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미국의 거대 에너지회사 엔론은 12억달러에 이르는 손실을 숨기고 63억달러밖에 안 되는 매출을 1000억달러로 부풀리는 회계부정을 저질렀다 파산했다. 당시 부정을 감시해야 할 14명의 이사진 중 11명이 외부인사 중에서 선임된 사외이사였지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경영진과 짝짜꿍이 돼 한 해 35만달러씩 보수를 챙기며 엔론이 거액을 기부한 기관의 장을 맡거나 엔론과 거래하는 회사의 이사를 겸직했다.
▶미국은 엔론 스캔들을 계기로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크게 강화하는 사반·옥슬리법을 만들었다. 뉴욕증권거래소는 상장기업 전체 이사의 절반 이상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도록 의무화했다. GE와 P&G 등 대기업들은 이사회에서 최고경영자와 최고재무책임자를 빼고 전원을 사외이사로 채웠다. 2006년 포천이 뽑은 1000대 기업 평균 이사 수는 10명, 이 중 8명이 사외이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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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이사의 숫자가 늘고 힘이 세지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사외이사의 권력화'다. 세계적 IT기업 휴렛패커드(HP) CEO에까지 올라 6년 연속 '최고 여성기업인'으로 칭송받았던 칼리 피올리나를 내쫓은 것도 사외이사였다. 이들은 인사경영권을 놓고 피올리나와 마찰이 잦아지자 2005년 그녀를 이사회에 출석시키지도 않은 채 합병 실패와 실적 악화를 이유로 해임했다. 그해 일본 소니의 회장과 사장이 한꺼번에 퇴임한 사건도 8명의 사외이사가 주도했다.
▶그제 금융지주 새 회장을 선출한 KB금융지주에서도 사외이사의 전횡 논란이 일고 있다. 12명 이사진 중 9명에 이르는 사외이사들은 그룹 회장 후보를 추천하고 뽑는 건 물론이고 동료 사외이사도 자기들끼리 뽑는다. 연봉도 스스로 정해 한 달에 서너 번 회의에 참석하고는 한 해 1억2000만원이나 되는 가욋돈을 챙겨 갔다. "금융지주 회장 위에 사외이사들이 있다"는 비아냥이 나올 만하다.
▶미국식 사외이사 제도가 도입된 것은 외환위기를 겪고 나서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책의 하나로 경영진과 독립해 감시·견제 기능을 잘하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는 사이 이젠 사외이사가 경영진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구가 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금융감독당국도 사외이사 제도의 전반적 개선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한다. "누가 감시자를 감시할 것인가(Who monitors monitor?)"라는 물음이 사외이사제에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