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자연관과 생태적 상상력
2006/3/ 시와 사람 기고
1. 자연과 대지에 대한 두 가지 관점
대지에 대한 고대사회의 인식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것이다. 동서양의 고대문화와 북미 인디언들에게 대지는 살아 있는 것이며, 인간의 활동에 응답하는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로 인식되었다. 이를테면 대지는 만물을 잉태하고 생산하며 건강하게 양육하는 창조적 모성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고대의 인식 속에서 대지는 매일 숨을 쉬고 대기 중의 영혼을 흡입하여 수많은 생명들을 재생시키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대지를 가로지르는 강과 샘물은 피나 땀에 비유되었고, 숲과 토양은 살갗으로 여겨졌다.
자연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대지에 대한 파괴적 행위를 비윤리적 행동으로 규정하게 만들었다. 대지는 살아 있다는 문화적 이미지가 자연에 대한 적대적 행동을 저지하는 윤리적 버팀목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유기적이고, 살아 있는 존재로 여겨졌던 자연과 우주는 ‘세계기계(world machine)’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세계는 죽어 있으며 기계와 같다’는 인식의 확산은 대지와 자연에 부여되었던 영혼과 생명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과학혁명의 영향으로 우주에 대한 애니미즘적이고 유기체적인 가정들이 하나씩 제거되었고, 이는 곧 ‘자연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대지와 자연을 향한 파괴적 행위가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문화적 방어선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지난 3백 년 동안 서구의 기계론적 과학과 자본주의는 ‘대지는 죽어있고 비활성적이며, 외부에서 조작가능하고 이윤을 위해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지구의 자원을 무한정 개발하고 이를 통해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풍요롭고 새로운 삶을 설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대지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생산 공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자연에 대한 신비와 대지에 대한 신성한 믿음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인간은 자연을 개발하고 자신들의 의도에 따라 인위적으로 변모시키는 것을 성장과 발전이라는 개념으로 이데올로기화 했다. 인간들은 ‘인류번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 위해 경제적 시스템을 통해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경제적 논리에 의해 자연이 인간들의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살아있는 자연은 점차 죽어 가기 시작했다. 반면 죽어있던 자본과 경제적 시스템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와 같은 속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자연과 자본으로 대표되는 이 같은 역전은 생태적 위기를 전 지구적 문제로 보편화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과학기술과 경제성장으로 인해 인간이 자연의 불편함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의해, 대지의 생산력에 의해, 지역 생태계의 순환과 질서에 의해 억제되었던 인간의 욕망이 해방됨을 의미한다. 이제 인간은 결실을 얻기 위해 계절의 변화에 따른 긴 생산주기를 기다리거나 자연적 순환에 종속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은 인간의 노동과 자본에 의해 창조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파괴는 오히려 생산적 활동으로 찬미되었다. 이렇게 볼 때 인간들은 이성의 힘으로 주술의 정원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풍요와 성장이라는 또 다른 주술(Magic)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전에 없이 강력한 마법을 발휘하던 풍요와 성장이라는 주문도 만능이 되지는 못했다. 환경이 파괴되면서 사람들은 자연이란 단순한 욕망실현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을 잉태하고 살아가게 해 준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을 타자화(他者化)하고 파괴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살상행위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대지에 대한 전통적 은유가 다시 부활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상황이 도래한다. 대지(大地)의 윤리를 제창한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d)는 대지도 윤리적 행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인간의 윤리가 점차 확장되어 생명 없는 대지조차도 윤리적 행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인간의 윤리적 범주는 이성적 존재나 생명체에 국한되지 않고 동물,식물,토양, 물을 포괄하는 대지의 윤리로 확장된다.
