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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체는 늘 청안합니다
“나도 아레까지 꼼짝도 못했어.못 걸었어요.”
허리를 다치셔서 못 오신다는 정오스님 소식을 전해주시면서 용학스님이 ‘요즘 스님들이 아프고 다치는 게 유행인가 보다’라고 하셨다.
다행히 용학스님도 아프셨던 다리가 나아지셨고, 회장스님도 7월 20일에 전화를 드려봤더니 의정부와 파주에서 도수치료를 받으시고 말짱히 나으셨다고 했다.
“차도 어느 정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그때부터 수리해 타야 되는 건데, 사고 이력이 있는 차들은 나중에 잔고장이 나요. 내가 운동할 때 사고 이력이 많잖아요. 다 째고 수술을 많이 했거든. 그리고 그 사고 이력이 젊을 때는 다 받쳐주다가 이제 하나하나 무너지는데 안 아플 수는 없다. 요령껏 살아가야지. 젊을 때처럼 똑같이 그렇게 살면 법신이 무너지지.”
이렇게 말씀하시다가 용학스님은 ‘법체 청안하십니까?’ 하는 인사를 하는데, 법체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법체라고 하면 골치 아프다고 하셨다.
비로자나법신 할 때의 법체를 말씀하시는 것이냐고 여쭤보니 ‘법체가 뭔지는 나는 모른다’고 하셨다.
“그런데 법체는 안 아픈데? 법체는 늘 청안하잖아. 편지 쓸 때 법체 청안하십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건 수행하는 스님의 몸이라고 법체라고 표현한 거겠지. 잘못된 건 아니고. 엄밀한 의미에서 진짜 법체는 아무 하자 없다. 없는 것이 어떻게 아플 수 있는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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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무거사님이 용학스님에게 절을 하시고 근황이야기를 나누셨다.
용학스님이 학무거사님이 삼영불교음반을 통해 스님들의 법문자료를 기록하고 보급하시는 일에 대해서 찬탄하셨다.
“제가 가진 자료들이 일주일에 하나씩만 신도분들께 보내도 10년안에 다 보내지 못할 만큼입니다.”
거사님의 말씀에 용학스님도 어릴 때부터 공부하여 메모한 자료들이 다시 볼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하셨다.
“그래도 유튜브에 많이 남긴 자료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으로 우주 법계에 다 살아남잖아요. 그러면 누가 봐도, 누가 듣더라도 앞으로 우리 불교는 다 들을 수 있을 것이죠. 눈이 밝은 삼영 입장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자리가 귀하다고 알아봤잖아요.”
“어떤 스님은 저에게 덕담하시더라고요. 21세기 장경불사라고.”
학무거사님이 말씀하셨다.
“덕담 아니고 실제라. 오늘도 목판본 한 벌 새기잖아요. 오늘도 우리가 대장경 찍어 놓으면 인경하듯이, 복사하듯이 계속 찍어나갑니다.”
“감사합니다. 일어나겠습니다.”
“찬탄합니다.”
학무거사님이 나가신 뒤에 용학스님은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거사님이 그 일을 안 했으면 자료들이 다 유실될 뻔했다고 하셨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된다고 저렇게 큰스님들 법문 강의록 모아놓느라 얼마나 힘들었겠노. 무피염심(無疲厭心)이지.”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一
如來出現品 第三十七之二
三. 普賢菩薩의 說法
반갑다. 연중에 7월 8월 두 달이 제일 더운데 한 달에 한 번씩 우리가 모여서 공부를 하니까 여기 두 번 오는 것도 날이 덥다고 좀 버겁다.
오늘 하실 대목이 여래출현품 중에서 부처님이 출연하시는데 대표적으로 부처님 여래 법신은 어떠한 것이고, 여래의 법음은 어떠한 것이고, 부처님의 뜻은 어떠한 것인가?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중에서 신업이 끝나고 지금 어업, 구업을 하는 중이다.
265페이지(민족사刊 제3권) 여래(如來)의 어업(語業), 구업(口業) 말씀의 업, 부처님의 음성은 어떠한 것인가?
네 번째 단락까지가 끝났고 오늘은 다섯 번째 단락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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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가 출현한다고 하는 것,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할 때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신심이 무르익어서 의심이 전혀 없이 완벽하게 법성(法性)에 대해 요해를 했을 때, 그것을 신해(信解)라고 한다. 분명하게 믿고 이해하는 것이 완성된 단계를 초발심이라고 하지 않는가?
초발심이 된 상태에서는 팔상성도(八相成道)가 바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변성정각이다.
정각을 이루게 되면 팔상성도가 저절로 도솔래의상(都率來衣相)에서부터 열반상까지 그대로 묻어나는데, 그 팔상이 바로 신업과 구업과 의업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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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살짝 돌아보면 선구(善口)천녀가 있었다. 종구일성(從口一聲)으로, 그 한 입의 일성, 한 음성으로부터 출어여시무량음성(出於如是無量音聲)이라,한량없는 음성이 나왔다.
흔히 비유하기를 하늘에 달 하나가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에 비치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과 같다고 한다. 또 다른 말로는 여울지든지 메아리치든지 지금 여기에서 울리는 한 음성이 스피커를 백 개 달아 놓으면 백 개에 나가고, 스피커를 천 개 달면 천 개에 나가고, 스피커를 만 개 달면 만 개의 스피커에 다 달려나온다.
여러분들께서 승음보살(勝音菩薩)을 기억하실 것이다.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에서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있는 게송이 승음보살장(勝音菩薩章)에 나온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 인연 따라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 그러나 한 발짝도 움직여 본 적이 없구나’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다.
