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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三角山 북한산) 의상능선을 가다 ①
-구기동에서 문수사까지-
지난 7월 8일, 그야말로 번개모임으로 의상능선 산행 및 국녕사 사찰순례를 했습니다. 작 년에 비니초님과 더불어 간 길을 다시 한 번 그대로 간 것인데 이 탐방로는 북한산 탐방로 가운데서도 경치가 좋기로 손가락에 꼽히는 곳이어서 법우님들과 진작부터 가려고 마음 먹었던 곳입니다.
의상능선이란 삼각산 문수사를 품은 문수봉( 文殊峰 727m)으로부터 청수동암문(靑水洞暗 門 694m) - 나한봉(羅漢峰 688m) - 나월봉(蘿月峰 657m)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 521m) - 증취봉(甑炊峰 593m) - 용혈봉(龍穴峰 581m) - 용출봉(龍出峰 571m) - 가사당암문(袈 裟堂暗門 488m) - 의상봉(義相峰 502m) 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말합니다. 약 3km정도 됩 니다. 그러나 이 거리는 산길인 관계로 생각보다는 깁니다. 그리고 이 탐방로는 그야말 로 용로(龍路)입니다. 오르락 내리락 길을 제가 용로(龍路)라 이름 붙여 봤습니다. ^^
7월 7일 토요일, 미소님께서 염화님과 더불어 산행을 할 수 있다고 하셔서 번개처럼 번개 팅을 했는데 모두 일정이 있다는 답변인 가운데 산수산님 만이 동참이 가하다는 연락이 와 서 다섯 명이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구기동파출소 앞에서 반가이 만나 9시 정각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불볕더위가 내리 쬐고 있었으나 마음은 즐겁게 구기동계곡으로 향했습니 다.
보니 염화님과 미소님은 토요일 이삿짐 도우미를 하셔서 피곤하실 텐데 오셨고, 산수산님 은 중국에 다녀오신 후인데도 오셨더군요. ^^
구기탐방지원센터
문수사까지 2.4km네요. 구기파출소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될까요? 1km는 족히 될 터이니 집결지에서 문수사까지 3.5km 쯤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9시 20분 통과합니다.
구기탐방지원센터
구기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하셨습니다.
구기탐방지원센터 옆은 시원한 물이 흐르는 청정계곡입니다. 이 계곡에는 버들치들이 많 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구기삼거리
구기탐방지원센터에서 700m 걸어온 지점입니다. 9시 40분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잠 시 쉬어 가기로 했습니다.
왼쪽으로 가면 승가사 0.9km이요, 직진하면 문수사로 가는 길입니다. 여기에 전에 없던 이정표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비봉 1.6km, 사모바위 1.3km, 문수사 1.7km라고 되어 있습 니다.
구기삼거리에서 휴식
여기는 갈림길로 쉬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대남문, 문수사로 가는 길은 이제 언덕길이 시 작됩니다.
깔딱고개에서 바라본 대남문
10시 36분 깔딱고개에 도착했는데 쉬지 않고 통과합니다. 그렇다고 삼거리에서 여기까지 쉬지 않고 걸어왔느냐 하면 중간에 쉬어서 간식도 먹고 차도 먹었습니다. ^^ 날씨가 더워 서 무척 땀이 많이 흐릅니다. 땀을 많이 쏟으니 기분은 좋습니다.
여기는 문수사 입구 갈림길입니다.
여기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10시 46분입니다.
쉬어 갈 곳 물색 중
까치수영
여기에 앉은 나비를 촬영했으나... 선명치 않아서 전부... ^^ 염화님이 잘 찍으셨지요.
문수사 오르는 길 옆에서 잠시 쉰 다음 문수사에 도착했습니다. 문수사는 수시로 가는 곳 이지만 늘 가도 좋습니다. 10시 58분에 문수사에 도착했습니다.
문수사는 고려 예종 4년(1109)에 명필로 이름 난 탄연(坦然) 스님이 창건하였습니다. 그후 조선 문종 1년(1451) 연창공주(延昌公主)가 중창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해오 다 6ㆍ25때 소실된 것을 1957년 신수(信洙) 스님이 중건하였고, 1957년 주영(周英) 스님이 신중탱화를 봉안하였고, 1978년에는 소종 1구를 조성하였습니다. 1985년에는 혜정(慧淨) 스님이 삼성각을 중수하고 법당에 후불탱화와 신중탱화를 새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전에 없던 부도탑이 보입니다. 아, 혜정(慧淨) 스님의 부도탑입니다. 작년 4월에 왔을 때는 대웅전에서 법문을 하시어 말석에 앉아 법문을 들었는데 이제 보니 부도탑의 주 인공이 되어 맞으시니 무상하기만 합니다.
