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원일기
[또 다른 시선으로]
블루베리 하우스 기둥들 사이를 제초 매트로 덮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우스를 만들고 바로 했어야 할 작업이었는데, 매사에 일을 밀쳐서 하다 보니 너무 바빠서 겨를이 없었다. 농한기인 1월에 쉼터를 만들고 싶다는 남편에게, 제초 매트 덮는 일을 마무리하고, 쉼터 만들기로 넘어가자고 했다. 봄부터 풀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화분의 풀을 뽑기도 바쁜데, 아픈 다리와 허리를 구부려서 풀을 뽑으려면 정말 힘들고 벅찼다.
제초 매트 덮는 일도 만만치 않는 작업이다. 허리 쉼을 하느라 고개를 뒤로 젖히니, 평소에 보지 못했던 천장 쪽 풍경이 신비롭게 보인다. 극한의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정치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결책이 폭력밖에 없는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다.
농원에서 일하면서 항상 EBS 라디오를 듣는다. '정경의 클래식 클래식'에서 조성진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이 들려왔다. 작곡과 피아노 연주, 지휘까지 했던 라흐마니노프는 3년 전,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여 발표했으나 실패하고 큰 슬럼프를 겪는다. 한동안 작곡활동을 못하고 긴 터널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 좌절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기어코 작곡을 해서 직접 연주하는 방법을 택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은 1901년 11월 9일 모스크바에서 연주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이 곡은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곡이 되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글도 보았다.
라흐마니노프의 자전적인 상황이 곡에 녹아들어서 슬프면서도 극복하고자 하는 힘과 의지가 느껴진다.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는 듯 밤하늘의 별들이 떠다니는 듯한 느낌으로 시작되는 도입부부터 몰입이 된다. 노래도 연주도 사연을 알고 들으면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곡의 선율도 의미도 참 좋다.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농부 5년 차까지 우여곡절을 겪은 우리도 이 겨울과 봄을 잘 넘겨야겠다고 힘을 내본다. 블루베리 나무들도 이 겨울을 잘 이겨내고 예쁜 꽃들을 피워주기를 기원한다.
[지나친 사랑]
블루베리 하우스에 물탱크 배관을 열선으로 감아 놓았다. 영하로 내려가면 배관의 물이 얼어버리기 때문이다.
모터 보관함을 스티로폼으로 잘 막아 놓았다고 칭찬받을 만큼 야무지게 단속을 했지만,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서 배관이 얼었다.
노란 열선을 감아 놓으니, 선명한 색깔이 예쁘다. 화재 위험은 없는지, 또 걱정이 된다. 집으로 돌아와서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까만 호스에 노랗게 감긴 열선이 뚜렷하게 떠오른다. 과열되어 불이나도 모르게 잠이나 자고 있으면 어쩌나 당장이라도 농원에 가봐야 하나 좌불안석이다.
옆에서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술을 먹었거나 많이 피곤할 때만 들리는 소리다. 오늘 농원일이 벅찼나 보다. 몇 번이나 화재 위험 없으니 걱정 말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혼자 놀란 가슴을 달랜다. 끝없는 걱정이, 끝없는 사랑이겠거니, 마음을 바꿔 본다.
20m 열선, 두 개를 바깥쪽으로 설치하고 나니, 내일쯤, 얼음이 다 녹으면, 목마른 블루베리들에게 물을 줄 수 있겠다. 흙을 쓸어야겠다고 말했더니, 지나친 사랑이라고 말한다. 농장이니, 흙도 좀 있고 그래야 한다고, 그래도 된다고 ㅠㅠ
[봄이 오는 소리]
블루베리 하우스 문을 열자, 저벅저벅, 뚝뚝...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깥쪽과 안쪽의 온도 차이로 생기는 결로가 천장에 매달렸다가 떨어지는 소리다.
나무를 키우는 화분에 제 집인 양 뿌리를 내리고 영역을 넓혀가는 풀들. 20여 일 만에 물을 주었더니, 이때다 싶게 파릇파릇 살아났다. 마치 제 집인 양 마음껏 자라난 풀들을 뽑는다. 단수를 했기 때문에 풀도 안 자라겠거니,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 부지런한 풀들이 살아나서 화분을 점령해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발견한 즉시, 한 뿌리도 남김없이 모두 깨끗하게 뽑아냈다. 만사가 이래야 하거늘, 집을 통째로 빼앗길 수 없는 일, 화분을 어질러놓은 풀 따위, 올라오는 대로 뿌리째 뽑아야겠다.
며칠 전에 물을 먹은 나무들이 조금 더 붉은색으로 변한 것 같기도 하다. 풀들이 기운을 차린 것도 며칠 전에 20일 만에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새잎이 나오면서 지금 달려있는 잎들은 떨어질 것이다. 비닐하우스 안에서는 떨어지지 않는 나뭇잎을 직접 따줘야 해서 만만치 않은 큰일이 기다리고 있다. 바깥 온도가 높아졌다. 물방울 소리가 저벅저벅... 마치, 봄이 오는 소리 같다.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이 있어서 올려 봅니다.
https://youtu.be/T8NVb2Q6o4g?si=YcrMcCRvpvUPPFFX
첫댓글 참으로 멋진 농부 민금순 부회장님,
음악에 취하먼서 야무지게 농사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선하네요.
머잖아 봄이 올 거라는 우리의 희망이 보여요.
그런데 월요일부터 눈 비가 온다고 하는데 긴장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의 삶이 현재 진행형이듯 식물들도 끊임없는 발돋음으로 자기들의 특별한 세상을 만들어 가잖아요.
부지런한 주인님 힘의 원리 믿고...
뿌듯함과 보람으로 행복 만들어가는 날 되길 응원합니다.
클래식을 듣는 것은 마음을 여러 곳으로 여행하게 해 주는 멋진 일입니다. 특히, 차 안에서나 농원에서 일할 때는 제격입니다. 설을 앞두고 대설주의보가 내려져 있어서 저도 긴장하고 있습니다. 나름 대비는 하고 있지만, 아직 난방시설이 갖춰지지 않아서 습설이 아니기를 바라봅니다. 응원에 감사드리고요. 나무들도 힘내서 잘 이겨내리라 기원해 봅니다. 회장님께서도 매사에 힘내시고 즐거운 설 연휴 보내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