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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놀라운 엄숙과 경건한 고독
시인 강은교는 다산의 시인이다. 시인으로 활동한 지 26년째 되는 지금까지 10권 이상의 시집을 간행했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시인이 천직이요 필생의 업이며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을 자인하지 않고서 오랜 세월을 두고 이처럼 많은 시집을 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시는 멀리 「순례자의 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사상계』 1968년 9월호에 발표된 신인문학상 당선작이다. 그의 시 역정이 장강의 도도한 흐름으로 비유될 수 있다면, 이 시는 강은교 시 세계의 남상(濫觴)인 셈이 된다.
바람은 늘 떠나고 있네.
잘 빗질된 無機의 구름떼를 이끌면서
남은 살결은 꽃물 든 마차에 싣고
집앞 벌판에 무성한
내 그림자도 거두며 가네.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은 아침
싸움이 끝난 사람들의 어깨 위로
하루낮만 내리는 비
落果처럼 지구는 숲 너머 출렁이고
오래 닦인 초침 하나가
穹窿 밖으로
장미가시를 끌고 떨어진다.
( ...... )
위대한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가는 아침
돌아옴이 없는 늘 나는
바람에 실려
내 밟던 흙은 저기 지중해 쯤에서
또 어떤 꽃의 목숨을 빚고 있네.
이 시는 60년대에 전지구적으로 풍미했던 참여문학을 연상케 한다. 마틴 루터 킹의 암살이라는 시사적인 소재로부터 착상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시사적인 내용이라고 해서 시적 언어가 더 긴장되거나 덜 함축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런 내용의 시라고 하면, 목청을 가다듬거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거나 시대의 비분강개를 직설적으로 토로하며 자칫 논장(論章)의 징후가 잠복되어 있는 시를 연상케 한다. 이에 비해 강은교의 「순례자의 잠」에서는 의표를 찌르는 듯한 참신한 이미지와 화사하면서도 발랄한 수사법이 유감없이 제시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사건은 인간에 의해 자행된, 인간을 억압하는 공포의 사건이다. 강은교의 초기시에는 공포에 대한 강박관념이 적지 않게 엿보인다. 권력․病苦․죽음 등의 문제가 늘 위협하면서 따라다녔다.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無限天空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삭막하고 황량한 내면 풍경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자전Ⅰ」이며, 인용문은 이 시의 첫 번째 연에 해당한다. 도회지의 스산한 황혼녘에, 화자는 한계 상황에 맞선 죽음의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것 같다.
60년대의 성장세대였던 강은교는 4․19에서부터 비롯된 정치적 격동의 현장에서 구조적으로 내재된 폭력의 긴장 관계를 직접적으로 체험했다. 그는 여기에서 인간을 억압하는 공포에 질린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한 듯하다.
암살된 킹 목사는 반파쇼적이고 비폭력적인 인격의 화신이다. 인종주의는 서구․남성 중심 사회가 빚어낸 가부장제의 억압적인 개념들에 다름 아니다. 그의 공포의식이 훗날 여성주의적 편향성을 보이는 데까지 이처럼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 ...... )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뒤에 있다.
인용시 「사랑법」은 강은교 시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시이다. 널리 인구에 회자될 만큼 독자 대중으로부터 무던히도 사랑을 받아 왔던 주옥같은 시이다. 초기의 작품에 해당하는 여기에 그의 웅숭깊은 삶의 지혜가 미리 내장되어 있다.
폭력의 구조가 내면화되어 있는 정치적인 문제의 시적 현안이나, 죽음과 허무에 맞서 싸우면서 이를 어떻게 초극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시적 대응력에 있어서, 강은교는 속내를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시인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는 이 물음을 부단히 제기해 온 시인이다.
그는 사물 하나마다 진지한 눈길을 주거나 작은 것에도 생명에의 경이를 섬세하게 느끼고자 했던 것이었을까? 그는 작은 것의 배후에 큰 것이, 낮은 것의 배후에 높은 것이, 사소하고 하찮은 것의 배후에 위대한 것이 엄존하고 있다는 이치를 깨우쳤을까?