한편으로는 지구도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은 존재라는 전통적 시각도 다시 등장했다. ‘가이아(Gaia) 가설’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은 전통적 이미지의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보다 세밀한 과학적 근거들로 재구성된 것이다. 제임스 러브록에 의해 제기된 가이아 학설은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이해하려는 유기체적 전체론이다. 생태시인이자 근본생태사상가인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 역시 지구를 어머니에 비유하고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을 한 가족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과 일반 시스템즈 이론을 접목했던 조애나 메이시(Joanna Macy)는 대지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연적 존재들의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대지와 자연에 대해 생명을 부여하고 인간과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대지와 자연이 살아 있는 존재라고 생각할 때 그들도 보호받아야 하고 정당하게 존재할 권리를 가진 윤리적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즉, ‘살아 있는 자연’이라는 이미지는 아무런 도덕적 죄의식 없이 자연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거나 개발할 수 없도록 하는 정신적 버팀목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대지와 자연에게도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 누리는 권리와 존엄성을 대지와 자연물에게도 동일하게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사상을 살펴보면 대지를 살아 있는 존재로, 우주 전체를 긴밀한 관계성으로 직조된 하나의 법계(法界)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생태사상가들이 말하는 가이아 가설이나, 생태계(Eco-System)라는 사유와 매우 깊은 유사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선사들은 생명 없는 존재로 여겨졌던 산하대지(山河大地)에 대해 진리를 설법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무정(無情)들에게도 생명이 있다고 바라보았다. 선사상에 내포된 이 같은 자연관과 생태적 상상력은 이미 생태철학의 사유로 흡수되고 있다. 따라서 선의 자연관을 조명하는 것은 생태철학의 사유를 풍부하게 하고 대안적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만들어 가기 위한 철학적 모색이라는 의미를 띤다.
2. 불교적 사유와 대지의 재발견
앞서 살펴보았듯이 과학혁명 이후 인간들은 대지에 대한 기계론적 사유를 앞세워 대지와 자연을 무참히 독살하는 범죄를 저질러왔다. 인간은 어머니 대지의 품에 있으면서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초월적 질서와 권위를 형상화했다. 그들은 하늘의 영광을 추앙하며 어머니 대지를 짓밟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아버지의 이름으로 어머니 대지를 약탈했다. 그 결과 대지와 그곳에 근거해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은 개체의 죽음과 종의 멸종이라는 위기로 내몰리는 ‘자연의 죽음(death of nature)’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대지를 딛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여기서 “땅으로 인해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 넘어진 그 땅을 떠나서 일어설 곳이 따로 없다.”는 보조지눌(普照知訥)의 말을 곱씹어보게 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삶은 초월적 신의 섭리가 아니라 대지의 질서, 자연의 섭리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딛고 일어서야 할 곳은 하늘의 권위나 이성이 설계한 테크노피아가 아니라 대지와 존재들의 연기적(緣起的) 관계성이다. 인간의 역사는 뭇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대지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하듯 이제 인간은 욕망으로 독살한 대지를 다시 살려내고 소욕지족(少欲知足)이라는 선적(禪的) 실천으로 지난 죄과를 참회해야할 때가 왔다.
신의 죽음을 선언했던 니체는 기독교의 신과 피안의 세계에 대한 반론을 자신의 사상적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에게서 자비로운 창조주는 더 이상 의미의 원천으로 생각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주의 목적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니체는 인간에게 유일한 관심거리는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대지라고 천명했다. 그는 짜라투스트라의 현란한 웅변을 통해 “형제들이여, 그대들에게 진실로 바라노니 대지에 충실하라!”며 대지의 역사를 선언한다. 니체에 따르면 전통적 형이상학이 인간의 삶을 지배할 때, 가장 큰 불경(不敬)은 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하지만 신의 부고가 나붙은 이후 그것은 삶의 토대이자 생명의 근원인 대지를 모독하는 것이다. 니체의 이 같은 주장은 인간의 삶이 하늘의 역사에서 대지의 역사로 전환되고 있음을 예견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대지에 대한 이 같은 니체의 주장은 붓다에 의해서 이미 2500년 전에 웅변처럼 설파되었다. 싯달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고 있을 때 군대를 보내 그의 성도(成道)를 방해한 것은 바로 하늘의 신들이었다. 아버지로 군림해 왔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이미지는 대지의 아들이 주술에서 깨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신의 신비로 포장된 브라만(Brahman)의 권위, 전통적 형이상학을 지키려는 지배계급은 마왕 ‘파순(pāpīyān)’으로 형상화되어 태자 앞에 나타나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수행을 방해한다.
