의 음모 가담을 감추는 입막음을 위해서였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로 조명한 가운데 집행된 총살 형장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Es lebe unser heiliges Deutschland!- 우리의 신성 독일 만세!-"라고 외쳤다.
프롬이 그렇게 발 빠르게 배신했음에도 독일의 게쉬타포 사령관 히믈러는 프롬을 체포했다.
그리고 그도 역시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으로 독일 군 부내에 대 숙청이 있게 되었다. 무려 7,000명이 체포가 되어서 이중 4,980명이 처형되었다. 그 중에 처형대신 음독을 권유받고 자살했던 에르빈 롬멜 원수도 있다.
처형된 사람 중에 동생의 거사에 가담했던 슈타우펜버그의 형도
있었다.
해군에 몸담고 있었던 전직 법학대학원 교수였던
Berthold Schenk Graf von Stauffenberg였다.
슈타우펜버그의 형 베르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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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증오에 가득 찬 히틀러가 고안해낸 인민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피아노 줄로 목을 묶고 정육점 갈구리에 매달아서 서서히 질식시켜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이 잔인한 처형 방법 역시 히틀러가 고안해서 지시한 것이었다.
슈타우펜버그는 총살당한 후 급히 매장되었지만 SS부대는 그의 유체를 다시 발굴해서 화장해버렸다.
그 매장자리에 기념비만 남아있을 뿐이다.
슈타우펜버그의 부인 니나와 그의 네 자식들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이미 막내딸을 임신했던 니나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서 그 곳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딸을 낳고 길렀다.
슈타우펜버그의 자녀들은 공립 고아원으로 보내져 강제로 슈타우펜버그라는 이름을 빼앗기고 마이스터라는 이름이 대신 주어졌다.
전후에 열린 그의 서거 20주년 추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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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가족들이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연합국에게 독일이 패망한 뒤였다.
기적적으로 가족중 아무도 이 시련을 거치면서 죽지는 않았었다. 슈타우펜버그의 큰 아들은 나중에 서독군이 새로 탄생하자 바로 임관하여 38년간 복무하고 육군 소장으로 은퇴했다.
슈타우펜버그의 장남 베르홀트 슈타우펜버그 소장 . 현재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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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동생 뤼드빅은 역시 변호사 출신으로 지금 유럽[EU]의회의 의원이다.
슈타우펜버그는 갔지만 남은 자식들은 훌륭히 커서 똑똑한 구실들을 했다.
그의 어머니이며 슈타우펜버그 대령의 부인 니나는
2006년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출처 - 야후 블로그
첫댓글 작전명 발키리외에도 독일영화 슈타우펜버그도 있지요
오오 고귀한 자 오오
어떻게 생각해도 히틀러는 뭔가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는...
마침 늑대굴 방문한 무대리가 늑대굴 폭파현장을 둘러보고 입을 못다물었죠.
진짜군요 ;;
퍼가요~ 안되면 자삭하게씀~!
근대 그때 히틀러가 죽어서 종전되었다면 얼마후에 또 3차대전이 일어났을수도 있을거 같내요. 국민적으로는 아직 '독일은 이기고 있다'고 믿고 있었을탠대 그때 국민의'영웅' 히틀러를 암살하고 전쟁을 끝내면 그들은 '민족의 배신자' 취급을 받고 광신적인 나치스가 다시 집권하여 되도 않는 전쟁으로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수도 있죠.. 전쟁 도중에 흐지부지 끝나는 것보다 한번 폭싹 망해서 다시는 전쟁이 없었다더라ㅡ가 좋은 결론인것 같내요.
좋은 글이군요. 퍼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