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를 돌아본후 양산을지나고 충청남북의 경계인 제원면을 지나 금산을 경유해 대둔산옆 진산면을 넘어서야 벌곡면에 도착하고 멋진 산길들을 넘고 넘어서야 개태사가 있는 연산면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여섯 개의 면소재지를 지나서온 곳인데 길이는 그리 멀지는 않았다. 개태사는 연산면의 천호산밑에 자리하고 있는데 산세와는달리 평지에 지어진 사찰이다. 고려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후 왕명으로 지은 절이라니 천년의 세월이 느껴지는 듯 하다. 국도 바로옆에서 개태사 일주문이 보인다. 천황문 들어가기전 주차를 하였다.
입구에 들어서자 벌써 느낌이 화려한 사찰은 아니라는 것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는 사주문 앞에 서면 야트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는데 규모가 아주 작은 사찰임을 금방 알 수가 있게 된다.
이곳을 들어서면서 또다른 느낌은 보통 일주문이라 해서 기둥이 하나씩 세워진 아니 둘다 합치면 이주문이 되겠지만 이곳의 천왕문과 사주문은 기둥이 네 개인 것이다. 물론 다른 곳의 문도 기둥이 네 개일 수 있지만 이렇게 기둥만 보이는 사주문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개태사 천왕문...]
절의 입구에 위치한 기둥 4개로 구성된 사주문이다. 개태사의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종도리 받침장여 아래의 뜬창방에 '佛紀三千七年庚申八月二十八日午時上樑于乙坐申向壬子生成造之大運' 뒤에 몇 글자가 더 있으나 글자가 덧씌워져 있어서 판독은 불가능하다. 원래는 횡서로 '大天護山三天一地開泰寺'라는 현판이 정면에 걸려 있었으나 지금은 현판이 없다. 또한 원래는 내부 좌우 벽에 각 2구(軀)씩 사천왕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수리로 인해 벽화도 지워진 상태이다. 원래 천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으나 사세(寺勢)가 약해 일반적인 사천왕문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현재는 그 용도마저 잃게 되었다.
[개태사 사주문...]
천왕문으로 사용되는 사주문 안쪽에 위치한 문으로, 4개의 기둥을 사용한 도리통 1간, 양통 1간의 사주문이다. 막돌초석 위에 원기둥을 세웠으며, 초익공식이다. 가구는 3량가로 지붕은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최근에 지어진 사주문으로 2짝 판문이 달려 있고, 좌우로 담장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최근 절의 정비 공사를 거치면서 실질적인 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인다. 홑처마인 점 등 일부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먼저 지어진 사천왕문으로 사용되는 사주문의 평면과 규모, 구조와 형식을 그대로 따라 지은 것이다.
[경내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요사채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요사는 앞마당의 남쪽에 북향, 즉 마당을 바라보며 위치하고 있다. 2003년에 신축한 건물로 평면은 ㅌ자형이다. 마당에 면해 一자형 건물을 두어 폐쇄적으로 구성하는 조선시대 이래의 일반적인 배치와 달리 마당을 향해 열린 평면으로 구성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두 단 정도 쌓아 낮게 만들었고,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다. 초익공집으로 익공 외단은 궁궐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초각을 한 몰익공으로 하였다. 지붕은 겹처마로 팔작지붕이다.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아직 단청은 베풀지 않았다.
[개태사 요사채가 인상적 이다...]
[개태사 오층석탑과 중창공덕비가 보이고...]
[개태사 오층석탑...]
사주문을 들어선 담장 안쪽, 용화대보궁 앞 넓은 마당의 한쪽에 위치한 5층석탑은 개태사지 제일 북쪽에 있던 것을 1930년 이후에 천명보살에 의해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현재 1층 옥개석에서 5층 옥개석까지의 석재가 원래의 것이며, 기단과 1층 탑신 및 상륜부의 보주는 최근의 수리로 보충한 것이다. 한편 탑 앞쪽에 있는 앙련의 석재는 상륜부에 부속된 석재로 추정된다(현장의 안내문)고 하나, 크기와 형태로 보아 이 탑의 상륜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 4개 층의 탑신석은 모두 단일석으로 만들어졌다.