여기서‘마라(魔羅;Māra)’는 일반적 의미에서 ‘죽이는 신’, ‘죽게 하는 자’, ‘파괴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마는 죽음의 인격화이자 신격화로써 생명을 단절시키는 것이 중심적 역할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마라는 부처님의 수행을 방해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악마의 정체가 바로 ‘하늘의 신[天神]’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붓다의 수행을 방해한 것은 하늘로 대표되는 신들이다. 반면 그 마왕의 유혹과 저항을 물리치게 하고 태자의 보살행과 수행을 증명한 것은 바로 대지의 신이다. 태자의 수행을 방해하던 마왕은 싯달타 태자가 깨달음을 이룰 만한 덕행이 부족함을 강조하기 위해 태자가 전생에 행한 보시의 공덕(功德)을 증명해 보이라고 한다. 바로 그때 대지는 수많은 생을 거듭하며 되풀이된 태자의 보시행을 증언한다.
[불본행집경]에 나타난 이 같은 내용은 붓다의 출현은 곧 하늘과 신들의 역사에서 대지의 역사로 전환됨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싯달타 태자의 삶과 역사를 증명하는 것은 신들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딛고 선 대지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대지는 “파순이여, 이 보살께서는 그 옛날 도(道)를 구해 재물은 물론 자기 육신까지도 남에게 보시하였다. 그 피가 지금도 대지에 침윤되어 있다.”고 증언한다. 이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왔던 초월적 존재에 대한 환영이 무너져 내리고 대지의 역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서막이다.
인간의 삶과 역사가 배어 있는 대지가 바로 붓다가 수행하고 보시를 실천했던 무대라는 것이 본생담의 내용이다. 그래서 붓다는 하늘의 영광이 아니라 대지의 질서에 충실하고,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서서 도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처럼 대지는 붓다에 의해 그 의미가 재발견됨으로써 불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곧 신의 섭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대지의 아들들이 삶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는 일대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생태적 위기에 직면해서 인류는 다시 대지를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대지로 대변되는 자연을 다시 발견하는 것은 인간 자신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인간은 환경 속의 존재가 아니라 환경의 일부라는 사실의 자각은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 다시 말해 사물의 보다 광범위한 체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아는 것이 철학과 종교에서 핵심적인 화두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것이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레오폴드가 말하는 대지의 윤리와 지구를 살아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가이아 가설과 같은 이론들은 점차 호소력을 더해가고 있다. 레오폴드는 붓다나 니체가 주장했던 것처럼 대지에 충실해야 할 윤리를 정식화한다. ‘대지의 윤리(Land Ethic)’란 인류의 역할을 토지 공동체의 정복자에서 그것의 평범한 구성원이자 시민으로 변화시킨다. 따라서 대지의 윤리에서는 인류의 동료 구성원에 대한 존중, 그리고 공동체 자체에 대한 존중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바야흐로 대지는 인간의 역사에서 전에 없이 분명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부상하고 있다. 생태중심적 윤리에서는 모든 존재들의 연기적 관계성에 눈뜸으로써 자연 속의 모든 존재 하나 하나의 가치가 새롭게 발견된다. 대지의 재발견은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전(禪典)에 나타난 선사들의 자연관은 산하대지와 산천초목이 모두 살아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선사들의 이 같은 통찰을 수용하는 것은 대지가 살아 있다고 믿음으로써 자연에 대한 파괴가 부당하다는 윤리적 버팀목을 다시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3. 걸어 다니는 산과 물위로 가는 산
근본생태론적 가치관에 입각해 볼 때 전체로서의 대지뿐 아니라 대지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들도 하나의 유기체로 사유된다. 그런 점에서 일체 모든 존재를 법신(法身)으로 바라보는 선의 통찰은 모든 존재는 살아 있는 거대한 생명체라는 생태적 통찰과 폭넓은 접점을 이루게 된다. 선에서도 나무와 바위나 돌과 같은 무정(無情)들에게도 불성(佛性)이 있고, 무정들에게도 지혜가 있고, 무정들도 진리를 설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생명을 가진 유정적(有情的) 존재에게만 생명과 도덕적 권리가 있다는 인식은 선적 사유에서는 무의미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선사들의 대화나 선종의 문헌에는 무정물(無情物)들 조차도 살아 있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중심적 윤리에 입각해 본다면 전체를 이루는 모든 부분은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전체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존재들로 인식된다. 선사상에 기반한 생태사상을 펼치고 있는 게리 스나이더는 시집 [거북섬(Tuttle Island)]을 통해 “대지와 행성 그 자체 역시 다른 속도를 지니고 살아가는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했다. 그도 러브록처럼 지구에 대해 “밤낮을 계속해서 항해하는 어머니”로 비유하고, 비옥한 대지는 지구라는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딸로 묘사한다. 스나이더는 ‘어머니 지구(Mother Earth)’의 품속에서 살아가는 나무, 바람, 물, 태양, 허공 등 야성의 여러 존재들은 모두가 다 ‘위대한 가족(Great Family)’의 일원들이라고 통찰한다.
