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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22 - 도쿠가와 이에야스 인질에서 벗어나 일본의 대 다이묘가 되다!
16세기에 120년간 지속된 센고쿠 (戰國 전국) 시대는 일본이 2백개의 나라로 갈라져 전쟁으로 날을 지새니
일본인들은 지옥과 같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면서 평화의 시대, 통일을 염원하는데... 오다 노부나가
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이어 최종적으로 일본을 통일해 평화 시대를 수립한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입니다.
무로마치 (아시카가)) 막부는 1467년 쇼군 후계를 두고 삼촌과 조카가 대립해 “오닌의 난(응인난)“ 이
일어나 교토에서 10년간 시가전을 벌였음에도 승부가 나지 않아 논공행상이 없으니, 지방에서 온
무장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립하니 일본은 200여개 나라로 갈라져 120년간을 싸우니 센고쿠 시대입니다.
일본의 도카이도 (東海道 동해도) 지방에서 아이치현의 서부는 오와리국 (나고야) 으로
지배자는 오다씨이며... 동부는 미카와로 마쓰다이라씨가 자리를 잡았고, 동쪽
시즈오카현은 이미카와씨가 세력을 떨쳤으며 후지산 북쪽 가이국은 오다씨가 차지했습니다.
'마츠다이라 (松平)' 가문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 (松平淸康) 가 13살에 가독을 이은후
뛰어난 능력으로 오카자키를 차지하고 주변 세력들을 호령했으나... 아버지 히로타다가
유약하니 이마가와씨와 오다씨 사이에 낀 약소한 세력으로 두 가문의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이에야스의 아명은 타케치요 (竹千代) 였으며 관례를 올리면서 받은 이름은 마츠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노부 (松平次郎三郎元信) 이니 이마가와 요시모토 (今川義元)
와 오다 노부히데 (織田信秀 : 노부나가의 아버지)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 왔다고 합니다.
이마가와 가문에서 인질 생활중 노부(信)를 빼고 오다씨를 상대로 분전한 조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 (松平淸康)
로 부터 야스(康) 를 따와 마츠다이라 구란도노스케 모토야스 (松平藏人佐元康) 로 개명했으며 이마가와
가문의 그늘에서 벗어난 뒤 모토(元) 도 빼고 마츠다이라 구란도노스케 이에야스 (松平藏人佐家康) 로 개명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름을 여러번 바꿨어도......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온 야스 (康) 는 끝내
건드리지 않았는데, 뛰어난 무장이었던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던게 이유
이니 유약하던 아버지에 비해 할아버지 키요야스는 미카와 일대에서 이름난 맹장이었습니다.
6살 타케치요 시절에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으로 인질로 가던 중에 새 외가인 도다 일족이 일행을 오다 가에
팔아넘기니 오다씨의 인질이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 덕에 오다 노부나가와 친분 관계를 갖게
되며 이마가와군에 포로가 된 오다 노부히데의 서장자 노부히로와 맞교환으로 이마가와씨의 인질이 됩니다.
이에야스는 인질 시절에 이마가와 가문에서 학대받지는 않았으니 이마카와씨는 조카인 세나히메와 결혼
시켰고 책사 타이겐 셋사이를 가정교사로 붙였다는 설까지 있으니 실제로는 노부나가씨
인질로 히데요시에게 맡겨진... 구로다 나가마사나 우키다 히에이에 처럼 꽤 대접을 받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마가와씨는 이에야스가 성인이 되었어도 슨푸에 계속 잡아두고 미카와에는 자기 가신을 보내 대신
지배하게 했는데.... 오래 전에 이에야스의 할아바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 (松平清康) 가 오다씨 측의
모리야마성을 공략하던 중 가신에게 암살당하면서 미카와는 예전의 사분오열 상황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후 이에야스의 아버지 히로타다는 숙부에게 추방당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원조를 받아 다시 오카자키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지만 키요야스 시절의 세력을 회복하기는커녕
오다 노부히데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이마가와의 지원을 받아 겨우 세력을 보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마츠다이라 가는 이마가와의 가신이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에야스가 인질로 보내진 것도 주종
관계의 일환이었던 셈인데.....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미카와 진출을 위해 마츠다이라 종가를 이용
했지만 마츠다이라 입장에서도 이마가와 비호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으므로 손해보는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입장에서 마츠다이라 종가는 지금은 미카와 일부에 세력을 가진 호족일 뿐인데도
그 후계자를 혼인으로 일문에 들였으니 파격적인 대우였다고 할수있는데, 이렇듯 마츠다이라
가문이 요시모토에게서 입은 은혜가 적지 않음에도..... 요시모토가 죽자마자 관계를 끊고 독립합니다.
