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원문보기 글쓴이: 선과
서원...조선 선비 양성의 요람
대구, 경북 지역에는 조선의 5대 서원으로 일컫는 풍기 소수서원, 안동 도산서원, 안동 병산서원, 현풍 도동서원, 안강 옥산서원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서원이 분포하고 있다.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은 조선시대 관립교육기관인 향교와 더불어 지방의 양대 교육기관이다. 최초서원은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의 숙수사 자리에 고려 학자 안향을 배향한 백운동 서원으로, 훗날 이황의 건의로 명종이 현판을 하사하여 소수서원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서원은 성리학 연구, 지역의 유능한 젊은 유생의 교육, 성현 배향, 향촌의 질서 유지, 백성 계도, 서적 발간 등이 주요한 기능이다. 이러한 순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쇠퇴하게 되는데, 서원쇠퇴의 주요 원인을 살펴보자. 첫째 서원이 마구잡이로 설립되어 상대적으로 공교육인 향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둘째, 조정에서 부여한 각종 특권을 악용하여 군역과 부역을 피하려는 유생들이 몰려들었다. 셋째, 백성들을 착취하고 횡포를 부리는 일이 허다했다. 마지막으로 당쟁의 온상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정에서는 한 때 서원 설립을 허가제로 운영하다가 흥선대원군 때 서원에 대한 모든 특권을 철폐하기에 이른다. 서원 철폐령으로 전국의 47개 서원만 남기고 그동안 세금이 면제 되었던 서원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켰다.
서원의 가장 악명 높은 폐단을 나타내는 것으로 화양묵패라는 말이 있다. 화양묵패華陽墨牌는 충북 괴산의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는 회양서원의 검은 도장이 날인된 공문서였다. 그러나 화양서원 유생들은 묵패를 세금 고지서처럼 남용하게 되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서원 유지를 위해 군, 현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납부 기한을 명시한 묵패를 발송했다. 기한을 넘기거나 납부하지 않으면 감금,폭행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서원의 부패와 관련 있는 웃지 못 할 이야기는 또 있다. 누구든 어린 시절 부모에게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리가 풍기 소수서원 옆 죽계천에 놓인 청다리이다. 소수서원 유생들과 이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근처에 머물던 계집종 또는 마을 처녀와의 불륜으로 아이기 태어나면 아이를 청다리 아래에 두게 하고 우연히 지나가다가 불쌍한 아이를 거둔 것처럼 길렀다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이 양반전에서 양반의 부패, 무능력, 표리부동한 처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풍자한 것처럼 청다리에 전해오는 민담도 하위 계층의 민초들에게는 작은 카타르시스가 되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단종 복위에 실패한 금성대군, 풍기의 선비들, 그리고 그 가족의 시신을 청다리 밑에 방치하였는데 그 와중에 살아남은 아기를 거두어 기른 아름다운 이야기가 와전되었다는 설도 있다.
향교와 서원은 공통적으로 선현을 배향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목적이지만 향교는 문묘배향을 중시하며, 서원은 강학을 우선시 한다. 그런 까닭에 평지에 위치 할 경우. 향교는 대성전을 전면에 두고 명륜당을 뒷쪽에 배치하는 소위 전묘후학前廟後學 구조이다. 반면에 서원은 강당을 전면에 사묘을 후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가 전형적인 구조이다. 자연스러움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추구하는 우리 선조들은 경사지에 건물을 세울 때에도 절개, 봉토 등의 인위적인 작업을 배제하고 자연환경에 순응하여 친화적인 배치를 고려했다. 향교와 서원은 대부분 경사진 곳에 위치하며 이럴 경우에는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로 조성된다. 또한 향교는 고을 중심에 위치하며, 서원은 배산 임수와 풍수형국을 중요시하여 풍광이 좋은 곳에 자리 잡아 건립 입지조건도 다르다.
