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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20일
말씀: 눅5:1-11
제목; 잘사는 길 ➁
잘 산다는 것은 소유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치에 있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몇 십 만 원짜리 신발을 아무 생각 없이 사 달라고 합니다. 몇 십만 원짜리 체육복, 가방 이런 것을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부모에게 사달라고 조릅니다. 왜죠? 첫 번째는 다른 아이들이 신고 입고 들고 다니니까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겠고 둘째는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하니까 다 따라한다는 것과 오죽 자랑할 것이 없으면 옷 자랑 가방자랑 신발자랑하고 살까? 자기 존재에 대한 자랑거리가 없어서 그런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소유가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존재가 잘 사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어른들이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소유가치가 높아집니까? 존재가치가 높아집니까? 예수를 믿어야 존재가치가 높아집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존재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존재가치는 존재목적에서만 옵니다. 마이크는 가치가 있습니다. 이 가치는 목적에서 발생합니다. 마이크의 존재목적은 작은 것을 크게 확산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대로 존재합니다. 어느 날 고장이 나서 목적대로 존재하지 못하는 날이 옵니다. 소리가 안 납니다. 그러면 가치가 없어지지요. 모든 존재가치는 존재목적에서만 옵니다. 그런데 그 존재목적은 누가 만드는가? 존재의 목적은 존재로부터 말미암지 않고 존재케 한 이로부터 말미암아서입니다. 마이크의 존재목적은 마이크가 결정하나요? 마이크를 만든 사람이 결정했나요? 만든 사람에 의해서 결정되지요. 모든 사람의 존재가치는 그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잘 사는 것은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은 존재목적과 동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분의 목적이 내 존재목적입니다. 그러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할 때 존재가 가치 있어지고 그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존재가치가 높아지는 일에 관심을 두시고 하나님이 왜 나를 이 땅에 보내주셨을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될 줄 압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살아가면 내 삶에 가치가 있어집니다. 그게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 하여 주십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사 하나님의 축복은 누구에게 주시나 당신의 목적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물질도 주시고, 재능도 주시고, 필요하면 자리도 주십니다. 그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여 주시리라’하는 말씀이 성립되는 것인데 이 축복을 받으려면 어디로 끌러야하는가 하면 목적, 소명, 하나님의 뜻에 이끌리는 삶이 잘 사는 삶인 줄 믿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엘리에셀이라는 종이 있었습니다. 아들 주겠다 해 놓고 25년을 기다려야하니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재해석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양자삼으시라고 그러는 모양이다 하고 엘리에셀을 양자 삼으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문화권에서도 파격적인 생각이지요. 그 당시 종은 사람이 아닙니다. 물건입니다. 종을 아들 삼겠다는 발상은 참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렇게 생각이 파격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믿음의 사람이구나 얼마나 믿음이 대단했으면 종을 양자 삼으려고 했을까? 이런 것이 충격이지요. 하나님은 이삭을 생각하셨기에 아브라함의 뜻으로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00세에 이삭을 낳고 이삭이 40세 되던 해 장가를 가는데 그 당시 아브라함은 140세인데 풍속으로는 아버지가 가서 며느리 감을 골라 와야 되는데 늙어서 못가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애비노릇 좀 해야 되겠다.’쉽게 이야기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종인데 아브라함에게는 그런 구분이 없는 것입니다. 종을 자식의 애비 노릇하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종의 신분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이 주신 인간으로 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에게 맹세하라고 하니까 맹세하고 나와요. 나와서는 신발 질질 끌고 침 튀튀 뱉으면서 ‘지남 늙었나! 나도 나이 먹을 만치 먹은는데 그 멀리까지 언제 갔다 와’이렇게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발이 땅에 붙지 않는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가장 못 사는 사람이지만 소유가치로 따질 때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나는 늙고 무익한 종이 아니구나, 우리 주인이 가장 귀하게 여기고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 인정받고 쓰임 받는 존재가 가치 있구나, 이 때 느끼는 만족감 배부름이 있습니다.
