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成均館)
성균관이라는 이름의 유래
후대 중국과 우리 나라 관직 제도의 기준이 되었던 주례(周禮)에 의하면 국가 교육기관으로 오학(五學)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남학(南學)을 성균이라 하여 음악을 통한 교육을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했다. 성균은 '음악의 가락을 맞춘다'는 뜻으로 어그러짐을 바로잡아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성균관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성균관은 크게 대성전 및 동무, 서무를 중심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제사 공간과 명륜당과 동재, 서재를 중심으로 한 강학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 데, 뒤에 사당을 세우고 앞에 학교를 세우는 전통적인 배치법에서 벗어나 대성전을 앞에 세우고 뒤에 명륜당을 배치한 점이 다른 향교와 서원과 다른 점이다.

녹색으로 표시된 건물들이 제향 영역(Ritual Ceremony Area)이고 황색으로 표시 된 건물들이 강학 영역(Recture Area)입니다.

국왕은 타고 온 가마를 동삼문⑥ 앞 근처에 있는 하련대⑭에서 내려 놓고 동삼문을 통하여 어도를 통해 대성전①으로 들어오며
외삼문을 대성전에서 마주 보는 정문으로 신도가 있다.

출처: 서울문묘와 성균관 팜플렛(종로구)
제향 영역(Ritual Ceremony Area)

동삼문(東三門)으로 어도로 이어진다.

유림회관에서 뒷문으로 나와 성균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로 들어가는 문으로
문 옆에 임금의 가마(輦)가 내리는 하련대 자리가 있다.


출처: 서울문묘와 성균관 팜플렛(종로구)

동무앞에 서 있는 오륜목

출처: 서울문묘와 성균관 팜플렛(종로구)

서무

대성전



대성전앞에 서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측백나무인데 유교에서 소나무와 더불어 올곧고 변하지 않는 군자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왼쪽에 가지가 3개인 나무가 삼강목이고 오른쪽 오래 된 측백나무가 오륜목이라고 불리며 삼강과 오륜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출처: 성균관 석전제 팜플렛
대성전에서 모시는 중국의 오성(五聖)인 공자, 안자, 증자, 사자와 맹자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공문십철과 우리나라
18현인(최치원, 정여창,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등) 을 모신 위패의 봉안 위차도이다.

단청의 본래 색인 붉은 색으로 벽면을 칠하고 녹색으로 공포를 칠하여 단정한 모습이다.


현판 글씨는 석봉 한호의 것이다.


문묘의 정문인 외삼문으로 들어 오면 만나는 한 그루의 노송(老松)은 군자의 푸른 기상을 상징하는 것 같다.

제기고⑦앞을 지키는 수복청⑧으로 서무의 서측 담장밖에 위치한다. 현판에는 '재학당'이라고 씌여있다.
이곳에 남자 하인들이 거처하고 있었다면 관노들인데 이렇게 좋은 집에 살았는 지는 의문이다.


동무, 서무에서 씌일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로 대성전과 동무, 서무의 세 곳간으로 분리되있다.
※ 이 곳 대성전에서 봄, 가을 두차례 석전제가 열리는 데 올해 9월28일(토)에 2013년 가을 석전제가 기대됩니다.
강학 영역(Recture Area)


출처: 서울문묘와 성균관 팜플렛(종로구)





성균관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의 마루에 앉아 강사의 해설에 귀 기울이는 회원님들


동재의 가운데 문은 명륜당에서 학업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오는 문이다

성균관 유생의 수는 초기에는 150명에서 시작해 200명으로까지 늘었다가 말기에는 100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기숙사 총 수가 30개 밖에 안되는 데 어찌 이 많은 수의 유생들이 함께 기거할 수 있었는 지 경이롭다


이렇게 열어 젖힌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본 방 안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이 서재의 끝 쪽으로 나가면 비천당⑮이 나온다.

약 오백년 정도 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59호).
이 나무 아래서 이이(율곡)가 별시 시험에 응시하여 '천도책'으로 장원급제하였다고 합니다.
최인호 작가의 명저 '유림'에 나오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출처: 서울문묘와 성균관 팜플렛(종로구)

비천당⑮은 2개 소의 장소에서 과거를 실시할때 제2의 장소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때 소실되었다가 1988년에 복원하였다.

향관청⑪: 문묘 향사시 제관들의 숙식처

서월랑⑬은 향관청⑪앞에 좌우로 동월랑과 마주보고 있지만 서로 등지고 있어 프라이버시를 존중한 것 같다.
문묘 향사시 제 집사들의 숙식처이다.

육일각⑤은 군자 육례의 하나인 사(射궁술)을 익히기 위한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곳이다.

존경각④


진사식당⑪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에 나누어 기숙하면서 공부하였는데, 이들은 아침·저녁 식사 때마다
진사식당에 비치된 명부인 도기(到記)에 서명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원점(圓點)을 계산하는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 아침·저녁 두번 식당에 들어가 서명해야 원점 1점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원점은 오늘날의 출석점수와 같은 것으로서 성균관 유생들로 하여금 동·서재에 기숙하면서 학업에 열중하게 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 원점 300점을 취득한 자, 즉 성균관에서 통산 300일 이상 기숙하며 공부한 유생에게만 관시(館試 : 성균관유생에게만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준 문과 초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한편 성균관유생들은 재학중 학령(學令)의 적용을 받았는데, 학령은 성균관 학칙인 동시에 관학(官學) 일반의 학칙으로서 주자학정신(朱子學精神)이 철저히 반영되어 있으나 그 윤리적 기초는 소학정신(小學精神)에 두고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균관 [成均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중국에서 공자(문성왕)에 의해 시작한 유교의 뿌리가 춘주시대를 지나 전국시대에 맹자에 의해 되살려 져 꽃피우게 된 것이 원시 유교라면 그 것이 한나라 이후 중국에서 사회제도로 굳건히 지켜져 내려 오다 주자를 거쳐 결국 유교의 화려한 열매는 해동공자로 불리던 이황(퇴계)와 이이(율곡)에 이르러 맺히게 된다. 그래서 조선은 공자외 성현을 모시는 제사를 성대히 치뤄왔으나 정장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은 청나라 말기의 혼란과 공산주의를 거치면서 그 의례들이 다 소멸됩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중국의 TV가 와서 이 성균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례를 모두 동영상으로 담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우리나라의 문묘의례는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한 원형인 셈입니다. ■
첫댓글 수고 많으십니다.
덕분에 편히 앉아서 역사공부를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력한 답사 후기에 격려의 말씀 주심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