경전이나 선전에도 이처럼 살아 있는 대지에 대한 은유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엄경]에서는 초목과 울창한 숲이 죽은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래서 숲이나 나무들도 보살을 알아보고, 보살이 설법하는 도량을 향해 시원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 같은 인식은 ‘청산은 항상 움직인다(靑山常運步)’거나 ‘앞산이 물 위로 간다(東山水上行)’와 같은 선사들의 사유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운문(雲門)은 자연을 살아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대표적인 선사로 꼽을 수 있다. 어떤 제자가 운문에게 ‘모든 부처님의 해탈처’가 어디냐고 묻자, 운문은 “앞산이 물 위로 간다.”고 대답한다. 또 한 번은 ‘산도 달리고 물도 달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표현은 산과 강을 비롯한 자연의 사물들이 살아 있으며 활동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일본의 도원(道元; 1200-1253) 선사는 선종의 문헌에 나타난 이 같은 언어적 메시지를 표면적 의미 그대로 수용한다. 도원은 ‘청산이 걸어 다닌다’거나 ‘앞산이 물위로 간다’라는 선화(禪話)에 대해 문자에 담긴 의미 그대로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한 기술로 받아들인다. 도원의 이 같은 입장은 현대의 생태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자연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정법안장(正法眼藏)]에서 도원은 ‘앞산이 물 위로 간다’는 운문의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이나 ‘청산은 항상 걸어다닌다’라는 ‘청산상운보(靑山常運步)’에 대해 주목한다. 그는 산과 물에게도 방대한 진리의 말씀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산과 물도 항상 진리를 설하고 있는 경전 그 자체라고 이해한다. 도원의 이 같은 인식은 [정법안장]의 [계성산색(溪聲山色)] 장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소동파(蘇東坡)가 시냇물 소리를 듣고 불법의 진리를 설하는 장광설(長廣舌)로 이해했던 것처럼 도원도 시냇물 소리와 산빛을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법신(法身)의 설법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도원은 “올바르게 수행을 할 때에는 시냇물 소리와 계곡의 모습, 그리고 산의 모습과 산의 소리가 모두 팔만 사천의 게송을 아낌없이 설하고 있음을 안다.”고 말한다. 도(道)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연은 살아 있고, 그 자체로서 언제나 진리를 설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도원은 자신의 이 같은 자연관을 기술하고 있는 [정법안장]의 내용을 [산수경(山水經)], 즉 '산과 물에 대한 경전'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산과 물은 죽어 있는 자연현상이거나 무정의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들이며, 동시에 진리를 설하는 법신의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산과 물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세계, 즉 부처님의 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산수경」의 내용이다. 도원에게 있어 눈앞에 펼쳐진 산과 강은 부처님의 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고, 부처님과 같은 진리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존재로 이해된다. 따라서 도원의 시각을 통해 보면 “무정에게도 옛 부처님의 마음(古佛心)이 있다”라는 혜충(慧忠)의 설법은 생태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진술로 이해된다.
아득한 먼 옛날부터 산은 존재해 왔으며 그런 점에서 산과 강의 법문은 우주의 아득한 연륜이 배어있는 소식이다. 그리고 현재 대지에 서 있는 나는 바로 그 영겁의 세월을 관통하고 있는 자연의 일부로 존재한다. 따라서 산과 강으로 대변되는 자연은 아득한 과거의 내 모습이기도 하며, 개체적 자아의 범주를 초월한 대법신(大法身)의 몸이기도 하며, 나의 태생과 진화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산과 강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다만 산하대지의 생명은 인간의 생명과는 속도를 달리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득한 과거로부터 나의 존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산하대지이기 때문에 나와 산하는 둘이 아니다.
