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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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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려 토론방 군사전략수립과 전쟁수행으로 보는 고-요전쟁과 정묘/병자호란의 비교 - (4)
天狼星主 추천 0 조회 360 09.10.03 00:10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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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0.04 20:44

    첫댓글 화력문제는 사실, 청국군의 화기사용 수준이 조선이 생각했던 노토부락이나 니탕개 토벌전 당시의 여진인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는 데 더 중심을 두어야 할 거 같습니다. 1600년까지 조선군이 승자총통 정도의 화기를 가지고도 장창전술과 연계, 여진인을 토벌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홍이포나 다연장인 삼안총, 조총등으로 무장한, 8기군이 과거 여진 부락의 수준으로 평가받았고 이에 따른 대응책으로 싸우려했기 때문에, 화력전에서 당연히 밀릴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 09.10.04 20:48

    게다가, 전면전의 대표적인 전훈이 된 조일전쟁에서는 한산도 대첩을 제외하고는 큰 전투는 거의 공성전이었다는 겁니다. 당연히 조선은 여진족의 후금군도 공성전을 하리라는 막연한 기대하에 전쟁지도를 했을거고, 여기서 기동전 개념이 15세기 이후, 사라진 조선이 허를 찔렸을 겁니다. 또한, 전에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조선은 당시, 전략물자 비축에 대한 개념조차도 없던 나라입니다. 조일전때의 경험으로 너무 철저한 청야작전을 이미, 정묘전 당시에도 보여줍니다. 당시 유도대장이었던 김상용이 한양성내의 모든 국고에 불질러 버리는 삽질을 저질러버리죠

  • 09.10.04 20:50

    남한산성 전 직전 몇년동안 조선은 사실, 산성도 잘 수축하고 물자도 잘 모아두었는데, 무슨 생각인지 관료들이 백성이 너무 힘들다는 아주 인도적인 이유 하나로 남한산성내의 물자까지 전부 노량진에 모아두었다가 남한산성 포위 후, 청군이 이를 알고 전부 노획했고, 이 식량덕분에 20만 대군의 수개월치 식량이 충족되는 결과로 나타나죠. 결론적으로 당시, 조선은 전혀 장기전에 대한 개념이 과거의 페러다임에 근거한 상태였기 때문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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