그러니까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을 배신했다는 것이 일본사학계의 정설이며, 요시모토에 대한 나쁜
이미지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니, 이에야스가 인질로 잡혀있다곤
해도 오케하자마 전투가 일어나기 1년전 오카자키에 있는 가신단에게 가법을 만들어 공표한 적도 있습니다.
그 가법에 내 명령에 불복한다면 세키구치 치카나가(関口親永), 아시나 모토나가에게 읍소해 보라고 한 내용을
보면, 이에야스가 인질인 시절에도 오카자키와의 주종관계는 성립하고 있었으나 가신단에 대한 장악력이
부족했고, 그것을 이마가와 가문이 오히려 후계자 입장에서 이에야스의 권력을 지켜주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인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마가와 가문과 손을 끊고 독립할 생각이었음이
분명했으니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바로
자신의 영지로 돌아와 이마가와 가문과 손을 끊고 가신단을 장악해 오다 가문과 손을 잡았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교토로 올라가 새 쇼군이 되려는 야망에서 오와리의 오다씨 공격을 위해 대군을
일으키자 오다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요시모토를 기습하여 목을 쳤고, 이마가와군에
종군하여 쏠쏠한 군공을 세웠던 이에야스도 급히 퇴각하여 오카자키에 입성해 혼란을 틈타 독립합니다.
이후 후지나미나와테 전투를 통해 미카와를 흡수하면서 자립하고 1562년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음
으로 이마가와의 종속에서 완전히 독립했는데, 이후 노부나가는 미노국, 이세국 등을 정복하며
서쪽으로 확장해갔고.... 이에야스는 영지 내의 불교 잇코 종도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진땀을 흘립니다.
이에야스 개인적으로는 인질이던 슨푸에서의 생활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는지, 후일 스루가 지역을 확보한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간토 지역으로 전봉되기 전까지 슨푸를 거성으로 삼고 증축했으며.... 훗날
쇼군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오고쇼가 된 뒤엔 슨푸를 거처로 삼아 성과 시가지를 정비해 노후를 보냈습니다.
혼쇼지 (本證寺) 를 거점으로 하는 승려 쿠세이 (空誓) 가 격문을 날려서 일향종 (一向宗) 신도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서니 미카와 잇코잇키 (三河一向一揆) 라고 불리는 불교도 농민들의 반란인데.... 절의 토지에도
세금을 부과하니 승려들이 반발했고 불교도 가신들까지 참가하는 바람에 이에야스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됩니다.
다르게는 미카와 서쪽은 일향종, 동쪽은 조동종 (曹洞宗) 이 번성했는데 이에야스가 미카와를 통일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향종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도 추측하는데.... 이에야스에게서 기득권
(절의 토지 면세)을 인정받거나, 이에야스를 죽이고 친 일향종 성향의 다이묘를 옹립하는 것이었다고도 봅니다?
이전까지 지배자이던 이마가와가는 일향종의 사찰에는 세금을 면세하고 지역 자치를 인정했는데
독립에 불타던 이에야스는 군대와 무기에 군량을 비축하기 위해 돈이 절대로
필요하니 절에도 세금을 걷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미카와 잇코잇키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일향종은 번성했으므로 마츠다이라가 가신 중에도 신도가 적지 않았으니 심지어 마츠다이라가
가 탄생한 이후로 계속 마츠다이라가를 섬겨온 사카이 가에서도 배신자가 나올
정도였으며, 후에 이에야스의 정치적 상담역이 되는 혼다 마사노부도 이에야스를 배신했습니다.