엘리에셀이 너무 감동을 받아 발이 땅에 붙지 않는 나라가리 만큼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기도가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 저도 엘리에셀처럼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종이 되게 해 주십시오’100세에 낳은 아들을 장가보내는 중요한 일에 누구를 보낼까? 할 때 저와 여러분들의 이름이 오른다면 이 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일에 한 번만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런 일에 한 번 만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사도바울 고백처럼 내 몸을 관제로 쏟아 부을지라도 기뻐하고 기뻐하리라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잘 사는 축복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축복하십니다. 주가 쓰시면 복을 받습니다. 주를 위하여 쓰면 풀립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타고 갈 나귀를 풀어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인이 뭐라 할 텐데요’그때 예수님께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그랬습니다. 여러분 주를 위해 쓰면 묶여 있던 나귀가 풀리듯이 풀립니다. 암 덩어리 풀립니다. 어떤 문제도 주가 쓰시면 풀립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녀가 무엇을 하더라도 형편만 되면 해 주세요. 그런데 꼭 하나 약속을 받으세요, 주를 위해 쓰겠다고 약속해라, 이 약속만 받으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주가 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김동호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숭이교회가 땅이 천안에 6000평이 있답니다. 4000평은 권사님이 주셨고 2000평은 사 놓은 땅이랍니다. 김동호목사님께 10년 전부터 천안에 가수원이 6800평이 있는데 4000평을 하나님께 드려서 쓰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볼 때 가수원이나 하지 쓸데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네 그러면서 10년을 받지 않았답니다. 아무리 봐도 과수원밖에 할 일이 없는 땅인데 교회가 가수원 할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 분은 정말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데 10년을 네 네 하고 받지 않다가 하도 바치겠다고 하니까 그냥 받았답니다. 그런데 그 땅에 이상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KTX아산역이 15분 거리 안에 섰습니다. 남 천안 톨게이트가 생겼는데 거기서는 5분 거리랍니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가려면 버스도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길이었는데, 과수원 땅에서 그냥 국도가 뚫려버렸습니다. 그것을 위해 산 하나를 깎았답니다. 이 모든 것과 합칠 수 없는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과수원 맞은편에 35만평이 계발되었답니다. 삼성협력단지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1800세대가 들어갈 아파트가 코앞에 세워졌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해도 되는 땅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 땅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땅입니다. 원래 가수원부지가 2만평이 조금 넘는데 친척, 친구들이 그냥 같이 공동명의로 되어 있는 땅이었습니다. 교회에 땅을 바치기로 하면서 목사님보고 일등으로 끊으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나누어서 분할 등기하겠다고 하도 조르기에 ‘여기요’하고 이야기했는데 입구가 없는 땅을 고른 것입니다. 목사님은 권사님 땅을 통해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권사님이 앞으로 입구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교회 땅 길 내어 주려고 길옆에 있는 땅을 두 배나 주고 1300평의 땅을 더 사 넣어서 등기를 시켰습니다. 그 교회 장로님들이 보고 나서 양계장을 사 넣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해서 2000평을 더 샀습니다. 권사님은 교회 바친 땅 길 내주려고 1300평 땅을 샀다가 대박이 났습니다. 권사님의 나머지 땅으로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게 똑 같은 논리입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까 풀리는 구나! 기도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전철역 들어서게 해달라고 했나, 톨게이트 생기게 해 달라고 기도했나? 도로 내 달라고 기도를 했나 그런데 주님 쓰십시오. 그 쓰임의 역사가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쓰면 풀립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 저를 쓰십시오. 주님 저희 영명교회 쓰십시오. 하나님 우리 자녀 쓰세요. 그러면 쓸 것 같지요. 안 됩니다. 아들 생각나고 자기 노후보장 생각나고 내 편리 생각나고 왜냐? 우리는 우리 안에 원죄가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그랬습니다. 죄의 뿌리는 욕심입니다. 욕심은 안 쓰겠다는 것입니다. 쓸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붙들고 있으려고 하는 것이 욕심이지요. 어떻게 보면 잘 사는 것에 죄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풀립니다. 주님을 위해 쓰면 반드시 풀립니다. 저는 우리 재정보시는 집사님이 이해를 하실지 모르겠지만 남 주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자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직 큰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온전히 주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마는 나름대로 저희교회처럼 빚이 있는데 이렇게 바깥으로 지원하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선교헌금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르는 필요한 것을 요청하면 성의껏 지원했습니다. 개척교회도 돕고 있습니다. 저는 빚이 있어서 자진해서 돕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청이 들어오면 그것이 주를 위해 쓰임 받는 일이면 그의 지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달 이자 낼 돈이 없어도, 언제는 낼 돈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저는 요동하지 않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가정에 복을 주시고 또 마음에 감동도 주시고 해서 해마다 헌금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번 행사도 여러 곳에서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남았습니다. 주가 쓰시겠다하면 교회부터 이 일을 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누울 때 보고 자리를 펴는 것이 아닙니다. 나올 구멍이 있어니까 작정도 하고 또 남을 위해 펴주고 하는 교회는 있지만 저희교회는 도움을 받아야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에 게을리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역사하는 줄 믿습니다. 분명히 개인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게 주를 위해 쓰면 풀리는 것은 틀림없는데 사탄은 우리를 그런 영광의 삶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욕심 부리게 해서 움켜지게 합니다.