승음보살장의 이 게송이 주련에 많이 쓰여 있지 않은가?
승음보살장에도 나오는 여래의 음성에 대해서 여래현상품에서 이미 우리가 공부를 했다. 그런데 우리는 까먹는 데 천재다 보니까 까먹고 없고, 그런 의미가 지금 다시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어쨌든지 우리는 금생에 화엄경을 공부하고 다비장까지 화엄에 묻혀서 죽어야 되기때문에, 여러분들은 결석하고 싶어도 결석 못 하신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오늘 빠지신 분들 할 수 없지만.
여하튼 앞에 나온 선구천녀를 보면 ‘부처님의 한마디 말씀 중에 일체 언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 이런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부처님의 말씀은 무상이라서 무심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중생은 각기 자기의 시력과 청력에 따라서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때문에 부처님의 음성이 다양하게 나온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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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천에 가면 아수라의 딸 그 사지천녀(舍支天女)가 사지천고라고 하늘 북소리를 울리는데, 그 북소리는 어디서 나오느냐? 무심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그런 것들이 바로 부처님의 음성은 자비로워서 이르지 않는 데가 없고, 부처님의 음성은 단절되지 않고 보입법계(普入法界)라, 부처님의 음성은 모든 법계, 일체의 유위법이든 무위법이 됐든 있는 자리에는 모든 법계에 다 들어간다. 단절됨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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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부처님의 말씀은 여기서부터 그 음성이 온 세상 끝까지, 천년만년 가지 않는 데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부산 앞바다가 저기 있는데, 바다로 들어오는 물은 낙동강에서 흘러 들어왔든 샛강에서 흘러 들어왔든 어떤 강에서든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바다로 유입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다에 들어가는 순간이 되면, 일심자리에 들어가면 오늘 들어온 강물이나 천 년 전에 들어온 강물이나 계급이 없지 않은가? 동급이다. 일심자리에 들어가 버리면 부처님이나 우리나 다 동급이 된다. 그렇지만 들어가기 전까지는 노정이 있고 과정이 있어서 천차만별이다. 아주 조그만 옹달샘도 있을 것이고 마음이 툭 터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꼬라지가 전부 다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입장에 들어가 보면 모두가 하나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것은 바다와 같은 무분별심인 부처님의 음성이다, 잔잔한 파도가 되어도 그것은 바닷물이고 큰 파도가 일어도 그 바닷물이다.
큰 파도가 되고 잔잔한 파도가 됐다는 것은 바다는 파도가 없는데 단지 중생의 허망한 생멸의 무명풍으로부터 일어난, 무명의 바람으로부터 일어난, 파도의 높이일 뿐이다.
잔파도나 큰 파도나 모두 바다임에는 틀림없다.
부처님 음성이 원래는 크고 작은 것도 없고, 멀고 가까운 것도 없고, 본래 없는 것이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중생이 자기의 분별심에 따라서 그 음성이 크고 작게 들린다.
‘잘 안 들리면 보청기 끼이소’
그래서 부처님 음성은 사곡이 없다. 너무나 정도(正道)라서 왜곡되거나 사사로움이 없다, 여기까지 지난 시간에 공부한 선구천녀에 대해서 짚어보았다.
3. 如來의 語業
마. 大梵天王의 梵音聲
復次佛子야 譬如大梵天王이 住於梵宮하야 出梵音聲에 一切梵衆이 靡不皆聞호대 而彼音聲이 不出衆外어든 諸梵天衆이 咸生是念호대 大梵天王이 獨與我語인달하야 如來妙音도 亦復如是하사 道場衆會가 靡不皆聞호대 而其音聲이 不出衆外니 何以故오 根未熟者는 不應聞故로 其聞音者는 皆作是念호대 如來世尊이 獨爲我說이라하나니 佛子야 如來音聲이 無出無住로대 而能成就一切事業이니라 是爲如來音聲第五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마치 대범천왕이 범천의 궁에 있으면서 범천의 음성을 내면, 모든 범천의 대중들이 듣지 못하는 이가 없으며, 그 음성도 대중 밖을 벗어난 것이 아니지마는 모든 범천 대중이 모두 생각하기를 ‘대범천왕이 나만을 위하여 말씀한다.’라고 하느니라.
여래의 묘한 음성도 또한 그와 같아서 도량에 모인 대중들이 듣지 못하는 이가 없으며 그 음성도 대중 밖을 벗어난 것이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근기가 성숙하지 못한 이는 듣지 못하는 연고며, 듣는 이는 모두 생각하기를 ‘여래 세존이 나만을 위하여 말씀하신다.’라고 하느니라.
불자여, 여래의 음성은 나는 일도 없고 머무는 일도 없지마는 모든 사업을 능히 성취하느니라. 이것이 여래 음성의 다섯째 모양이니,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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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범천왕(大梵天王)의 범음성(梵音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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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범천이 나왔는데 굳이 중생심에서 잘라보자면 타화자채천까지는 욕계천상이다. 욕계천상 욕계천인데 대범천부터는 색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니까 조금 더 고준하게 부처님의 음성에 대해서 분석을 해 보겠다는 말씀이다.
대범천, 범천에 이 정도 나왔다,라면 비유로써 하자면 대범천쯤 되면 욕계 하고는 좀 달리, 때를 놓치지 않고 근기가 성숙한 중생에게는 부처님의 음성을 반드시 들려주겠다는 뜻이다.
색계에서 선정에 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전혀 청력이 들리지 않아서 옆에서 고함을 질러도 못 듣는 사람들한테 부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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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아침에 쉽게 눈을 떴다. 그런데 어느 병원 중환자실에는 아침이 되어도 누워서 눈을 못 뜨고 몇 년을 그렇게 계시다 가는 분들도 있다.
