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죽음
요한복음 21:18-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물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장차 베드로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18절에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리고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의 죽음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20)라고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을 보고 ‘그가 죽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라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23).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다른 어느 제자들보다는 신뢰 하셨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자신의 변화된 모습도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릴 때도 다른 제자들은 따라오기를 허락지 않으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가셨습니다(막5:37).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다른 제자들은 멀리 있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마26:38). 이처럼 베드로와 요한을 다른 제자들보다 더 가까이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같은 고향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와 바다에 그물을 던지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름을 받았고, 요한과 야고보는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다가 부름을 받아 제자가 되었습니다(막1:16-20).
나이는 베드로가 좀 많았고 요한은 열두제자들 중에 나이가 제일 어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좀 급한 반면에 요한은 대체로 조용한편입니다. 베드로는 나서기를 잘했지만 책망도 많이 들었습니다. 요한은 항상 예수님 곁에 또는 무릎에 안겨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베드로를 먼저 찾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났지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하므로 다른 제자 여섯과 함께 옛날 고기 잡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날이 새어 갈 때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을 때 요한이 먼저 예수신줄 알고 ‘예수다’라고 외쳤고, 베드로는 바다에 뛰어 내려 예수님께로 먼저 왔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신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18)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진실로 진실로’라고 거듭 두 번이나 말씀하신 것은 신적인 권위 하나님의 말씀임을 선언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젊었을 때는 마음껏 활동할 것이지만 늙어서는 결박당하여 순교를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1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속죄의 제물이 되셨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심같이 베드로의 죽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을 것인가가 우리 모두에게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죽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실패는 무엇이고 성공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어떤 것이 영광이고 어떤 것이 굴욕입니까? 모두가 다 부질없는 것들 입니다.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습니까? 젊은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성공을 했습니다. 마치 소원성취를 이룬 것처럼 희희낙락합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낱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필경은 성공도 하찮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져보아도 그렇고 되어보아도 그렇습니다. 칭찬을 받아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표창이나 훈장도 명예도 죽음 앞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헛되고 헛된 것들 일 뿐입니다.
돈 좀 벌었다고 성공입니까? 벼슬 좀 누렸다고 성공했습니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서 받았던 그 영광, 지금은 다 어디 가고 죽기 보다 더 힘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성공이란 잣대를 대면 그게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큰 교회 목사가 되었다고 목회를 성공한 것입니까? 작은 교회를 목회했다고 해서 목회를 실패했습니까? 굴지 굴지한 교회를 목회하던 분들의 끝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봅니다. 조용기, 석원태, 김삼환 목사, 그분들이 과연 목회를 성공다고 생각하십니까?
노인 요양병원에 병상마다 누워있는 많은 환자들을 보면 그들의 화려했던 과거는 온데 간데 없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을 볼 때 마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나도 저렇게 죽어야 하는지를 생각을 합니다. 나의 죽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켜 주심 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죽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리고 가리라’는 말씀은 장차 베드로가 잡혀 끌려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좀 신중한 사람이었다면,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진심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시며 앞서 가십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심은 고기 잡던 디베랴 바다에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던 것처럼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 너도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입니다.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만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요한의 죽음은 어떻게 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속내를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요한이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가까이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하여 퍽이나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죽을 지언정 주님을 따르겠다고 큰소리치며 명세까지 했던 자신은 예수님이 잡혀 갈 때 멀찍이 따랐고, 요한은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심문받는 가야바의 법정에도 요한은 들어갔지만, 자신은 문밖에서 기웃거리다가 요한이 사람을 보내어 들어오게 해서 법정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작은 여종에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에도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그 현장에서 그 장면을 목도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십자가 밑에서 지킨 제자입니다. 요한과 비교 할 때 베드로는 자신의 초라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명색이 수제자인데, 요한이 자신보다 나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제자인 자신보다 사실상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는 것에 대해서 속내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요한에 대한 질투심이 있었다고 봅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용기 있게 앞장섰지만 그래서 실수를 많이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지만, 요한은 베드로처럼 실수를 하거나 책망 들은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속내는 요한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베드로와 요한과 비슷한 관계를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일을 하지만 욕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말없이 봉사하는 사람은 실수도 별로 없고 그래서 교회로부터 신임을 받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저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자신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근히 마음속으로 질투하고 시기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의 죽음이 어떻게 되느냐고 예수님께 물었다는 것은 나는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면 요한의 죽음은 어떠한가를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질문은 요한에 대한 경쟁적인 질투였습니다. 죽음까지도 비교하며 질투하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죽음이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말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에게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내가 십자가를 진 것처럼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더 이상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상관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이후로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뒤늦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을 때, 감히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가 없어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많은 고생을 했지만 계시를 받고 요한계시록을 쓰고 다시 에베소로 와서 백 세가 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지금도 에베소에 요한의 무덤이 있습니다. 요한은 십자가에 달려 순교의 제물은 되지 않았지만 오래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각양 다르며 개인적입니다. 오래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하면 당장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지만, 성공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모양으로, 어떤 사람은 저런 모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 순종하며 살다가 죽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그가 살아온 한 평생의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한 결과가 그 사람의 죽음에서 나타납니다. 그 사람의 삶이 선하지 못했다면 부끄러운 죽음이 될 것이고, 의롭게 살아온 사람은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죽든 그에게 마음을 쓰지 맙시다. 그것은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내가 갈 뿐입니다. 남에게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은 결코 좋은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존재, 내 운명까지 비참해 집니다.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이야 어떠하든 상관하지 맙시다. 내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생각합시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사명을 끝까지 충성하다가 죽을 때 베드로처럼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