1970년대 말, 여성 시인 김승희는 『문학사상』지에 동시대 시인․작가들을 탐방하여 인터뷰한 내용의 대화록을 연재한 바 있다. 이때 그는 강은교를 만났을 때 “그녀의 방에서 놀라운 엄숙함과 경건한 고독을 보았다”라고 소감을 나타낸 바 있었다. 김승희의 말처럼, 강은교는 이러저러한 점에서 볼 때 놀라운 엄숙과 경건한 고독의 시인인지도 모를 일이다.
Ⅱ. 허무와 신생, 그 아득한 틈새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을 부단히 제기했던 시인 강은교......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진술이 되겠지만 존재에 대한 문제 제기란 죽음에 대한 천착과도 서로 통하는 것. 그는 적어도 등단한지 10년까지 허무라는 이름의 키워드랄지, 화두와 같은 것에 매달렸다. 그의 허무는 선험적이라기보다는 체험적이며 관념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다. 따라서 그는 허무 그 자체의 실재 속에서 존재와 죽음의 깊은 의미를 탐색하는데 안주하지 않고, 허무를 허무로써 초극하는 즉 허무를 하나의 육화된 영혼의 구원으로 재인식할 수 없느냐 하는 적극적인 시인적 통찰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음에 올 때면 그대여
저승에나 갔던 듯 돌아오게
저승이 저 하늘이라면
여기서 하늘이 참 가까우니
별 냄새도 조금 묻혀서
산 모래 부서지듯 부서지듯
부끄럽게 부서지며 오게.
다음에 올 때면 그대여
잠든 이의 눈까풀 속으로는 오지 말게
귀뚜라미나 풀잎처럼
풀잎처럼 사랑처럼
오래 말 못하는 것이 되어
눈물이 죽은 강물을 깨우듯
말없이 깨우며 깨우며 오게.
다음에 올 때면 그대여
죽은 강 허리에
귀뚜라미 울음이나 얹어주게.
쓰러질 수 있다면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쓰러져서
귀뚜라미 울음 위에
저 하늘의 푸른 색을
놓아주게, 잠들지는 말고.
- <회 귀> 전문
비교적 잘 알려진 전기적 사실이 되겠지만 시인 강은교에게 있어서 1972년은 혹독한 생의 시련을 감당한 해가 된다. 이 해에 그는 어두운 사경을 헤매면서 힘겨운 투병을 혼신으로 체험한다. 그는 이때 거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죽음의 집행이 유예되는 축복을 받는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 감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카톨릭에 귀의하기 이른다. 하지만 그는 힘겹게 투병하며 낳은 쌍둥이 한 아이를 저 세상으로 보낸다. 생후 7개월의 아이를 가슴에 묻고 그는 인용시를 썼다. 이 시에 등장하는 ‘그대’는 바로 시인 자신이다. 즉 강은교 스스로 이 시를 두고 “바로 내가 나 자신의 죽음에 걸어보는 이야기”라고 해설한 바 있듯이, 이 시는 시인이 다름 아닌 시인 자신에게 건네는 형식의 넋두리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의 존재를 신에 이르는 자라고 규정했던 플라톤 유의 가설을 만약 승인할 수 있다면 시인ㅇㄴ 신명을 얻기 위해 넋두리한다. 그리하여, 신명을 얻은 자는 정신적인 완벽한 해방을 향유할 수 있으리라.
허무와 신생을 거의 동시에 체험했던 강은교는 죽음 그 자체를 온전한 사멸로 간주하지 않고 새로운 생을 얻기 위한 이른바 통과제의로 파악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죽음과 삶의 틈새에, 보이지 않는 이음새가 있음을 비로소 체득한 그는, 인용시 <회귀>에 이르러, 죽음의 가까운 자리에서 절박하게 투병했던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을 통해 육친과의 사별로 인한 지고한 비극의 내면적 현실을 추스르는 초인적인 인내를 보여준다. 요컨대는 허무에의 극복인 것이다. 이를 두고 우리는 생의 예지 및 그 밝고도 여유로운 달관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1971년에 간행했던 그의 첫 시집《허무집》에 허무의 심연에 가라앉는 듯한 어둡고도 무거운 언어(어조)가 비교적 어렵잖이 확인되는 것도 그러한 점을 반증해 주고 있다.
