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겨울부터 한 해에 한 권꼴로 동시집을 쏟아내다니요. 마치 동시 함박눈이 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도 몽글몽글 잔뜩한 구름 속에 아직 많은 동시가 들어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눈을 기다리듯 권영욱 시인의 동시예보에 귀 기울여야겠습니다. 이런 동시눈이라면 한동안 눈 속에 갇혀도 좋을 듯합니다. 단단한 눈들입니다. 뭉치면 쉬 흩어지지 않을 눈 뭉치입니다. 집 앞 뜰이나 마당에 세워두면 든든할 눈사람이 될 것입니다. 힘을 뺀 듯하다가도 다시 솟구치는 시어들을 따라 읽는 재미가 만만치 않습니다. 꼭 1년 전에 선보였던 첫 동시집 『불씨를 얻다』와 함께 읽는 재미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자 소개>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습니다. PEN문학 신인상, 푸른문학상 새로운 시인상을 수상했으며, 대구문화재단·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습니다. 동시집 『웃음보 터진다』(공저), 『구름버스 타기』(공저), 『불씨를 얻다』는 2021 한국동시문학회 올해의 좋은 동시집에 선정됐습니다.
<책 속으로>
씨앗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데 날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었다고 해서 잠이 깼어
날 위해 큰 밭으로 옮겨 심는다고 해 난, 아직 포근한 포트 속을 떠나기 싫은데
날 위해 잘 크는 비료를 준다네 난, 아직 흙냄새만 해도 충분한데
날 위해 벌레 죽이는 농약을 뿌린다네 난, 배추벌레 한 마리쯤은 키워도 괜찮은데
날 위해 좋은 값을 받으려면 꽃을 피우지 말래 난, 꽃 피워 씨앗 하나 남기고 싶은데
날 위해 진작 꿈을 물어보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하네 난, 내 꽃에 하얀 나비를 앉히는 꿈을 꾸었다고 하려 했는데
날 위해 하얀 나비 대신 눈을 보내줄 거라고 하네 난 날 위해 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이 겨울이 올 때까지 --- 「배추를 위해」
마른 풀 마른 나뭇가지가 새둥지가 되었어
알을 품었나 싶더니 둥지에서 째재째재 새순이 돋는 거야
뾰족뾰족 새순이 먹이를 쏙쏙 받아먹더니
보송보송 꽃송이로 피는데 이걸 마른 풀 마른 나뭇가지가 해냈다는 거야
아직 놀라기에는 일러
조금 더 있으면 꽃송이가 하늘을 날아다닐 거래
마른 풀 마른 나뭇가지가 새순을 키웠다고 자랑하고 싶다는 거야 --- 「새순」
꼭, 나보다는
더 좋은 곳에 자리 잡으렴
씨앗 날려 보낸
민들레 빈 꽃대
‘좋은 곳에 자리 잡았겠지’
바짝 마른 꼭지만 남았습니다 --- 「민들레 엄마」
새들은 누가 낳은 알이든
묻지 않고 품는다
오목눈이는 제 알 밀어내고 낳은
뻐꾸기알도 품어
둥지를 떠날 때까지 키운다
‘낳은 엄마’ ‘기른 엄마’라는 말
새들에겐 없다 새들은 둥그런 알을 낳는다 --- 「새들은 알을 낳는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아파트가
층층층 불 밝히고
보름달을 쑥 낳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큰일 해냈습니다
오늘만큼은 달의 엄마로 불러주겠습니다 --- 「달의 엄마」
가시 빽빽한 탱자나무 울타리
길쭉한 가시
참새 작은 발 놓기 좋은 발 받침이다
큰 새들 공격 막아주어
떼로 모여 놀기 좋은 마음 편한 쉼터다
참새는 탱자나무 가시와 친구 할 줄 안다
--- 「참새와 가시」
<출판사 리뷰>
권영욱의 동시는 조금 더디 핀 꽃과 같습니다. 그래서 더 절절하고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뜨겁고 아팠을까요?
