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밖의 한국사찰, 1991년 3월호
뉴욕 전등사
전등사는 뉴욕 플러싱 주택 지역에 있다. 절 앞에 있는 5층 석탑만 없다면 그저 평범한 주택일 따름이다. 그러나 전등사의 터전은 전등사가 들어서기 전 까지에는 전설따라 삼천리 시리즈에나 나올 법한 사연을 간직한 사찰인 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87년 버클리대학에서 개최되었던 세계 종교인 대회"에 참석하고 필자와 함께 나성을 거쳐 뉴욕에 온 승려출신 민족시인 고은씨를 모시고 전등사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이때 이 좌담회에 참석했던 뉴져지 주립대 교수이자 목사인 임순만씨, 김홍준 장로 등이 전등사를 보고는 아주 기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두 분이 그것 참 이상한 일이라고 하면서 필자에게 언제부터 여기가 절이 됐는냐고 물었다. 그래서 필자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이 전등사가 전에 두 분의 친구가 살던 집이 틀림 없는데 집의 모양이 바꿔지고 절이 되 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 부인이 죽고 난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으며 뒤뜰에 큰 나무가 벼락에 맞아 쓰러졌는데 그 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 부처님이 앉아 있다고 얘기를 했다. 그 당시에 필자는 고은씨를 여기 저기를 안내 하느라 더 이상 얘기 할 시간이 없어서 언제 다시 한번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냥 지내 왔다. 김홍준 장로는 내 친구의 아버지이고 임순만 목사도 평소에 아는 분이다. 그래서 이글을 쓰기 위하여 자료를 준비하던중 이 생각이 나 올 1월에 임순만교수께 전화를 하여 다시 얘기를 들었다.
임목사는 이에 대해 "그 집에 살던 친구와 나는 아주 절친한 사이입니다. 그래서 친구 부인이 죽기 전날에도 친구가 큰 파티를 열어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L.A에서 오는 친구와 같이 만나기로 해서 기다리다가 오지 않아 친구 집에 가보니 부인이 병원에 입원해 있더군요 나중에 들으니 일하는 직장에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병원으로 갔는데 안타깝게 죽고 말았습니다. 주위에서 훌륭한 부인이라는 평을 받았고 일도 열심히 하여 사업도 성공했고 애들도 공부를 잘해 이만하면 괜찮다 싶은 때 죽게 돼 안타까웠습니다. 남편은 집사였고 부인도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부인이 기독교인 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전등사 주지 혜등스님은 "그 부인이 원래 부처님을 집에 모실 정도로 돈실한 불자였는데 주위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간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부인이 쓰던 초대와 향로를 지금도 스님이 쓰고 있다고 했다.
이상한 일은 그 부인이 죽은 다음부터 일어 났다. 장례식날 장지에서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묘하게도 장지 부근만 비가 왔다. 더 이상한 것은 장례가 끝났을때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날이 해가 쨍쨍하게 뜨고 맑았다.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예상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음은 물론이다.
그 후 집 뒤의 큰 아름드리 나무에 벼락이 떨어져 나무가 쓰러졌다. 부인이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이상한 일 때문에 그 집은 폐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주인은 집을 팔려고 내 놓았으나 2년 동안 팔리지 않았다. 이때 혜등스님이 마침 건물을 찾고 있던 중이어서 우연히 이집을 보게 됐다. 이 집을 사게 된 경우 에 대해 혜등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에 있던 곳에서 좀 더 크고 넓은 곳으로 이전을 하려고 건물을 물색하던 중 현재의 건물을 보니 터전이 아주 센 곳더군요. 이러한 곳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살면은 망하게되고 사람이 죽게됩니다. 그래서 이 집 주인에게 이러한 점을 설명하고 이 자리는 종교가들이 들어와서 종교를 세워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야 이 자리의 터세를 누르고 일어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자리는 불교인이라면 말 할 것 없이 좋아 이 자리에 절이 들어서면 부홍하게 되는데 내가 절 사람이니 나한테 이 집을 파십시오" 하여 이 집을 구입하게 됐다고 했다.
