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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히 여기는 마음
마가복음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가복음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찬송가 427장( 맘 가난한 사람)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에 무리를 보실 때마다 불쌍해서 가슴이 미어지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피곤하신데도 불구하고 그 무리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병들을 고쳐주시고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알아듣기 쉽게 비유로 가르쳐주시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 같은 곳에 모였을 때에는 가다가 혹시라도 지켜 쓰러질까봐 먹을 것을 챙겨주시려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기적을 일으켜 수천 명, 수만 명을 다 배불리 먹여서 보내시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따뜻한 마음, 불쌍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어쩔 줄 몰라 그들을 돕고야 마시는 마음을 두고 성령께서 기록한 복음서 원문을 보면,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스플랑크논’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이 단어는 사람의 내장, 창자를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1:18 말씀에,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는 문장에서 창자가 바로 이 ‘스플랑크논’입니다. 그래서 스플랑크논은 창자, 간장, 허파, 심장, 콩팥 등을 가리키며 여기서부터 심정, 마음, 긍휼, 심복, 사랑, 감정, 애정, 소중한 사람, 자신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나 헬라 사람들은 사람의 감정과 마음의 중심을 가슴보다 더 깊은 곳 곧 사람의 내장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애간장이 녹는다’, ‘애가 끓다’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 단어는 사람의 마음보다 더 깊은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것은 사람의 감정이 원천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울컥 하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쌍한 마음이 이 단어를 가리킵니다.
복음서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속 마음이 요동하여 불쌍히 여기시어 일하신 것들을 자주 나옵니다. 마가복음 1:41 말씀에 이르기를,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고 하였습니다. 문둥병자의 일그러진 얼굴과 다 구부러지고 떨어진 손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 문둥병자에게 다가가 그 몸에 손을 얹으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고 말씀하시고 깨끗이 치료해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13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나인 성 근방으로 전도 여행 가셨다가 마침 성 안에서 죽은 외아들 청년을 인하여 슬피 울면서 장례 행렬을 따라오는 과부를 보시자 또 불쌍한 마음이 우러났습니다. 그래서 그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신 후에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일어나 앉아 말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의 손을 잡고 관에서 나오게 하시고 그 어머니에게 건네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청년을 살린 동기는 죽은 자를 살리는 위대한 능력이 있음을 자랑코자 함도 아닙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너무 커서 도저히 견딜 수 없기에 이렇게 그 청년을 살려내어 그 울고 있는 여인을 기쁘게 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쓴 편지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스플랑크논’과 이 단어를 넣은 합성어인 ‘유스플랑크논’이라는 단어 역시 뜻이 동일한 것인데, 이 긍휼히 여긴다, 불쌍히 여긴다는 단어를 사도들이 편지에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 중 바로 이 주님이 가지셨던 긍휼한 마음이라고 사도들은 쓰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32 말씀에,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3:12 말씀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긍휼’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스플랑크논’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가르치기를 베드로전서 3:8 말씀에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소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라는 단어가 ‘유스플랑크노이’입니다. 사도 요한도 그의 편지 요한일서 3:17 말씀에서 이르기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도와줄 마음’이 바로 ‘스플랑크나’ 곧 ‘창자들, 불쌍히 여기는 마음들’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우리 주님의 마음이나 사역에서나 사도들의 마음에서나 행실에서 이렇게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가진 불쌍히 여기는 마음들이 늘 있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러한 긍휼의 마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마음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모세는 약자의 편이었습니다.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가혹한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서 동정합니다. 자기는 애굽 왕자로서 앞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자기의 모든 특권과 행복을 다 버릴 각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족을 애굽 감독관이 때리자 동족을 위하여 발 벗고 나서서 애굽 감독관을 몰래 때려 죽일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미디안 광야에 도망치는 중일 때 우물가에서 양떼를 먹이는 이드로의 딸들이 남자 목자들에게 내쫓기고 양떼에게 물을 먹이지 못하자 또 다시 연약한 여인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나서서 남자 목자들과 맞서 여자들로 양떼에게 물을 먹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모세의 마음은 바로 이러한 긍휼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일 동족 이스라엘을 광야에 이끌어나왔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과 성민 언약을 맺은 직후에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하여 하나님께서 무서운 진노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을 때에도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하면서까지 동족을 살려내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긍휼의 사람이었습니다.
