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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이랬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여자의 마음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움'에 요동치고 끌려감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죽음에 대한 불안 등 실존적 한계상황 그리고 괴로움의 뿌리가 비롯된 것이라고 성서는 말한다. 여자는 그 마음이 탐(貪 베차 בֶּצַע)으로 인해 요동치고 끌려가 어떤 결과가 초래 될지 몰랐다. 이 사건 이후로 처음 찾아온 부정적 감정은 두려움(야레 יָרֵא) 이었다고 성서는 말한다.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0)". 인류 최초로 두려움의 스위치인 편도체가 활성화 된 것이다. 두려움의 첫번째 반응이 회피로 숨었다. 이어 연쇄적으로 가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한 분노로 동생 아벨을 살인한 사건(창4장), 죽음, 슬픔, 불안, 공포, 분노, 강박, 염려, 근심, 우울, 악독, 교만 등 자타를 불문한 온갖 괴로움이 성서에 나타나고 우리들의 삶에 지배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에서 이런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가 샬롬(שלום)이다.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처음 한 말이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21)"였다.
평강(에이레네 εἰρήνη)은 히브리어로 샬롬(שלום)이다. 이 말은 스승을 배반하고 두려움에 부인했으며 무기력하고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실망하여 트라우마를 안고 본래의 삶터로 돌아간 제자들에게 단순한 인삿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 모든 심리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평안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그들이 평안하기를 진정으로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온갖 괴로움을 소멸하고 주께서 주는 평안을 누리기는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몸과 마음안에서 일어난 괴로움을 어떻게 소멸 시켜야할지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이 성서에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나를 믿으라 (요14:1)', '두려워하지 말라 (마10:31)', '맡겨라(벧전5: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 등이 있으나 어떻게 믿고, 두려워 하지않으며, 맡기며, 기도하라는 실천적 방법이 제시 되지 않고 있다.
실천적 방법을 찾기 전에 먼저 성서에서 이 괴로움을 여의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할 때 기도의 한 방법으로 구약에서 말하는 '묵상'을 살펴 보고자 한다. 성서에서는 묵상을
명상과 같은 Meditation과 meditate로 번역하고 있다. '명상'을 영어로 'Meditation'이라고 하며 '명상하다'는 'meditate'라고 한다. 명상과 묵상이 종교적 의미에서 목적과 방법이 다를 뿐 모두 마음을 고요히 하고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묵상을 하가 (הָגָה maditate)로, 창24:63에서는 특별히 슈하 (שׂוּחַ maditate)로 표현하고 있다. 성서에는 묵상(Meditation)이 9곳, 또는 묵상하다(meditate)는 말이 18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시편작가는 시편 1장 2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기록 했다.
명상이라는 말을 우리 나라에서만 기독교 밖에 있는 불교 등의 영적 전통이라는 종교적 편견이 거부감을 갖게한다. Meditation을 명상의 의미로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명상이 묵상이고 묵상이 명상이다. 명상이나 묵상이나 모두 생각을 멈추고 침묵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의 묵상으로 부터 크리스천의 명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크리스천이 명상을 한 흔적을 아바 안토니우스(Anthony the Great, 251~356)와
폰토스의 에바그리우스 (Evagrius Ponticus, 345-399) 그리고 아바(abba)라 불리던 수많은 사막교부들의 영적 전통으로 부터 중세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1260~1327), 근세의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31 ~ 1968. 12.10) 등의 수도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의 영적 전통인 테오리아(theoria 觀想)와 헤시키아(hesychia 淨觀)
와 아파테이아 (Apatheia 不動心)를 주목하고 이를 적용하여 온갖 괴로움의 해결 방법으로 크리스천의 명상이 어떻게 행하여져 왔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 테오리아(theoria 觀想)
테오리아(theōria)는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보는 태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contemplatio에서 온 단어로
관상기도는 마음의 기도이다. 그러나 '관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적인 명상과 숙고라는 의미에서의 관찰을 말한다.
마음과 의지는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현존을 향하여 나아간다. 이 때 입술과 생각은 쉰다. 마음은 말없는 기도로 주님께로 나아가고 의지는 주님의 의지와 하나 되기를 추구하면서, 다만 단순히 주님을 응시한다. 관상기도는 이성적 사고보다는 가슴으로 사랑에 의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
관상기도는 개념들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구현된 현실적 실상을 자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관상은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서 알려지고 사랑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에 대하여 '휴식을 취하라. 천천히, 리듬 있게 호흡하며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현존 안에서 고요하게 쉬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러한 자각을 신앙으로 추구할 때, 이것을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 pl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자각을 실질적인 체험으로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이것을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tion)이라고 한다.
1)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
믿음과 희망과 열망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향해 나아갈 때. 이 관상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이 진정으로 현존하심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그분과의 접촉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2)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tion)
그분이 대가 없이 거저 주신 은총으로 기도할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현존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주신다.