허무란, 비극적 세계인식의 결과이다. 세계와의 접촉의 과정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좌절될 때 허무의 감정이나 그 의식이 발생할 것이다. 자고이래로 수많은 시인들에 의해 高熱의 서정성을 띤 허무가 노래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그 역시 모래, 사막, 페허, 죽은 나무, 사라지는 별들을 통해 허무를 노래했다. 다만 그의 시에 반영된 서무의 특징을 말해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사소한 개인의식이나 소시민 근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불모의 삷, 황폐화된 삭막한 세계의 풍경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여
네가 가는 길 위에
웬 모래가 이리 많은가.
조금만 귀 기울여도
창 밖에는 살(肉)을 나르는 바람소리
동쪽으로 서쪽으로
내 뼈 네 뼈가 불려가는 소리
바다로 가는 소금들의
빠른 발자국도 보인다.
여기가 너무 넓은가.
알지 못할 빛이 많은가.
오늘밤엔 시든 나팔꽃들도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숙이고
나팔꽃 그늘에서 우리는
몇 만 그램의 핏방울을 저울에 달았다.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다만 흐르는 소리뿐인
내 피의 몇 세기
날이 저물고
저편 하늘에서 기다리던 구름 서넛이
무덤 속으로 들어간다.
- <黃昏曲調 4> 전문
시인 강은교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된다. 필경 모든 사람도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될 것이다. 김승희의 말에 따른다면, 강은교는 삶의 아름다움을 부정했고, 우주론적 절망을 노래했고 호사스러운 지상의 육체를 해체했고 끝내 모래가 된 살과 물이 된 피와 어둠처럼 끝없는 시간만을 보았다. 그는 인간을 시간이라는 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조건에 처한 존재로 간주했다. 우리가 아무리 달려도 시간의 흐름을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끝간데 모를 허무의 깊이에 빠져들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결국 소멸한다면 미의 진실 역시 지속하는 것이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는 보편적인 명제에 의해 큰 설득력을 얻는다. 예컨대, 숙련된 바하의 노래가 공중에 이르자마자 꽃가루처럼 덧없이 공중에 흩어져버림으로써 결국 사라지는 운명에 놓여 있는 모든 소리의 완성은 소리 그 자체에 이미 완벽한 세계를 마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강은교는 사라지는 것의 덧없는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의식을 지배하는 모든 억압된 삶의 조건과 분별없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다. 이를테면 이 세계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표현된다.
거기엔 아마 시간이 없고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다. 거기엔 아마 삷도 죽음도 없고 다른, 전혀 엉뚱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또는 거기엔 일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이 이미 비열해지고 자유라든가 해방, 그런 따위에의 열망도 가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해탈도 無我의 환희도, 자비도, 그렇다고 어둠도 빛도 없는 세계, 아, 지구가 길다란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시인수첩》p.11
불교적 세계관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시작도 끝도 없다는, 그 오묘한 반야심경의 空觀! 시인은 지구가 길다란 평면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것은 현재의 위치로부터 끝없이 간다면 어디엔가 도달할 수 있으리란 관념을 나타낸 것. 바로 허무이면서 동시에 그 초극이라 할 수 있다. 그 벼랑이 평면의 끝인 동시에 또한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강은교에 있어서의 허무는 서양의 허무주의가 지향하는 온전한 사멸을 의미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반복시킬 수 있는 창조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허무는 순환적 질서의 원리를 얻고 있다. 그의 시가 불교,장사상,샤머니즘 등 방대한 동양적 사고체계에 친연성을 가지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완전한 침묵을 소리의 어머니라고 규정하는 老莊的 견해에 동의를 표한 바 있다. 환원하자면 허무는 충만의, 소멸은 창조의 어머니인 셈이다. 여기에서 그는 사물의 근원적 모성성에 대한 깊은 명상과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한번 보란 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내 만일> 부분
이 시는 김소월의 <개여울의 노래>로부터 韻을 얻은 것으로서 동양적 생명원리에 입각한 작품의 적례에 해당한다. 김소월의 시에서는 바람, 굼벵이, 돌, 불귀신으로부터 생명력의 변천에 대한 암시를 얻고 있지만 강은교의 시에선 폭풍, 안개, 종소리 등의 무감정적 대상물로까지 그 꿈을 연장시키고 있다. 이 우주의 순환적 생명질서는 이를테면 윤회설이라고 불려진다. 카톨릭에 귀의한 그로서는 이 불교적 용어에 대해 썩 달가워하지는 않겠지만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국문학자들 가운데 강은교 시세계를 이루는 윤회설을 일반적 학설로 대체로 수용하는 듯하다.
