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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자료 스크랩 정암 조광조 - 그의 유배지 화순 적려유허지 답사기(1)
이장희 추천 0 조회 49 14.05.16 20: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실패한  개혁주의자,  조광조


          - 화순군  능주면  적려유허비를 찾아서


                  김세곤 (노동부 법무행정팀장, 前 목포지방노동사무소장)



  2월 마지막 일요일(2.26)에 목포에서의 마지막 문화역사기행을 떠난다.

평소에 문화기행을 같이 하던 오선생님과 함께 화순군 능주면에 있는 조광조의 적려유허비와 양팽손의 학포당등을 보러 간다. 이제 1년 6개월간의 목포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다음 주 부터는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어  이번 역사기행은 감회가 깊다. 더구나 마지막 기행지로 화순군의 적려유허지를 찾게 되어  변화와 혁신이 화두인 참여정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으로서  더욱 그렇다.

   

조광조. 최근에 최인호의 소설 유림 1권의 왕도(하늘에 이르는 길)로 더욱 유명해진  실패한 개혁주의자. 그를  만나러  최인호의 소설책을 몸에 지니고  화순으로 간다.  


 목포에서 화순 능주로 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주 남평에서 화순으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 줄곧 가니 능주에 도착하였고, 능주에서는 적려유허지로 가는 표시판이 잘되어 있어 적려유허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유허비와 강당 그리고 적중거가, 영정각 등이 있는 건물 앞 주자창에 차를 세워놓고서  나는 먼저 정문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을 본다.



‘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

             소재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이 비는 조광조(1482-1519) 선생이 이곳에서 사사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선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다가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중종 14년(1519년) 이곳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되어 1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 후 현종 8년(1667년) 당시 능주 목사인 민여로가 우암 송시열의 글을 받아 이 비를 세워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되새기게 하였다. ‘


매우 간단한 설명문이다. 조광조의 일생이 단 몇 줄로 정리되어 있다.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한양 조씨. 성종 13년에 한성에서 태어난 그는 17세 때 어천찰방(지금의 역장)으로 부임하는 아버지 조원강을  따라갔다가 그곳에서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에서 유배 중이던 사림파 성리학자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을 만나 수학한다. 그리고 중종 5년에 장원으로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한다. 중종 10년(1515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왕의 두툼한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4년 만에 고속 승진을 하여 중종 13년(1518년) 약관 37살의 나이에 대사헌이 된다. 그는 사림파의 영수로서 현량과를 설치하여 신진 사림들을 정계에 진출시킨다. 이때부터 그는  훈구파 소위 보수 세력을 몰아내는 급진적인 개혁을 하여 정국공신 103명중에  4분의3에 해당하는 78명에 대하여 훈작을 삭탈(위훈삭제)한다. 이에 훈구파의 반격이 일어나고 중종도 조광조에게서 마음이 떠나 1519년(중종14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기묘사화로 죽게 된다.


나는 ‘실패한 개혁주의자, 조광조’ 란 단어를 되새기면서  적려(적려란 유배된 곳이란 뜻임)유허비가 있는 건물 정문을 들어선다. 그리고 곧바로  ‘추모비각’이라고 써진  쪽문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적려유허 비각이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진 작은 비각에는 3미터정도 되는 비석이 목책으로 둘려 쌓여 있다. 자세히 보니 비석은 거북이가  받치고 있고 그 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신의  앞면은 ‘ 정암조선생적(靜菴趙先生謫)   려유허추모비(廬遺墟追慕卑)’란 총 12자의 해서체 글씨가 세로 두 줄로 6자씩 써져 있다. 그리고 그 글씨 위에는  용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며 엉켜서 조각되어 있다.  비석 뒷면의 비신에는 맨 위에 ‘정암조선생 추모비’라는 전서체 글씨가 가로로 적혀 있고 세로로는 ‘정암 조선생적려추모비기’라고 시작되는 정암 선생의 추모내역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이 뒷면 글씨의 맨 상단에는  한 마리의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한편 비각 뒤쪽의 뜰에는 최근에  화순군에서 세운 것으로 보이는 ‘ 정암 조광조 적려 유허 추모비 번역문’ 간판이 있다. 이 번역문을 읽으면서 ‘ 기묘년 11월에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밀의하여 주초위왕이 왕이 된다는 무근지설을 조작하여 변을 일으켜 변고가 일어나 이곳 능주에 유배되니’ 란 글이 눈에 들어온다.


‘주초위왕이 왕이 된다.’는 이야기는 고등학교때 국사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중종 임금 때 궁중에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씨가 새겨진 나뭇잎이  발견되었다. 한 궁녀가 해괴하다고 여겨서  벌레 먹은 이 나뭇잎을 왕비에게 바쳤는데 해석하여 보니 주(走)와 초(肖)를 합하면 조(趙)자가 되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설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단초가 되어 바로 기묘사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중종도 임금 자리를 넘보려 한다는 도참설에는 기분이 안 좋았으리라.


