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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함께(공개) 스크랩 14. 섣달 그믐밤에 만나는 고도리석불입상
창암( 한호철) 추천 0 조회 50 09.12.30 10:2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익산고도리 석불입상(益山古都里 石佛立像)

 

익산고도리석불입상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1086번지와 서고도리 400-2번지에 분리되어 있으며, 각기 커다란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세워진 불상 2구를 말한다. 이 사람모양의 석상은 국가소유로 불교의 상징인 불상이며,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석불입상은 금마면 남쪽 1km지점의 들판에 비포장도로를 따라 동서로 약 200m의 거리를 두고 서있다. 전체적으로 사다리꼴 모양의 커다란 하나의 돌기둥에 불상의 머리부터 석대좌(石臺座)까지 조각하였고, 보일 듯 말 듯 웃는 모습으로 민속적인 감각이 가미된 것이 특이하다.

불상의 머리는 위에 높은 사각형의 관(冠)을 얹었고, 그 위에 다시 방형(方形)의 갓을 올려놓았다. 가늘게 뜬 눈과 작은 코, 가느다란 입술은 겨우 형체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짧은 목은 한 줄로 처리하였고 몸통과 머리가 붙은 듯 보이며, 몸통 또한 굴곡이 없고 밋밋하다. 어깨는 그대로 흘러내려 아주 좁게 처리되었다. 양 팔은 복부 앞에서 손가락을 끼고 있으나, 법의(法衣)로 가려졌고, 의문(衣紋)은 목에서부터 평행선으로 흘러내려 양쪽 발등위에 와서 좌우로 벌어졌다.

석대좌는 앞쪽을 깎아 모를 냈으며, 발등은 약식으로 처리하였다. 고려시대의 신체적 표현이 절제된 커다란 석상 중의 하나로 입상(立像)의 높이는 각각 4.24m에 달한다. 마치 금마의 수호신과 같은 느낌을 주어 ‘인석(人石)’이라고도 불린다.

석상의 발치에는 신발을 벗어 놓을 법한 판석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신체구조에 비현실적인 것은 마치 묘소(墓所)의 석인상처럼 토속적인 모습이다. 고려시대에는 이와 같이 신체의 표현이 지극히 절제되고 기이한 형상의 석상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 역시 무척 친근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일반적인 묘석에서는 큰 얼굴을 하고 비정상적인 몸체로 괴상하고 위엄있게 보이는 것과 대조적으로 온화한 느낌이다.

일반적인 고려의 조각작품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해학적이고 무뚝뚝하면서 거칠고 조잡한 느낌을 담는 경우가 많다. 커다란 바위에서는 자연적인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각을 하다만 정도의 표현이나 상징적인 조각도 많이 있다. 발견되는 석인상의 경우 갓을 쓰고 눈이나 비를 피하는 모습이며, 주로 사각형의 갓이지만 둥근 것도 발견된다. 신체구조의 부조화는 물론이며 의복이나 부속품이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논산의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즉 은진미륵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도리석인상 중건비의 뒷면에 쓰여 있는 함풍(咸豊) 8년 5월은 조선 철종 9년 1858년 5월로, 이 고을에 부임한 군수 황종석(黃鍾奭)이 길에 넘어져 있는 석불을 세우고, 그 옆에 석불중건비(石佛重建碑)를 세웠다. 중건기에 ‘금마는 익산구읍의 자리인데 동?서?북의 3면이 다 산으로 가로 막혀 있다. 그런데 유독 남쪽만이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수문(水門)의 허(虛)함을 막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다른 내용으로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은데, 말에게는 마부가 있어야한다고 하여 이 석상을 세웠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래서 금마산을 마이산(馬耳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금마산은 현재의 미륵산을 의미한다. 1400년대의 이숭원(李崇元)가(家) 기록에 의하면 금마의 주산이 금마산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뒤에 용화산, 미륵산으로 명칭이 바뀌어 왔다. 그렇다면 말은 하나인데 어찌하여 마부는 둘이나 될까 의문도 든다.

또는 이 석인상이 미륵사를 호위하던 지역표시는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곳은 도읍지 금마로 들어서는 초입으로 왕립사찰 미륵사를 위시하여 지역 일대를 알리는 경계석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금마보다 더 가까운 곳에 왕궁리유적지가 있기는 하지만 석인상의 방향으로 보아 왕궁리유적지를 호위하던 모습은 아닌 듯하다. 또한 고려시대에도 왕궁보다 금마가 더 번성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런 해석이 든다. 석인상이 가지는 특성은 고려시대의 풍속석상인데 이는 금마보다 미륵사를 호위하는 것으로 해석함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아니면 고려시대에는 석인상 근처에 미륵사를 대신할 정도의 다른 어떤 시설물이 있었다는 추측도 해볼 수 있겠다. 군남석불중건기를 비롯하여 이 석인상을 예전부터 불상으로 해석해 온 것이 그런 느낌을 더해준다.