오늘 아침에 저는 제가 죽었나 살았나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 보았다. 지금 잘 움직인다.
어떤 분은 이 손가락 하나 드는 것이 힘들어서 못 움직이는 것이다.
제가 어제 아레, 다리를 다쳤는데 ‘오늘 강의를 못 가게 잘 됐다. 선배님들이 많으시니까 누가 대신 중강하시면 되겠다’라는 해방감을 가졌다. 그런데 오늘 마침 다리가 나아버려서 다시 여기에 왔다.
아플 때는 ‘못 움직입니다’하면 핑계대기가 좋다.
우리 어른스님도 그러시잖는가? 유마거사가 병을 앓듯이 ‘내 아프다’ 이러시고 안 하시면 우리끼리 죽을둥살둥 전부 다 같이 해나가야 된다.
오늘 아침 제 다리는 나았지만, 평생에 다리가 중추신경이 마비돼서 한 발짝도 못 뗀다면 굉장히 힘이 들 것이다. 안 그렇겠는가?
여기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의 음성이 확연하게 막 귀에 속삭이듯이, 확성기를 대고 얘기해 주는데도, 내가 눈이 멀어서 안 보이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내가 귀가 멀어서 안 들리는 걸 어떡하는가?
화엄경은 이와 같이 찬란하고 아름다운데, 화엄경이 눈에 안 들어오고, 화엄경 책장 하나 넘길 힘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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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음은 하늘의 음성인데 스님들이 부르는 범패가 있지 않은가? 범패는 ‘오동잎 한 잎 두 잎’ 하고 속된 노래를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 ‘어어허야 어아아아아’ 우리가 하는 범패, 이 범성이라고 하는 것은 잡되고 땟구정물이 싹 사라져 버린 음성이다. 범행, 범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것은 ‘참선하는 마음이다’ 정도는 돼야 한다.
‘고요한 적정의 음성이 된 사람이 부처님의 음성을 받아들일만 하다’ 이런 뜻으로 이 대목을 이해하면 된다.
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또 불자야
비여대범천왕(譬如大梵天王)이 : 비유컨대 대범천왕이
주어범궁(住於梵宮)하야 : 주어범궁하야, 대범천왕이 당연히 범궁에, 깨끗한 데 계셔야 될 것이다.
속가의 누린내 찌린내가 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범천궁에 계시면서
출범음성(出梵音聲)에 : 범천의 음성을 내면, 그 깨끗한 음성을 내면
일체범중(一切梵衆)이 : 모든 범천 대중은
미불개문(靡不皆聞)호대 : 듣지 못하는 이가 없다. 들을 만한 사람은 다 듣는다. 여기는 욕계를 초월해서 색계의 경계에 들어온 이들이다.
사실 욕계 중생들은 좀 잘 안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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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음성(而彼音聲)이 : 그러나 그 음성이
불출중외(不出衆外)어든 : 대중 밖을 벗어난 것이 아니지만
제범천중(諸梵天衆)이 : 범천 대중들은
함생시념(咸生是念)호대 : 생각하기를
대범천왕(大梵天王)이 : 대범천왕이
독여아어(獨與我語)인달하야 : 누구만을 위해서? 오직 나만을 위하여 말씀한다고 하느니라.
승수미산정품에 보면 청량국사가 삼주(三舟)에 대해 해석해 놓은 것이 있다.
강에는 삼주(三舟) 배가 세 척 있다. 환하게 달 밝은 밤에 강에 배 세 척을 띄워놓고 하나는 강남으로 가고 하나는 강북으로 가는데 한 척은 정주(停住)라 멈추어 있는 배가 있다.
강남으로 가는 배는 달이 남쪽으로 따라가고, 강북으로 가는 배는 달이 북쪽으로 간다.
사람이 천 명 있으면 전부 다 자기 집으로 가는데, 집집마다 달을 데리고 머리에 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달은 한 발짝도 간 적이 없다.
부처님의 음성은 한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그럼 부처님의 말씀 49년 설법을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자설(自說)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그렇게 고백해 놓았다.
어른스님이 저한테 “니는 말을 좀 천천히 하면 좋을 텐데”하신다. 좀 빨리 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이 정도면 천천히 하는 편이다.
“말만 조금 천천히 하면 좋겠다.”
“예”
그래놓고 어른스님께 제가 말씀드린다.
“그런데 스님, 제가요 저는 말을 안 하는데 말이 지 혼자 톡 튀어나와 버립니다.”
저는 가만히 있는데 말이 저 혼자 말이 되어서 톡 튀어나온다. 그러면 제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종경록이나 부처님 어록에 보면 그런 것이 나온다.
‘부처님 말씀은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한 말씀도 하신 것이 없는데 말이 자설(自說)이라’ 말이 스스로 말을 해버렸다.
부처님 당신은 말씀을 의도적으로 하신 바가 없고, 스스로 자(自)자 말씀 설(說)자 자설(自說)이라.
부처님의 말씀은 방편삼아서 하신 것이라서 자연스럽게 할 자리에 하고, 안 할 자리에 안 하는 것이다.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의 믿음과 이해 정도라든지 때라든지 좋아하는 정도 이런 것에 따라서 부처님의 음성이 있어진다.
원래 부처님의 음성은 크고 작은 것도 아니다.
크고 작은 중생이 자기 마음이 옹졸하든지 넓든지 못된 중생이든지 잘난 중생이든지, 희한하게도 부처님 음성은 아주 귀 먼 사람도 듣고 눈먼 사람도 본다.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신심만 있으면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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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묘음(如來妙音)도 : 여래의 묘음, 우리가 능엄경을 배울 때 청정(淸淨)과 묘정(妙淨)에 대해서 배운다.