혼다 가나 사카이 가 등의 유력한 일족들도 일향종 반란군과 이에야스 군대 둘로 갈라져서 싸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으며, 분가이면서 종가를 없애고 자리를 빼앗을 궁리만 했던
사쿠라이 마츠다이라 가문도 참여했고 그 밖에 이마가와 가를 버린 이에야스에게
원한이 있던 이마가와 가의 잔당도 합세해 오카자키성 까지 적병이 몰아닥칠 지경 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일족 대부분이 배신했음에도 혼자 개종까지 하면서 이에야스 곁을 지킨 젊은 장수가
있었는데, 바로 혼다 타다카츠로 이때 무공과 충성심을 높게 평가받아 고속 출세를
하게 되며 그외 이에야스의 곁에 남기로 한 가신도 많았으니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일향종에 투신한 아버지를 등졌으나...... 뒷날 이에야스를 버리고 히데요시 밑으로 갑니다.
결국 성에 의지하여 간신히 버티면서 이에야스가 진두지휘해 힘들게 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사라진
가신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가신들이 용서받았으니 이에야스가 관대하다고 평할수도 있지만
중신들도 과반수가 잇키에 참여했기 때문에 전부 벌했다가는 집안이 망 판이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또 잇키에 참여하지 않고 이에야스의 곁에 남은 가신들도 같은 핏줄이었으니 섣불리 벌했다가는 후환을
남길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용서했다는게 중론인데, 잇키에 가담했다가
용서를 받은 가신 나쓰메 요시노부는 그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를 피신시키다가 전사합니다.
이에야스는 일향종과 화평을 맺으면서 그들도 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화평이 맺어지고 수습이 되자..... 약속을 깨고 영내에서 일향종을 금지
했으며, 이는 이에야스가 공식적으로 일향종을 사면한 1583년까지 지속됩니다.
잇코잇키를 주도한 혼쇼지(本證寺), 조구지(上宮寺), 쇼만지(勝鬘寺) 등 3개 절도 원래대로 돌리겠다(종전
처럼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 했는데 화평을 맺은 다음에 아예 절을 파괴하면서 한다는 말이 “원래 평지
였으니 평지로 돌려보낸다” 는 말장난을 했는데, 폐허가 되었다가 1580년대와 에도 시기에 모두 재흥됩니다.
잇코잇키의 주도자였던 쿠세이는 목숨만 건졌다가 1583년에 일향종이 사면받으면서
복귀하였고, 이후 만년에 쇼군 알현을 허가받는등 1614년에 70살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도쿠가와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미카와 잇코잇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니 영내의 반대파를 모두 숙청했고 또 가신단 내부의
결속을 다질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 다이묘들은 봉건 군주에 가까웠기 때문에
무엇을 할 때 가신들의 반대가 있으면 억지로 하기 힘들었는데.... 그러나
이에야스의 경우 가신들이 한번 반역했다가 용서받았으니 대놓고 반대의견을 내기 어려워집니다.
이후 1566년 까지 미카와(아이치현 동부) 동부와 북부를 평정해 미카와국을 통일하였으니,
이때 조정에게서 종오위하(従五位下) 미카와노카미(三河守) 로 서임받았고,
도쿠가와 씨(德川氏) 로 성씨를 바꾸면서..... 이름은 도쿠가와 지로사부로
이에야스 (徳川次郎三郎家康) 가 되었는데, 일족은 계속 마쓰다이라 성씨를 쓰도록 합니다.
본래 마츠다이라 씨(松平氏) 는 떠돌이 중이 미카와국 마츠다이라 마을에 정착하며 시작
되었으니 호족으로는 정통성이나 가문의 권위가 낮았는데, 미카와국을
통일한 참에 조정에서 권위를 가진 족보를 인정받아 갈아탄 것이니, 세이와 겐지
(清和源氏) 의 일파 닛타씨(新田氏)의 세라다(世良田) 도쿠가와(得川) 가문 후손을 자처합니다.