 

고도리 석불입상은 키가 아주 큰 거인에 속한다. 석인상 2기는 모습이야 어찌되었건 상관없이, 우선 큰 키를 가지고도 까치발을 하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느낌을 준다. 최근에는 이 두 입석에 커다란 봉분모양의 발무덤을 만들어서 아주 높은 데에 서있게 하였다. 주변의 논에 경작을 하면서 석인상의 시야가 가려질까 걱정하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이제는 주위에 잡초가 우거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그시 바라볼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그것은 1년에 한번 만나는 대신 언제든지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석인상에 대한 배려였다. 반면에 석인상의 주변정리를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관리인에 대한 배려도 되었다.

두 석상 중 서쪽의 석상은 남자이고, 동쪽의 석상은 여자라고 한다. 남자석인상의 경우에는 수염이 새겨져있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윗수염은 돼지꼬리처럼 휘어있고, 아랫수염은 고사리순처럼 뭉쳐져 있다. 이 두 석상 사이로 옥룡천(玉龍川)이 흐른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 냇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서로 건너와서 끌어안고 그동안 맺혔던 회포를 풀다가, 새벽에 닭이 울면 헤어져서 다시 제자리로 간다는 전설도 있다.

예전에 두 석인상을 갈라놓았던 옥룡천은 작은 도랑으로 변했다. 자연발생적으로 흐르던 넓은 하천에서, 이제는 경지정리가 끝난 작은 농수로에 지나지 않는 개천으로 변한 것이다. 토사가 쌓이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반듯하게 정비하고 나머지는 모두 농토로 사용하니 그것이 바로 인위적인 개발이 아니었던가. 뿐만아니라 맑고 투명하던 물이 흘러 바닥의 자갈이 옥으로 보이던 옥룡천이, 지금은 생활하수가 흐르는 ‘버린천’이 되고 말았다.

바로 인근을 지나는 1번 국도도 이제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반듯하게 정비가 되었다. 굽었던 허리를 펴고 짚세기 대신 운동화를 신으니 어디든지 날아갈 것만 같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은 빠르고 편리한 교통환경이라고 자랑을 한다. 그러나 석인상은 더욱 외로워졌다. 예전에는 바로 앞을 지나던 구불구불 2차선에서 언제든지 머물다갈 수 있었으나, 이제는 쌩쌩 달리며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나가는 국도가 되고만 때문이다.

엄동설한 섣달그믐이 되어야만 두 석인상이 만나 회포를 푼다고 하였다. 그런데 요즘 옥룡천은 얼음조차 얼지 않으니 그리운 임을 찾아 건너갈 방법조차 없어졌다. 거기다가 지나가는 사람마저 인적을 끊으니 소식을 전해줄 방법마저 없는 형편이다. 집나간 며느리가 행여 돌아올까 섣달 그믐밤 대문을 열어놓고 아들을 바라보는 시아버지처럼, 누군가가 그리운 때이다. 그 사람이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든 아니면 차가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든, 석인상을 그저 바라보아만 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익산시민들은 이런 때를 대비하여 옥룡천에 다리를 놓았을까. 두 석인상은 얼어붙은 발걸음 대신 뜨거운 시선을 보내며 작지만 산뜻한 다리위에서 만나고 있었다. 이제는 굳이 1년을 기다릴 필요도 없어졌다. 봄이면 봄대로, 가을이면 가을대로 언제든지 시선을 주고 눈길을 받는 사이가 되었다. 둘의 사랑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마치 오래전의 서동과 선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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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의 여자석상

 

 

 서쪽의 남자석상

 

 

옥룡천으로 섣달 그믐밤에 얼어붙으면 두 석상이 건너가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지금은 강의 직선화작업으로강폭이 줄어들고 다리가 놓여 언제든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땅에 묻힌 석인상을 캐어 다시 세웠다는 중건비가 동쪽 석인상 발옆에 서있다.

 

석불입상이 문화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발치에는 신발을 벗어놓을 정도의 작은 댓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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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투데이 2009.12.30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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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9.12.30 10:29

    첫댓글 지난 가을 문학답사에 나섰던 곳중의 하나인 석불입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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