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면 아버지는 나를 이발소로 데려가셨다
십리를 걸어야 비로소 그 이발소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삼거리였으므로 두 개의 길이 더 있었다
하나는 내가 사는 동네보다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고 하나는
낯설고 먼 도회지로 나가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검지 없는 손가락으로 그 길을 가리키시며
너는 저 길을 따라가거라 하셨다
반듯하고 큰 신작로였다
가끔 쇠뭉치같이 큰 차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먼지 속으로 사라지고는 했다
아버지는 삼거리 이발소에 나를 앉혀 두고
이발소 옆 주막에서 담배 내기 화투를 치셨다
담배 몇 개비에 버럭 화를 내고 삿대질을 하고
술잔을 거푸 돌리며 떠들썩했다
연말은 곧 닥칠 텐데 너는 농협 빚 어떡할 거냐
비료대며 농약대에 물세 빼고 나면 남는 게 뭐 있어야 말이지
거, 재 너머 돌모산 성님 말여
누런 농협 봉투만 보면 쯧쯧, 질겁을 하더니
제길, 딸년 하나 잘 둬서 늦복 터졌잖여
말도 안 통하는 그 잘난 사위가
참나, 비까번쩍 자가용 몰고 왔도만은...
칠석이란 놈은 지 딸 기어코 식모살이 보냈단 말이지
내팽개치 듯 후려친 화투장이 벌컥 싸지르자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는 종식이 아버지 얼굴 위에
충혈된 삼십 촉 전구알
하나밖에 없는 삼대독자 내 아들,
대처로 유학 내보냈다가 저런,
교통사고로 횡사하고 말았다니!
작달막하고 앙칼진 철호 아저씨 마누라가 들이닥쳐
화투판은 진즉 엎어지고
젓가락 장단에 유행가 가락에 이러구러 해는 저물고
상고머리에 철없이 기분 좋아진 나는
하릴없이 술판을 기웃거리며 안주거리를 얻어먹으며
어리고 작고 가난한 내가 가야 할 길,
노을 질펀히 드러누운 신작로의 아득히 끝간 데를
또 하염없이 바라보다
아버지의 취한 입냄새가 나를 와락 껴안았을 때
조금 울었던가
성님! 내년에는 뭐가 됐든 한판 크게 저질러 봅시다
썩을 놈의 세상
이 징한 놈의 가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