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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씨에게
오늘 K씨에게 보내는 편지는
내가 국악예고에 재직하였던 2005년 6월 4일에
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인 관허회에서
제자들에게 보내는 인사말 원고입니다.
이제와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제자 여러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여러분들을 이렇게 다시 만나고 보니 여러분들과 시간을 하게 했던 그 아름답던 날들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물처럼 흘러갔음이 실감납니다.
나에게도 고교시절이라는 학창시절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아름답기만 보이는 그 시절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남몰래 가슴 설레였던 사랑이 있었고, 가슴 벅찬 우정이 있었고, 진학과 진로에 대한 불확실감으로 인한 불안과, 청소년기의 방황과 좌절 속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던 날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시절에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어려움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 더욱 정겹고, 따뜻한 시선으로 격려해주시던 선생님들이 더욱 고맙게만 느껴집니다.
나는 1979년 2월 26일에 지금의 서울국악에술고등학교의 전신인 한국국악예술학교에 부임하였습니다. 이 학교와의 인연은 숙명이었는지 모릅니다. 이 학교와의 첫 번째 인연은 1970년 대학교 1학년 가을쯤이었습니다. 내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당시 석관동에 살고 있었는데 친구 집에 놀러와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깨워보니 멀리서 장구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내 친구에게 저 소리가 뭐냐고 물어보니 이 근처에 우리 국악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는데 이 동네 사람들은 장구소리에 아침잠을 깬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1978년 대학 동창인 나의 친구가 한 학교에 국어선생님으로 취직을 하였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축하차 간 곳이 바로 석관동 한국국악예술학교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습니다. 1978년 당시 나는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본사 옆 공간그룹 편집실에 편집부 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덕수 사물놀이가 1978년에 만들어져 공간그룹 지하 소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당시 나는 사물놀이에 대하여 깊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가을 예쁘고 귀엽게 생긴 여학생 둘이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1978년 가을 여학생 둘이 나를 찾아와 한국국악예술학교 예술제 초대장을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국악예술학교의 국어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던 내 친구가 그 두 여학생을 내게 심부름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초대장을 보니 ‘민속예술제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 전통음악과 춤에 문외한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서양음악과 미술에 탐닉하고 있었으며 우리 전통음악은 서양 예술에 비하여 하위 예술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라디오를 통해 우리 전통음악이 흘러나오면 들어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은 채 가차없이 다른 방송으로 다이얼을 돌리던 때라 국악이 공연되는 한국국악예술학교의 예술제에 별 매력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학생들을 보내 초대를 해준 친구의 성의를 봐서 얼굴 도장이나 찍을 겸 공연장으로 향했습니다.
1978년 민속예술대제전은 시청 옆 시민회관 자리에서 공연되었는데 친구의 배려로 나는 운 좋게도 당대의 서예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당시 한국국악예술학교 교장이신 연당 허구선생님 곁에서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겠구나 하던 나의 예상을 뒤 엎고 그 날의 공연 관람은 내게는 그야말로 흥분과 감격 그리고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인으로 이 나라에 태어나 살아오면서 이렇게 훌륭한 우리 음악과 춤이 있었음을 몰랐던 내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였습니다. 저런 음악과 춤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함께 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에 얼떨김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학교에 근무하고 싶다는 부탁을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교장 선생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를 불러주시리란 기대는 별로 갖지 않았습니다.
해가 바뀌어 1979년 2월 26일 아침 사무실로 허구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본교에서 근무하지 않겠느냐는 전화가 왔습니다. 나는 기뻤습니다. 그날 오후 사표를 제출하고 2월 27일 본교의 영어교사로 이 학교의 첫날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2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1979년 당시는 지금 고인이 되신 우리 전통음악의 거두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에능보유자이신 판소리의 정권진 선생님, 풍물의 전사종 선생님, 대금의 한범수 선생님과 지금 우리 전통음악계의 거목으로 활동 중이신 김영재, 최태현, 김광복 교수가 전임교사로 근무 중이었으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가곡 예능보유자이신 김월하 선생님과 민요의 이소향 선생님, 한국무용의 국수호, 정재만 교수가 당시 본교 강사로 출강하시고 계셨으니 쟁쟁한 강사진이었습니다. 그 때의 내 나이 스물아홉. 지금은 50이 훨씬 넘은 나이가 되었으니 내 인생의 가장 커다란 부분을 이 학교와 함께 보낸 셈입니다.
나는 이 학교를 졸업한 졸업생은 아니지만 졸업생 이상으로 이 학교를 진정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며, 험난하고 어려웠던 긴 세월을 이 학교와 함께해 왔습니다.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빼면 내 인생의 모두를 이 학교와 함께 해온 샘입니다. 이 학교에 재직하면서 내 사랑했던 두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한 놈은 대학을 졸업했고, 또 한 놈은 군대를 다녀와 대학에 재학하고 있습니다.