특히 박노균은 강은교의 시세계를 세 가지로 요약한 것 중의 하나로, 그의 시에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불교적 윤회사상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어쨌든 강은교의 시에 나타난 윤회론적 생명의 순환적 질서는 명시로서 독자수용의 폭이 넓은, 다음의 아름다운 시편에 잘 집약되어 표현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우리가 물이 되어> 전문
여기에서 물과 불로 대립되는 원형적 이미지는 생명력의 근원으로 환원되는 질료로서의 이미지이다. 물은 하나의 비탄의 全景이며 아름답고 성실한 죽음의 세계이다. 이에 반해 불은 자기 희생과 관련된 소멸의 운명을 지닌 순간성, 야성적이고도 열광적인 본성 내지 번뇌와 世界苦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불교적 세계인식에 도달한다. 나는 한때 이 시를 강은교가 추구하고자 했던 독특하고도 강렬한 시적 페미니티(feminity)가 있는 작품으로 간주하면서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선 글을 줄이려 한다.
강은교의 시는 숱한 무속적 심상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구적 합리주의를 거부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로의 탈근대성을 지니고 있다. 그가 즐겨 수용한 무속적 심상은 특히 신화적 세계에 깃들어져 그 자신 특유의 여성성을 지니고 있다.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때로 한없이 부드럽고 눈부신 인간 정신의 빛인 여성성. 혹시 이것은 여성적인 의식상태 내지 그 존재 방식으로 정의되지 않을까. 인류역사 초기에 형성된 母權的 문화층이 지배적인 공식문화로서 획득한 부권적 의식의 저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신화적인 여성성은 오늘날에도 문학이나 예술 등을 통해 깊이 반영되어 있다.
여성의 性徵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적 표현물은 아마도 달이 될 것이다. 달에 대한 원형적 집단 무의식은 아마도 한없는 모성의 깊이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달과 ‘그레이트 마더’ 간의 상관성 내지 여성성의 주술적 활동에 힘입은 다산성 등에 관련된 이미지는 강은교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적잖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강은교는 초기 때부터 시적 聖母象을 그려 나아갔다. 그에 의해 최초로 그려진 성모상은 비리데기(바리데기)로 이름되는 여성신으로부터 소의 巫祖神이다. 이에 관해선 언급을 회피하겠거니와 대표적은 작품으로는 <비리데기의 여행 노래>가 있다. 그리고 <소리․8>에서는 “처녀적 마을숲이나 헤매시며/모래 웅덩이 혹은 밭고랑/엎뎌 있는 모개신......”을 그렸다. 그 초월적인 모습은 그믐달빛을 통해 칠흑 어둠에 스며 계시된다. 그는 80년대에 이르러서도 시적 화자의 초자연적 예언과 영감을 반영한 巫歌풍의 시를 선호했다.