탑신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이 네 모서리에 우주(隅柱)만 양각했다. 우주는 탑신석의 크기에 비해 가는 편에 속한다. 옥개석 역시 모두 단일석으로 만들어졌다. 각층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모두 네 단으로 각 단의 높이는 낮은 편이다. 처마는 아래면과 윗면 모두 반곡된 곡선이며, 추녀와 지붕면에도 반곡을 두었다. 옥개석 위에는 상층의 탑신을 받치기 위한 탑신고임은 두지 않았다. 탑신석은 2층에 비해 3층이 비교적 많이 줄어든 편이다. 또한 5층 탑신도 4층 탑신에 비해 좀 많이 줄어든 감이 있다.
[개태사 오층석탑...]
반면에 옥개석은 1층과 2층 옥개석 사이, 3층과 4층 옥개석 사이가 다른 층에 비해 체감이 약간 큰 편에 속한다. 옥개석 모서리가 깨어져 나간 것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도 생각되지만 원래부터 5층이 아닌 그 이상의 규모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기단과 1층 탑신이 소실되어 단정 짓기는 어려우나 신라계 탑의 기본 형식을 따르면서도 전체 비례는 충청도 지역 백제계 탑의 형식을 약간 반영한 듯한 조형을 지니고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으로 각 단의 높이가 낮은 점,
우주의 굵기가 비교적 가는 점 외에 세부 수법이 남북국시대 신라의 석탑에 비해 약화되었으나 비교적 규모가 크고 장대한 점에서 고려시대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은 개태사가 고려 초에 창건되었고, 고려 말에 폐사되었다는 연혁과도 일치한다. 다만 세부 기법이 상당히 약화된 점은 지방색으로 볼 수도 있으나 부여 무량서 석탑 등과 비교해도 시대가 떨어질 가능성이 있고, 원래 이 탑이 개태사지의 중심 위치가 아닌 사역(寺域)의 북쪽 끝에 치우쳐 위치했었다는 점으로 보아 개태사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개태사 중창공덕비...]
오층석탑의 뒤편, 용화대보궁 측면 마당에 1930년 개태사를 중창한 김대성화 보살의 공덕을 기록한 ‘開泰寺重創主金大成華功德碑’라는 제목의 碑가 있다. 1979년에 조성한 것으로 귀부와 이수 및 비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부와 이수는 모두 화강석으로 귀부에는 거북을 새겼다. 이수는 맨 아래 비신과 만나는 곳에 앙련의 띠를 돌린 위에 정면과 후면에 각각 용 두 마리가 구름 속에서 서로 마주보며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새겼다. 여의주 위에는 연꽃을 새겼다. 귀부와 이수의 조각은 기계칼로 가공한 흔적을 그대로 남기고 있는
1970년대의 날카롭고 조악한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다. 비신은 검은 색의 오석을 이용했으며, 정면과 후면, 그리고 좌측면(向右側)에 음각으로 글을 새겼다. 글은 문학박사 이종익(李鍾益)이 짓고 삼일원장(三一院長) 정봉화(鄭鳳和)가 썼다. 정면에는 중앙에 길게 종서(縱書)로 ‘開泰寺重創主金大成華功德碑’라는 글을 크게 새긴 좌우에 각각 “爲國丹誠 千古無比”, “爲法忘軀 萬古無倫”이라는 글을 역시 종서로 새겼다. 비문은 후면에서 좌측면까지 연속해서 종서로 새겼다.
[개태사 중창공덕비...]
[역사를 말해주는 듯한 석조물...]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석조물이 이렇게...]
[개태사 용화대보궁이 요사채와 마주보고...]
1992년 창건된 용화대보궁은 개태사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을 모시기 위해 부석사 무량수전을 모방해 지은 건물이다. 도리통 5간, 양통 3간의 규모로 주심포식의 팔작지붕으로 된 건물이다. 평면은 도리통 5간, 양통 3간으로 도리통의 중앙 3간을 양 협간에 비해 넓게 설정하였으며, 측면은 중앙 1간을 양 협간에 비해 상당히 넓게 설정하였다. 내부에는 8개의 고주를 외진주의 중심열에 맞추어 배열하였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평면을 그대로 모방한 평면이다. 어간의 후면 벽에 의지하여 석불입상을 모셨다.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 및 갑석으로 이루어졌으며, 화강석을 말끔하게 다듬어 사용했다. 계단은 정면 중앙에만 있다.