나는 2014년에 정년퇴직을 합니다. 지금이 2005년이니 9년 남은 샘입니다. 이제 인생의 마무리를 해 나갈 때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은 그동안 졸업시킨 내 제자들을 위하여 바치고 싶습니다.
나는 지난 해 까지 교감으로 일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지난 해 자리에서 물러나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 학교에 대한 나의 공로와 업적을 도외시한 채 학교의 구조적 역학 문제로 나를 매몰시킨 이사진의 처사에 원망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학교 당국의 섭섭함에 앞서 학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자, 이 학교가 있었기에 오늘 날의 나도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 가족도 함께 살아 온 것이다라고. 그리고 남은 기간에 현재는 학교행정의 중심에서는 떠났으나, 내가 할 일을 찾을 것이며, 내가 지금껏 살아오며 축적된 모든 역량을 제자들의 발전을 위하여 바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나는 이 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시작했지만 그 동안 무형문화재인 국악과 전통무용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공부를 했으며 대학원도 문화재전공을 하였습니다. 금년 5월에는 문화재청 무형문화재분과 국악분야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위촉을 받고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국악과 전통무용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무형문화재이므로 나의 활동은 우리 국악과 전통무용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서 나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과 전수와 관계된 일과, 무형문화재의 발굴과 연구를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나는 현재 화성재인청복원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화성재인청은 조선조 초중기 무렵부터 전국에 산재한 재인청을 대표하여 조직화되어 전국의 재인(才人)을 총괄하던 국가 공식 재인 관리기구였으나 조선말에 멸실되었습니다. 화성재인청이 복원되면 멸실 위기에 처해 있는 경기도의 전통적 무속, 음악, 연희, 춤, 복식, 건축 등을 위시한 무형문화유산의 원형 되찾는 것은 물론 그 정체성을 회복함으로써 경기도 전통문화의 중심적 기능을 하게 하고 나아가 수원의 세계문화유산인 ‘화성(華城)’과 함께 경기도의 우수한 무형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릴 좋은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될 것입니다. 화성재인청복원사업추진위원회는 경기도의 후원으로 앞으로 2~3년에 걸쳐 지속적인 연구조사활동과 학술회의를 거쳐 소프트웨어를 구축한 후에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드웨워에 해당되는 화성재인청복원과 상설공연장, 전통예술 체험관, 교육관, 전통예술상품 쇼핑몰을 구축하여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華城)’과 링크하여 한국 전통 무형예술의 메카로서의 역할과 나아가서는 국제적인 문화체험 관광명소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사업을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화성재인청복원은 해방후 민속악계의 숙원이었던 진정한 의미의 국립민악원이 설립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아울러 우리 제자들에게 적지 않은 일자리를 창출해 낼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이것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현재 우리 위원회는 화성재인청 복원을 위한 부지 확보를 위하여 화성시로부터 화성재인청 부지로 2만평이라는 부지를 받아 냈으며, 내년에는 수원시 화성 성곽 복원 터에 안에 화성재인청의 예술을 공연할 수 있는 노천극장이 문을 열게 됩니다.
제자 여러분!
우리 국악은 전통예술분야에서 민족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중 민속악은 특수계층의 음악이라 할 수 있는 아악과는 달리 민초들의 애환과 신명을 함께 해온 진정한 의미의 우리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해방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는 민(속)악을 중심으로, ‘국립국악중․고등학교’는 아악(정악)을 중심으로, 한국전통음악을 계승․발전시키고자 설립되었습니다.
아악(정악)은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의하여 보호받고, 일제 36년 동안은 일제의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보호받고, 해방 후에는 국가에 의하여 보호받았음에 비해, 민초들의 애환과 신명을 함께 해온 진정한 의미의 우리 전통음악인민속악은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계층사상에 의하여 폄하되었으며,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민속음악인들은 마치 야생초처럼 민중들의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을 지켜왔습니다. 우리의 민속악은 소중한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해방 된 조국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음지에서 온갖 역경을 견뎌 나가야 했습니다.
해방 전부터 국악중흥운동을 위하여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오신 국악이론가이자 본교설립자 겸 초대교장 기산 박헌봉 선생님과 당대의 명창이자 본교 법인 초대 이사장이신 향사 박귀희 선생님, 국창 만정 김소희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 당대의 명인들은 민속악을 정규 전문교육기관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우리학교의 전신인 ‘국악예술학교’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개교 당시에 현재의 국립국악고등학교의 전신인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가 이미 설립되어 있었으나 국립국악원이 구왕궁아악사들로 중심이 되어 있었고, 국립국악고등학교가 민속악을 함께 가르쳤다고는 하나 형식적이었으며 아악사 출신의 선생님들로부터 아악 중심의 교육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민속악 보존과 계승․발전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60년 3월에 한국 최초의 사학 국악전문교육기관이자 우리 학교의 전신인 ‘국악예술학교’가 개교되었던 것입니다.