문수사 주지이며 도선사 조실이셨던 조계종 원로의원 보광당(寶光堂) 혜정(慧淨) 대종사 (大宗師)는 불기 2555(2011)년 11월 12일 오후 서울 삼각산 도선사에서 입적하셨습니다. 이때 세수 81세요, 법랍 64년이셨습니다. 선원에서 안거 수행에 들어갔고, 이후 여러 선원에서 참선 수행을 하셨습니다. 대구 동화 사 주지를 지냈으며, 2008년 해인사에서 조계종단 최고의 법계인 대종사(大宗師) 법계를 받았습니다.
보광당혜정대종사비(寶光堂慧淨大宗師碑)와 부도탑(浮屠塔)
혜정(慧淨 1930 ~ 2011) 대종사의 행장
『충북 충주 탄금대가 고향인 혜정스님은 고등학교 다닐 때 문경의 한 광업소에서 일하는 형과의 인연으로 봉암사에 가게 됐다. “절에 가보니 스님들이 장삼을 입고, 염불인지 뭔지 를 하고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불교를 전혀 몰랐지요, 그래서 호기심이 발동해 성철스님 에게 ‘절에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왜 이렇게 옷을 입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등등을 여쭤 보았어요.” 그러자 성철스님이 방으로 불러들여 “절을 둘러본 감상이 어떠냐?”고 물었고, 이에 혜정스님은 “신선공부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며 당돌하게 답했다.
그때부터 성철스님은 어린 혜정스님에게 불교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와 인생무상, 북망산 가를 소재로 인간이 100년도 못살면서 1000년을 살 것 같은 생각을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 었다. 이어 생사문제가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인데 가장 급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 다며 ‘스님들이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에 와 있노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 때 성철스님을 뵈니까, 인상이 신비스러워 범인(凡人)은 아닌 것 같아 보였어요. 소납 에게 일본역사에 나오는 스님 이야기도 해주시고, 일본불교계에 최고 높은 지위에 있는 스 님 이야기도 해 주었지요. 그러면서 가족상황을 물어보시더니 은근히 출가하라고 권유했 어요.” 그 길로 절에 머물면서 혜정스님은 성철스님이 시키는대로 ‘대보누각다라니’를 외 우고 반야심경 강의도 듣고 관세음보살의 의미도 배웠다. 한동안 절에 머물자 부모님이 찾 아와 아들을 찾겠다고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을 만났다. 그곳에서 혜정스님의 부모님은 두 어른의 법기를 알아보고 학업을 마치는대로 아들을 출가시키겠노라고 허락했다. 고등학교 를 졸업한 혜정스님은 열여덟살에 문경 봉암사에서 출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보광당혜정대종사비(寶光堂慧淨大宗師碑)
그 때가 1948년이다.
“당시 봉암사에서는 결사가 진행되고 있었어요.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공주규약을 정해 놓고 정진하고 있었어요. 우선 산신각, 칠성각, 신중단 등의 탱화는 다 끄집어내어 없애버 렸어요. 그리고 목발우 대신에 철발우를 사용했어요. 목발우는 대처승들이 사용했고, 부처 님법에는 목발우가 없다는 이유였어요. 제사 때는 위패만 놓고 반야심경 한 편을 읽었습니 다. 그리고 능엄주를 매일 외웠고, 가사와 장삼도 새로 해서 입는 일대 혁신을 도모했습니 다.”
당시 혜정스님은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을 따라 탁발도 나가고, 매일 108배를 하며 수행자 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그러나 빨치산의 잦은 출몰로 봉암사결사가 차질을 빚게 되자 스님 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출가수행자가 된 이상 선수행을 하며 경전도 배워야 겠다는 생각에 오대산 상원사로 찾아가 그곳에서 당대 선지식 한암스님의 지도를 받았어요.”
보광당혜정대종사부도탑(寶光堂慧淨大宗師浮屠塔)
은사인 청담스님이 정화불사를 수행하며 조계종 총무원장직을 맡아 정진할 때 혜정스님은 잠시 해인사 재무국장겸 주지 대행이라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당시 선방에는 현 원로의 장 종산스님을 비롯한 눈밝은 납자들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어요. 당시 선원 납자들의 정 진기백이 얼마나 서릿발 같았는지 사중에서는 신심이 나서 물심양면으로 시봉한 기억이 납니다.”
이외에도 청담스님의 상좌로서 혜정스님은 종무행정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청담스님 의 총무원장 재직 당시, 태국에서 개최된 세계불교도우의회(WFB) 총회에 다녀왔다. 그때 청담스님이 “앞으로 서구 사람들과 교류하려면 젊은 스님들은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말 에 고무돼 영어공부에 매진해 상당한 실력을 갖췄다.
