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져야할 속담(1) 개천에서 용났다
조수현
시댁의 유일한 장점은 그들이 서울에 산다는 것이다. 미혼 시절 맘먹고 1년에 한두 번 서울에 가서 대형 전시를 보곤 했던 나는, 서울태생과 결혼하면서 설과 추석명절 뿐만 아니라 집안 대소사로 시댁에 방문하면서 겸사겸사 원하는 전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번 명절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비엔나1900 전시를 보려 했는데 생각보다 인기가 많아서 예매를 못했다. 명절이라도 삼시세끼 시댁 밥을 얻어먹는 것은 예의가 아니므로 매번 외출을 강행했는데 이번 설엔 꼼짝없이 하루를 집에 있게 되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눈치껏 남편과 카페에 가서 음료를 포장해 왔다.
각자 취향에 맞는 음료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시작됐다. 대부분은 지금 현실을 참을 수 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화려했던 시어머니 집안의 부, 올해 또 승진인사에서 누락되었지만 과거에 똑똑했던 남편의 학창시절, 야무진 고모들의 자랑이다. 명절마다 조금씩 듣던 레파토리인데 음료도 있겠다, 시간도 많겠다, 시어머니가 작심하고 A부터 Z까지 다 말할 것 같은 기세에 피로가 몰려온다. 이제 그만 방에 들어가 쉬고 싶어서 자학을 선택했다. “와 저만 지방대 출신이고 다들 인서울이네요. 하하하.”
그러자 시어머니는 한껏 자비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얘. 그래도 넌 개천에서 용난 거지. 그런 시골에서 교사까지 됐는데. 너도 성공한 거야.”
뭐지? 이 칭찬을 가장한 조롱은?
“어머니, 제가 자란 환경이 어때서요. 제 주변에 교사는 부지기수고, 고학력, 전문직 진짜 많아요. 저를 개천에서 난 용으로 생각하셨다니 놀랍네요.”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나를 보며 웃음기를 싹 거두는 시어머니 머리 위로 ‘아, 방심했네. 저 또라이!’라는 말풍선이 보이는 것 같다.
내 집도 아닌 시댁 안방에 누워 몸도 마음도 불편한 상태로 “개천에서 용났다.”는 속담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봤다.
<낮은 신분이나 환경에서 성공함. 성공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이루는 성과,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것을 칭찬하는 말>이라고 나온다. 더 다양한 뜻이 있나 하고 사전 여러곳을 검색해 보는데 다들 결이 비슷한 풀이를 내 놓는다. 아니 어떻게 이 말을 칭찬이라 생각하는 거지? 나는 이렇게 기분이 나쁜데?
우리 부모님은 내가 가장 최고로 생각하는 정직과 성실, 신실한 신앙의 본을 삶으로 보여주셨고, 매사에 최선으로 우리 남매를 뒷바라지 하셨다. IMF사태와 아빠 지인의 연대보증 사기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때도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이 우리 가정의 화목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했다거나 불리한 조건에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이 살아온 나를 한순간에 인간승리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가? 도대체 서울이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그곳을 제외한 모든 곳을 개천 수준으로 퉁 칠 수 있는 것인가?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따지면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 못 들어봤냐고 할 것 같다. 서울중심주의의 뿌리는 정말 오래되었구나.
배번 양보해서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은 소위 성공했다는 당사자가 성취를 칭찬하는 사람들을 향해 겸양의 표현정도로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의 입에서 저런 말을 칭찬이랍시고 쓴다는 것은 선 넘은 것 아닌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뒷맛이 쓰다.
어려운 환경, 불리한 배경을 극복하고 뜻을 이룬 사람을 향해 이왕이면 더 좋은 말로 축하하고 축복하면 좋겠다. 칭찬 받는 것이 반갑지 않다. 타인이 나를 평가하고 판단해서 내리는 결론 같아서다. 대신 격려하고 인정하는 말은 좋다. 겸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첫댓글 조수현 님, 좋은 글 쓰셨어요.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