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트니스 리는 과연 워치만 니 보다 전진된 계시의 사역자인가?
제가 처음 2006년 서울 동교동에 위치한 학생센타를 통해 지방교회 형제 자매님들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서 가장 먼저 자주 들었던 말은 "워치만 니 형제님보다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사역은 한 단계 더 전진된 계시의 사역이다" 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 3개월전 인터넷 사이트에서 지방교회 한 형제와 교통하던 중에 "내가 경험하고 느낀 바로는 워치만 니 형제님의 사역이 고등학교 레벨이라면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사역은 대학교(대학원) 레벨이다"는 말을 분명하게 들은 것이 기억이 납니다.
물론 주 예수님께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고 말씀하셨고 진리는 쌓여지며 계시는 점진적인 것으로 볼 때 리 형제의 사역이 어떤 면에서 좀더 전진된 계시의 사역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좀더 전진된 계시의 사역이 성경과 충돌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워치만 니 -
교회가 어떻게 하여 오늘날의 상태에 이르렀는가?
그 이유는 교회가 고린도 전서 14장의 그러한 집회 위에 건축되지 않고 사역적인 집회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왜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가 있으나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가 없는가? 그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의 집회를 가지려면 성령의 옮겨 부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옮겨 부음이 없으면 고린도전서 14장의 집회가 있을지라도 형식에 불과 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는 사람을 인도할 때 먼저 성령의 옮겨 부음을 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로 하여금 처음부터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를 갖게 할지라도 그것은 효력을 발하지 않고 능력이 없는 것이다.
- 위트니스 리 -
아래 글은 위트니스 리가 집필한 '역사와 계시' 가운데 어떤 질문에 대하여 그가 답변한 내용입니다.
-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의 내적인 공급과 성령의 옮겨 부음인 외적인 능력에 관하여 -
질문 : 성령은 내적인 생명의 방면과 외적인 옮겨 부음의 방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침체되어 있거나 압력을 받을 때는 외적인 옮겨 부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몇 년 동안 우리의 이해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 영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과 하나가 되어 우리의 생명 공급이 되십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침체되어 있거나 압력을 받을 때에 그 영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어떤 문제든지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답변 :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는 내면적인 영과 외면적인 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이 올 때에 그는 내면적인 영과 외면적인 영을 말하지 않고 일곱 영을 말합니다. 일곱 영은 모든 것을 포함한 영이며 그 안에 모든 풍성이 다 있으므로 내면적인 영과 외면적인 영을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밥을 먹을 때 매끼마다 두 잔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지식하게 반드시 유리컵에 따라 놓은 두 잔에 물을 마셔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은 국을 두 그릇 먹을 수도 있고 커다란 수박 두 조각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위'에는 두 잔의 물이 있게 됩니다.
원칙은 당신이 먹는 매끼의 음식 속에 항상 두 컵 분량의 수분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것이 수분인지 아닌지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면적인 영과 외면적인 영도 이와 같습니다. 고지식하게 "나는 이번 6주 동안 내면적인 영의 공급을 받았는데 지금 내가 침체되어 일어날 수가 없으니 외면적인 영의 옮겨 부음이 필요하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분석의 결과로 당신은 내면적인 것도 잃어버리고 외면적인 것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소의 힘줄이나 꼬리, 배추, 양파, 당근에다 두 잔 분량의 물까지 들어 있는 중국의 '루오쑹탕'을 마시듯이, 다만 간단히 모든 것을 포함한 이 영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모든 영양분을 얻게 됩니다. 옮겨 부음의 영은 아주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30여 년 동안 성령의 옮겨 부음에 관한 일을 그다지 많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옮겨 부음의 영은 다만 사도행전 시작에만 나오고 서신서와 계시록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머무르지 말고 계시록의 일곱 배로 강화된 일곱 영까지 전진해야 합니다』.
저는 위에 게시된 글 안에서 여러 주제의 제목을 끄집어내 교통할 수 있겠지만 먼저 "성령의 옮겨부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전개를 하고자 합니다.