이후 한.태국불교협회가 결성돼 양국의 불교교류에 상당한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혜정스님은 “(이 모든 일이)부처님이 설파한 마음을 깨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 편”임을 간파하고 참선수행에 매진한다. 여러 선원에서 정진하며 조사어록을 공부했던 스 님은 궁극에 ‘참나’를 찾는 참선수행에 매진하게 된다.
“수행자는 신명을 다해 중생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마침내 안락정토를 성취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행(因行)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인이나 이 땅의 지도층 인사들도 마찬가집니다. 지도층이란 중생들을 위해 올바른 전범을 세워 봉사하는 사람들 을 뜻합니다.”
다른 각도에서
1985년 대구 동화사 주지를 회향하고 다른 교구본사 주지소임을 제안받았지만 ‘마음을 깨 닫는 정진’에 소홀할 수 없어 폐허나 다름없는 삼각산 문수사를 수행처로 정했다. 이 곳에 서 혜정스님은 태고 보우국사로부터 전해지는 임제선맥의 정맥이 한국불교에 유유히 흐름 을 확인하게 된다. 혜정스님은 문수사에서 서울땅을 내려다보며 늘상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고 한다.
“저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 법을 접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이 몸뚱이의 유한함 으로 인해 물론 그렇게 다 되진 못하겠지만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 정진하는게 수행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신문에서-
문수사 편액 이승만 대통령 글씨
최근에 낡은 편액을 떼고 다시 만들어 건 것 같습니다.
문수사 전경
혜정 스님과 문수사
『서울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맑은 날이면 인천 앞바다까지 보일 정도로 조망이 좋 은 북한산 문수사. 고려시대 명필가 탄현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지만 현재의 사격을 갖 춘 시기는 20여년이 채 되지 않는다. 보광당 혜정대종사의 원력과 땀이 고스란히 들어가 서울시민들이 즐겁게 찾아 기도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도량으로 변모했다.
종로구 구기동 산 2번지에 자리잡은 문수사는 구기동 자연탐방센터에서도 성인걸음으로 1시간반은 족히 올라가야 닿는다. 해발 645m에 둥지를 튼 구중심처(九重沈處) 산사다. 앞 에는 보현봉이 바라다보이고 사찰 뒤편에는 우뚝 솟은 문수봉의 정맥이 사찰로 흘러든다. 그 혈맥에 자리한 ‘삼각산천연문수동굴’은 오대산 상원사, 고성 문수사와 함께 국내 3대 문수성지로 알려져 있다. 삼각산 문수사는 고려 예종 4년 때 탄연스님이 창건했고, 조선 문종 1년에 연창공주가 중창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소실됐는데 공주 국회의원이었던 박충식 거사가 자그마하게 중건했다. 박 거사는 정화불사때 적극 나섰던 무착행 보살이라는 여성불자의 남편으로 이승만 대통 령의 양아들로 알려져 있다. 이 절을 당시 혜정스님이 소송으로 되찾아 ‘조계종 문수사’로 등기하고 전통사찰로 등록했다.
혜정스님은 이 곳 문수사에서 매주 일요법회를 열어 마음이 가난한 도시민들에게 청량한 감로법문을 설했고, 산사를 찾는 이들에게 무료로 점심공양을 내주며 넉넉한 자비행을 실 천했다.』 -불교신문-
문수사에서 바라본 풍광
응진전(應眞殿)
우보처 제화갈라보살 본존 석가모니불 좌보처 미륵보살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좌보처 미륵보살, 우보처 제화갈라보살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를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이라 합니다. 현세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 보처에 미래의 미륵불(彌勒佛)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우보처에는 과거세의 부처님인 정 광불(錠光佛)을 보살화한 제화갈라보살(提和渴羅菩薩)을 말합니다.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과 오백나한성중(五百羅漢聖衆)
오백나한성중(좌편)
오백나한성중(우편)
신중탱화
삼각산천연문수동굴(三角山天然文殊洞窟)
일찍이 태고(太古) 보우국사(普愚國師)가 이 천연동굴에서 정진하기도 했고, 조선조에는 어사 박문수(朴文秀)의 부친이 이곳에 와서 기도해 아들을 점지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하며, 근세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어머니가 멀리 황해도 평산에서 이곳까지 와, 동굴 속 에 모셔진 오백나한상에 백일간 치성을 드려 이 대통령을 낳았다고 합니다.
문수보살님
문수사 기념사진
문수사에서 바라본 보현봉
문수사에서 약 1시간 동안 두루 참배하면서 머물다가 11시 45분, 문수사(文殊寺)를 나와 대남문(大南門)으로 향했습니다.
☞ 다음은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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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수사 몇년전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산행을하면서 들렸던 사찰이에요.라진점은 보광당혜정대사 부도탑과 무소 위치가 바뀐것이였어요.
