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길을 찾아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까? 현재에 만족하며 그저 그런 기독교인으로 살겠습니까?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재능을 묵히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두 번째 이야기의 첫 주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전제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시험에 들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마귀가 그대로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시험받으셨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로 나가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할 때도 시험받으셨고, 사역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유대인들에게 의해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시험받으셨다면 그 분의 자녀인 우리도 시험이 찾아오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지 기도만 하고 시험을 맞아해야 합니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시험을 대비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시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을 지라도,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틀지 않게는 할 수 있다. 머리 위에 둥지를 틀지 않게 하라.” 그렇습니다. 시험이 찾아오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약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스스로의 약점을 찾고 그것을 인정하고 살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더구나 현대인들은 강점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무엇을 잘하느냐? 잘 할 수 있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점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무너질 때는 강점 때문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약점 때문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킬레우스는 바다의 여신인 테티스와 펠레우스왕 사이에서 태어난 전설적인 영웅입니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는 제우스에게 이 아이를 불사(不死)의 몸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을 했고, 제우스는 아이 몸을 ‘스티크스 강’에 담그면 칼과 창이 뚫지 못하는 강철 몸이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를 잡고 강 속에 몸을 넣었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어떠한 강철로도 뚫지 못하는 초인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손으로 잡고 있어 강물이 닿지 않았던 발뒤꿈치는 그에게 가장 연약한 부분이 되었고, 결국 트로이 전쟁 중에 발뒤꿈치에 독화살을 맞아 숨을 거두고 맙니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바로 치명적인 약점을 뜻하는 ‘아킬레스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킬레스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점 때문에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강점은 그대로 두면 아깝기는 하지만 약점은 그대로 두면 그것 때문에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약점을 알고 대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약점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바로 그 부분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좋은 임금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전쟁에서의 승리를 주셨고 나라는 점점 다윗왕의 때에 강성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왕들이 전쟁에 나갈 때에 그는 궁전에 머물러 늦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았고, 결국 그 여인 때문에 그녀의 남편을 죽이는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에게는 이미 많은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의 부인 그것도 자신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남편을 죽인 것입니다. 디윗의 약점은 육체의 정욕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바로 그 부분을 파고들어 다윗을 무너뜨렸던 것입니다. 한순간의 방심이 그를 무너뜨렸기 때문에 그의 평생의 소원인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는 소원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반면 요셉은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던 집의 안주인이 그의 손을 붙잡았을때 그 손길을 뿌리침으로서 가족을 구원하고 당시 세상의 굶주린 사람들을 구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찾아온 시험에 빠지지 않았고 그것을 이겨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는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의 삶속에서 이루어진 기도가 분명히 있었을 것을 우리는 알지만 기도의 바탕위에서 드러난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도 시험을 대비하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먼저 폐쇄적인 삶에서 open된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대부분 유혹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감추고 숨기고 회피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은밀하게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모든 일을 은밀하게 함으로서 스스로를 함정으로 몰아 넣는 것입니다. 요셉의 손을 붙잡았던 여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39:11-12절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삶의 행위가 오픈되었을때 부끄럽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남편들이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있다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말하지 않고 살아가는 부분이 있다면 시험에 빠져 스스로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가정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앙인으로서의 분명한 가치관과 거부의 태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여인이 손을 붙잡았을 때 요셉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유혹에 빠져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거절합니다. 그러다가 중간지대를 만들어 놓습니다. ‘다 그렇게 해, 인간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어, 한번쯤은 이렇게 해줘야 하는거야’ 이 지역이 회색지대 분명하지 않은 지대를 만들어 놓고 그곳으로 도피합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짐승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울왕은 ‘좋은 짐승을 남겨 놓고서는 이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얼마나 좋겠냐?’고 회색지대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신앙적인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간관계 때문에 신앙을 접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인간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맺어지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유혹이란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있던 자리에서 떠나도록 만들어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군인이 자리를 이탈하면 탈영입니다. 결혼한 사람들이 가정을 이탈하는 것, 학생이 학교를 떠나는 것이 탈선입니다. 회사에서는 직원의 자리를 지켜야하듯이, 퇴근후에는 아빠의 자리, 남편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자기 합리화의 회색지대를 없애고 분명한 신앙의 정체성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자신이 있어야할 삶의 자리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신앙인으로 살 때 세상의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신가족여러분! 시험에 들지 않게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기도제목은 악에서 구원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시험이 페이라스모스란 헬라어를 사용하는데 이 뜻은 훈련이란 의미를 갖고 있지만 악이라고 쓰인 포네로스는 본질적인 성품으로서의 악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는 악인이 존재하고, 마귀가 존재하여 악을 행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거의 모든 드라마에 저 인간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인물말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일이 있는데, 악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주님만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즉 악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들의 영역이 아닌 주님의 권능을 의지함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완악함을 알게 하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라는 명령이 주어졌을 때 요나는 이를 거부하고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그 사람들이 뉘우쳐 용서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에는 용서받으면 안될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요나를 깨우쳐주기 위해 하나님은 그를 물고기 뱃속에 집어 놓고 그에게서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로서 온다’고 고백하게 한후 니느웨로 다시 보냅니다.
하지만 니느웨에 도착해서도 요나는 니느웨의 멸망을 보고 싶어할뿐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킨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죄의 본성을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악에서 구원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 기도는 사회적인 악에 대해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일어나지 않아야할 악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묻지마 살인, 자살에 이르도록 괴롭히는 악한 사람들, 남의 약점을 이횽해서 파멸에 이르도록 의도적이교 집요하게 괴롭히는 악인들이 존재합니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걸까요? 왜 가만히 계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악에서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도 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심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토이스토리3에 보면 인형들을 괴롭히는 악당 곰인형이 등장합니다. 낫소르라고, 영화의 결말부분에서 이 놈도 함께 쓰레기 처리장에 가게 되고 무거운 쇳덩어리에 눌려 산산조각이 날 위기에서 카우보이와 레인저가 구해주거든요,
그런데 이 곰돌이가 소각장으로 들어가는 레인위에서 멈출 수 있는 단추를 보고 도움을 받아 올라가서는 단추를 안누르고 도망을 가버려요. 결국 인형들이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서로 손을 맞잡고 눈을 감고 있는데 위로부터 다섯 손가락 갈고리가 나타나서 인형들을 구원해서 안전한 곳에 옮겨 놓거든요. 갈고리에 관심이 많은 피자인형 3형제가 구원해준거에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죠.
물로 그 영화가 복음적인 영화는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악에 의해서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한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다섯손가락(하나님의 손)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속에 살지만 여전히 희망과 새로움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악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권면합니다.
마지막 기도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주기도문은 산상수훈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 위치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 맞춰 살라는 메시지의 중심에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이 마지막 송영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두가지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루시도록 그분께 순종하고, 권위에 복종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왕되심을 고백함으로서 모든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소유권이 그분에게 있음을 기억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 있으니 우리의 소망과 미래 그리고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분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삶을 위해서 생명과 재산과 건강과 재능을 다 바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우루과이의 한 성당에 적힌 무명의 사람이 썼다는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할 때, ‘하늘에 계신’하지 마십시오.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마십시오. 자기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하지 마십시오.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마십시오.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지 마십시오.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지 마십시오.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지 마십시오.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하지 마십시오.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하지 마십시오.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주기도문의 축복과 사명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