서원배치의 일반적인 전형은 서원목, 외삼문, 강당영역의 강당, 동재와서재, 내삼문, 사당이 거의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부속 건물로는 문집, 서적을 발간하는 장판고, 이를 보관하는 서고, 서원을 관리하는 교직사,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원목은 외삼문 밖의 은행나무 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을 말한다. 은행나무는 은행알처럼 많은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라는 상징과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서 유래했다.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 하는 현풍 도동서원의 은행나무는 선생의 외증손자인 한강 정구가 심었다고 한다. 수령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는 아직도 푸르름을 지니고 있으며 만추에는 단풍이 절경이다.
외삼문은 절제되고 엄격한 서원에서 잠시 여유를 누릴 수 있는 2층 구조로 아랫 층은 출입문이며 윗 층은 마루를 깔린 루이다. 회재 이언적을 배향 하는 안강 옥산서원 역락문은 2층에 방을 설치한 특이한 구조이며, 서애 유성룡을 배향하는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는 뛰어난 풍광과 절묘한 건축 배치로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강학공간 구역에는 강당과 좌우에 대칭 건물로 유생들의 기숙공간인 동재와 서재를 두며, 제향 공간인 묘에는 내삼문을 설치하여 제향 등의 특별한 행사 외에는 출입을 금하는 신성 공간이다. 그밖에도 제사에 올릴 고기를 검사하는 생단, 야간행사시에 불을 밝히는 정료대, 축문을 사르는 차 등의 구조물이 있다.
서원의 인적 구성은 교육과 서원의 제반 대소사를 관장하는 책임자인 원장을 비롯하여 서원 향사·교육·재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유사와 양반 자제들 가운데서 유교적 소양을 어느 정도 갖춘 생원·진사·초시입격자인 유생들이 있다. 원생들에 대한 교육과정은 과거시험 및 성리학의 교육과 연구를 목적으로 하기도 했다. 유생들은 30명이 넘지 않은 소수정예인원으로 원규에 따른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원규는 수학규칙, 거재규칙, 교수실천요강, 독서법 등 유생으로 지켜야 할 학칙이다. 한강 선생이 제정한 도동서원 원규에는 "노자 열자와 장자 및 불교에 관한 책과 바둑과 장기 놀이를 해서는 안 된다. 제주이외 술을 빚어서는 안 된다. 제수이외 소를 잡아서는 안 된다. 신분이 천한 하녀는 재와 당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원규를 통해서 불교배척, 신분 차등, 농업 중시 등의 시대적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교육과목은 서원마다 차이가 있으나. 소학, 주자가례, 사서오경과 경서(성현들의 말씀), 역사서, 시문집이었다. 그러나 불교서적, 서학 등의 서책은 철저히 금지 했다. 소수서원의 교육과목은 강의, 강회, 문답법, 토론법으로 진행되었다. 강의講義는 배운 과목을 소리 높여 읽고 일대일로 문답하는 교수법이며, 강회는 일정한 절차에 따라 예를 갖추고 수업 하는 방식을 말한다. 또한 유생들은 제례에 동참하여 선현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성주군 수륜면에는 한강 정구 선생이 주자의 무이구곡을 추억하며 대가천의 절경을 노래한 무흘구곡의 제1경인 봉비암을 등지고 회연서원이 자리한다. 회연서원은 한강 정구(1543∼1620)선생이 1583년(선조 16년)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설립하여 제자를 가르치던 곳에 한강의 사후 유림들이 1627년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창건했다. 그 후 숙종 재위 시에 사액을 받았고, 선생이 강학을 했던 초당에는 매화가 가득하여 백매원으로 불렸다.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 오현으로 알려진 한강 정구 선생 1543년(중종 38년)은 대가면 칠봉동 유촌에서 태어나 78세로 1620년(광해군 12년)에 운명한다. 선생이 태어난 칠봉동은 선생과 이강二岡으로 불리던 동강 김우옹 선생과 근세의 유학자이며 독립운동가, 성균관대학 설립자인 심산 김창숙 선생의 향리이다. 한강의 자는 도가, 호는 한강, 본관은 청주다. 22세에 과거보러 상경한 적이 있었으나 느낀 바 있어 과장에 들지 않고 귀향하여 그 길로 과거를 포기하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573(선조 6년), 31세 때에 조정에서 예빈시참봉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후에도 건원능참봉과 여러 지방의 현감 발령이 있었으나 거절하고 선영에 한강정사를 지어 제자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1580년(선조 13년), 38세에 다시 창녕현감으로 발령되어 비로소 부임, 1년 반 동안 지방행정에 종사하여 선정으로 생사당이 세워졌다.