시편과 잠언에서도 긍휼의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축복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
잠언 14:21 말씀에,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고 하였습니다. 잠언 19:17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시편 41:1 이하의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주시나이다”(시편 41:1~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어렵고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자들은 하나님께서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주시고 어려운 때에 그만큼 도움을 베풀어주시고 선행을 갚아주신다고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7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신 말씀이 그러한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척박하고 사랑이 식어진 시대를 사는 동안에도 주님의 마음과 사도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이 긍휼의 마음을 잃지 않기를 늘 힘써야 하겠습니다. 욥이 그 극심한 고통 중에 처해 있을 때에 자기를 마음 깊은 곳에서 동정해주는 사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도, 친척도, 종들도 다 그를 외면하고 그의 이웃들도 그를 멸시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그의 절친했던 친구들도 그를 찾아와서는 비난하고 정죄하기에 몰두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이렇게 박정한 친구들에게 하소연하였습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대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욥기 19:21,22)
그렇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가 박정한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조금만 실수해도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함께 돌을 던지고, 상처가 나면 달려들어서 그 상처를 헤집어서 더 깊게 상처를 내서 온 몸이 병들어 아예 목숨까지 내놓도록 요구하는 정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쌍히 여기면서 힘을 내라고 용기를 내라고 함께 있어 주며 함께 돌을 맞아주며 지켜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세상의 모진 고난을 이겨갈 수 있을텐데, 그렇게 불쌍히 여기고 힘을 주는 사람을 찾았으나 찾지 못한 사람은 절망해버립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아예 세상을 등지고 멀리 떠나가버리고 한을 품고 숨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실수를 덮어주는 마음, 잘못할 때에 너그럽게 보아넘겨주고 다독여 주는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룻기에서 그런 따뜻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나오미라는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잃고 아들들을 다 잃고 갑자기 혼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시집와서 젊은 남편을 갑자기 잃어버린 며느리 룻은 자기도 남편을 떠나보냈지만 자기보다 남편을 잃고 연이어 두 아들마저 잃게 된 시어머니를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자기 고향과 민족을 다 내려놓고 시어머니와 함께 낯설고 물선 땅 베들레헴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베들레헴 성의 유지였던 보아스 역시 긍휼의 사람입니다. 보아스 역시 모든 것을 다 잃고 돌아온 친척 나오미와 그 연약한 모압 소녀 룻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음에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이 가득차 있던 차에 자기 논밭에 와서 이삭을 줍는 룻을 보고서 불쌍히 여겨 돕고자 합니다.
이렇게 긍휼을 품었던 사람들을 긍휼의 주 하나님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로 이끌어서 서로를 품고 치유해주고 살아갈 희망을 갖고 용기를 갖게 도와주시고 텅 비었던 공허와 슬픔의 사람 나오미까지 다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채워주시는 것이 룻기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긍휼의 사람이었으니, 자기를 그토록 철저하게 미워하고 죽이려고 끈질기게 힘썼던 동족 유대인들을 보고 파멸과 심판을 구하는 대신에 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기를 위하여 늘 간절히 기도하였으니, 이는 그가 주님과 같이 긍휼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중세 시대에 걸인 전도단의 창립자 프란체스코 수도사도 본래 부요한 귀족이었지만 모든 재산을 다 팔고 자발적인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긍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하고 몸을 씻어준 불평이 많은 한 문둥병자는 프란체스코의 손이 닿을 때에 문둥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독하던 그 문둥병자는 변화되어 주님께 깊이 회개하여 구원을 얻는 역사가 뒤따랐다고 합니다. 프란체스코 심령에 넘치는 긍휼을 통하여 주님의 영께서 그 문둥병자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그 영혼의 더러움까지 고치시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긍휼은 두려움을 물리칩니다. 원수까지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요한일서 4:18 말씀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처럼 긍휼은 원수마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해줍니다. 모든 거리끼는 것들까지도 품게 하는 능력이 긍휼 안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며 남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그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지옥에 곧 떨어질 가장 위험한 사람임을 알고 불쌍히 여깁니다. 이러한 마음은 긍휼에서 나옵니다.
오늘날 세태를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속에 나오는 것처럼 강도를 만난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게 많이 있습니다. 여기 저기에 강도 만나서 물건들을 빼앗기고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피 흘려 쓰러진 강도 만난 자와 같습니다. 바로 이러할 때에 진정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자비를 베푸는 자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누가복음 10:30 이하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니라”(누가복음 10:30~37)
그렇습니다. 오늘날 시대를 긍휼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다 강도 만난 사람들처럼 보일 것 같습니다. 공부하는 아이들도 불쌍하고, 날마다 일터로 축 처진 어깨로 나아가는 가장도 불쌍하고, 부모 세대, 형님 세대들도 다 불쌍한 사람들이요 청년 세대도 불쌍합니다. 날마다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는 오늘날 여야 정치인들도 다 불쌍합니다.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다움의 증거입니다. 또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신앙의 진실성의 참된 증거입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여전히 생생하게 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모두 이 긍휼의 마음을 구합시다. 다른 이들의 마음 속에 아픈 마음을 알아주고 그 마음에 공감해주고 힘들고 어려운 그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는 주님의 마음을 가집시다. 긍휼이 여기는 자가 가장 큰 복을 받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늘 그 마음이 뭉클 뭉클하여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올라와서 병든 자, 슬픈 자, 귀신들린 자, 진리를 몰라 방황하는 자, 가난한 자, 세상에서 외면당한 자, 마음이 괴로운 자들을 언제나 가까이 하시고 위로해주시고 함께해주시고 따뜻하게 품어주셨나이다. 우리도 주님처럼 한평생 모든 이들에게 항상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웃어주면서 마음으로 사랑하며 동정하며 위로해주며 격려해주며 기도해주는 긍휼의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