아 오소서, 당신
어둠의 어머니시여
슬픔의 어머니시여
<오소서, 꿈마다 깨우치며 오소서> 부분
이 시를 보면 그는 무녀의 퍼소나(탈)을 쓰고 그레이트 마더를 애타게 부른다. 예로부터 북방족은 남성보다 여성이 샤먼적인 재능을 많이 부여받는다고 믿었다. 시베리아에서는 여성을 선천적인 샤먼으로 여기기도 했으며, 몽고 신화에서의 여신들은 ‘달의 딸’로서 표현되는 샤먼 그 자신이라고 여겼다. 이 사실을 하나의 근거로 삼는다면 여성 시인은 어쩌면 샤먼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인지도 모른다. 강은교 역시 죽음의 제의를 통해 시를 통한 여성성의 깊이를 한껏 보여주고 있다.
보고 있었어, 난
결코 잊을 수 없었어. 한 탄생
뒤에서
달려오는 다른 탄생을.
어둠 속에서
빛나는 어둠을.
물의 죽음 뒤에
불의 胎芽.
<生者埋葬 3> 부분
이 시는 혼돈되지만 황홀한 죽음의 의식을 거친 후 새로운 삶의 거듭남을 강렬히 희원하고 있다. 이 땅의 현실이 모순되고 불합리하다면, 이때 시인은 보다 나은 공동체적 세계질서를 위한 제의를 연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제의가 바로 넋두리이며 詩인 것이다. 이러저러한 맥락에서 볼 때, “아직도 어둠은 빛의 어머니임을 보십시오.”라고 부르짖고 있는 <거리 詩>는 강은교 시의 여성성을 나타내는 한 극점에 도달하고 있다.
만약 시인이 신에 이르는 자라고 할 것 같으면, 시인은 정신적 오르가즘으로서의 해방과 자우를 최대치로 발휘하고자 한다. 이를 우리는 신성의 충만이나 법열이니 자기 완성에의 염원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지에는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다. 다만, 도달을 시도하다가 시도한다는 그 자체에 만족할 뿐이라는 생각에 도달할 뿐이다. 강은교도 일찍이 “해방에의 의지 때문에 나는 시를 쓰고 그것이 결국 불가능한 것임을 인식하는 데서 나의 시는 끝난다.”고 술회한 바 있었듯이.
Ⅲ. 공동체 의식의 확산된 지평
강은교 시의 정치적인 문제의식은 초기시의 경우에 수면 아래 잠겨 있었다. 그 후, 그는 두레박으로 명징한 물을 길어 올리듯이 삶의 구체적인 현실 속의 참여가 기약된 시의 언어를 제시하여 보여 주었다.
강은교는 70년대 후반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란 산문에서 “나는 이제껏 병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이 땅의 억울한 삶과 역사에 대하여 관찰하고 그들의 진실과 만나야겠다”라고 밝힌 바 있었다.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이 세상 숨소리 빗물로 쏟아지면
빗물 마시고
흰 눈으로 펑펑 퍼부으면
가슴 한아름
쓰러지는 풀아
인용시 「일어서라 풀아」는 1979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김수영의 「풀」이래 풀뿌리의 상상력이 빚은 끈질긴 민중적 생명력의 문제를 다시금 제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이 사는 삶의 터전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풀은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풀의 배후에 자연의 엄격한 원리가 이어져 있다. 말하자면, 풀은 보잘것없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힘이요, 쓰러져도 살고 되살아서 마침내 일어설 수 있는 뭇 생명의 상징인 것을.
강은교에 있어서의 1980년은 각별한 의미가 내포된 해가 아니었던가 한다. 1980년의 격동의 시절에 겪은 그의 정치적 충격은 4․19에서 한일협정 반대 데모에 이르는 정치적 충격 이후에 겪었던 두 번째의 그것이었다. 이것에 반응한 시가 있다면, 1980년에 발표된 「이제 스미리」가 아닌가 한다. 이 시의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스미리.
언제나 핏물 넘치고 넘쳐
저물녘이면 시뻘겋게 해져 가는
이 땅에 스미리.
안개 밟고 가는 이들이여
발걸음들은 가볍고 가벼워
한 올 실바람에도 자주 흩어져 버리는 이들이여.