그러나 사헌부지평으로 발령됨을 기회로 벼슬을 버리고 매화 100그루를 심어 백매원이라 불렀다. 그 후에도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내직은 항상 사퇴를 하였으나 외직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임하였다. 선생은 21세에 퇴계에게, 3년 뒤인 24세에 남명 조식에게 사사하였다. 또한 대곡 성운에게도 수학하였다. 퇴계에게 인(仁)을 남명에게 의義를 배웠으며 천성은 남명과 닮아 출처의리出處義理를 본받았지만 학문태도에 있어서는 퇴계를 따랐다고 전한다. 예학의 대가로 왕가의 예와 일반 사대부의 예는 다르다(왕사부동례)는 견해를 완성시켰다. 역사학자로도 업적을 남겨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의 영향을 받아 통감의 형식을 참고로 하면서도 기자조선, 신라 중심 사관에서 탈피하여 후대의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의 단군조선, 고구려, 발해사관에 영향을 주었다.
선생의 대표적 제자로는 조카사위 여헌 장현광, 문익 한준겸, 미수 허목이 있으며 미수와 윤휴 윤선도 등을 통해 조선후기 남인 실학자들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그의 방대한 저서는 화재로 인해 몇 몇 권을 제외하고는 소실되어 버렸다. 1620년(광해군 12년) 1월, 선생이 돌아가자 문목의 시호를 내리고 인조반정 후에 이조판서, 효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회연서원 외삼문인 견도루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사방에 쪽마루를 내고 닭다리 모양의 계자 난간을 설치했다. 문루 아래는 통로이고 위층은 누각으로 좌우에 낮은 흙담을 쌓았다. 회연초당 시절 매화가 가득했던 백매원 터에 뜻밖에도 산소 앞에 위치해야 할 신도비가 보인다. 선생의 묘소가 수륜면 창평산에서 성주읍 금산동으로 이장하면서 현종 3년(1668년)
서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신도비 이수에는 쌍룡문과 여의두문이 깊게 새겨져 있고, 귀부는 귀갑문이 양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문은 상촌 신흠이 지었고, 글씨는 김세렴이 썼다.
외삼문과 강당 중문 사이의 넓은 공간에 매화가 심어져 있어 봄이면 장관일 것 같다. 이 구역에 서원 배치에서 사례가 없는 향현사를 배치하였다. 향현사에는 신연 송사이, 용재 이홍기, 육일헌 이홍량, 모재 이홍우, 동호 이서 등 한강의 동년배로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분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강학공간인 경회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막돌기단의 덤벙 주초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대청은 우물마루다. 측면은 3칸이며, 좌우 퇴칸에는 전퇴를 달고 양후면은 방으로 되어있다.
정면에 숙종 임금이 사액한 회연서원 현판이 걸려있고 대청 안쪽에는 미수 허목의 망운암, 옥설헌 액자가 걸려 있다. 독특한 미수체를 고려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글씨 아래에 작게 새겨진 한글이 오히려 정겹다.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인 명의재, 서재인 지경재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 안마당에 도난 후 새로 설치한 정료대는 종갓집에 갓 시집온 새악시처럼 어색하기 그지없다.
회연서원의 사당은 강당 좌우에 신사당. 구사당 2곳과 향현사를 비롯하여 3곳이다. 사당에는 한강 정구와 석담 이윤우를 배향하고 있다. 구사당은 옛생각에 잠긴 듯 다소곳한 자태로 경회당 동쪽에 자리해 있다. 곱게 단장하고 반대편에 자리한 신사당은 솟을삼문을 지나 경회당 만큼 넓은 중정을 앞에 두고 다시 삼문을 지나서 들어 갈 수 있다. 중정에는 생단으로 보이는 장방형의 구조물이 놓여 있다.