워치만 니는 사도행전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의 침례'(행 1:8)를 "성령의 옮겨부음"이라는 아주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 워치만 니 -
"성령의 부어짐에 대한 해석"
시간 1935년 11월 18일 오후 3시
장소 : 천주(泉州)
"여기서 성령의 부어짐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아마 열흘의 시간을 들여서 전해도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조금만 말하겠다. 그렇다고 이 일에 관해 성경에서 이 정도만 말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단지 조금만 제시할 뿐 결코 깊은 연구를 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한 면으로 연구하면서 다른 한 면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많은 빛을 주시기를 구한다."
워치만 니는 이 문제를 약 8~9년을 연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영적인 분량이 큰 형제가 "나는 단지 조금만 제시할 뿐 결코 깊은 연구를 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대단히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 한참한참 부족한 제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두 사역자의 "성령의 옮겨부음"에 대한 차이점을 논한다는 것이 솔직히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만 "하나님께서 더 많은 빛을 주시기를" 구하며 계속해 글을 씁니다.
워치만 니는 분명한 말로 --
"형제들이여, 우리는 사람을 인도할 때 먼저 성령의 옮겨 부음을 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로 하여금 처음부터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를 갖게 할지라도 그것은 효력을 발하지 않고 능력이 없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
"옮겨 부음의 영은 아주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30여 년 동안 성령의 옮겨 부음에 관한 일을 그다지 많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옮겨 부음의 영은 다만 사도행전 시작에만 나오고 서신서와 계시록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머무르지 말고 계시록의 일곱 배로 강화된 일곱 영까지 전진해야 합니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사람 육체 위로 부어지는 "성령의 침례"는 사도행전에만 있지 사신서나 계시록에는 당연히 없습니다. 이처럼 당연한 말을 위트니스 리는 왜 했을까요? 그것은 워치만 니가 인식하고 체험한 "성령의 옮겨부음"과 위트니스 리가 인식한 "성령의 옮겨부음"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저는 보았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말대로 --
"성령의 옮겨부음은 사도행전에만 있고 서신서나 계시록에는 없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머무르지 말고 계시록의 일곱 배로 강화된 일곱 영까지 전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방교회 형제자매님들이 생각하는 "워치만 니 형제보다 위트니스 리 형제의 사역이 한 단계 더 전진된 계시의 사역이다" 인가요?
이곳에 계시는 형제 자매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현재 지방교회 안에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이 두 사역자의 사역만을 가지고 매주 실행하는 "신언집회"가 과연 워치만 니가 말한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니와 리 두 사역자는 이미 무덤에 누었지만 지방교회는 여전히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이 두 사역자의 사역만을 가지고 매주 신언집회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실행은 니와 리 두 사역자의 사역만이 통행할 수 있는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이지 결코 워치만 니가 말한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가 아닙니다.
저의 관찰이 틀리지 않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성경 안에 이미 본으로 존재하고 가리키는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댓글 워치만 니는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베풀었으나(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거듭남을 체험함으로 이미 내주하는 성령을 받고 중생함) 사도들이 와서 성령받기를 기도하고 나서야 성령을 받은 사실.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에 바울이 5절에 요한의 제자들에게 먼저 세례를 주고(예수를 주로 시안하고 내주하신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 침례를 줌) 나서,
6절에서 다시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교회 역사의 창세기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2번의 사례에도 있듯 거듭남과 성령의 옮겨 부음에 있어서 발생하는 시간적 간격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분명하게 거듭남과 성령의 옮겨 부음을 니형제는 별개의 체험으로 보았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와 만나기전 형제회에서 배운 그대로 거듭남과 성령의 옮겨 부음을 단일한 체험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문제입니다.
저는 이런 좁히기 힘든 견해의 차이(간극)을 가지고 논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지방교회 안에서는 니형제의 이같은 사역은 수면 아래 있고 리형제의 사역(관점)만이 수면 위에 있음을 인하여 중요한 하나님의 은사들이 결핍되고 매장되어 있어 워치만 니의 가르침에 따른 풍성함이 제한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저는 주님의 은혜로 오랫동안 이 문제를 연구하고 살펴왔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워치만 니 형제의 사역을 통해 도움을 받고 이러한 간극을 지울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만 성경에 있는 본과 가리킴과 빛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이런 시작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서 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