그 안개 실은 우리가 남겨 놓은 것
우리 크나크던 한숨 어둠에 끌려가다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 허공에 부서진 것들.
그 바람도 실은 우리 가슴에서 불어 가는 것
서리 맺힌 우리 마음들
날이면 날마다 일어나
어이 하리. 세상 지붕에 몸 비비는 것
어젯밤엔 눈이 되어 내렸었네.
우리 채 녹지 못한 눈물 긴 눈발로
창밖 담벼락에 닿아 울었었네.
아, 이제 스미리
가슴마다 맺힌 한 전부 풀어 풀어
떠오르는 해에 정성 바쳐 드리고
스미리, 산야에 가득 풀포기로
실은 우리 울음인 까치 소리로
이 시를 사회참여시나 민중의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생경한 관념을 극한으로 절제한 품격 높은 한 편의 서정시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암울한 정치 현실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넉넉히 보여주면서 문제의 핵심과 실상에 적확하고 진실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그런데, 시인 강은교에겐 시인으로서의 역할이 따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굳이 강은교가 아니어도 무수한 민중시인들이 칼날을 세우고 있었듯이 말이다. 소위 80년대 민중의 시대에 그는 시류에 휩쓸린 감도 없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평론가들은 80년대의 강은교 시를 가리켜, 지하에서 지상으로 옮겨진 능동적인 상상력이니, 민중 주체의 발전 사관에 기초한 진보적 시각이니 하면서 고무적인 평판을 남겼다. 하지만 당대의 이해와 세평을 넘어서는 그의 문학의 시대적인 호응이 폭넓게 적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Ⅳ. 여성생태주의의 시적 가능성
오늘날 우리는 극심한 환경오염의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 환경오염이란 자연 상태의 극단적인 부조화를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이 한 몸을 이루며 살아가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각종 성인병 질환이 유발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식생활에서조차 자연의 조화롭고 화해로운 질서를 거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물로부터 우리는 우주적 리듬을 감지할 수 있다. 한 개인의 인체에도 부단한 기의 순환과 신체 리듬의 곡선이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 위대한 콤비네이션의 세계를 간과하고 있다.
시는 인간의 삶의 현장과 구체적인 복지 향상에 기여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것일 수도 있다. 시는 시인의 출세를 보장하지 않는다. 또 베스트셀러 소설가처럼 재산을 형성하지도 못한다. 연애시는 연애를 성공시켜 주지도 않는다. 꽃다운 처녀가 좋은 시집을 읽는다고 해서 좋은 데 시집간다는 보장도 없다. 역설적으로 말해 시의 최대한 매력은 여기에 있다. 쓸모없다는 사실을 활용한다는 것, 이 점이야말로 인간정신을 고양하며 심금을 울리며 시심을 자극한다.
오늘날 시의 역할은 삭막하게 황폐화된 세계의 풍경을 개선시키는데 있다기보다는 인간이 시의 우주적 리듬을 배워야 한다는 데 있다. 시에는 氣의 생명력, 신명, 우주생명의 리듬 등이 비밀스럽게 내포되어 있다. 서정시가 일종의 秘意的인 우주음악이란 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나는 평소에 시를 통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친화감, 인간과 자연의 교감, 심지어는 인간의 초자연적 영감의 확대까지를 구현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강은교의 시에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원적 생명력에로 환원하는 이미지가 있고 윤회라고 이름되는 우주의 순환적 생명질서가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를 오늘날일수록 더욱 유효한 현재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그는 시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유기적인 관계를 중시했다. 즉 그에 의하면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는 살아 있는 인체의 각 기관으로 비유되며 그 조화와 협력의 관계가 깨지는 경우에 인간적 삶의 보편성이 상실된다. 그가 시집 《貧者日記》이후 인간과 사회의 자율적이고도 통제적인 관계의 와해에서 야기되는 모순과 갈등의 문제에 천착해온 사실 역시 자연의 조화로운 질서에 대한 가치지향성을 함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허무에 매달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허무 그 자체에 안주하지는 않았다. 그의 허무에는 新生으로 표현되는 생명질서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스스로도 말한 바 있듯이 그가 느끼는 허무는 우리의 삶 속에 드리워져 있는 실패의 내재성에 대한 일종의 저항적인 무기였던 것이다.