이 집을 처음 샀을 때는 폐허가 다 돼 있었다. 그러나 혜등스님이 터를 보고 난 후 스님 자신이 들어서면 분명히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 이 집에 입주를 했고 이 예감은 맞아 6~ 7년이 지난 지금은 홍칙했던 뒷뜰 수영장은 천불상을 모신 여법한 법당이 됐고 벼락맞은 큰 나무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다.
임목사의 말을 듣고 추측하면 너무나 허망하게 죽은 그 여인은 무슨 한이 남아 있었는지 전등사가 이사와서 3년이 되는 해까지 가끔 혜등스님의 꿈에 보였고 이 여인의 친정 어머니는 현재 전등사 신도인데 혜등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작년까지도 이 어머니 꿈에 딸이 나타나 좀 멋적고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 배도 고 프고 좀 춥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헤등스님은 지금도 7월 백중에는 이 여인을 위해 꼭 재를 지내 주고 있지만 유가족들이 지금이라도 고인의 영혼을 천도하는 천도재를 지내주면 좋을 텐데 하고 말씀하셨다.
이곳에 입주하기 전 터를 보고 예언한 대로 현재의 전등사는 확실한 신도 세대수 50세대를 비롯하여 약170세대의 신도를 확보한 뉴욕 굴지의 사찰이 됐다. 이렇게 되기 까지에는 현 주지 혜등스님의 어려움에 대한 인욕 바라밀행 또한 말 할 수 없이 많았다. 혜등스님은 1977년 여행차 미국에 온것이 인연이 돼 1979년 12월에 미국에 왔다. 그리하여 나성, 하와이, 라스베가스, 알라스카등을 돌아보고 뉴욕에 사찰을 개원하기로 결심을 했다. 플러싱에 아파트를 얻어 1980년 2 월에 개원식을 했다. 전등사라 한것은 현재 태고종 종정이신 안덕암스님께서 " 지혜의 등불을 사방천지에 전 해라는 뜻"에서 전등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당시 뉴욕에 사찰은 맨하탄에 원각사와 조계사가 있을 뿐이었다. 혜등스님 은 사고무친인 뉴욕에서 초기의 포교와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압을 했다. 약 2년 동안 지압을 하여 많은 사람들의 병을 나아 주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주다보니 이제는 스님 손에 무리 가와 날씨가 긋은 날에는 손에서 통증을 느낀다. 이렇게 아파트에서 1년을 지내다 1년 후 플러싱 로빈슨 스트릿에 혜등스님의 개인 돈으로 14만불에 건물 을 구입하여 이사를 했다. 이 곳에서 몇 년을 지내다가 혜등스님, 보봉스님, 윤스님 세분이 힘을 한데 모아 좀 더 크게 포교를 하자고 하여 현재의 건물을 34만불에 계약을 하고 10만불을 지불했다. 이중 445000불을 혜등 스님이, 35000불은 보봉스님이, 19,000불을 윤스님이 내 놓았다. 이렇게 출발을 하였으나 보봉스님은 서울에서 미국으로 들어올 수 없는 사정이 생겼고 윤스님은 L.A로 떠나가 혜등스님 혼자 전등사를 꾸려 나가야 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집이라 단장을 해야 했다. 먼저 뒤뜰 풀장을 법당으로 개조를 했다. 이 작업에 약20만불이 들어 갔는데 이 돈은 스님이 로빈슨 스트릿에 14만불을 주고 산 집이 몇 년 뒤에 22만불이 되어 이 집을 팔아서 전부 이 공사에 썼다. 이렇게 법당을 만들고 나서 곧 바로 천불상을 봉안했는데 이 천불상 조성비도 혜등스님의 한국에 있는 개인 부동산을 처분하여 전액 지급을 했다.
지금까지의 전등사의 불사 과정을 살펴보면 미주 다른 사찰의 경우와는 확실이 다른 점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찰은 불사에 드는 비용을 모금을 하거나 신도들이 내는 불사 동참금이 처음부터 주를 이루는데 전등 사의 경우는 집을 구입할 때는 세 스님이 재원을 마련하였고 법당건립에는 혜등스님 개인이 비용을 부담하였 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혜등스님은 이렇게 말씀한신다. "먼저 시주 받아서 불사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그런 경우에는 너무 힘이 들고 계획이 차질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슨 불사든 불사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재정을 준비를 하고 보시금을 나중에 받는 방법을 택합니다. 예를 들면 천불상도 미리 제가 개인 돈으로 비용을 지불했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 비용에 쫏겨 무리가 생깁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합리적인 사고에 바탕을 두고 해야지 억지로는 무리가 생깁니다."