초석은 화강석을 방형으로 다듬어 사용하였으며, 주좌는 만들지 않았다. 기단 윗면에는 방전을 깔았으며, 초석 사이는 고막이돌을 두었다. 초석의 운두가 낮고 하인방을 낮게 들인 것으로 보아 원래는 내부 바닥도 외부 기단의 윗면과 같은 높이로 하여 입식의 구조로 사용하도록 의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내부 바닥은 석불입상을 안치한 부분을 제외한 전체에 온돌마루를 깐 좌식의 구조이다. 원래의 의도에서 사용상의 편의와 관습에 따라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기둥은 모두 배흘림 원주이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올려 놓은 위에 내외2출목의 주심포를 짜 올렸다. 주두와 소로는 굽받침이 있고 굽을 곡면으로 하였으며, 살미와 첨차는 외단을 사절(斜切)하고 그 아래에 연화두형을 새겼다. 주간(柱間)에는 화반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뜬장여 아래에 소로 하나만을 두었다. 공포의 짜임에서 세부적인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석사 무량수전을 완전히 모방하고 있다. 2고주9량으로 구성된 가구 역시 전체적인 구조와 각 부재들의 세부 형태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부석사 무량수전을 모방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다.
[개태사 용화대보궁 현판...]
정면의 중앙 세 간에는 문설주를 두어 구획한 다음 가운데 두 짝의 여닫이문, 양 옆에 외짝의 들창을 달았다. 양 협간은 세 짝의 들창을 달았는데, 각 문짝 사이는 문설주를 세웠다. 창호는 모두 정자살이다. 후면에는 어간에 두 짝의 판문을, 그 좌우의 간에는 살창을 두었는데, 내부에서는 창호가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양 측면에는 전면 쪽에 출입을 위한 외짝의 여닫이문을 두었다. 양 측면에 설치된 창호를 제외한 전면과 후면의 창호 역시 부석사 무량수전의 창호 구성과 형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용화대보궁은 기단과
초석의 형식 및 단청 등 일부를 제외하면 평면과 기둥, 공포, 가구, 지붕에 이르기까지 부석사 무량수전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이것은 개태사가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용화대보궁에 모시기 위한 석불입상이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龍華月出鷄龍天 / 十方萬國大統化 / 十方唯一眞主皇 / 十方垂界大活用 / 如是無量大眞光 / 唯有亞聖頗微笑' 어간의 후면 벽에 기대어 모신 석불입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며, 그 앞에는 석조대좌를 두었다. 양측면의 중앙 벽에는 각각 신중탱과 지장탱을 조성하여 걸었다. 이들 불화는 모두 최근에 조성된 것들이다. 의식구로는 범종 하나가 있다.
[개태사 보물 제219호 석불입상...]
본존불 높이 4.15m, 우협시 높이 3.21m, 좌협시 높이 3.21m 황수영 편저,『국보4-석불』(도판해설:정영호), 서울;예경산업사, 1985에 따른 것으로 현장의 안내문에는 3.50m로 되어 있다. 개태사가 고려 태조 때 창건된 것으로 보아 이 삼존석불 역시 고려 초기에 추정된 것으로 보인다. 삼존석상으로서는 巨作에 속하며, 고려시대의 불상을 대표할만한 한 작품이다. 본존은 높이 4.15m, 좌우협시는 각 3.21m이다. 1930년 폐허가 되었던 개태사를 중창하면서 파괴되어 묻혀있던 석불 2구를 복원하였으며, 1987년에는 배수로 확장공사를 하던 도중 좌협시불의 불두(佛頭)를 발견하여 복원하였다.