허무와 신생, 그 틈새에는 아득함이 있다. 끝간데 모를 어두움이라 해도 좋고 우주적 침묵이라 해도 좋으리라. 여기에서부터 그의 시에 반영된 여성성의 심층이 그 아득한 틈새를 극복하려 한다. 《70년대》동인으로 활동해온 김형영은 “은교의 시의 저류에는 여성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모태의 힘 같은 것이 흐르고 있다”라고 평한 바 있고, 정희성은 <은교의 시>라는 시편에 “그녀가 다스리는 허무의 영역/다시 들어가 보면/그러나 아주 허무는 아니고/자궁같이 든든한 알맹이가 보인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는 강은교의 시세계를 단적으로 집약하고 있는 시구를 인용하고자 한다. 더 이상의 설명은 췌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다는
모든 여자의 자궁 속에서 회전한다.
<自轉 2>부분
그대여
어두운 세상 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진눈깨비>부분
생명의 모태 깊숙이 내재하고 있는 여성성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인도한다 라는 유명한 경구도 있지 아니한가. 나는 앞서 여성성을 여성적인 의식상태 및 그 존재방식이라고 매우 추상적으로 정의한 바 있었다. 물론 여성성은 남성성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여성성은 반드시 그 대립개념인 남성성을 전제로 할 때에만 성립하는 개념인가. 이에 대해서도 설명을 유보한다. 이러저러한 물음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이미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걸로 예상된다.
여성의 지혜는 思辨的이 아니고, 보다 더 생명이나 자연에 가깝고, 운명과 살아 있는 현실에 밀착하고 있다. 그 幼想이 없는 현실에의 눈길은 이상을 품는 남성적인 지성을 놀라게 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여성의 지혜는 그뿐만 아니라 이 현실을 기르고 도와주면서, 위로하고 사랑하면서 그에 매어져 있고 더욱이 죽음을 넘어, 언제나 새로운 轉生과 誕生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에리히 노히만, 서봉연 역. 《여성의 심층》, 삼성미술문화재단, p.137)
강은교의 시가 여성주의의 맥락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필자도 관심이 없지 않다. 이 문제는 이 분야에 지적 정보와 경험이 풍부한 여성 비평가에 의해 탐구되어봄직하다. 우선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의 시에는 생태여성주의적인 이미지가 적잖이 드러나 있다. 특히 최근의 작품에 가까울수록 이러한 경향이 구체성을 띠는 것 같이 느껴진다.
섬의 끝에서
동쪽과 서쪽이 만났습니다.
동쪽이 서쪽의 어깨를 만지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해를 뜨게 한다고.
서쪽이 동쪽의 어깨를 만지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해를 지게 한다고.
북쪽이 끼어 들었습니다.
나는 늘 지구를 얼어 있게 한다고.
동쪽과 서쪽이, 남쪽과 북쪽이
눈을 흘겼습니다.
서쪽과 동쪽이, 북쪽과 남쪽이
눈을 흘기며 어깨들을 심하게 부딪쳤습니다.
지구가 출렁
흔들렸습니다.
그 바람에 주홍 산나리 셋이
바위 틈에 몸을 풀었습니다.
꽃잎으로 뿌리를 가리며.
이 시는 2002년에 문학과 사상사에 상자한 시집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표제는 「섬의 끝」이다. 왜 이 시가 생태여성주의적인가? 남성에 의해 여성 지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사회는 지배와 경쟁의 원리로 이루어진다. 그 반대의 경우는 평화와 공존의 원리를 지향한다.
남성 권력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 여성적인 것의 진정성은 보살핌의 원리, 관계성, 다원적 사고 등에 있다. 이 시에서 바위 틈새에 몸을 푼 주홍 산나리는 갈등을 조정하고 이분법적인 사유를 화해롭게 하는 여성적인 특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성적인 것의 상징은 여신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있어서의 그것은 웅녀, 파소, 설문대할망 등등이 있어 시의 상관물로 이용되었던 적이 있었다. 에코페미니즘의 상징물로는 요컨대 삼신할미와 바리공주로 집약된다.