맑은 깨끗함, 묘한 깨끗함, 이렇게 청정과 묘정을 배운다.
청정은 어떤 존재가 허공처럼 하나도 없어서 맑은 것을 청정이라고 한다.
묘정이라고 하는 것은 연꽃처럼 아주 탁한, 냄새 나는 뻘밭의 진흙탕물 같은 데서 그 진흙탕에 훈습되지 아니하고 연꽃이 오히려 연못을 정화시키면서 자신도 당당하게 피어있는 것을 말한다.
여연화불착수(如蓮花不着水) 심청정초어피(心淸淨超於彼)다.
탁한 연못에서 연꽃이 자기도 탁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연못을 정화시키면서 당당하게 핀다. 이것은 묘정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들 중에 연꽃을 밟고 사바세계를 다니는 관세음보살님은 조금 모자란다. 진짜 관세음보살님은 맨발로 저벅저벅 걸어다닌다. 똥물이나 진흙탕을 맨발로 저벅저벅 걸어다녀도 아무것도 발에 묻지 않는다. 발수코팅이 되어 있기 때문에 묻지도 않는다.
묘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성음과 똑같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묘미가 있다.
주가신 1번이 누구인가? 유연승미주가신(柔軟勝味主稼神)이다. 유연하다는 것은 선정을 뜻하지만 유연하고 맛있다고 하는 것은 남녀노소나 동서고금을 떠나서 누가 먹어도 맛있는 맛이다. 그것이 승미다.
묘음도 누구한테나 들린다. 개미한테도 들리고 코끼리한테도 들린다.
역부여시(亦復如是)하사 : 또한 그와 같아서
도량중회(道場衆會)가 : 도량에 모인 대중들이
미불개문(靡不皆聞)호대 : 듣지 못하는 이가 없으며, 혹시 안들린다면 그는 인간이하다.
이기음성(而其音聲)이 : 그 음성도
불출중외(不出衆外)니 : 대중 밖을 벗어난 것이 아니니
하이고(何以故)오 : 무슨 까닭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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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숙자(根未熟者)는 : 근기가 미숙한 자, 근기가 성숙하지 못한 이는, 미숙이는 안 좋다. 성숙이는 괜찮다. ‘오늘 미숙이 가 왔나 안 왔나’ 미숙, 익지 못한 사람들은
불응문고(不應聞故)로 : 들리지 않는다. 화엄경이 안 보인다.
화엄경이 절대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기문음자(其聞音者)는 : 그러나 그 음성을 듣는 사람 중에 성숙한 사람은 다 들린다. 화엄경에 인연이 있는 사람은 다 들린다. 부처님의 음성이 들린다.
개작시념(皆作是念)호대 : 모두 생각하기를 생생하게 역력하게 들리니까
여래세존(如來世尊)이 : 여래 세존께서
독위아설(獨爲我說)이라하나니 : 오직 나만을 위해서 설하는 가 보다,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월인천강지곡에서 세종대왕께서는 얼마나 신심이 있는지, 천 리 밖의 일이지만 부처님을 눈앞에 마주 본 듯이 해서 부처님을 대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외외(巍巍) 석가불(釋迦佛)이여,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시여, 당신의 일이 만 리 밖의 일이라도 눈앞에 보는 듯이 하고, 천 년 전의 음성이라도 귀에 속삭이는 듯이 여기서 듣듯이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런 구절이 월인천강지곡 첫 대목에 있는 것을 제가 보았다.
우리가 지금 여래출현품을 하고 있지만, 여래출현품 중에서 저에게 제일 좋았던 게송은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 그런 뜻의 게송으로 여래출현품에 나오는
여시미밀심심법(如是微密甚深法)
백천만겁난가문(百千萬劫難可聞)
정진지혜조복자(精進智慧調伏者)
내득문차비오의(乃得聞此秘奧義)
이 구절이다.
이 심오한 뜻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나온다. 내득문차비오의(乃得聞此秘奧義) 이렇게 나오는데 측천무후가 얼마나 감동했으면 그 대목을 우리가 오늘 상강례를 했듯이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이라고 해놓았다.
제가 화엄경 약찬게 도표를 만들면서 7회차 11품 중에서 한 게송만 딱 뽑아서 도표 속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어느 게송을 찾을까, 새벽 예불을 갔다와서 ‘여래출현품에서는 찾겠지’ 하고 화엄경을 착 넘겼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났다.
여시미밀심심법(如是微密甚深法)
백천만겁난가문(百千萬劫難可聞) 백천만 겁토록 듣기 힘들다.
정진지혜조복자(精進智慧調伏者)
내득문차비오의(乃得聞此秘奧義)
정진하는 사람들은 정진하기 전에 이미 인내가 있었을 것이고 인내하기 전에는 지계가 있었을 것이다. 지계 전에는 보시가 있었을 것이다.
정진지혜조복자, 마음을 다 조복했다고 하는 사람, 반야바라밀을 얻어서 조복한 사람은 근기가 다 익은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반야바라밀, 대승의 길로 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화엄경이 보이기도 하고 들리기도 하지만, 대승하고 아무 상관이 없으면 화엄경이 보고 들리지 않는다.
여래 세존께서 오직 나만을 위해서 설하신다고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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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래음성(如來音聲)이 : 여래의 음성, 부처님의 음성은
무출무주(無出無住)로대 : 무출무주로되 그대로 나왔다. 무출무주, 이 구절은 화엄경의 이야기가 아니고 제가 써놓은 것 같다.