산하대지에 대한 이 같은 사유는 레오폴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사냥꾼의 총부리에 맞아 비장하게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에 담긴 의미를 알아듣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산이라고 말한다. 인간들은 미처 자각하지 못하지만 “오직 산만이 늑대의 울부짖음을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알 수 없는 늑대에 대한 생각을 산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없을 뿐”이라고 말한다. 한 생명이 죽어가며 뿜어내는 강렬한 눈빛을 통해 레오폴드는 모든 생명과 자연이 가진 무한한 신비감을 체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존재들에게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닫는다. 혹자는 환경윤리의 초석이 되었던 레오폴드의 이 같은 깨달음에 대해 살아 있는 생물은 물론이며 무정물(無情物)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다는 존재의 본질적 가치를 깨달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레오폴드는 이 같은 자신의 자연관에 대해 ‘산처럼 생각하기(Thinking like a mountain)’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그에게서 산은 죽은 존재가 아니며, 산은 자신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우리도 산과 같이 생각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출 때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산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산이 물 위로 간다’라는 선(禪)의 어법과 산과 물을 경전으로 읽고자 했던 도원의 사유는 까마득한 세월을 지나 레오폴드에 의해서 ‘산처럼 생각하기’라는 개념으로 의미심장하게 다시 등장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도원은 산은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그 공덕이란 레오폴드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존재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살아온 존재가 가진 덕성이다. 산은 영겁의 시간을 가로질러 모든 존재들의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보듬어 온 터전이기에 항상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반면 산은 그 스스로도 태어나고 늙고 죽어 가는 생명체이기에 항상 움직이고 활동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시선으로 볼 때 항상 정지해 있는 것 같지만 영겁의 시간에서 보면 산과 강은 활발하게 살아 있고 활동하는 존재들이다. 스나이더의 표현처럼 산은 다만 그 삶의 속도가 인간과 다를 뿐이다.
레오폴드가 산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처럼 도원은 수행자들을 향해 산이 살아 움직이는 존재임을 깊이 탐구하라고 당부한다. 그는 살아 있는 자연의 생명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이 살아 움직이듯 산도 살아 움직인다고 설법하고 있다. 그래서 도원은 산을 인간과 같은 선상에서 직관하면서 의인적 모습으로 산을 설명한다. 따라서 ‘청산이 움직인다’거나 ‘앞산이 물 위로 간다’라는 옛 조사들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비방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의 무지를 폭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유는 산과 강이 살아 있다고 믿는 것은 과학적 진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도원은 산과 강이 살아 있다는 조사들의 법문을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무지라고 말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산과 강과 같은 자연이 죽어 있다고 보는 것은 인간중심적 삶의 속도와 생명관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이다. 생명과 활동성에 대한 기준을 인간중심적으로 국한할 때 산하대지는 죽은 존재가 되며, 기계와 같은 존재로 보일 뿐이다. 다시 말해 산같이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이며, 산이 살아가는 속도를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의 단절이자 생태적 사유의 빈곤이다. 그러나 참다운 인식에 눈뜨게 된다면 살아 있는 자연을 보게 된다는 것이 도원의 직관이며 레오폴드와 스나이더의 통찰이다.
도원은 선사들의 사상 속에서 막연한 선문답으로 이해되어 온 ‘청산이 움직인다’든가, ‘산이 살아 있다’와 같은 것을 사실적 진실로 받아들이고 「산수경」을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경계를 꿰뚫게 되면 청산이 항상 움직이고, 앞산이 항상 물 위를 흐르니 깊이 참구하라.”고 당부한다. 이처럼 도원은 [정법안장]에서 자연에 대해 의인적이고 물활론적(物活論的)으로 기술함으로써 독특한 자연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이라는 선종의 역설적 진술이 도원의 자연관과 생태적 상상력으로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도원의 이 같은 자연관은 10년 간 임제종(臨濟宗) 문하에서 선 수행을 체험하고 선과 동양정신에 기반한 생태사상을 전개하고 있는 게리 스나이더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게 된다. 그는 도원의 자연관에 대해 산과 물이 모든 존재와 행위의 진행과정이라고 이해한다. 물론 여기서 산과 물은 자연을 대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산과 물로 대표되는 자연은 존재와 비존재 모두에게 생명을 부여하여 살아 있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존재의 본질로 이해된다. 그런 점에서 산하(山河)로 대표되는 자연과 개체 존재는 둘이 아니다. 개체는 산하라는 자연의 진행과정들이며, 산하는 개체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스나이더는 「산수경」을 통해 산이 곧 나이고, 내가 바로 산이 되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불이적(不二的) 가치관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는 초목에 불성(佛性)이 있음을 주장한 길장(吉藏)의 ‘의정불이설(依正不二說)’과도 맥락이 상통하는 인식이다.