예를 들면, 그분은 사랑, 평화, 기쁨과 같은 성령의 열매(갈 5:22)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분의 현존을 참으로 자각하게 해주신다.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또는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자각하게 해주신다
• 헤시키아(hesychia 淨觀)
헤시키아란 관상에 전념하여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자유, 완전한 쉼을 얻는 상태를 의미한다. 영혼의 깊은 고요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 얼굴을 대면하여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모든 집착을 떨쳐내 돌파한 무심으로 깊고 고요한 영혼의 근저에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 됨과 하나님아들로의 탄생'을 말한다. 교부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서 헤시키아에 이를 수 있음을 인식 했다.
• 아파테이아 (Apatheia 不動心)
아파테이아는 그리스어로서 사전적 의미는 “정념(情念)이나 외계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마음의 경지”를 의미미한다. 아파테이아는 헤시키아의 삶으로 말미암아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된 부동심이 이루어져 온갖 괴로움이 소멸한 지고의 상태다. 이렇게 테오리아에 전념하고 ‘헤시키아’(hesychia) 안에서 사는 삶의 양식을
비오스테오레티코스(Bíos
thoretikos) 즉 고요히 현존하 는 것의 순수한 빛남 안으로 관조해 영혼의 근저로 내려가는 '관상자의 삶의 양식'이라고 부른다.
여기까지 우리는 온갖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는 기독교 명상 전통을 살펴 보았지만 사막으로 물러나거나 수도원 안에서 고독한 고행을하는 수도사들의 비오스테오레티코스가 우리들의 현실적 삶과는 괴리가 있을 뿐 아니라 실천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ChatGTP에 크리스천 명상에 대해 물어 봤더니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크리스천 명상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깊이 경험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초점을 맞춘 명상 방식입니다. 일반적인 명상과 달리, 기독교적 명상은 단순히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임재로 채우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크리스천 명상의 주요 방법
1. 거룩한 읽기(Lectio Divina)
성경 말씀을 천천히 읽고,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묵상하는 방법입니다.
단계: 읽기 (Lectio) → 묵상 (Meditatio) → 기도 (Oratio) → 관상 (Contemplatio)
2. 예수 기도 (Jesus Prayer)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와 같은 짧은 기도를 반복하며,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는 방식입니다.
동방 정교회에서 유래되었으며, 현대에도 널리 사용됩니다.
3. 침묵 기도 (Centering Prayer)
한 단어나 구절(예: "주님", "사랑", "평안")을 반복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기도입니다.
신학자 토마스 머튼과 토마스 키팅 신부가 강조한 방법입니다.
4. 창조 명상 (Creation Meditation)
자연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묵상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명상입니다.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을 떠올리며 자연 속에서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5. 감사 명상 (Gratitude Meditation)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돌아보며 감사하는 명상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를 중심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 명상의 효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짐
마음의 평안과 내적 치유 경험
신앙 생활의 집중력과 영적 성장 강화
스트레스 감소와 감정 조절 능력 향상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조용한 공간에서 시작하세요.
성경 말씀을 한 구절 선택하세요.
천천히 반복해서 읽고 의미를 묵상하세요.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고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세요.
크리스천 명상은 단순한 심리적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한 영적 훈련입니다. 시도해 보시면서 어떤 방법이 본인에게 맞는지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이상의 보고 또한 복잡하고 번다해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고 보인다. 아주 단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에바그리우스의 "기도할 때에 상상 하지 말고 생각을 버린다. 당신은 기도할 때 모든 생각을 버려 서 영혼이 깊은 고요함에 들어가게 하라. 그러면 무지한자에게도 자비를 베 푸시는 분이 당신처럼 작은 자에게도 찾아오실 것이다. 바로 그때 당신은 가장 영화로운 선물인 명상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라는 말에 터해 예수님의 '깨어 있으라', '눈을 떠 알아차림', '자기를 비워 아버지의 뜻에 맡김', 그리고 기독교 영적 전통인 테오리아(theoria 觀想)와 헤시키아(hesychia 淨觀)
와 아파테이아 (Apatheia 不動心)를 적용해 [마음여행]이라는 크리스천 명상 프로그램을 제시하고자한다. 아주 오래된 영적 전통에 뿌리를 둔 명상부터 종교 색채를 쏙 빼고 뉴로사이언스와 여러 신경과학적 치료를 위해 개발해 산업화한 명상까지 수 없이 많은 명상이 있지만 모두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어 모두의 행복을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복음임을 믿는다. 이 명상프로그램이 우리 모두 메타노이아로 의식의 대전환을 이뤄 하나님나라에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복음이 되길 바란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평안 할 수 있는 이 좋은 명상을 소개하는데 이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결코 설득하려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누구나 명상을 통해 행복했으면 좋겠다.
첫댓글 테오리아 헤시키아 아파테이아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정념과 평상심에 드는 비법을
알고 바라보게 하십니다.
깊은 명상 속에서 내 존재를 찾아보는 영적 여행^^*
예배 처음시간에 묵상이 곧
명상이요.
서로 통하게 됨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