여러분 쓰면 늘어난다는 것 아십니까? 제가 런닝머신을 4km 뛴다고 했죠.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계속 뛰니까 늘어난 것입니다. 무거운 것 자꾸 들면 힘이 빠질 것 같지요. 아닙니다. 더 큰 것 듭니다. 그러니까 쓰면 쓸수록 늘어납니다. 안 쓰면 줄어들어요. 이게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김장훈씨가 50억 이상을 기부하면서도 행복하고 넉넉한 이유에 대해서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 : 많은 분들이 김장훈씨가 지금껏 50억 이상을 기부하고 항상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서까지 헌신적으로 봉사활동, 사회활동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이 생기는 것이며 왜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서 그렇게까지 헌신적으로 기부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존경심 반 걱정 반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김장훈 : 저는 어렸을 때부터 지독하게 가난했었고 몸도 약해서 의사가 말하길 넌 평생 제대로 뛰지도 걷지도 못할거라 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은 좌절과 분노, 절망 밖에 없었죠. 저는 주머니에 천원조차 없어서 종로에서 사당동까지 걸어 다니면서 음악을 하였습니다. 그랬던 제가 50억이 넘게 기부를 하면서도 항상 여유 있게 건강하게 사는 모습들을 보고 사람들은 신기해하면서 경이롭게까지 저를 대합니다.
비결은 간단합니다. 항상 어떻게 하면 나 한사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을까...저는 그것만 집중했습니다. 나의 노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지길 원해서 노래를 부르니 앨범이 성공을 거두며 인기도 많아지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제 공연을 보러 와서 행복을 느낄까 해서 항상 공연에 대해서 연구하며 연구했더니 항상 공연은 매진이었고 행사 요청은 정말 1년 365일에 1000건도 넘게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해서 번 돈을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쓰여질 수 있을까 연구해서 불우아동들, 끼니를 거르지 못하는 노인들, 제 3세계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1달러짜리 주사를 맞지 못해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린이들, 기름유출로 인해 생활터전을 빼앗긴 태안반도 분들... 이분들에게 아낌없이 쓰기 시작하였죠. 많은 사람들이 물어봐요. 그렇게 아낌없이 기부를 하면 김장훈씨 당신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제가 신기한 거 가르쳐드릴까요? 그렇게 많은 분들의 행복을위해 돈을 쓰면 쓸수록 기부를 하면 할수록 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저에게 그보다 더 큰 돈이 항상 제게 들어왔어요. 1억 원을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기부했을 때 몇 달 뒤 앨범이 대박 나서 3억원 이상의 이익이 생겼고 5억 원을 양로원에 기부했을 때 며칠 뒤 CF가 한 달에 3개 넘게 들어와서 10억 이상이 생겼으며 10억 원을 월드비전에 기부하였더니 하는 공연마다 대박이 나서 전국투어 순이익이 20억이 넘게 생겼어요.
네 쓰면 쓸수록 늘어나게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돈도 마찬가지고 재능도 마찬가지인데 주를 위해 쓰는 모든 것은 늡니다. 주를 위해 아끼는 모든 것은 줄어요. 주를 위해 쓰면 풀립니다.
