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제3편]
화살이 과녁을 맞추려면
이리저리 둘러갈 순 없다. 하지만 좋은 궁수는
거리와 바람을 수락한다.
그러니 네가 과녁일 때 나는 조금 위를 겨눈다.
-울라브 하우게, 「조금 위를 겨눈다」 전문
뛰어난 궁수는 과녁을 맞추기 위해 오조준을 한다. 과녁을 조준할 때 “거리와 바람”이라는 변수를 계산에 넣는다. 과녁보다 조금 위를 겨누어야만 과녁의 중심에 꽂히는 것이다. 하우게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좋은 시인들은 과학에 버금가는 투명한 진실을 담고자 한다. 하우게의 시구들은 곧추세운 창날의 끝인 듯 날카롭게 벼려져서 어느 한 군데 거짓이 깃들 여지가 없다. 하우게는 “거기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고 한다. 언덕 꼭대기에서 외치는 말들은 너무 옳다. 그 말들이 너무 옳다면 이미 그 말들은 화석화한 도덕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높은 곳에 서서 옳은 말들을 외치는 대신 “언덕으로 들어가/거기 대장간을 지어라/거기 풀무를 만들고,/거기 쇠를 달구고,/망치질하고 노래하라!”(「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라고 권면한다. 말들은 자의적 성질이 강해서 쉽게 변질되는 탓에 항상적 진실을 담보하지 못한다. 그래서 옳은 말[큰 진실]보다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는 것[작은 진실]들의 울림이 더 큰 경우가 자주 있다.
나쁜 시는 사실보다 더 큰 진실을 담으려는 시, 큰 목소리로 외치는 시, 옳은 소리만 해대는 시들이다. 큰 진실, 큰 목소리, 넘치게 옳은 소리 들은 작은 진실, 여린 것들의 속삭임, 가냘픈 것들이 내는소리들을 덮어버린다. 그런 종류의 시를 ‘나쁜 시’ 혹은 ‘악시惡詩’라고 부를 수 있을 테다. 18세기에 태어나 ‘세속사제’로 살았던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는 『침묵의 기술』에서 “온갖 악서(惡書)를상대로 싸우거나 뜯어고치는 작업이 걸출한 문필가의 숙제 중 일부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세상에 널린 온갖 풍자문들, 거짓 기록들, 과도한 평문들, 무의미한 짜깁기 글들, 파렴치한 콩트들, 그리고 종교와 풍속을 해치는 여러 저작들이 내가 일반적으로 ‘잘못된 글쓰기’라 부르는 행위의 결과물들이다.” 라고 쓴다. 18세기의 이 사제는 거짓, 과도함, 무의미, 파렴치함, 반풍속성 따위를 악서의 요소들로 꼽았는데, 물론 이 기준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악서’가 있듯이 ‘악시’도 있다. 세상의 지면에 나오는 모든 시들이 다 좋은 시일 수만은 없다.
과문한 탓인지 주변에서 ‘악시’를 비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악시’의 존재를 부정하는 단서는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 ‘악시’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아무도 ‘악시’고 인지하지 못하거나 말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악시’는 ‘이교적이거나 불온한’ 내용을 담은 시도, 혹은 악행에 대해 쓴 시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프랑수아 비용의 시,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나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악시’가 아니라 악의 양태와 궤적을 보여줄 따름이다. ‘악시’는 좋은 시와 대척적인 자리에 놓이는 시들, 거짓과 과도함에 오염된 시들, 인간 본성을 왜곡하는 시, 도덕적 상투성에 빠져 화석화된 진실들을 파렴치하게 담는 시들, 진부한 악에 교묘하게 동조하는 시들, 한 줌의 가치도 없는 이기주의와 진부한 인지들로 가득찬 시들이다.
장석주 「은유의 힘」
2024. 3. 14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