1992년에 삼존석불을 모시기 위한 불전으로 용화대보궁을 이어 봉안하였다. 본존은 복련을 새긴 작고 간단한 형식의 방형대좌 위에 서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繫)가 큼직한 편이다. 살짝 미소짓고 있는 상호는 원형에 가깝고 평판적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눈과 코, 입 등의 비례가 적당한 편이나 다소 둔중하다는 느낌을 준다. 전체 비례가 5등신에 가깝고 넓은 어깨와 굴곡 없는 신체의 선 등이 석인(石人)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다소 투박하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올렸고, 왼손은 배에 대고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듯하다 양손은 모두 신체에 비해 매우 큰 편이며, 조각도 둔중하다.
[개태사 보물 제219호 석불입상...]
법의 아래로 노출된 양 발도 큰 편으로 둔중한데, 장방형에 가까운 윤곽을 지니며, 발가락의 표현도 매우 소박하다. 法衣는 두껍게 표현되어 무거운 느낌을 준다. 좌우협시는 모두 복련을 새긴 낮고 간단한 형식의 팔각대좌 위에 서있다. 두 협시상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수법으로 조각되었으며, 본존과도 비슷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좌협시는 본존에 비해 상호가 갸름하고 신체도 약간의 굴곡이 표현되는 등 좀 부드러운 느낌이다. 왼손은 가슴 앞에 들어올려 施無畏?與願印을 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허리춤까지 들고 있다. 양손의 조각수법 역시 본존에 비해 섬세하고 부드러운 편으로 사실적이나 둔중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발은 본존과 같은 장방형 윤곽에 발가락을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협시도 좌협시와 거의 비슷한 수법을 지니고 있다. 한편 석불입상 앞에는 새로 조성한 넓은 石床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것을 받치고 있는 석재는 탱주와 우주를 새겨 두 간으로 구획한 사이에 眼象을 새겼다. 안상 안쪽에는 꽃을 새겼는데, 그 수법으로 보아 석불입상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개태사 용화대보궁안 우측 협시...]
[개태사 동종...]
[축대위에 모셔진 갖가지 동자승들의 표정...]
[신도들의 정성이 모여서...]
[개태사 정법궁...]
마당 뒤편에 축대를 쌓아 한 단 높게 조성한 대지 위에 있다. 정면 어간에 ‘正法宮’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의 한쪽에 ‘甲寅五月五日造成’이라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74년에 신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면 협간에는 ‘創運閣’이라 쓴 또 하나의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목조기둥 하나가 있으나 지은 후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보가 쳐진 것을 보강하기 위해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어간 후면에는 불단을 둔 위에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셨다. 전면 기둥에는 주련 형식을 빌려 ‘南北統一世界平和祈願大道場’이라는 글을 써놓아 개태사가 호국의 성격을 지닌 사찰임을 강조하고 있다.
[개태사 정법궁...]
[개태사 정법궁의 협간에 걸려있는 또하나의 현판...]
[개태사 정법궁내에 모셔진 단군상...]
[정법궁내부 좌측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고...]
[쓰인 편액이 걸린 팔각전각...]
이 건물은 마당 뒤편, 즉 동쪽 축대 위의 대지에 정법궁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다듬돌을 한 단 쌓은 외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이 건물은 내부에 석조좌상을 모시고, 그 뒤편으로 산신탱과 칠성탱을 걸었으며, 정면에 “三一老上正天”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평면은 보기 드문 팔각형이며, 내부에는 방형을 이루도록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안쪽에 불단을 만든 다음 석조불 좌상을 모셨다. 불상 상부에는 닫집을 두어 장엄을 베풀었다. 초석은 화강석을 비교적 거칠게 다듬은 방형초석이며,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는 초익공 짜임을 이루고 있으며, 지붕은 겹처마에 모임지붕, 즉 팔모지붕이다. 가구는 내부의 기둥 4개와 외부 기둥 8개를 이용해 구성했다. 즉 외진주 8개에서 내진주열을 향해 보를 걸었는데, 하나 걸러 하나씩 하나는 내진주에, 하나는 내진주 사이를 연결하는 수평재의 중앙으로 걸리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현판이 걸려있는 정면에만 4분합문을 달았고, 나머지 간에는 모두 두 짝의 여닫이문을 달았다. 모든 창호는 동일한 형식으로 하부에 궁창부를 두고 살대는 띠살로 구성하였다.
[팔각전각 안에 모셔진 석조불 좌상...]