이 가운데서 바리공주는 강은교가 초기 시에서부터 최근 시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관심을 가져 왔던 신화적 캐릭터이다. 바리공주는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바리데기라고 한다. 그러나 죽어 가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 천상의 생명수를 구하러 길 떠나기를 시도한다. 천상에서 9년의 시집살이를 한 후에 궁전으로 돌아와 부모를 되살린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만신(무당)의 몸주가 되었다.
바리데기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였다. 그녀가 자기 희생과 맹목적인 효의 화신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신격으로 해석됨으로써 마침내 페미니즘의 승리자가 된다. 그러면,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여성적인 것의 특징은 어떠한 맥락에서 가치가 부여되는가? 다음의 글에 적절히 시사되어 있다.
여신은 합일의 과정, 우주적인 춤, 자궁처럼 생긴 동굴, 달의 주기를 닮은 여성의 생리, 끊임없이 진동하는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을 존중한다.
(김재희 편, 《깨어 있는 여신》, 정신세계사, 2000, p.14)
생태여성주의는 가부장제 문화에서 말하는 진보를 거부하고 그 동안 평가절하 되었던 여성의 기르고 양육하는 특성의 가치를 복원시킨다. 여신 숭배, 가이아, 몸, 자연적 주기, 모든 것의 상호관련성 등을 강조하면서 영성을 추구한다.
(같은 책, p.185)
생태여성주의는 급진적인 사상이다. 그러나 강은교의 시는 결코 급진적인 성격의 시라고 볼 수 없다. 생태여성주의와 강은교의 시가 이를테면 <남성에 의해 억압된> 여성의 원리와, (문명에 의해 훼손된) 자연의 원리를 일체화시키는 면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연과 여성을 근대문명과 가부장제의 타자로 보는 생태여성주의와, 곧잘 자연을 여성으로 의인화하거나 여성을 자연과 동일시하는 강은교의 시는 순환적 리듬의 주재자로서 생성과 소멸을 주관하는 여신의 눈길로 세계를 그윽히 관조한다.
살이 춤춘다
춤추면서 살은
주인 없는 산으로 간다.
가다가 밭이 있으면
잠깐 쉬어 밭이 된다.
산밭에 나물로 핀다.
「연도 4」의 일부를 따왔다. 이 시에서 시인화자는 여신의 시선으로 생명의 영속적인 윤회를 간파해 내고 있다. 이 윤회의 과정 속에서 가부장적인 이성과 합리성은 제어되고, 상호관련적인 존재 양식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에코페미니스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 ‘평화의 정치학’에 대한 비전일지도 모른다.
Ⅴ. 맺 음 말
강은교의 시세계는 대체로 세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진다. 초기 시는 허무와 초극의 개인의식에 깃들어져 있었다. 반면에 80년대에 이르면, 그는 공동체 의식을 드러내면서 인간과 인간의 유대, 관계성에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이 경우에 그는 인간을 사회역사적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십 수년간에 걸쳐 그는 우주적 생명의 문제 의식에 대한 시적인 천착을 서서히 보여주기도 했다.
필자가 비평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던 부분은 이 세 번째 국면이다. 여성과 자연의 동화적 관계의 원리에 의거하여 좀 더 근원적인, 우주적인 생명의 圓環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의 시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강은교가 시를 쓰던 어떤 시기이든지 위의 세 가지 국면은 언제나 혼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송희복
199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고, 1995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영화평론이 당선됨으로써 문학과 영화에 관한 비평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대표적인 저서로 「해방기 문학비평 연구」 「한국문학사론 연구」 「한국시, 감성의 계보」 「영화, 뮤즈의 언어」 「비평사와 동시대의 쟁점」 「소설의 역사성, 소설사의 환(幻)과 탈역사성」 등 다수가 있다. 현재 진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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