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장 이혼에 대한 가르침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31-32)
- 이 주제는 설교자들이 피하는 경향이 있는 주제가 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중 어떤 부분이라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삶의 모든 부분에 관여하고 있으며 삶의 어느 부분도 성경의 범위 밖에 있다고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 우리는 이 교훈을 정직하게 직면해야 한다.
이 진술은 “너희는 ---들었으나---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형식으로써 이 주제를 도입하신 여섯가지 진술의 하나이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9-20)는 말씀이 나온다. 주님의 목적은 왜곡,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던 거짓된 율법해석을 정정하는 데 있다. 주님이 이혼의 문제에 관해 하신 것도 바로 이것임은 물론이다.
- 이 주제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먼저 모세의 율법이 이 문제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명백히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봐야 하고, 그리고 우리 주의 가르치심을 살펴봐야 한다.
1. 모세의 가르침 – 모세의 가르침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구약시대에는 간음이란 말이 이혼문제와 관련해서 진술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옛 율법 밑에서는 간음을 범한 사람은 돌로 쳐 죽였기 때문이다. 이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의 목적은 그저 이혼문제를 조절하는 것에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하찮고 무가치한 이유로 아내를 버릴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은 정욕과 색욕 바로 그것이었다. 모세 율법은 혼동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인들에게 부당하였던 상황을 바로 잡고 조절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다. 이것은 여인들과 어린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끝없는 괴로움을 주었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 원칙을 설정해 주고 있다.
① 이혼은 아내에게 어떤 생리적이거나 도덕적 육체적 결함이 발견될 때에만 허용되어야 했다.
② 아내를 버린 남자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여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증서에는 그녀가 버림받은 것은 부정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진술되어 있었다. 결혼의 신성성은 이렇게 강조되었던 것이다.
③ 아내를 버리고 그녀에게 이혼증서를 주는 남자는 그녀와 다시 결혼할 허락을 주지 않았다. 이 법은 백성들로 하여금 결혼이란 것은 그들이 마음대로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모세의 법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생각하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모세의 법의 목적은 더 많이 혼란하였던 그때 형편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모세의 율법이 어떤 조건아래에서는 아내를 버리라고 명하며, 이혼을 강요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모세의 율법은 아무에게도 아내와 이혼하라고 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온갖 부당한 이유를 들어 이혼을 요구하고 그렇게 할 권리를 주장한 것은 물론이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는 물론 원칙도 회피한 것이다. 그 결과 주님 당시에 가공할 불법이 다시 수많은 여인들에게 행하여져 사소한 이유로 이혼을 당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가장 중요시 한 것은 이혼증서를 주는 일이었는데, 그들은 아내를 어째서 버리고 있었는가를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혼의 문제를 바로 생각하지 못하였으며, 결혼의 참된 의미를 보는 일에 실패하고 있었다. 모세의 가르침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왜곡이 이러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회피하고 그 대신 그들의 율법에 추가한 교묘한 해석과 전통으로 대신했다. 그 결과 모세의 율법과 궁극적인 목표는 사실상 취소되고 무효화된 셈이었다.
3. 주님의 가르침 - 주님은 이것에 대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9장3-9절의 진술은 이 교훈을 해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19:3)
주님께서 강조하신 원칙은 결혼은 신성하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이다.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최초에 주신 법으로 돌아가신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결혼은 민법상의 계약이나 성례가 아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한 육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결혼에는 불용해성, 영구불변성이 있다. 하나님이 남자를 위하여 여자를 만드셨을 때 하나님은 이것을 의도하셨다.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법은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전의 다른 유대는 깨어지고 새로운 유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 몸’이란 말씀만이 중요한 전부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원초적 결혼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 그러하다면 모세의 율법은 어떻게 설명이 되는가? 하나님은 어째서 이혼을 허락하셨는가? -
첫째, 하나님은 결혼에 관한 그분의 최초의 법을 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 당시 만연했던 형편 때문에 임시법을 도입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그 당시에는 큰 혁신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그분의 최초의 선언하신 방향으로 인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모세가 이렇게 양보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아무데서도 이혼을 명하신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혼의 불가해성뿐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법을 가르쳤다. 우리가 무가치하고 하잖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 받았으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에 이런 견해를 견지해야 한다. 특히 결혼 관계에서 우리는 이런 견해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셋째, 이혼에는 오직 한 가지 합법적 원인과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음행’이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 원칙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남편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나 아내는 그대로 이방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남편이 개심하고 아내가 개심하지 않았다고 해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마저도 이혼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개심한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을 가질 경우 아내는 그 남편을 성화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가는 중요하지 않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가도 중요하지 않다. 성격이 맞지 않는다 운운하는 말도 중요하지 않다. 이 한 가지 일 외에는 이 불가용해성의 결합을 해체할 수 없는 것이다. 간음은 합법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명령이 아니다. 하지만 이혼할 근거는 된다.
넷째, 만일 너희가 이 외에 다른 이유로 아내와 이혼한다면 너희는 그녀로 간음하게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유대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간음함인데 다른 이유로 아내를 버린다면, 그는 그 유대를 깨뜨리지 않고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간음을 범하게 하고, 그녀와 결혼하는 남자도 이렇게 해서 간음자가 된다. 이혼에는 한 가지 원인이 있을 뿐이며 그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 이 가르침의 결과는 무엇인가?
모든 법은 그에게서 온다. 이 생과 세상에 관한 모든 것은 모두 그에게서 나온다. 이스라엘의 특수 상황 때문에 그들을 위한 임시법이 있었다. 간음죄에 대한 모세의 형벌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임시법을 철폐하시고, 간음으로 인한 이혼 사유를 합법으로 만드셨다. 이때로부터 남자와 여자는 간음죄 때문에 돌에 맞아 죽지 않아도 되었다. 아내의 간음 때문에 이혼한 사람은 이혼할 자격이 있다. 이 남자는 이제 자유로우며 재혼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 아내는 재혼할 권리가 없다.
저는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해서 이것이다. 이것을 조심스럽게, 권면으로 말하려 한다. 복음을 기초로 해서, 진리를 위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간음마저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니다. 간음죄는 무서운 죄이다. 하지만 간음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밖에서나, 그의 나라 밖에서 죄를 범하였다는 느낌을 가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만일 여러분이 참되게 회개하고, 죄의 가공성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와 은혜에 온 몸을 내어 맡기면 용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복되신 우리 주님의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을 새겨라.
만일 사람들이 이 가장 엄숙하고 성스러운 결혼의 결합에서조차 서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른 서약을 지킬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겠는가? 우리 자신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우리의 개인 생활에서 준수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각 국가와 각 민족들을 신뢰할 권리와, 지금과 다른 행동과 처신을 세상으로부터 기대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