석조불좌상은 유리 상자 안에 놓여 있으며,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없다. 산신탱과 칠성탱은 모두 근래에 조성한 것으로 화기가 없어 정확한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건물의 조성 연대인 1960년보다 훨씬 늦은 것으로 추정된다. 방형으로 놓인 네 개의 기둥을 연결하는 수평부재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묵서명이 있다. '佛紀二九八七年庚子小春地藏菩薩齋日 / 檀紀四二九三年更子年十月丁亥十八戊辰日戊午時 / 入住上梁 日月星靈龍華白蓮 石峯十水正心佛成造運' 이를 통해 이 건물이 1960년에 조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팔각전각의 모습을 볼수있고...]
[철확을 감싸고 있는 개태사 우주정...]
1981년에 팔각형 전각 옆에 위치한 우주정은 개태사의 철확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보호각이다. 정면에 ‘宇宙井’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사방 1간의 건물로 기단은 외벌대이다. 방형초석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초익공식으로 지붕은 겹처마에 사모지붕이며, 모로단청을 하여 장엄을 베풀었다. 보 아랫면에는 '龍 佛紀三千八年辛酉九月初三日巳時上梁于戊辰生兪天明成造之大運 唯一宇宙井造化大統成 鳳'이라 쓴 묵서명이 있다. 또 내부에는 1982년에 쓴 개태사 우주정 복원불사 유공자 명단을 적은 글이 걸려있다.
[개태사 우주정 안에 있는 철확 ...]
개태사에서 사용하던 철솥으로 지름 약 2m, 둘레 약 6.28m, 높이 약 0.97m이다. 솥의 규모로 보아 개태사가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가름해 볼 수 있다. 폐사 후에 들에 방치되어 있다가 가뭄에 솥을 옮기면 비가 온다는 전설에 의해 여러 곳으로 옮겨지다가, 일제때 한양에서 열린 박람회에 출품 후 연산시에 소재한 공원에 보존되어 왔다. 이후 1978년에 이곳 개태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와『가람고』를 비롯한 문헌에도 이 솥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 중 『가람고』의 기록내용은 '『여지도서』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여지도서』의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輿地圖書' 忠淸道 連山 古跡條 開泰寺大鼎 '本寺舊址有大鼎 周圍可十餘把高可一丈. 氓俗相傳 本寺全盛時 僧輩?醬之哭也. 鑄成旣久 頗有靈異. 每當大早 民人輩曳置他所 則輒雨 今在邑西二里許. 頃年久早時 曳移在此云' 이 절 옛 터에 큰 솥이 있었는데, 주위가 능히 10여 파(把), 높이가 능히 1장이다. 세속에 전하는 바로는 본사 전성시에 승려들의 음식을 끓이던 것이라 한다. 주성(鑄成)한 지 이미 오래 되어 자못 신령스러움이 있다. 한발이 닥칠 때마다 사람들이 그것을 끌어 다른 곳으로 옮겨 두면 비가 내렸으므로 지금은 읍 서쪽 2리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한발 때마다 옮겨 이곳에 위치하게 된 것이라 한다.
[우주정이라 쓰인 편액이...]
[뒷벽밑엔 알 수 없는 조형물들이...]
[사대부집 내부와 비슷하게 건축된 요사채...]
[요즘만든 창살이지만 그래도 정감이...]
[고즈넉해 보이는 개태사 경내...]
[화장실이 멀지감치 지어져 있어 불편할 것 같은...]
[다시 천왕문을 나서면 바로 길이 나선다...]
마치 동네 안의 사찰 같으면서도 산세가 있는 터에 드리워진 개태사 오늘 낮 개태사의 정취에 흠뻑 젖어본다. 이곳까지 며칠간의 여행을 같이한 곡성의 성산과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성산은 논산역에서 곡성으로 돌아가고 나는 논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며 공주에 들러 지난번 못들른 신원사와 미륵정토사를 향하여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길을 달리며 생각나는 것이 많다. 재작년 논산을 온통다 뒤지며 돌아보던 그런 생각을 하며 탑정 호수를 멀리하며 논산역으로 들어선다. -<끝>-
첫댓글 미처 알지 못한 사찰을 소개 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