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북적(北敵)의 목표와 고려와 조선의 방어전술 비교
A. 침공의 목적과 침략군의 전략
지금까지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고-요전쟁 당시의 遼軍과 후금/청軍은 한반도를 공격하는 이유에서도 유사성을 보인다. 중국에 있는 한인(漢人)왕조와의 대결을 앞두고 있거나 전쟁후 소강상태에서 그 배후에 있는 한반도 왕조(고려/조선)를 굴복시키기 위함이었다. 두 국가모두 중국과의 전쟁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과의 장기 소모전은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적인 제약 때문에 요와 후금 모두 기병을 위주로 한 속전속결의 단기전을 계획하였다.
거란의 경우는 고려가 신라의 영토에서 일어난 고려가 자꾸만 고토회복을 획책하고 백성을 구제하지 않으며 거란이 세운 요(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송(宋)과 계속 통교를 한다는 것을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전자는 단순한 핑계에 불과하지만 바로 옆에 붙어있는 국가가 자국의 주적(主敵)과 계속 통교(通交)하고 자국을 적대시 한다는 것은 요로서는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요는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점령하고, 청천강 이북의 영토를 할양받는 것과 동시에 고려의 대송(對宋)외교를 중단시키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거란은 고려를 점령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요나라의 행동은 자국에 위협이 되는 행위를 중지시키거나 적국으로 하여금 자국이 원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강요(Compellence)’차원의 무력행사였다. 여기서 핵심은 정치적 의지의 관철이지, 적의 파멸이 아니다. 강요적 전쟁에 나선 세력은 적이 불쾌한 행동을 중지하고 자국의 의도대로 행동만 한다면 지체없이 물러선다. 애초부터 제한적인 목표를 설정했기 때문에 청천강을 넘지못하고 2차적인 목표인 개경점령을 하지 못했어도 협상을 통하여 자국이 원하는 것(고려의 대송외교 단절)을 얻었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물러선 것이다. 서희가 이몽전이 들고온 소손녕의 서신을 논하는 자리에서 “契丹의 東京으로부터 우리 安北府에 이르기까지의 數百里의 땅은 다 生女眞의 所據인지라 光宗이 그것을 빼앗아 嘉州 松城 等의 城을 쌓은 것인데 이제 契丹이 온 것은 그 뜻이 이 2城을 取하고자 함에 不過한 것인데 그 高句麗 舊地를 取하겠다고 聲言하는 것은 實은 우리를 두려워 하는 것이오니…”라고 한 것은 거란의 제한적인 목표를 간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627년에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킨 후금(後金)의 목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태종실록>에는 협상과정에서 요구를 늘어놓고 사신을 보내 답하지 않으면 다시 남진하겠다는 협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묘호란은 본격적인 침략이 아니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영원성(寧遠城) 전투에서 누루하치가 포탄에 맞은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이괄의 난에 가담하였던 잔당들이 조선침공을 종용하자 침공한 것이고, 그 이유는 누르하치의 죽음으로 인하여 혼란스러운 후금상황을 조선침공으로 수습하고자 한 것이다. 지속적으로 후금의 배후를 괴롭혀 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부대를 무찌르고 모문룡의 본영이 있는 가도를 점령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불과 35000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조선을 쳤다는 것이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방증이다. 특히 전근대의 단위로 700리가 넘은 의주-서울 축선상에서 보급을 유지하려면 통상적으로 거점에 경비병력을 남기고 가야하기 때문이 병력이 많지 않으면 다수의 거점들에 일일이 경비병력을 잔류시키는 것은 스스로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묘호란때 청군이 형제지맹만 맺고 쉽게 물러간 이유도 적은 병력이 부담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B. 고려의 기동방어