전통을 존중하는 일본에서 다이묘들은 영지를 지배하고 다른 영주들과 전쟁하기 위해서는 권위가 필요했으니
‘겐페이토키츠’ 라고 불리는 미나모토(겐지), 타이라, 후지와라, 타치바나등 일본 무가 사회에서
최정점에 위치하는 성씨에 속해야 했기 떼문에 센고쿠 시대 다이묘들은 자신이 이들의 후손이라고 사칭했습니다.
도쿠가와씨가 마치 진짜 닛타 씨의 후손인 것 처럼 행세했기 때문에.... 후일 닛타 씨 출신인 한
승려가 도쿠가와 자신의 부하에게 굽신거리자 '같은 닛타 씨인데 눈뜨고 못보겠네!
우리 집안이 걔 보다 명문인데 왜 그렇게 저자세로 구니?' 하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미카와국을 통일한 이에야스는 시즈오카현의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노려 카이(甲斐), 시나노
(信濃) 의 다케다 신겐과 연합해, 1568년에 이마가와를 멸망시키고 그 영지를
분할하여 서부 도토미(遠江)는 마츠다이라 가문, 동부 스루가 (駿河) 는 다케다 가문에
속하게 되었으며 1570년에 이에야스는 거성을 오카자키에서 도토미의 하마마츠로 옮깁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70년 노부나가가 에치젠(후쿠이현) 의 아사쿠라씨를
칠 때 종군하였으며 아자이씨의 배반으로 발생한 가네가사키 전투,
아자이씨와의 결전이었던 아네가와 전투에도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오다가 아자이씨와 일진 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1572년, 오다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각이었던 다케다 신겐
2만 7천이 도카이도(東海道 동해도) 로 진격하자 도쿠가와와 오다 연합군 1만 1천은 이 맞서니
미카타가하라에서 도쿠가와는 학익진으로 임했는데 종심 깊은 어린진으로 대응한 다케다군에 패배합니다.
전사자는 도쿠가와군 2천명에 오다군은 2백명으로 이에야스가 겪은 패배중 처참한 것이니, 후에 이에야스는
도망쳐와서 우거지상이 된 처참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젊은날의 객기, 혈기에 대한 교훈으로
삼게했는데 와신상담 비슷한 동기로 일본 무사들이 명예를 중시했던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다케다 신겐에게 대패해 간신히 하마마츠성에 도망쳐 들어와서는 성문을 열어 놓고 화톳불
을 피운후 부하들은 소리내지 말고 숨어 있게 하니...... 추격해 온 다케다의 장수는
이 뜻밖의 광경에 당황하고는 적군의 매복이 있을거로 오판해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에야스는 하마마츠성에서 농성하며 월동하고 있었는데, 성을 지나쳐 미카오 영내로 진격했던 다케다 신겐의
갑작스러운 병사(病死) 와 그로인한 다케다군의 철군으로 한숨을 돌렸으며 노부나가도 이 소식에 긴장이
풀려 사흘간 잠만 잤다는데, 아들 다케다 카츠요리가 그해 가을에 동 미카와로 진출하니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1575년 다케다 카츠요리는 도쿠가와에게 넘어간 나가시노성의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를 정벌하기
위해 15,000명의 대군을 일으키자 마침 아사쿠라와 아자이씨를 처리해 여유를 얻은
오다 노부나가는 대군을 이끌고 참전하니 이에야스도 호응해 연합군은 무려 38,000명이었습니다.
양군은 5월 21일에 미카와국의 시타라가하라에서 회전하니 나가시노 전투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6,000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내면서도 다케다 군을 격퇴하였는데 참패한 카츠요리는 패전 이후
우에스기가와 동맹을 맺고 재건에 힘썼으나 오다-도쿠가와 연합과 호조씨의 공격에 가신들이 이탈
하면서 1582년 멸망하니 이에야스는 스루가를 차지해 옛 주군인 이마가와의 영지를 전부 다스리게 됩니다.
이 전에 노부나가의 딸로 며느리 도쿠히메와, 이마가와의 조카로 이에야스의 아내 츠키야마도노 간의 고부갈등이
불거지는데, 도쿠히메가 시어머니가 다케다 가문과 내통한다고 노부나가에게 밀고하니 노부나가가 사위로
이에야스 장남 노부야스에게 자결을 명해 이에야스는 따르니.... 츠키야마도노는 살해되고 노부야스는 자결합니다.