자기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구절이 경전에서 확인되어 나오면 굉장히 기분이 좋다. 확신이 서는 것이다.
경전에 안 나오면 남들한테 강의할 때도 ‘내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말해도 되는가? 저 사람들한테 쥐 뜯기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말해놓고 그 구절이 경전에 나오면 ‘휴우’ 하고 한시름 놓아진다.
부처님의 음성이 나온 바도 없고 머무는 바도 없다, 이렇게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데, 남한테 건방스럽게 제가 얘기를 안 해도, 입이 먼저 촉발되어 말이 톡 튀어 나와서 얘기를 해버렸잖은가. ‘아유 큰 실수했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경전에 확인되어 나와주면 굉장히 기쁘다.
여래음성은 무출무주로되
이능성취일체사업(而能成就一切事業)이니라 :이(而) 그러나, 능히 성취한다. 일체사업을.
무출무주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환하게 보겠지만 이판(理判)이다. 이(理)라고 하는 것, 마음의 심성(心性)이라고 하는 것은 보고 싶어도 눈 씻고 봐도 볼 수가 없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헛것이다. 보였다 하면 다 헛것이고 꿈이고 여몽환포영이라. 무출무주라고 하는 것은 무거무래라. 여래의 음성은 부동이다. 움직이는 것이 없는 무동(無動)이다.
그런데 일체 사업, 업(業)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업이라고 하는 것은 동작을 한다는 말이다. 한문으로 업(業)을 해석하면 조작(造作)이라는 뜻, 기동(起動)이라는 뜻이 있다. 일어나고 움직이는 것을 업이라고 한다.
업이 다 해버리면 뭐가 되는가? 구래부동명위불로 업장소멸이 된다. 업이 다 소멸되면 움직이는 것이 없다. 분별사식이 안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이 없음이 바로 무거무래가 되는데 여기 일체 사업이라고 하는 건 사판(事判)이고 현실이다.
무출무주라고 하는 것은 이치다.
여래의 음성은 진리의 입장에서 아무 흔적이 없다. 그러나 투명한 색깔 속에서 8만 4천 가지 색깔이 다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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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여래음성제오상(是爲如來音聲第五相)이니 :이것이 여래 음성의 다섯째 모양이니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들은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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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운가? 신심이 나서 더워야 할텐데 저 혼자만 좀 덥고 신심이 나는 것 같다.
어른스님이 안 계시니까 공부하는 분들 숫자도 자꾸 줄어들고, 그래서 저라도 투툼하게 있는 것처럼 거품 물고 강의해야 된다.
바. 衆水의 味와 器
復次佛子야 譬如衆水가 皆同一味니 隨器異故로 水有差別이나 水無念慮하며 亦無分別인달하야 如來言音도 亦復如是하야 唯是一味니 謂解脫味라 隨諸衆生의 心器異故로 無量差別이나 而無念慮하며 亦無分別이니라佛子야 是爲如來音聲第六相이니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니라
“또 불자여, 비유하면 마치 여러 물이 다 맛은 같지마는 그릇이 다르므로 물에 차별이 있으나 물은 생각도 없고 분별도 없느니라.
여래의 음성도 그와 같아서 오직 같은 맛이니 곧 해탈하는 맛이거니와 중생의 마음 그릇이 다르므로 한량없이 차별하지마는 생각도 없고 분별도 없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의 음성의 여섯째 모양이니,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
부차불자(復次佛子)야 : 또다시 불자야
비여중수(譬如衆水)가 : 마치 여러 물이
개동일미(皆同一味)니 : 다 맛은 같지마는
수기이고(隨器異故)로 : 그릇이 다르므로
수유차별(水有差別)이나 : 물에 차별이 있으나
수무염려(水無念慮)하며 : 물은 생각도 없고
역무분별(亦無分別)인달하야 : 분별도 없다.
*
여러분들께서 납득하시기 좋게 조금 더 이해를 돕자면 이런 것이 있다.
중생은 그릇으로 치면 일반적으로 흙그릇이라 이야기한다.
토기, 질그릇이다.
보살 수행자들, 제보살(諸菩薩)은 여은기(如銀器)라, 마치 은으로 만든 그릇과 같다. 제불(諸佛)은 여금기(如金器)라, 모든 부처님, 일체제불은 마치 금으로 만든 그릇과 같다.
도자기 같이 흙으로 구운 그릇과, 은그릇과, 금그릇은 세속적인 비중으로는 흙과 은과 금이라고 하는 업의 가치가 다르다. 그렇더라도 거기에 담겨진 공기가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일심(一心)이라고 하는 이 마음 하나를 쓰는 데 있어서, 부처님이나 우리나 ‘없다’라는 것은 동등한 입장이다.
그 일심(一心)을 생각으로 뽑아내 쓸 때, 얼마나 자비롭게 쓰느냐, 무자비하게 쓰느냐, 탐진치를 쓰느냐, 지저분하게 쓰느냐, 깨끗하게 쓰느냐, 순수하냐, 잡되냐 이 정도 차이가 그릇에 있다. 그런 것은 그릇의 인연에 있는 것이지 본래 공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대충 이해가 가셨는지 모르겠다.
그 그릇들 흙그릇이나 질그릇이나 은그릇이나 금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의 인연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공기는 방편과 아무 상관이 없다. 경전에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 공기가 일심의 자리다.
똑같은 마음인데 부처님은 백퍼센트를 쓴다면, 중생들은 그렇게 쓰지 못한다.
똑같은 물인데도 그릇에 따라서 물맛에 차이가 나는지는 모르지만, 원래의 물맛은 일미(一味)다.
물은 일미라서 삿되거나 왜곡된 것이 절대 없다.