스나이더는 “나는 옛 부처님의 뼈(bones of the Ancient Buddha)들인 화강암의 융기가 200마일이나 길게 뻗은 시에라네바다의 서쪽 비탈에 위치한 집에서 살고 있다.”고 노래한다. 길게 뻗은 산맥은 도원이 ‘옛 부처(古佛)’의 현현으로 보았듯이 스나이더의 눈에도 부처님의 뼈로 인식되고 있다. 스나이더에 따르면 생명은 생태계의 거대한 테두리 속에서 식물, 동물, 미생물 등과 함께 생존해 가는 하나의 유기적 존재로 인식된다. 생태계는 하나의 거대 고리로 형성된 소우주이며, 상호의존이라는 공동체 인식을 바탕으로 한 통합적 체계라는 것이다. 그는 [거북섬]을 통해서 이렇게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해 헌신할 것을 서약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 자체로 부처님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 살펴본 바대로 중국 선종의 자연관과 생태적 상상력은 도원을 통해 일본으로 전승(傳承)되고 이것은 다시 아득한 시간의 강을 건너 스나이더를 매개로 하여 서양에 전해짐으로써 생태철학을 구성하는 철학적 통찰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선사들의 자연관은 근본생태론의 가치관으로 수용됨으로써 선의 정신세계는 생태철학의 내용을 구성하는 사상적 자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근본생태론은 앨런 와츠, 스즈키 다이세츠, 게리 스나이더 등에 의해 서구사회에 소개된 불교와 선사상 등을 사상적 내용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과 이성적 입장에서 보면 신비적 진술로 치부될 수도 있을 선의 자연관은 생태철학과 결부됨으로써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사상적 전통이 되고 있다.
4. 선전(禪典)의 언어 속에 담긴 생태적 상상력
과학적 지식과 이성적 사유는 자연을 죽은 존재라고 정의 내렸지만 선사들은 ‘푸른 산은 언제나 걸어 다닌다’고 말한다. 선의 인식 속에서 자연은 살아 있는 생명체로 이해되며, 죽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 같은 인식은 생태철학적 사유와도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생명 없는 존재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교감하려는 생태사상가들의 등장은 선사들의 인식과 태도를 생태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스나이더는 허물어져 가는 낡은 집을 바라보면서 살아 있는 인격체를 대하듯 말한다. 마치 법당 앞의 돌기둥과 법담(法談)을 주고받는 운문(雲門) 선사나, 나무와 대화했던 위산(潙山) 선사처럼 생태시인의 눈에 비친 무정(無情)의 존재는 생명을 가진 존재와 다를 바 없다. 조애나 메이시(Joanna Macy)가 주도하는 ‘모든 존재들의 회의(The Council of All Beings)’ 역시 무정들에게 내재된 생명을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대화하며 교감하려는 시도를 보여 준다. 이 프로그램에 참석한 사람들은 강변이나 야생지에 둘러앉아서 자연을 구성하는 수많은 존재들을 느끼고 그들과 감정을 나누면서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닫고자 노력한다. 이들은 인간의 관점이 아닌 자연의 입장에서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여우의 입장에서 여우를 위해 대화에 참여하며, 또 어떤 사람은 새의 입장에서, 어떤 사람은 밀과 같은 작물의 입장에서, 또 어떤 사람은 잡초의 입장에서, 또 어떤 사람은 산이나 강의 입장에서 대화에 참여한다.