1582년 6월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교토 혼노지에서 사망하는 혼노지변이 일어났는데
당시 이에야스는 기나이에 왔고 초소카베 공격을 준비중인 노부나가의 시코쿠 원정군을 시찰하기 위해
사카이에 있었는데, 교토의 대상인 차야 시로지로(차야 키요노부) 로 부터 혼노지의 변 소식을 알게됩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사망 소식이 퍼지면서 시코쿠 원정군에서 탈영병이 속출하고 기나이 전역에 폭도들이
들고 일어나 무사들이 살해당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목숨이 위험하다는 판단에 미카와로 도망치는데,
핫토리 한조와 닌자 이가 경호를 받으며 험준한 산을 넘는 도피행(이가고에) 끝에 미카와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오카자키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곧바로 미츠히데
를 제거하여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으나 그 사이 노부나가의 가신인
하시바 히데요시가 혼노지의 변으로 부터 보름 후에 벌어진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츠히데를 패사시킵니다.
7월 말에는 오다 가문의 발상지라 할수있는 키요스성에서 주요 가신들(시바타 카츠이에, 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츠네오키) 간에 오다 가의 당주를 정하는 키요스회의에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장손
산보시를 당주로 만드는데 성공하니 2남 노부카츠와 3남 노부타카는 후견인, 네 가신은 이를 보필하기로 합니다.
이에야스는 오다 가에 영향력을 행사해 기나이 방면으로 진출하는건 단념하고는 대신
구 다케다의 영지인 카이와 시나노 일대로 눈을 돌렸는데, 당시 카이와 시나노는
다케다를 따랐던 유신들과 토호들이 노부나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들고 일어납니다.
이에 더해 관리자인 타키가와 카즈마스는 옛 영토였던 코즈케의 수복과 구 다케다 영지를 노린
오다와라의 호조씨의 공격으로 도주하면서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었는데,
이에야스와 호조, 시바타에 의해 멸망 위기에 몰렸다가 혼노지 변으로 기사회생한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삼파전 끝에 이에야스가 군사적으로 우세를 차지하니 덴쇼 진고의 난입니다.
우에스기는 본거지인 에치고(니가타현)로 철수했고, 이에야스와 호조는 카이와 시나노는 이에야스가 그리고
코즈케는 호조로 분할하고 호조 우지마사의 아들 우지나오와 이에야스의 딸 도쿠히메가 혼인해 사돈관계를
맺는 것으로 휴전했으며, 카이와 시나노를 차지한 이에야스는 구 다케다의 유신들을 거두니 노부나가의
하위 파트너에서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 카이, 시나노 5개국을 차지한 도카이(東海 동해) 의 패자로 등극합니다.
서쪽에서는 히데요시- 노부카츠와 시바타 - 노부타카 간의 전쟁이 발발해 시즈가타케 전투
에서 히데요시- 노부카츠 군이 승리함으로써 히데요시가 기나이 대부분을 장악하고
패권에 한발 앞서게 되는데, 이에야스는 시바타와 노부타카를 지원하며 히데요시에게
적의를 표했고.... 두 사람이 사망한 후에는 히데요시와 사이가 갈라진 노부카츠 편에 섭니다.
1584년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카츠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노부카츠는 이에야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야스는 오와리로 출병해, 3월부터 11월까지 오와리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히데요시
와의 전쟁에서는 전술적 승리를 얻어내 어느정도 우위를 차지했으니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입니다.
히데요시는 전술에서는 패배했지만 정략에 능하다는 평가답게 노부카츠와 화친함으로써 이에야스가
전투를 계속할 명분을 끊고, 이에야스가 모리 데루모토, 쵸소카베 모토치카, 삿사 나리마사
등과 동맹을 맺어 구축한 히데요시 포위망도 와해되자 이에야스는 휴전에 동의하여 아들
오기마루(유키 히데야스) 를 히데요시의 양자(사실상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양측은 휴전을 체결합니다.