이들 북방제국의 침략을 대비하는 고려와 조선은 일견 비슷한 전략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각 거점을 산성(山城)등의 요새로 만들어 적에 의한 포위공격과 소모전을 유도하고, 적이 지쳤을 때 반격을 한다는 전략이었다. 첫 장에 상기된 4개의 국방개념중 ‘방어’에 중점을 두는 수세적 전략이었다. 그러나 비록 수세적으로 보일 지라도 그 전술을 고려와 조선군의 실행하는 방법은 달랐다. 일단 고려군은 단순히 성에 앉아 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비대를 두고 적병력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거란장수 소손녕이 자칭(自稱) 80만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널 때 소규모 고려군 부대가 나타나 도처에서 거란군을 습격하였다. 거란군의 피해가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거란군의 진격을 늦추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요새들에게 수비를 강화할 시간을 확보해주었다. 적의 병력이 자국을 침공하였을 때, 기동 예비대의 존재는 침공군에게 상당한 부담이 된다. 일단은 거점 우회 시도를 차단할 수 있고 거점을 포위하면 외부에서 위협을 가하기 때문에 침공군은 행동과 작전의 자유가 상당히 제한된다. 645년의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서 고구려군은 말갈(靺鞨)병을 포함한 15만의 야전병력을 유지한 것이 보이는데, 비록 고구려 야전군의 선봉부대가 패하기는 하였지만, 당군은 이 야전병력의 존재 때문에 평양에 대한 직공(直攻)계획을 포기 하고 고구려의 요동방어선을 돌파하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물러가고 만다.
이와 더불어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가 BC 480년에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 저항군을 힘겹게 물리치고 그리스 본토로 밀고 내려왔을 때, 그리스에서 세력이 가장 큰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방어계획을 두고 의견이 엇갈린 사례가 있다. 스파르타는 두개의 바다가 거의 만나는 코린토스(고린도)의 지협(地峽)에 성을 쌓아 페르시아군을 저지해야 한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테네군을 이끌던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무리 성을 쌓아도 페르시아는 수천척의 함선이 있기 때문에 병력을 싣고 다니다가 방비가 부족한 곳에 상륙을 시키면 그만이라고 역설하였다. 페르시아의 기동군 역할을 하고 있던 함대를 쳐부수지 않고는 근본적인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뜻을 관철시키고 그리스 연합함대를 이끌고 나가 페르시아 함대를 살라미스에서 대파한다.
이런 사례는 무엇을 뜻하는가? 적이 자국을 침공하면 이를 물리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적의 주력 부대를 공격하여 괴롭히고, 종내 격파하는 것이다. 고려는 기동군을 두어 고-요전쟁 내내 거란군을 괴롭혔다. 위에서 언급한 소손녕 군단에 대한 공격이외에도 2차 침공때 요장(遼將) 을름의 선봉부대를 서경 북쪽의 임원역(林原驛)에서 격파한 탁사정, 지채문, 승장(僧將) 법언의 부대가 있다. 의주 근처의 흥화진을 지키고 있던 고려 장수 양규(楊規)는 즉시 성안의 부대를 기동부대로 편성하고 통주에서 1000명의 지원을 얻어 1700의 부대로 곽주를 공격하였다. 그는 불과 1700으로 곽주를 지키고 있던 6000명의 거란군을 섬멸한다. 이외에도 후방에 점령하지 못한 고려군의 거점들이 온존하여 있었다. 이 때문에 후방이 급해진 요 성종(聖宗)은 화의만 맺고 구체적인 명문화도 뒤로 한 체 다급하게 철수한다. 양규와 귀주(龜州)의 별장 김숙홍등의 부대는 귀로의 요군 선봉부대를 공격하여 1만 이상을 사살하고 후속부대까지 강타한다. 