애우당(愛優堂)


이윽고 나는 추모비각을 나와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 건물 안에는 ‘애우당(愛優堂)’이란 현판이 붙은 강당이 있다. 애우당(愛優堂). 최인호의 소설 유림 책에서 읽은 바 있는 조광조의 절명시중에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같이 하였다’는 문장에서  ‘애(愛)’를 따오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다’는 문장에서 ‘우(優)’를 빌려와  붙여졌다고 하는 ‘근심걱정을 사랑’하는 강당. 나는 이곳에서 애우당 현판이 나오도록 사진을 찍고서  방명록에 사인을 한 다음 마루에 올라서 강당을 한 바퀴 둘러본다. 강당 안 벽 천장에는 현판이 여러 개 붙어 있다. 맨 먼저 보이는 것이 ‘역모무고공술(逆謀誣告供述)’이라고 써진 현판이다. 이 현판에는 조광조의 최후의 진술이  한문으로 먼저 적혀 있고 그 다음에 이곳의 관리인겸 역사해설가 오정섭 선생이 정리한 해문이 적혀져 있다.



 ‘선비로 태어나 이 세상에 살면서 믿는 것은 오직 임금의 마음뿐 입니다.

 국가의 병통이 모두 사사로이 이익을 추구하는 이원(利源)에 있다고 망령   되어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맥을 새롭게 하여 무궁하도록 하고자 했을   따름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士生斯世 所恃者

 君心而己 妄料國家病痛

 在於利源 故慾新國脈

 於無窮而己 頓無他意  ‘

               

중종 14년(1519년) 11월 9일 조광조에 의해 위훈삭탈을 당한 남곤, 심정, 홍경주등 훈구세력은  11월 15일 야밤에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으로 몰래 들어가 중종 왕에게 역모시급이라는 무고를 한다. 그리고  조광조는 한밤중에 영문도 모르고 의금부에 끌려가서 문초를 받게 된다. 그날 밤에 그는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한다. 그리고  문초를 받으면서 진술서에 서명을 안 하였다 한다. 아마 조광조는 날이 밝아  중종임금을 뵙게 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으리라. 그런데 조광조가 진술서에 서명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중종은 크게 노하여  조광조를 참형시키라고 한다. 조광조가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역린은 문자 그대로 용의 목에 난 비늘이다. 이 말은 중국의 한비자 책에서 나온 것으로서 거기에는 ‘용이란 동물은 길들이면 사람이 탈 수 있을 정도로 순하다. 그러나 목 아래 거꾸로 난 1척 정도의 비늘을 잘못 건드리면 바로 물려죽는다. 이와 같이 군주의 역린에 닿지 않도록 설득하는 것이 최상의 설득이다.(人主之逆麟則幾矣)’ (한비자 설난편 - ‘중국 3천년의 인간력(청년정신 발간)’ 책에서) 라는 글이 적혀 있다. 


 현판에 써진 ‘역모무고공술’은 이렇듯 중종의 역린을 건드린 조광조가 11월16일 참형을 앞두고 중종 임금에게 말한 최후의 진술이다. 다행히도 조광조는 당시 영의정 정광필의 읍소에 의해  참형만은 면하고  능성현( 지금의 능주)으로 유배를 떠난다. 이로서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위훈삭제이후 6일 만에 막을 내리는 것이다. 


역사는 아이러니한 것인가.  피비린내 나는 기묘사화의 출발은 바로 11.15 밤 신무문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 신무문이 바로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서거이후 신군부에 의한  12.12 사태가 비롯된 현장이었으니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한편  이 공술문 현판 왼쪽에는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 현판이 걸려 있다.  

‘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 웃음을 짓네.

  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誰憐身似傷弓鳥

 自笑心同失馬翁

 猿鶴定嗔吾不返

 豈知難出覆盆中 ‘


  조광조가 능성에서 유배 중에 지은 이 7언4구 한시는 자신의 처지를 활 맞은 한 마리 새로  비유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조광조는  중종 임금이 다시 그를 부를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움을 알아채고 체념과 자조가 더 깊다. (이 한시는  조광조를 끝까지 곁에서 지킨 지란지교인  학포 양팽손(1488-1545 )에게 전하여졌다 한다.)


  그런데 두개의 현판을 둘러본 다음에  애우당 벽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최인호의 소설 유림에서 읽은 조광조의 절명시(絶命詩) 현판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 내가 전화 연락을 하여 오신  관리인 겸 역사 해설가  오정섭 선생에게 물었더니 절명시가 써진 현판은 다시  만들려고 최근에 철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광조가 11월17일 한양을 떠나 귀양지 능성현(지금의 능주)에 도착한 날은 11월26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유배 온 지 한 달도 채 안된 12월20일에  사약을 받는다. 그리고  사약을 마시기 전에  다음과 같은  5언 절명시를  쓴다.



 ‘ 愛君如愛夫

   憂國如優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


  나는 유림 소설책을 꺼내어서 이 절명시를 읽고서 상념에 잠긴다. 역사란 무엇인가? 왕도정치는 있는가? 정의는 누구의 편인가? 

 

 

 2편에 계속됩니다.


  ( 2006.3.26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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