휴전 이후에도 냉전 상태가 계속되었으나 이에야스는 구 노부나가의 세력 대부분을 흡수하고 천하인이 되기
직전까지 온 히데요시를 상대하기에는 힘이 모자랐고, 히데요시도 대다이묘인 이에야스와의 전면전은
버거운데다가 1586년 덴쇼지진으로 기반인 기나이가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전면전 대신 이부동생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에게 시집보내고 친모 오만도코로도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회유합니다.
한편 도쿠가와가의 고참 가신 이시카와 카즈마사를 전향시키는 것으로 이에야스를 압박하니, 여기에 홍수
까지 더해져 이에야스의 영지 도카이가 큰 피해를 입자 결국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권위에
굴복하고 1586년 히데요시의 거성 오사카성에 입조해 형식상으로 신하의 예를 갖추고 복종을 맹세합니다.
이후 히데요시가 시코쿠와 규슈 등 서일본 평정에 집중하는 동안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의심을 사지 않기위해 거성을 하마마츠에서 이마가와의 볼모로서 어린 시절을
보낸 슨푸로 옮겼으며, 1590년 2월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들어간 사나다와 호조씨가
호조 옛 영토로 사나다가 차지한 누마타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니 히데요시가 개입합니다.
동일본 평정과 일본 통일을 위해 간토 지배자인 호조가 하루빨리 입조하길 바랐던 히데요시는 누마타
중에 사나다가 선조의 선산이 있다고 주장한 나구루미성을 포함한 1/3은 사나다가, 누마타
에서 가장 중요한 누마타성을 포함한 나머지를 호조가 가진다는, 호조에게 유리한 중재안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호조의 당주인 우지마사가 불만을 품고는 누마타성을 차지하자마자 성이 나구루미성 보다
낮은 곳에 있어 방어에 불리하다는 핑계로 나구루미성을 공격해 점령하자, 무시당한
히데요시는 분기탱천해 호조 정벌을 결의했는데, 이때 이에야스도 어쩔수 없이 종군하게 됩니다.
호조씨는 히데요시의 22만 대군에 오다와라성에서 농성전으로 대항했으나 결국 7월 5일 항복하였고,
우지마사가 할복하면서 히데요시에게 저항한 마지막 유력 주자 호조는 멸망했으며, 히데요시는
아이즈까지 진격해 오우 지역의 다이묘들로 부터 복종을 받아내면서 마침내 일본 통일을 완수합니다.
논공행상에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기존의 영지였던 도카이 5개국을 받는 대신 호조의 영지였던
간토 8개국과 이즈를 영지로 주겠다고 제안하니 표면적으로는 영지가 100만 석 이상 늘어난
영전이었으나, 히데요시는 다이묘의 영지를 교체하는 전봉과 그로 인해 일어난 잇키
(농민 봉기)등 트러블을 구실로 삿사 나리마사등 오다가문 가신들을 교묘히 숙청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호조가문이 100년간 5대에 걸쳐 다스렸던 영지이자 영민과 무사들의 반항적, 독자적인 기질과 용맹함으로
유명했던 간토로 이에야스를 보낸다는 것은 "가서 고생 좀 해보고 못 하겠다고 하면 바로 숙청해
버리겠다" 라는 노골적인 견제였으니... 가신들은 맹렬하게 반대했지만 이에야스는 간토로 영지를 옮깁니다.
간토로 전봉된 이에야스는 거성을 옛날 가마쿠라 막부의 가마쿠라나 호조의 거성 오다와라가 아닌 일개 출장소
였던 에도(江戶, 강호, 도쿄) 에 두었으니, 5대 동안 주군으로 모셔온 호조를 잃고 불안해하던
현지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위해 이에야스는 일부러 명절인 팔삭(八朔 음력 8월 1일) 에 에도에 입성합니다.
에도에 입성하자 마자 제일 먼저 쌀을 풀어 현지인들의 민심을 샀으며 그런 다음 자신을 따라 간토
로 온 가신들을 배치했는데, 우선 자신의 최측근인 도쿠가와 사천왕에게는 10만석
이상의 먼 외곽 영지를 주어 자신에게 적대적인 다이묘들을 견제하게 하였고......