여기 시계가 있다. 제 시계는 디지털이라서 이렇게 누르면 초침도 나왔다가 분침도 나왔다가 막 바뀐다.
모래시계가 됐든지 물시계가 됐든지 디지털이 됐든지 아날로그가 됐든지 태엽시계가 됐든지 상관없다. 그런데 시계에는 시간이 없다. 시계는 시간을 나타내는 기능을 가질 뿐이지 시계는 시간이 아니다.
어떤 음성을 크게 했든지 작게 했든지 그것은 음성이 아니다.
음성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물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크거나 작은 것이 아니고, 듣는 사람이 때로 크게 할 때도 있어야 되고, 때로 약하게 할 때도 있어야 된다.
그런 뜻으로 지금 부처님의 음성은 본래 없지만 중생의 수준에 따라서 이렇게 있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지금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모나미 볼펜에 잉크를 담는데, 빨간 데 빨간 것을 담는 게 아니다. 파란 데 파란 것을 담는 것도 아니다.잉크를 담는 플라스틱은 빨갛고 파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호등에 빨간 전기가 오면 불이 빨갛고, 파란 불일 때는 전기가 파란 것인가? 전기는 색깔이 없는데 그렇게 보이도록 덮어 씌웠다는 것이다, 여기는 그런 뜻이다.
어떤 분들은 다 아는 얘기를 왜 하는가 하는데, 우리가 계속 숨을 쉬지만 쉬었던 숨을 또 쉰다.
*
그다음 대목 이어서 하겠다.
광명에 대한 일심은 다 똑같지만 무명잡념이 너무 다르다.
광명에 있어서 우리 일심분상에서는 다 똑같지만 우리가 무명이 있어서 다르다.
기신론에 이렇게 나온다.
‘왜 사람들은 이것이 깨달음의 길이라고 딱 가르쳐주면 똑같이 깨닫지 못하고, 빨리 깨닫는 사람, 늦게 깨닫는 사람, 못 깨닫는 사람, 말하기도 전에 알아보는 사람, 천차만별로 차별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일심,진심, 진짜 마음의 빛, 지광은 똑같다. 지혜 광명은 똑같은데 그러나 무명에 덮인 업장이 두껍고 얇은 것이 있다.’라고 하였다.
무명에 덮인 정도가 어떤 사람은 업장이 두꺼워서 안보이고 어떤 사람은 업장이 가벼워서 잘 보인다.
*
여래언음(如來言音)도 : 부처님의 음성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그와 같아서
유시일미(唯是一味)니 : 오직 같은 맛이다.
부처님의 음성이 무슨 맛이 있겠는가? 유시일미다. 아주 중요한 말을 써 놓았다.
오직 유(唯)자를 썼다. 오직 한 맛뿐인데 무슨 맛이냐?
없는 맛이다. 없는 맛이 뭐냐?
위해탈미(謂解脫味)라 : 모든 번뇌쪼가리가 없는 해탈미다.
부처님의 맛은 해탈미다. 이 맛은 유통기한이 없어서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맛이다. 상락아정의 맛이다. 해탈미다. 그러나
수제중생(隨諸衆生)의 : 수제 모든 중생의
심기이고(心器異故)로 : 마음 그릇이 그릇마다 종지 같은 사람, 도토리 깍지만한 사람, 접시 같은 사람, 병 같은 사람, 넓은 사람, 좁은 사람, 천차만별로 중생의 마음 그릇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심기이고(心器異故)로 여기에 줄을 쫙 긋자.
줄을 백 번 그어도 괜찮겠다.
어떻게 이런 걸 써놨는가? 마음 그릇이 다르기 때문에 바다같이 넓은 사람도 있는 반면에 용량이 달리는 사람들이 많잖은가? 용량이 달리면 보일러도 터진다. 열 받는다.
사람들이 용량이 달리면 화내지 않는가? 열 잘 받는 사람들은 용량이 아주 옹졸한 사람들이다. 안 삐칠 것도 삐쳐서 몇 날 며칠 또 오래 삐쳐있다.
마음이 고장 잘 나는 사람들은 마음이 넓지 못해서 그렇다. 마음은 중고품이 안 되는데 자꾸 중고품으로 쓰니까 그렇다.
‘수제중생(隨諸衆生) 심기이고(心器異故)’ 중생의 그릇이 다르다는 것은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본래 부처님처럼 업이 없으면 괜찮은데
무량차별(無量差別)이나 : 한량없이 차별한다. 무량차별이다.사람마다 다 다르다.
한 나무에 있는 나무 이파리도 이렇게 다르다. 심심하면 올해 단풍 이파리를 한 나무만 다 따다가 크기를 재보라. 무게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다. 한 나무에 달려서 엔간하면 이파리가 똑같아야 되잖은가? 같은 게 하나도 없다.
요새 하지감자를 캐는데 감자를 캐보면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새끼가 쪼만하게 달리는 것도 있고 굵다란 것도 있다.
사람도 우리가 평생토록 살면서 자기가 자기라고 하면서 이렇게 사는데, 인생 중에 하루도 ‘같은 나’가 없다. 사람이 그것만 알면 싱긋이 웃으면서 아침마다 냉수 한 그릇 먹고 속 차릴 수 있다.
그런데 맨날 고집스러워서 ‘내 누구인지 알죠?’ 알기는 뭘 아는가. ‘나 같아도 나를 모르는데 내가 지를 누군지 아나? 니나 알아라.’
여기는 그렇게 나온 것이다.
여기서 무량차별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량잡념이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중생은 그렇기 때문에 한량없는 차별이 있지만 부처님은 어떤가?