이 프로그램 속에서 자연은 인간의 감정과 언어를 통해 의인화되는 반면 인간은 자연적 존재를 대변하게 된다. 이 같은 역지사지의 과정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가는 방법을 찾는다. 참석자들은 이 같은 과정을 통해서 자연이 살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수긍하게 되고, 그들도 주체적 권리를 가진 존재라는 점을 자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임에서는 모든 자연적 존재들은 대상화된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다시 옹립된다. 그래서 조애나 메이시는 인간이 숲이나 산을 개발하고자 할 때는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동물, 식물, 무정물 등으로 구성된 ‘모든 존재들의 회의’로부터 재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자연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생태사상적 관점에서 본다면 무생물들을 살아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의인화하고 있는 선사들의 선화(禪話)는 풍부한 생태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도해화상(道楷和尙;1043-1118)은 어느 날 대중에게 이르기를 “청산은 항상 움직이며 돌계집(石女)은 야밤에 아이를 낳는다.”고 말했다. 돌계집이 아기를 낳는다는 내용은 곧 ‘푸른 산이 항상 움직인다’라는 개념과 같이 우리가 죽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연적 존재에 대해 생명과 활동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원은 이 같은 선의 인식이 은유적 수사법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사실적 기술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이미 고찰했다.
도원이 보기에 도해화상이 말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언표인 ‘돌계집이 야밤에 아이를 낳는다’는 진술은 언어의 틀을 초극하고 있는 선문답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도원은 도해 화상의 언어적 기표 속에 담긴 표면적 의미를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의미의 전달이라는 언어의 본래적 기능성을 회복시킨다. 바로 그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선의 텍스트 속에는 생태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수많은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해화상뿐 아니라 [임간록(林間錄)]의 달관(達觀) 선사도 “석녀는 차가운 서리 속에서 베를 짜고 진흙 소는 불 속에서 밭갈이 하네.”라고 노래한다. 평상적으로 이 같은 내용들을 담고 있는 선화(禪話)에 대한 평가는 언어는 아무런 의미도 담아내지 못하는 죽은 것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언어에 집착하지 말고 언어적 기표 이면에 숨어있는 본분의 소식에 귀 기울일 것을 강조한다. 언어는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標月之指]’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전달이라는 언어의 본래적 기능은 박탈되고 만다.
하지만 도원처럼 선전(禪典)에 진술된 언어의 표면적 의미를 그대로 수용하면 선의 언어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초월적 의미만을 지시하는 껍데기가 아니라 본래적 기의(記意)를 충실하게 전달하는 사실적 언어로 새롭게 정의된다. 다시 말해 죽은 청산에 대해 ‘살아 있다’라고 진술하는 선의 언어를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청산에는 생명이 부여되고 그것을 진술하는 언어에도 진실성이 부여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운문은 죽은 자연을 살려내고 무정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생명의 언어를 기술하고 있는 샘이다. 그의 언어는 언어적 규칙을 따르되 언어가 지시하는 내용에 대한 이성적 진실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래서 합리적 인식으로 진술할 수 없는 내용을 언어 속에 담아내는 자유로움을 보여 준다. 그 결과 그의 언어를 통해 표현된 법당 앞의 돌기둥은 살아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어느 날 운문 선사는 한 스님이 법당 모서리에 서 있는 것을 보더니 손뼉을 한 번 친 다음 “법당 앞 돌기둥이 부엌으로 달려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 동안 이 같은 선사들의 선화에 대해서는 논리를 초월한 것이라거나 또는 언어적 규칙을 초월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다녔다. 그래서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는 해석되지 않고 애써 간과되었다. 따라서 선사들의 언어 속에 그려져 있던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한 이미지도 자연스럽게 삭제되고 말았다.
이 같은 현상에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이성적 사유라고 볼 수 있다. 합리적 판단으로 볼 때 푸른 산이 움직이거나 석녀가 아기를 낳을 수 없음으로 그것을 진술하는 언어적 기표는 불합리한 것으로 낙인찍혔으며, 따라서 기표가 담고 있는 물활론적 내용도 폐기되었다. 그리고 항상 그 언어 이면에 살아 있을 어떤 본지, 즉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통해서 전해진다는 추상적 메시지가 언어적 진술 위에 군림해 왔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선의 언어는 늘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이유를 들이대며 송두리째 부정되어 왔던 것이다.