그러나 성종이 이끄는 요군 본대에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요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중에도 정성(鄭成)이 이끄는 고려군이 기습을 가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이로 인하여 점령되었던 성을 모두 탈환하였다. 거란의 3차 침공때도 서북면(현 평안북도)의 주요거점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주력부대는 야전에 두어 거란군이 청천강을 건너는 것을 막고 전장(戰場)을 청천강 이북으로 한정시키려 하였다. 여기서도 김종현(金宗鉉)의 부대가 별동군으로 설정되어 방어선이 돌파될 경우를 대비하게 하였다. 야전군 체제를 갖춘 강감찬은 거란의 남로군(南路軍)을 쳐부순 다음에 속은 것을 알고는 강민첨에게 소배압을 추격하게 했다. 강민첨은 내구산에서 소배압 부대의 후미를 따라잡아 기습하여 많은 피해를 입힌다. 소배압군이 개경에 접근하자 김종현의 부대가 급파되어 개경의 수비를 굳혔다. 개경을 공격하기에 역부족임을 느낀 소배압군이 철수를 하여 귀주에 도착하자 이를 강민첨군이 맞아싸웠다. 요군은 다시 북쪽으로 후퇴하다가 강감찬군과 싸우게 되었다. 이때 때마침 개경에서 강행군을 한 김종현의 부대가 기습하고 추격하던 강민첨 부대가 때마침 들이치니, 삼면공격을 받은 요군은 무너지고 말았다. 수성전(守城戰)을 기본으로 하되 기동 예비대의 중요성을 인식한 고려의 통쾌한 승리였다. 고려를 굴복시키는데 실패하고 3차 침공때 참패를 당한 요나라는 다시는 고려를 침공하지 못한다.
C. 조선의 수동적 거점방어와 야전(野戰)의지의 결여
인조반정이후 조선은 중앙군이 강화되고 지방군이 약화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새로이 등극한 왕과 반정세력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이 급했기 때문이다. 특히 서북(평안도) 지역은 이괄의 난에 많은 정예병이 동원되었다가 몰살당하고 서북지역 전체를 불과 1만의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조선의 친명(親明)정책을 불편하게 여긴 후금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자 조선은 서북면 방어를 급하게 보강하였다. 1626년 8월에 후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조선 조정은 공격축선상의 각 거점을 강화함은 물론 정예인 훈련도감(訓鍊都監)군 250명과 하삼도(下三道)에서 징집한 5000명의 서북지역에 배치하였다. 이어 11월에는 함경도 남부지역에서 병력 2000명을 차출하여 평안도 방면으로 재배치하였다.
조선이 후금의 침공에 맞서 행한 노력은 상당했지만 방어전에서는 적의 야전군을 격파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임을 간과한듯 하다. 조선군과 후금군이 전투를 벌인 의주, 창성진, 용골산성, 안주의 전투는 모두 성을 둘러싸고 부딪힌 공성전(攻城戰)이었다. 야전에 부대를 편성하여 후금군을 기습한다던가, 아니면 후금의 주력부대를 야전으로 섬멸하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성을 지키는 병사들도 전투의지가 결여된 모습을 벌였다. 의주전투에서는 일부 병사들이 탈영햇고 용골산성 전투를 앞두고는 후금군에 아예 항복하려는 무리들까지 나왔다. 성벽이라는 장애물 뒤에서 조차 탈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군사들이 적의 군사와 직접적으로 대결해야 하는 야전에서 전투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군이 야전을 포기한 탓에 각 거점을 공격하는 후금군은 외부의 위협없이 성을 공격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불과 한 세대전,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공방전에서도 외부 호응부대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공성전에 관한 전술적 경험이 정묘호란에서는 반영이 되지 않은 듯싶다. 외부의 지원이 없었던 서북의 거점들은 용골산성만 제외하고는 힘없이 무너졌다. 그나마 정묘호란중 유일하게 있었던 야전 시도는 황주에서 황해병사 정호서가 이끄는 황해도 병력 5000명이 후금군을 기다린 것이다. 평양에서 지원오기로 되어있었으나 평양의 군민이 후금군앞에서 모두 도망치고, 심지어는 평안감사도 도주하는 바람에 정호서는 자신의 병력만으로 후금군이 감당이 안된다고 생각하고 봉산으로 후퇴하였다. 정호서가 야전을 포기하는 바람에 후금군은 조선의 수도인근까지 무인지경으로 달리게 되었다.