이무염려(而無念慮)하며 : 이(而) 그러나, 무염려며 중생의 입장에서는 흔히 염불이라 한다. 염불(念佛) 부처를 생각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입장은 염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무념(無念)이다.
의상스님은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라 했지만,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에 가야 아미타불을 만난다. 아미타불이 누구냐? 아미타불 안 할 때 아미타불이 되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자기가 아미타불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 아미타불을 찾아줘야 되니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하고, 내가 죽을 때가 되면 내가 급하니까 ‘내아미타불 내아미타불’하다 죽어야 된다.
여기서 분별 생각도 염려가 끊어졌다고 하는 것, 무념으로 갔다고 하는 것은 안쪽의 어떤 독사 같은 아만심이나 바깥으로 뻗어져 나온 탐진치가 사그러들어서 선악 시비가 다 끊어진 것을 말한다.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이다.
어떤 것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 무염려에 들어가는 것을 부처님이라 한다. 이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거기에 들어가니까 무분별이라, 분별이 전혀 없다.
허공에 무슨 크기가 있겠으며, 허공에 무슨 각도가 있겠는가? 바람도 각도가 없는데 허공은 더 없다. 바람은 그래도 느낌이라도 있지 허공은 느낌마저도 없잖은가.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여래출현품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나온다.
약인욕식불경계(若人欲識佛境界)
약유욕지불경계(若有欲知佛境界)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取)라
반야심경에는
심무가애(心無罫碍) 무가애(無罫碍)하니까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이니라.
그렇게 나온다.
그러니까 둥글거나 모난 것과는 아무 상관 없다.
모양 없는 무상인데, 무슨 둥근 것이 있고 모난 모양이 있겠는가? 되게 못된 스님들은 삼각형도 아니고 이각형이라고 한다. 엎어졌다 자빠졌다만 한다고 이각형이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여래음성제육상(是爲如來音聲第六相)이니 : 이것이 여래 음성의 제6상이다. 여섯 번째 음성이니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모든 보살마하살이
응여시지(應如是知)니라 :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한다.
다음 대목에 용왕이 나온다. 오늘은 용왕이 많이 나와서 스님들께 유인물을 한 장 나눠드렸다.
화엄경 14권 중간부터는 정행품이 나오고 정행품 다음에 현수품이 나온다. 14권에 현수품, 정행품이 같이 나오는데 흔히 하는 참선 수행의 기본 요점을 다 정리해 놓은 것이 정행품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 해야 할 청정한 행위들이 정행품에 나온다. 화장실 들어갈 때부터 양치할 때까지, 길 다니는 법 등 모든 모습을 다 정리해 놓았다.
정행품 다음에 14권 중간부터 15권까지가 현수품이다.
잘 아시다시피 현수품에는 스님들이 알고 계시는 게송이 많이 나온다.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
장양일체제선법(長養一切諸善法)
단제의망출애류(斷除疑網出愛流)
개시열반무상도(開示涅槃無上道)라든지 주옥 같은 게송들이 많다. 현수품은 14권, 15권 전체가 일곱 자 배기 게송으로 되어 있잖은가. 전부 게송으로 되어있다.
현수품은 장문이 없고 게송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용왕 부분을 제가 좀 줄여서 프린트 해왔다.
여러 스님들께 ‘현수품에서 찾아라’ 하면 또 안 찾아보실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한 것이다.
바로 뒷대목에 용왕 대목이 나오는데 같은 내용이 현수품에 그대로 나온다.
화엄경은 앞의 품에 나왔던 내용이 뒤에도 반복적으로 나오는 대목들이 있다. 제가 본 것만 해도 삼사십 군데다.
똑같은 내용이 그대로 앞에도 나오고 뒤에도 나오는 것이다.
한참 읽다가 ‘어 이거 오늘 처음 보는 건데 왜 자꾸 읽어본 것 같지?’ 그러면 언젠가 한 번 만났던 사람이다.
언젠가 한 번 만났던 사람이니까 그럴 때는 또 익숙하잖은가.
감동 없이 읽은 책은 언제 봐도 맨날 처음 보는 것 같고, 한 번 봤는데 뚫어지게 본 것들은 재미있든 어떻든 영원히 기억에 남는다.
제가 어릴 때 학생 시절에도 예쁜 미스코리아가 나오니까 지금까지도 누구누구라고 하면 눈에 삼삼하게 안 까먹어진다.
그런데 맨날 만나는 우리 동네 시장 아지매나 아가씨는 기억도 못한다.
그러니까 경전을 미스 코리아 보듯이 봐야 까먹고 싶어도 안 까먹어진다. 경전을 쉰 빵처럼, 상해버린 옥수수처럼 쳐다보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래출현품에서는 용왕에 대해 다섯 가지 비유를 한다.
구름에 비유하고, 비에 비유하고, 천둥에 비유하고, 번개에 비유하고 또 비바람이 치지 않는가. 바람에 비유를 한다.
현수품에는 바람을 빼고 나머지 비유들이 나온다.
유인물을 보시기 바란다.
