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당시 청군 규모 요약
병자호란 전야 ‘다이칭 구룬(대청국)’은 팔기만주, 팔기몽고에 약 2만 명, 우전 초하(ujen cooha, 중군重軍, 팔기에 속한 한인 병력=팔기한군을 의미함 – 작성자 주)에 약 1만명의 갑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10명에 2명꼴로 총 1,300~1,400명 동원이 상례였던 三順王(모문룡 휘하에 있다 청에게 투항한 공유덕, 경정충, 상가희를 의미함) 휘하의 천우병, 천조병까지 더하면, ‘다이칭 구룬’ 자체의 군세는 31,000~32,000명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병자년 12월 홍타이지는 팔기만주, 팔기몽고에서 약 1만 명의 갑사를 조선 침공에 투입하였고, 우전 초하는 약 1만 명의 전 병력을 동원하였다. 천우병, 천조병에 대해서는 (상황이 급박한 관계로 – 작성자 주)상례보다 약 50% 더 많은 1,900~2,000명의 참전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병자호란에 참전한 ‘다이칭 구룬’ 자체의 정규 병ㄹ혁은 약 22,000명에 달했던 것으로 계산된다. 여기에 더하여 홍타이지는 병자호란 직전인 숭덕 원년 10월에 개최된 회맹을 통해 외번몽고 각 ‘구사’(팔기의 각 기旗 혹은 기를 관장하는 대신을 의미함 – 작성자 주)에 참전 병력을 할당하였고, 이에 따라 합계 약 12,000명에 달하는 외번몽고의 갑사들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결론적으로, 외번몽고를 포함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은 약 34,000명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약 34,000명이라는 숫자는 앞에서 밝혔듯이 어디까지나 갑사, 즉 정규병력만을 추산한 것으로,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침공한 청군 진영에 있던 모든 인원을 합산한 것은 아니다. 당시 청군에는 정규 갑사가 아닌 존재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갑사가 불법적으로 “한산무갑지인閑散無甲之人”을 대동한 경우가 있었다. 또한 외번몽고의 경우에는 숭덕 원년 10월의 회맹에서 할당하나 갑수甲數보다 많은 병력을 출전시킨 노얀도 보인다. 단 이들의 경우는 전체 인원 추산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수가 많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시에 군량이나 무기의 운방 등을 맡았던 쿠툴러(kutule, 종복從僕, 시졸廝卒)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팔기의 갑사들이 가노家奴(aha)를 쿠툴러, 즉 비정규 종군 인원으로 전쟁터에 데려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만큼,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 진영에도 적지 않은 수의 쿠툴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 쿠툴러 관련 사료를 검토해 보면 쿠툴러의 수에도 일정한 규제가 존재하여 팔기와 외번몽고 갑사 1인당 대략 0.5명의 쿠툴러가 따라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전 초하, 천우병, 천조병은 고위 장령이 아니라면 家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팔기만주, 팔기몽고, 외번몽고 부대에 한하여 갑사 1인당 0.5명의 쿠툴러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총수는 약 11,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쳐들어온 청군은 정규 병력 약 34,000명에 쿠툴러 약 11,000명을 합한 약 45,000명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보오이 니루’로부터 최대 2천 명의 갑사를 동원했다고 보더라도 참전 인원의 총수는 약 45,000명에 그친다. 또한 한산무갑지인과 같은 불법적인 참전 인원이나 외번몽고의 할당 갑수를 초과한 인원 등을 고려하더라도 5만 명 수준을 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참전 병력 규모는 언뜻 보기에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자체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처럼 비친다.(대중적인 역사인식 하에 그렇다는 의미 – 작성자 주) 즉, 당시 홍타이지는 조선의 군사적 역량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그리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않았으며, 그의 예상대로 전쟁은 단기간에 청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다이칭 구룬’의 전시 동원 능력을 고려한다면 병자호란은 사실상의 ‘총력전’이었다고 간주해도 무방한 전쟁이었다.
이 수치는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잡았던 종래의 통설에 비해 현저히 적어 보이지만, 병자호란 직전 전시 동원 능력의 실질적인 최대치 31,000~32,000명의 무려 70%에 해당한다. 여기에 숭덕 원년(1636) 6~10월에 아지거를 사령관으로 카라친, 투메트와 함께 화북에 출정시켰었던 병력을 재차 출정시키기 어려웠던 사정과 명나라와의 전선 및 수도 성경盛京을 비롯한 여러 요충지에 적잖은 수의 수비 병력을 유지해야 했던 현실 등을 감안하면, 병자호란 당시 홍타이지는 ‘다이칭 구룬’이 보유한 군사 역량의 거의 전부를 조선에 출병시켰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구범진 외,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구성과 규모」, 『한국문화』 (72), pp. 13, 28~31.
조선을 공격한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구성은 만주팔기, 몽고팔기, 한인팔기 및 천우병·천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규모는 총 50,000명을 넘지 못하였으나 홍타이지가 동원할 수 있었던 최대병력의 70%를 동원한 국가 대 국가 간의 총력전 수준이었음
앞선 게시물의 누르하치의 요동 점령 직후 후금의 상황이 혼돈, 파괴, 망각이었음을 고려하면 홍타이지 제위기간 동안 시행된 여러 개혁책이(황제 권력 강화, 몽고와의 혼인동맹, 행정기구 확립, 한인 지식인 및 군사세력 흡수 등) 나름대로 효과를 본 상황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위해 조선을 공격해야만 할 정도로, 또 이를 위해 전 병력 자원의 70%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여러 차원에서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