‘국악예술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민속악의 체계적인 이론화 작업과 현대화 작업을 추진하는 본산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문화재 관리국의 위촉을 받아 1962년부터 무형문화재 전수사업을 추진하여 사라질 뻔했던 우리의 문화유산을 위기에서 구하였으며, 당시 광대라고 천시 받았던 민속악의 명인들을 중요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 받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예술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한 문교부와 공동 주최로 초․중등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국악교육연수를 1960년 개교부터 10여년간 실시하여 음악교육 현장에서 국악교육을 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1964년에는 서양음악에 밀려 설자리가 없었던 우리 국악을 현대화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일부 국악기를 개량하여 한국 최초로 서양 오케스트라와 필적할 수 있는 대규모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여 현재 전국의 시도립국악관현악단의 모체가 되게 하였습니다.
또한 86 아시안 게임, 88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문화행사 등 각종 국가주최 중요국제문화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중요 전통예술공연을 통하여 국민에게는 문화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세계로는 우리의 전통예술을 세계에 알려 국위를 선양하였으며 국제문화교류도 활발하게 펼쳐나가 민간사절로서의 역할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유아기부터 한국민으로서의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뿌리교육과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의식형성 교육을 의하여 1999년 한국 최초의 ‘서울국악유치원’을 설립하여 개원시켰으며 국악의 조기교육과 연계교육을 위하여 2001년 중학교 과정의 ‘서울국악예술학교’를 개교한 것은 국악교육에 대한 역사의식과 사명감의 결과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학교는 8,000명 이상의 민족예술가들을 배출하였으며 한국이 자랑하는 타악예술가인 ‘김덕수’ 명인등 수많은 명인들을 배출시켰습니다. 오늘날 졸업생들은 민족예술의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우리의 전통예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주체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며 아직도 교육 여건은 매우 열악한 상태입니다.
나는 우리 학교와 라이벌관계에 있는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여건이 잘 갖추어진 강남이라는 입지 조건, 우리나라의 어느 음악대학 전공 연습실보다 더 시설이 잘 갖추어진 연습실과 교실들, 최고 시설의 공연 극장, 쾌적한 기숙사
시설을 둘러보며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우리 학교의 시설을 떠올리면서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또한 똑 같은 국악을 공부하면서도 국립국악고등학교 학생들은 학비를 전액 감면 받는데 비해서 우리 학교 학생들은 높은 등록금을 내고 공부하는 불공정한 현실이 너무나도 가슴 아팠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모교도 5년 후면 50년 전통의 학교가 됩니다. 그런데 타학교에 비해서 동문들의 모교에 대한 기여가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나 부족합니다. 애교심은 동문들의 모범적인 활동과 기여가 있을 대 배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학교의 동문들이 타교에 비하여 인색해서가 아니라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이며, 예술계로 진출하지 않은 동문들에 대한 관리가 전무였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뜻을 합치어 모교의 발전을 위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서구문화 지향적인 경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전통음악을 지키고 발전시키겠다고 우리 학교를 선택한 장하고 고마운 어린 후배들을 위하여 기여를 할 때입니다.
제자 여러분!
지금 여기에 자리한 제자 여러분들은 갖은 어려움을 극복해내며 지금의 여러분을 일구어냈습니다. 참으로 힘겹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현재 국악계 혹은 무용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제자 분들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고교시절 때의 예술가로서의 꿈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생소한 영역을 개척하며 오늘 날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예술이라는 향수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며 여러분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던 모교가 애증의 감정으로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의 꿈과 낭만이 숨쉬던 그 시절 여러분들이 몸담고 있었던 모교를 위하여 조그마한 정성을 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동문들끼리 서로 돕고 끌어주는 문화를 일구어 주십시오.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험난합니다. 지금까지의 여러분들의 생을 돌이켜보면 오늘날의 여러분이 있기까지에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동문들 간의 끈끈하고 지속적인 도움이 더해졌더라면 지금까지의 고달픔이 조금은 덜어졌을 것입니다. 과거는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습니다. 앞으로라도 동문들 간의 상부상조하는 문화를 일구어내십시오. 나는 여러분들이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모임이 그런 계기가 되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제자 여러분! 사랑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20005년 6월 4일 觀虛 김승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