안쪽에는 미카와 시절부터 가신으로 섬겨 온 후다이 다이묘를 배치해 이중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100만석 규모의 직할 영지에는 구 이마가와, 다케다, 호조의 유신들에게 '다이칸
(代官)' 이란 지방관직을 주어 행정을 담당하도록 하였고.....
'다이칸카시라(代官頭)' 라는 관직을 두어 기술·행정 전문가들을 등용하였습니다.
이에야스가 거성으로 삼을 당시 에도는 오타 도칸이 쌓은 폐성에 가까운 성 하나만 있을 뿐
농사도 잘 안되는 소금기 머금은 들판에 들어선 작은 어촌에 불과했으나 드넓은
간토 평야 한가운데에 위치해 교통의 요지가 될수 있는 잠재력을 꿰뚫어
본 이에야스는 이러한 효율적 제도를 기반으로 에도를 포함 간토를 철저히 개발합니다.
이에야스의 역량에 옛 영토에 대한 히데요시의 관리 실패로 이에야스는 무사시, 이즈, 사가미, 가즈사,
시모사 5개국 전역과 고즈케, 시모즈케 및 히타치 3개국의 일부를 지배하는 간토의 패자이자 옛
영토(미카와, 도토미, 스루가, 시나노, 가이)에 대한 영향력도 잃지않은 다이묘로 성장해
명목상 석고는 150만석에서 250만 석으로 증가하니 천하인 히데요시 석고 220만석 보다 많았습니다.
또한 이에야스는 가모 우지사토와 마사무네의 분쟁을 중재하고 그 밖에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아사노 나가마사,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이
히데요시로 부터 징계를 받을때 앞장서서 그들을 변호해 다른 다이묘들에게 신망을 얻습니다.
히데요시는 대륙 정복이라는 야망을 실현할겸 급속히 세가 불어난 휘하 영주들에게 나눠줄 땅을 확보하고 전국
시대를 거쳐 비대화된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소모시켜 견제하기 위해 영주들에게 대륙 원정 준비를
지시하니 이에야스를 비롯 대부분 영주들이 명나라의 개입을 우려해 반발했지만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일본 최대의 다이묘 이에야스도 임진왜란에 참여하도록 압박을 받았지만 반전파인 도쿠가와는 관동
일대의 반란진압 및 경영을 핑계대며 관동 다이묘들을 비롯한 자기 세력의 참전 규모를
최소화하고 일부만 전진기지인 사가현 가라쓰시 히젠 나고야성에 주둔시키는 선에서 멈춰버립니다.
히데요시로서는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했으나 이에야스의 세력은 히데요시와 마에다 토시이에
에게 맞먹을 정도로 상당했고 히데요시의 세력은 한반도에서 소모되고 있었기에
이에야스의 참전을 강제할수 없었으며 결국 이에야스의 군사적 지원을 포기
해야만 했으니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으로 역량을 손상하면서 선견지명은 들어맞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전이 좌절되자 마에다 토시이에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으로 파견되는게
고려되었으나 결국 무산됐으니..... 훗날 이 조치는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중요한 명분이 되었고,
조선 측에 의도는 의심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정권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 줍니다.
1598년 히데요시가 급사한후 가문은 급격하게 무너졌으니 히데츠구 사건을 포함한 히데요시 본인의
실책과 미츠나리의 인간관계 파탄이 문제였는데 1년간은 중도파 마에다 토시이에가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분쟁을 중재했으니 그가 죽자 이에야스를 견제할 세력이 없어졌으며
히데츠구 사건 당시 엮여있던 여러 다이묘들이 이에야스에게 비호받으면서 그의 파벌로 들어갑니다.
그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금기로 했던 각지 다이묘와 혼인관계를 맺는등 세를 불렸으며, 그나마 견제
세력의 필두인 이시다 미츠나리는 인망이 없었으니..... 이에야스를 막을만한 여력이 없었고
무단파와 문치파 갈등이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고 미츠나리의 실각으로 오대로 - 오봉행 체제도 와해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