조선조정은 서북에서 후퇴해온 병사들과 함경/강원도에서 병사를 차출하여 임진강에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한강에는 총융청(摠戎聽)군과 하삼도에서 모은 군사들로 방어선을 만들었다. 만약 후금군이 도하를 시작하였다면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나 청과 조선이 화의를 체결하는 바람에 전쟁은 끝났다. 후금군은 불과 35000의 병력으로 조선 서북의 여러 거점을 무너뜨리고 전투를 치르면서 한양과 지척에 있는 개성까지 300km 거리를 불과 15일만에 진출하였다. 이는 기동방어를 애초에 포기하고 수성(守城)에만 의지한 전술적 실책과 의주나 평양등지의 군민(軍民)이 보여준 전투의지 결여에 기인한 바가 크다.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의 움직임을 보면 정묘호란에서의 실책을 만회하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거의 동일한 형태의 공격이 이루어질 것임에도 기본적인 작전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만약 후금(이때는 청)군이 침공을 개시하면 수비군은 서북지역의 각 요새로 들어가 농성전으로 청군을 지연시키고 수도권 방어에 가능한 시간을 번다는 것이 조선군 작전의 골자였다. 이 작전의 실행을 위하여 조선은 각 지역의 산성에 3천에서 5천의 병력을 분산 주둔시키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각 요새는 스스로의 힘으로 버텨야 하고 상호구원이 어렵게 된다. 이를 보면 조선군은 성에 들어가 농성하는 동안 인구가 많은 삼남(三南)에서 병력을 모아 반격하는 先수비, 後 반격의 전술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간에 청군의 본부대를 공격하여 무찌른다는 개념은 없다. 이렇게 피침략국이 야전전투를 위한 기동예비대를 두지 않고 단지 고립된 요새에서 농성에만 의존할 경우 적군은 요새들을 우회하여 버리는 것으로 간단히 수비작전을 무력화시켜 버릴 수가 있다. 그리고 병자호란은 실제로 이런 형태로 전개가 된다.
물론 적군이 후방의 거점을 방어하기 위하여 경비병력을 잔류시킬 경우 전력이 약해진다고 할 수 있지만, 청의 태종(太宗) 홍타이치는 이미 그런 상황을 예상하고 잔류병력으로 활용할 3만의 몽고군을 대동하고 있었다. 이에 16000명으로 구성된 치중대(보급부대)를 구성하여 현지보급이 아닌 후방을 통한 보급체계를 세웠다. 청태종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1636년 12월 10일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용천-곽산-선천등을 거치는 전통적 축선을 따라 진군하였다. 소수의 병력을 각지에 잔류시키는 한 편, 공략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는 안주성등의 요새는 우회하였다. 본군과는 별도로 마푸다(馬夫大)의 선봉부대는 청태종보다 12월 8일에 압록강을 건넜고 예친왕 도도가 읶는 청의 좌익군 역시 12월 8일에 압록강을 건너 백마산성을 공격해 보았으나, 성이 견고하고 군민의 항전태세가 강해보여 그대로 지나친다. 청군은 선봉대가 12월14일에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 철옹산성 전투와 홍제원(弘濟院)에서 조선의 결사 기병대 80명과 접전한 것 이외에는 거의 전투가 없었다. 이는 거점을 가급적이면 점령하기 보다 우회하면 된다는 청군의 기본 전략때문이기도 하지만, 청군을 어느 형태로든 적극적으로 공격하려는 조선군 야전전력의 부재(不在)가 보다 큰 요인이라 하겠다. 전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청군은 전력의 소모가 거의 없이 12월 14일에 한양 인근에 도착하였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힌 인조는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한양을 지키고 있던 심기원의 6천 조선군은 청의 좌군(左軍)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결전을 기하기 보다는 삼각산(三角山)에 올라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보다 느리게 오고 있던 청의 우군(右軍)은 12월 23일 평양인근의 중화(中和)를 출발하여 12월 25일 토산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김자점의 5000부대를 공격하였다. 그나마 야전 부대와 함께 나와있던 김자점은 청군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청군의 야간기습을 허용하여 참패하고 말았다. 조속히 야전에서 청군을 격파하지 못한 조선군은 남한산성의 포위를 허용하고 말았고 인조는 혹시라도 자신의 격문을 보고 지방에서 얼어날 근왕군(勤王軍)의 구원을 기다려야 했다.