아주 일리가 있고 불사를 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음미해 볼 말이라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불사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야 의미가 있으니 천불상 같은 불사에는 되도록 많은 동참자가 있었야 한다. 그런 의미에 서 올해에는 전등사에 천불상 불사 시주 동참자가 많이 생기기를 바란다.
전등사 불사에는 주지 혜등스님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김란회, 심혁근, 김기원, , 박정렬, 강영옥, 김남심, 전송국, 서흥양, 김우숙, 최종학, 정택종, 노경애, 강범, 강신숙, 김길석, 이창균, 라군식, 오훈, 진재곤, 이 성옥, 이주호, 김철현, 정중옥, 이옥연, 허세자, 엄태영, 남인순 등이 헤등스님을 도와 오늘의 전등사가 있기 까지의 큰 공로자들이다.
태고종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포교에 나선 혜등스님은 지혜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스님이 지압을 한다느니 이러쿵 저러쿵 많은 말을 들었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내가 내길을 꾸준히 갈때 시간이 가면 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할 것이다 생각하고 오늘까지 그 어떤 말에도 변명없이 지내왔다. 그리고 개원부터 오늘까지 정확하게 회계정리를 해왔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면서 필자는 정도를 걷는 비구니스님으로서 혜등스님에게 존경심이 생겼다.
그러나 사고무친인 뉴욕에서 80년 개원이래 공양주 보살에서 주지스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스님 손으로 하다 보니 혜등스님의 건강에 무리가 와 88년 혈압으로 쓰러졌다. 다행이 지금은 많이 회복되어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동부한인태권도 사범협의회 회장이며 전등사 이사인 심혁근씨는 "혜등스님은 1인 5역을 했고 또 고달픈 이민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어머니 역할을 했읍니다. 신도들이 사업을 하려고 해도 돈이 없을 때 재정적인 도움을 줘 성공한 사람들도 몇 세대나 됩니다. "라고 그간의 스님의 활동에 감사를 드렸다.
근래에 뉴욕의 불교 행사에 여러 사찰들이 합동으로 행사를 하면서 각 사찰의 스님과 임원들이 모여 회 의를 몇 번 했다.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회의 때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또 공동 불교행사에 적극적이라고 혜등스님에 대하여 평했다. 필자도 혜등스님과 여러 번의 대화 도중 아주 치밀하며 계획적이고 동시에 매우 자애로움을 느낀 적이 많았다.
전등사의 앞으로의 계획은 첫째 지금까지 "혜등스님과 신도 임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자리가 잡혔으니 앞으로는 신도들이 이사회를 중심으로 서로 화합을 다지면서 신도관리, 재정관리 등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절을 이끌어가고 둘째로는 20~ 40대로 이루어진 청년회가 조직되어 독자적 법회를 하며, 세째로는 좋은 고 사를 만나 주말 어린이 학교를 시작할 계획이다. 또 작년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석탑 조성에 이어 올해에 는 미륵부처님 봉안을 추진하여 내년에 회향할 예정이다.
대외적으로는 92~ 93년 중에 플로리다에 전등사 분원을 세울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올란도 부근에 대지를 구해 준비 작업 중에 있다.
현재 전등사의 신도는 노보살님들과 젊은 신도들이 50%씩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청년회와 어린이 학교도 핵심적으로 이끌고 나갈 사람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활동 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은 조성 돼있다. 전등사와 뉴욕 불교계의 발전을 위하여 청년회와 어린이 학교가 하루 빨리 결성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전에 박성 배교수를 초청하여 매월 1번씩 초청 법회를 하였듯이 법회를 다양하게 해으면 좋겠다.
전등사가 들어서기 전에 기이한 사연이 있도록 한 터세를 극복하고 천불상을 모신 영험 도량으로서 또 미주에 지혜의 등불을 전달하는 사찰로써 전등사가 길이 빛나기를 부처님전에 발원한다.
199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