<유인물>
龍王譬喩/ 華嚴經 제 15권 賢首品
① 雲色各異喩
-구름의 빛이 같지 아니함을 비유하다-
大海龍王遊戲時에
普於諸處得自在하야
興雲充徧四天下에
其雲種種莊嚴色이라
큰 바다의 용왕이 놀 때에
널리 모든 곳에서 자재를 얻어
구름을 일으켜 사천하에 두루 충만하니
그 구름이 갖가지로 장엄한 빛깔이라
第六他化自在天엔
於彼雲色如眞金이며
化樂天上赤珠色이요
兜率陀天霜雪色이며
제 6타화자재천에는,
저 구름의 빛깔이 진금(眞金)과 같고,
화락천 위에는 붉은 구슬의 빛깔이요,
도솔타천(兜率陀天)에는 서리와 눈의 빛깔이며,
夜摩天上琉璃色이요
三十三天瑪瑙色이며
四王天上玻瓈色이요
大海水中金剛色이며
야마천(夜摩天) 위에는 유리(琉璃) 빛깔이요,
삼십삼천에는 마노(瑪瑙) 빛깔이며
사왕천 위에는 파려(坡瓈) 빛깔이요
큰 바닷물 위에는 금강 빛깔이며
② 電光差別喩
-번개의 힘이 차별함을 비유하다-
又復他化自在天엔
雲中電曜如日光이며
化樂天上如月光이요
兜率天上閻浮金이며
또 다시 타화자재천에는
구름 속에 치는 번개 햇빛과 같고
화락천 위에는 달빛과 같고
도솔천 위에는 염부금(閻浮金)빛이며
夜摩天上珂雪色이요
三十三天金焰色이며
四王天上衆寶色이요
大海之中赤珠色이며
야마천 위에는 흰 눈빛이요
삼십삼천은 금불꽃빛이며
사왕천 위에는 온갖 보석 빛이요
큰 바다 가운데는 붉은 구슬 빛이며
③ 雷聲不同喩
-뇌성(雷聲)이 같지 아니함을 비유하다-
他化雷震如梵音이요
化樂天中天鼓音이며
兜率天上歌唱音이요
夜摩天上天女音이며
타화의 우레 소리 범음과 같고
화락천 가운데는 하늘 북소리
도솔천 위에는 노래 소리요
야마천 위에는 천녀의 음성이며
於彼三十三天上엔
如緊那羅種種音이요
護世四王諸天所엔
如乾闥婆所出音이며
저 삼십삼천 위에는
긴나라의 갖가지 음성과 같고
호세사천왕의 여러 하늘에는
건달바가 내는 음성과 같으며
④ 降雨不同喩
-비가 내림이 같지 아니함을 비유하다-
他化自在雨妙香과
種種雜華爲莊嚴하고
化樂天雨多羅華와
曼陀羅華及澤香하며
타화자재천에는 묘한 향을 비 내려서
갖가지 온갖 꽃으로 장엄하였고
화락천은 다라(多羅)꽃과,
만다라(曼陀羅)꽃과 택향(澤香)을 비 내리며
兜率天上雨摩尼와
具足種種寶莊嚴과
髻中寶珠如月光과
上妙衣服眞金色하며
도솔천 위에는 마니를 비 내려
갖가지 보배장엄을 구족하여
상투 가운데 보배구슬 달빛과 같고
가장 묘한 의복은 진금 빛이라.
夜摩中雨幢幡蓋와
華鬘塗香妙嚴具와
赤眞珠色上妙衣와
及以種種衆妓樂하며
야마천에는 깃대와 깃대덮개를 비 내리고,
꽃다발과 바르는 향과 묘한 장엄거리와,
붉은 진주 빛깔의 가장 묘한 옷과,
갖가지로써 온갖 놀이를 즐기며
閻浮提雨淸淨水호대
微細悅澤常應時하야
長養衆華及果藥하고
成熟一切諸苗稼니라
염부제에는 깨끗한 물이 비 내리되
미세한 기쁨의 비가 항상 때에 응하여
온갖 꽃과 과일과 약초를 길러내고
일체 모든 벼의 싹을 익게 하나니라
⑤ 現殊勝
-수승함을 나타내다-
如是無量妙莊嚴과
種種雲電及雷雨를
龍王自在悉能作호대
而身不動無分別이니
이와 같은 한량없는 묘한 장엄과
갖가지 구름과 번개와 우레와 비를
용왕이 자재하여 다 능히 짓되
몸은 움직이지도 않고 분별도 없나니
일단 보면, 용왕이라고 하면 비를 내리는 것과 상관이 있다.
구름이 뭐냐? 구름은 법신이다, 라고 해놓았다.
비는 뭐냐? 법문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나간다.
처음에는 구름 색깔이 다양하다, 또 번갯불도 다양하다, 천둥 소리도 다양하다, 크고 작고 천둥에 ③번 뇌성 부동유 있잖은가. ④번에 보면 강우(降雨)가 부동이다, 이렇게 해놨다.
사람 사는 곳에 따라 또 사람 수준에 따라서 그 비 내리는 강도가 다르다는 말씀이다.
그 정도를 점검하고 우리가 공부하는 여래출현품의 용왕에 들어가겠다.
스님들께 죄송한 말씀인데 제가 운문사에 가서 요즘 계속 일주일에 한 번씩 강의를 한다. 치문반, 사집반, 사교반, 대교반, 대학원 그리고 강사스님들하고 같이 공부를 하면 별로 재미없는 얘기를 해도 까르르 웃고 진짜 재미있게 한다.
그런데 여기 오면 스님들이 휴우 무표정 하고, 저는 강연을 하는 게 아니고 공연을 하고 있다. 저 혼자만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끄집어 내서 아무리 해도, 스님들은 시쿤둥하다. 오늘 제 제자들도 몇이 와 있는 것 같은데 거기도 동화되어 같이 시쿤둥하다. 자기들이 좀 리액션을 취해서 피드백이 있고 이래야 되는데 앞의 선배 스님들처럼 이렇게 뚜우 해서 있다.
지금 이 대목에서, 구름도 색깔이 다양하고 비도 모양이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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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보살님, 심청정초어피에서 '심'자에 해당하는 한자가 빠졌습니다.
@연기의 도리와 인생을 알고자 네 감사합니다^^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