강원도와 평안도,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근왕군이 조직되어 남한산성의 구원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정규병력과 민간인이 혼합된 혼성부대인 근왕군들의 전투력은 기대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강원도에서 일어난 7000근왕군은 12월 26일에 검단산 근처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초반의 우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청군의 화력에 밀려 패하고 말았다. 토산에서 패퇴한 김자점은 자신의 패잔병 2000에다 강원감사군 6000, 함경감사군 7000, 그리고 삼각산에서 청군에게 패한 심기원의 패잔병 2000을 합쳐 17000을 확보하였으나 남한산성 전투에 적극 개입하지 못하고 관망만 하다가 인조의 항복을 맞았다. 전라도 근왕군은 수원 인근의 광교산(光敎山)에 진출하여 청태종의 매부인 바이앙고라를 사살하는등 승리를 거두었으나 단독으로는 남한산성을 구원할 길이 없어 결국 수원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경상도 근왕군 2000명 역시 1월 3일 여주근처에서 청군의 습격을 받고 조령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근왕군들의 규모를 표로 정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표 2. 병자호란시 남한산성 포위후 일어난 근왕부대
첫댓글 화력문제는 사실, 청국군의 화기사용 수준이 조선이 생각했던 노토부락이나 니탕개 토벌전 당시의 여진인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는 데 더 중심을 두어야 할 거 같습니다. 1600년까지 조선군이 승자총통 정도의 화기를 가지고도 장창전술과 연계, 여진인을 토벌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홍이포나 다연장인 삼안총, 조총등으로 무장한, 8기군이 과거 여진 부락의 수준으로 평가받았고 이에 따른 대응책으로 싸우려했기 때문에, 화력전에서 당연히 밀릴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게다가, 전면전의 대표적인 전훈이 된 조일전쟁에서는 한산도 대첩을 제외하고는 큰 전투는 거의 공성전이었다는 겁니다. 당연히 조선은 여진족의 후금군도 공성전을 하리라는 막연한 기대하에 전쟁지도를 했을거고, 여기서 기동전 개념이 15세기 이후, 사라진 조선이 허를 찔렸을 겁니다. 또한, 전에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조선은 당시, 전략물자 비축에 대한 개념조차도 없던 나라입니다. 조일전때의 경험으로 너무 철저한 청야작전을 이미, 정묘전 당시에도 보여줍니다. 당시 유도대장이었던 김상용이 한양성내의 모든 국고에 불질러 버리는 삽질을 저질러버리죠
남한산성 전 직전 몇년동안 조선은 사실, 산성도 잘 수축하고 물자도 잘 모아두었는데, 무슨 생각인지 관료들이 백성이 너무 힘들다는 아주 인도적인 이유 하나로 남한산성내의 물자까지 전부 노량진에 모아두었다가 남한산성 포위 후, 청군이 이를 알고 전부 노획했고, 이 식량덕분에 20만 대군의 수개월치 식량이 충족되는 결과로 나타나죠. 결론적으로 당시, 조선은 전혀 장기전에 대한 개념이 과거의 페러다임에 근거한 상태였기 때문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