무소에 근무하시던 풀잎님을 뵐수가 없었어요. _()_
2012년 새해 첫날 문수사를 찾았고 이번 번개산행중
문수사 가는 길은 다소 경사가 급하여 힘든 길이지요. 옛날에는 길이 더 안 좋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정성스럽게 올라 기도를 해 영험을 많이 보았던 것입니다. 문수사는 정말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식수가 넉넉치 않은 곳이지만 그 많은 대중들에게 일요일 점심공양을 베풀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 혜정 스님께서 대중에게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예를 올렸습니다. _()_
예나 지금이나 길은 같은데 길이 믾이 좋아졌지요. 군 입대 하기전 서울불청 시절 가끔 철아 정진 하던곳 그땐 초라한 아주 작은 사찰 이었던 기억이 나는곳 이지요, 그땐 왜 그리 문수사 오르는 길이 힘들었는지 ㅎㅎㅎ....나무묘법연화경()()()
입대 전이라면 70년대이겠군요. 혜정 스님이 1985년에 부임하셨다고 하니 정말 초라했겠네요.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_()_
문수사 까지 거침 없이 도착,,. 홀로 2 번 다녀온 문수사 ()()(). 불심 깊은 백우 염화 비니초 미소님 과 함께 글구 계절이 바뀌어 다시 보니 환상적 입니다. 세상에 제일 맛 있는 라면 은 ::: 함께라면 중식으로 함께 라면을 먹어 보겠 습니다. 혜정 대사 ()()() , 지난 번에 보지 못 한 부도탑,,,. 봉암사 해인사 동화사 통도사 문수사 까지 유명 사찰에서 수행 가풍의 법맥을 이어 오시고 ,, 이곳 문수사에서 사후의 터를 잡 으셨네요. ()()().
산수산님이 향불교와 인연이 되신 것이 아마 문수사였지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라면이 함께라면이군요. 과연 그렇습니다.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혜정스님의 법문을 한 번이라도 들었으니 영광입니다. 그때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이제 부도의 주인공이 되시어 문수사를 찾는 이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_()_
2011 년 11 월 어느날 북한산 산행기를 접 하고,,,, 문수봉과 보현봉 ,,, 문수사를 알게 되어 향불교 법우님들과 짧은 시간 자주 뵙다 보니 ,,, 불심은 미약 하지만 잘 이끌어 주시는 백우님 과 법우님들 자비보시 속에 오늘 의상능선 까지 거운 산행 하게 되었 습니다. . 산행기를 올려주신 묘법님과 동행 하신분들께 처음으로 감사 하다는 말씀 올리 나이다 ,, 사이버 공간에서 보에 귀의 하는 향불교 훌륭 하신 법우님들 과 귀중한 인연 이어 가고자 합니다. ()()()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쭈욱 아름다운 인연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 _()_
7월8일 일요일에 잡혀 있던 질녀 이사를 7일 토요일로 급 변경하여 미소님과 함께 염화차량으로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백우님께 일요일 번개팅 가능하다고 연락을 취하였더니 곧 바로 의상능선 탐방을 추진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평소에 가고 싶었던 아름다운 의상능선 탐방과 국녕사 순례를 하게 되었습니다.거운 길 함께 해주신 백우님, 비니초님, 산수산님, 미소님 감사합니다. _()_
그때 연락을 안 주셨으면 우리는 노적봉으로 해서 백운대로 향하려 했지요. 노적사도 궁금하여... 함깨 동행하고 함께 바라보면서거움을 같이 했으니 더없이 거운 하루였습니다. _()_
그럴 날이 있을 겁니다. 노적사도 궁금하거든요. _()_
산행길 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묘법이만 없을뿐!! 삼거리 휴식처, 문수사 대남문 삼거리, 그리고 깔닦고개 다오르고 나면 문수사. 함께 못한 산행 이지만 함께 동행한 느낌 입니다....나무묘법연화경()()(0
함께하실 수도 있었는데 병주군이 외박을 온 탓에... 그래도 훤한 길... 다음 기회엔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_()_
저는 배낭매고 집을 나가면 일단겁습니다.
많이 메고 나가지요. _()_
먼저 다녀오신 백우님 ,, 비니초님 덕분에,,,, 훌륭한 코스에서 함께라면겁게 잘 먹었 습니다. ()()()
함께라면 어디를 가든겁습니다. 감사합니다. _()_
음악과 새소리... 산을 오르는 듯 합니다. 문수사의 역사와 혜정스님의 향훈을 느낍니다. 시간과 거리를 적시하니 더욱 좋군요. _()_
반갑습니다. 문수사는 가끔 찾는 절이입니다. 혜정 스님이 갑작스레 입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일찍이 입적 소식은 들었지만 부도를 대하니 감회가 샘솟네요. 한참 머물다 대남문으로 향했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