엄마를 떠올리며 오롯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시인의 말」 부분
문경 청화산 산골 소년으로 자란 권영욱 시인의 두 번째 동시집인 『새 둥지엔 왜 지붕이 없을까』에는 조용한 가운데 쉼 없이 움직였던 그동안의 마음들이 한가득입니다. 조금 더디 핀 꽃처럼 그 고운 빛이 은은하게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하지만 시작은 이렇습니다.
“아프리카/세렝게티 넓은 초원에//어떤 경우에도/미리 포기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대//살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죽을힘을 다하면서 같이 살고 있는 거래”(세렝게티 생존법)
사뭇 비장하게 시작됩니다. 시인이 그동안 시를 대해왔던 태도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한술 더 뜹니다.
“죽기 살기다/돌격 앞으로//애앵/애앵//뱃속/알을 위해”(돌격) 이 대목에선 ‘알’을 ‘시’로 바꿔 읽어봅니다.
“새끼 소라네가/단단한 집을 새로 짓고 있어”(소라네 이야기)
시인은 조금 더디 핀 꽃인 만큼 절절하고 오래 기다려온 마음으로 단단한 시를 쓰겠다는 다짐들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저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권영욱 시인을 아는 분들은 아마 다들 그렇게 느끼실 겁니다.
“난, 내 꽃에 하얀 나비를 앉히는 꿈을 꾸었다고 하려 했는데”(배추를 위해)
여기서 시인의 시어가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떠오르게도 합니다. 여기까지 닿기 위해서 시인이 얼마나 오래 그리고 질기게 시를 잡고 있었을지 상상이 됩니다.
“젖줄이/계속 그렇게 맑게 살아있어야”(젖줄) 라고 말하며 모성과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자연을 함께 아우르고 있습니다.
“아직/놀라기에는 일러//조금 더 있으면/꽃송이가 하늘을 날아다닐 거래//마른 풀 마른 나뭇가지가/새순을 키웠다고 자랑하고 싶다는 거야”(새순)
새를 꽃송이로 치환해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선선하면서도 경탄할 만합니다. 마른 풀과 마른 나뭇가지를 물어나를 땐 그것으로 뭐 하려나 의심의 눈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하늘 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대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거야, 이것 때문에 그동안 그랬던 거야, 잘 봐!”
표제작에서는 “엄마 아빠 따뜻한 체온 나누고 싶어 새 둥지엔 지붕”을 아예 안 만들었다고 합니다. 서로의 체온을 나눌 수 있다면 높고 푸른 하늘을 보게 한다는 마음,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이번 시집에서도 모성에 대한 그리움의 말을 잊지 않고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만큼은 달의 엄마로 불러주겠습니다”(달의 엄마) “새들은 누가 낳은 알이든 묻지 않고 품는다” “‘낳은 엄마’ ‘기른 엄마’라는 말 새들에겐 없다”(새들은 알을 낳는다)고 첫 번째 동시집에서 한층 더 진보한 모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말
담쟁이꽃, 묵묵히
지나는 바람에 윤기 흐르는 잎을 푸른 빛으로 한껏 자랑하는 담쟁이. 넓적한 이파리 사이로 웅웅거리며 벌들이 들락거리고 있었습니다.
웬 벌? 궁금해 자세히 보았습니다.
세상에나! 꽃이 숨어있었습니다. 노란 꽃술을 내밀고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모여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담쟁이도 꽃을 피우는구나! 작은 청포도 알처럼 열매를 키우고도 있었습니다.
담쟁이를 푸른 잎으로만 보았던 게 미안해졌습니다. 역시, 백과사전에는 포도과에 속하는 식물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한여름 뙤약볕에서도 잎이 무성했던 것은 씨앗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묵묵히 푸른 잎을 키우며 한 땀 한 땀 온몸으로 벽을 오르던 몸짓은 포도처럼 낮은 밭이 아닌 더 높은 곳을 보여주려한 마음의 표현이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