현재의 사당구조는 서원 배치에서 사례가 없는 경우로 고증을 거쳐 재배치 문제를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당은 종축으로 강당 뒤편에 모시지만 중심 축 동쪽에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민가의 불천위를 모신 부조묘와 마찬가지로 선현의 위패를 모신 신성공간인 사당에 아침 햇볕을 가장 먼저 받게 해야 한다는 상징성을 갖기 때문이다. 서원 부속 건물로는 전사청과 관리사, 선생의 저서 및 문집의 각종 판각 등 유물과 유품을 보관하고 있는 숭모각이 있다. 향사는 매년 2월과 8월에 올린다고 한다.
어른이 존경받지 못하는 세상. 아니 존경할 원로가 없는 세태라고 말하는 요즈음이다. 날마다 매스컴과 신문 지면에는 가정에서의 존속 학대, 사회에서의 노인 비하, 학교에서 일어나는 스승 폭행 등의 기사가 가득하다. 풍족한 생활과 지식을 갖춘 현대인이 패륜을 자행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온고지신이라고 했다. 책에만 답이 있지는 않다. 학과 공부와 더불어 수기치인의 삶을 연마하고 절제된 예와 선현을 배향하는 지극한 제례를 올렸던 가까운 서원이나 향교 답사도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서원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원 강당 측벽에 걸린 불괴침이라는 허목선생의 글씨가 내내 눈앞에 아롱거렸다. 불괴침不愧寢. 부끄럼 없는 잠자리를 뜻한다. 과연 나는 하루를 부끄럼 없이 생활하고 잠자리에 든 적이 있었던가?
*** TIP
회연서원이 위치한 봉비암에서 성주댐을 경유하여 대가천변을 따라 김천 수도사까지 가는 길은 뛰어난 절경으로 지금도 관광객의 발길이 잦으며 드라이브 코스로 주목 받고 있다. 이러한 자연경관에 한강 정구 선생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기리며 아홉 곳에 이름을 붙이고 절경을 노래하였다. 이른바 무흘구곡으로 회연서원 뒤편 봉비암이 1곡이다. 2곡은 수륜면 수성리 갓말의 한강대, 3곡은 금수면 무학리의 배바위(무학정), 4곡은 금수면 영천리 선바위이다. 5곡은 금수면 영천리 은지골 사인암, 6곡은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 옥류동, 7은 증산면 평촌리 만월담, 8곡은 증산면 평촌리 와룡암, 9곡)은 증산면 수도리 용소( 완폭정)이다.
무흘 구곡이 펼쳐진 대가천변에는 성주 출신 시인 배창환의 시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의 가천장이 있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문학기행 코스로도 적합하다.
추수 끝난 강둑에 무리지어 / 다 끝나가는 한 생을 마저 살려고 / 마구 흔들어대는 저 으악새는 / 어떻게 내 마음을 통째로 뒤흔들지 않고 / 내 곁을 지나친단 말인가 // 성주 가천 닷새장 파장에 부는 소슬바람도 / 대가천 식당 할매가 말아내는 돼지국밥도 / 정류장 둘레에 퍼질러 앉아 / 금방 밭에서 뽑아온 무 배추 몇단 놓고 / 국수 말아먹는 아낙의 등 굽은 가계도 // 어찌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 지나치리 / 그 모습에서 감동을 찾아가기도 하고 / 그 웃음에서 가버린 세월을 되감아오기도 하고 / 하다못해 연민의 눈길이라도 욕심껏 퍼붓고 갈 일이니
회연서원 주변에는 수성리 중매댁, 가야산 백운동의 법수사지 삼층탑,당간지주, 심원사 삼층탑, 보월동 삼층탑 등 많은 문화재가 분포해 있다. 또한 가야산 야생화 박물관이 있어 야생화 탐사와 문화유산 답사 동선 수립에 용이하다. 뿐만 아니라 가야산 우두봉, 최근에 개방한 만물상 등산코스도 레저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답사와 등산이라는 일석이조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