문제는 주는 아무나 안 쓰신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설교를 들을 때 ‘아 내가 주를 위해 쓰임을 받아야 되는데’하는 욕심을 가져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 쓰지 마십시오. 나 돈 없습니다. 저 사람 돈 많아요 저 사람 쓰십시오.’그러면 주님이 쓰고 싶어도 안 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위해 쓰임 받는 일에 목숨을 걸면 잘 살 수 있습니다. 축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풀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쓸 때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공통점은 보고 쓴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외모를 안 보신다는 것이지 아무것도 안 본다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막 쓰지 않습니다. 외모보다 더 주요한 기준은 중심을 보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쓰신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빈부귀천이 있을 때 그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외모를 보아도 학벌을 보아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썼잖아요. 그래서 자영업을 했습니다. 어부가 된 것은 누가 쓰주지는 않으니까 어부밖에 더 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베드로의 중심을 보고 스카우트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면이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마음에 드신 것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쓰시면 여러분 대박 터지는 것입니다.
첫째 충성이었습니다. ‘깊은 대로 가서 거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야기 했더니 베드로가 하는 말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는 것이 없지만은’그랬습니다. 어제 밤새도록 고기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사람과 하나님이 보신 장면이 다릅니다.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밤새 고기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아 너 어부 맞아’이런 시각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고기 많이 잡은 사람만 씁니다. 못 잡은 사람은 무능하다고 안 씁니다. 이게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보셨느냐? ‘뭐 빈 그물질을 밤새도록 했어’ 딴 면을 보셨습니다. 끈질기다는 것이지요. 성실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능력이 아니고 충성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능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능력은 하나님이 주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충성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성실은 우리가 드리는 것입니다. 빈 그물질도 끝까지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마음에 들어서 쓰니까 베드로에게 능력이 있었습니다. 두 배를 채우매 물에 잠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성실함 충성입니다.
만일 능력을 하나님이 요구하신다면 저는 하나님께 절대로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만 있으면 드릴 수 있는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능력을 없으면 못 드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충성은 안 하는 것입니까? 못하는 것입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혜로우셔서 큰일에 충성하는 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찾습니다.
여러분 안내하는 것 누가 하냐에 따라서 교회 오고 안 오고 합니까? 아닙니다. 아무상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떤 교회 집사님은 안내를 할 때 최고 좋은 옷을 입고 나와서 안내를 하는데 꼭 이런 기도를 하고 안내를 한답니다. ‘하나님 저 얼굴보고 혹시 마음이 상한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풀려서 목사님 설교 은혜 받게 해 주세요’그러면서 웃는 연습 거울보고 하고 안내를 한다고 그럽니다. 혹시 사람은 이런 정성을 모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게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십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자꾸 풀립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작은 일에 마음을 다하고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 성실과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예배, 봉사, 기도)
충성하는 사람들은 좋은데 충성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약점이 있습니다. 교만하고 강합니다. 자기가 잘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습게 보이고 못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말해야 되고 시켜야 되고, 그런데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안 쓰십니다. 누구를 쓰시는가? 겸손한자를 쓰십니다. 그런데 충성스러운 사람은 겸손하기가 힘듭니다. 여러분 무우 먹고 트림 안하면 인삼 먹을 것과 같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무우 먹으면 트림이 잘 나오는 모양인데 그것보다 냄새가 얼마나 많이 납니까? 충성하고 트림하면 얼마나 냄새나는 줄 아십니까? 충성하고 트림 안하면 축복받는 줄 믿습니다.
베드로가 충성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졌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전직 목수가 현직 어부에게 명령을 한다는 것을 말이 안 되지요. 프로는 아마추어에게 훈수당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말씀을 의지해서 거물을 내리리이다.’이거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성실한 사람, 끈기 있는 사람이 남의 말 듣는 것을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드로를 왜 쓰셨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간단합니다. 주는 누구를 쓰시느냐? 주를 위해 쓰는 사람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쓰는 사람만 씁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위해 쓸 줄 아는 사람들 쓰십니다. 하나님은 저 쓰주십시오. 하는 사람만 쓰시지 나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는 안 쓰도 좋습니다. 하는 사람은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께 쓰임 받음으로 잘 사는 비결을 깨닫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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