동물이나 초목(草木)에도 불성(佛性)이 있다는 내용도, 무정(無情)들이 설법한다는 내용도 모두 이성적 합리성이 수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내용들은 사실적 기술로 수용되지 못했다. 그리고 선사들이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언어를 초월한 다른 심오한 저의가 숨어 있을 것이라는 식의 해석을 늘어놓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도원은 선화(禪話)에 나타난 언어적 진술을 표면적 의미 그대로 수용했다. 도원은 “산이 걷기도 하고 흘러가기도 하며 산이 산의 아이를 낳을 때도 있다.”라며 선전에 나타난 언어적 지시 내용을 사실적 진술로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잣대를 통해 죽은 존재로 인식되었던 자연을 생동감 있는 이미지로 다시 살려내고 있다. 표면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선의 언어에 대해 도원은 기표(signifier)가 나타내는 소박한 의미를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한 이미지를 오롯이 살려내는 묘약으로 삼고 있다. 이 같은 입장은 오늘날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도 의미 있는 대목이다. 산과 강물과 대지는 살아 있으며, 생명 없는 무정들도 설법한다는 내용은 무한한 생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녀가 아이를 낳고’, ‘푸른 산이 항상 걸어 다니고’, ‘앞산이 물 위로 간다’라는 진술에는 언어적 질서를 초월하는 선의 본분사(本分事)뿐 아니라 죽은 자연을 살려내고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생태적 상상력도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조산록]은 “불꽃 속에 찬 얼음 맺히고 버들 꽃은 9월에 날리네. 진흙 소는 물 위에서 포효하고 목마는 바람 따라 울부짖네.”라고 노래한다. ‘포효하는 진흙 소’와 ‘울부짖는 목마’라는 표현은 모두 무정물을 살아 있는 존재로 그려내는 대목들이다. 무정의 사물에 대해 생명을 부여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바위와 흙도 살아 있다는 인식을 가로막는 이성적 합리성의 장벽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선사들의 기발한 언어를 다시 발견할 때 우리는 선의 텍스트를 통해서 자연의 생명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발랄하게 살아 있는 무정의 활동성을 느끼게 된다.
선사들은 무정의 존재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의인적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무정의 존재들과 자연은 또 다른 ‘나’임을 일깨우고 있다. 이처럼 유정과 무정은 불이(不二)의 존재들이지만 인간중심의 인위적 인식은 그 둘을 차별적 대상으로 개념화했다. 그러나 선의 인식 속에서 이 둘은 다시 동일법성(同一法性)을 회복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5. 맺음말
앞서 고찰한바와 같이 기계론적 가치관과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는 자연을 죽은 존재로 정의 내렸다. 하지만 생태적 위기에 봉착하면서 적어도 생태철학적 사유 속에서는 자연과 대지가 다시 소생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대지와 자연을 살아 있는 존재로 바라보고 법신(法身)의 생명을 부여했던 선의 자연관과 선사들의 상상력은 생태철학의 부상과 함께 새롭게 주목받아야할 사상적 전통이 아닐 수 없다.
선의 자연관은 산하대지(山河大地)로 대표되는 자연 그대로를 법신(法身)의 드러남으로 인식한다. 선사들은‘온 누리가 모두 법신’이라고 사유함으로써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들을 도구적 대상이 아니라 부처님과 같은 지고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선사들은 인간중심의 위계질서를 설정하거나 자연 위에 군림하려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했다. 산하대지가 모두 법신이라면 모든 존재에게는 법성(法性)이라는 진리의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나 선사상에서 그려지는 자연과 대지는 모든 존재들의 삶을 지탱하는 생명의 과정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선종(禪宗)의 관점에서 자연은 인간과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의정불이(依正不二)’의 사유는 대지와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이 인간과 동일한 법성(法性)을 지닌 존재라는 인식으로 연결된다. 자연에 대한 선의 이 같은 사유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부당하다는 생태적 인식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사상적 자원이 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선의 사유는 이성적 합리성에 의해 객관적 진실로 수용되지 못했다. 자연이 살아 있음을 기술하는 선의 언어에 대한 그동안의 태도는 언어는 껍데기일 뿐이며 기표의 이면에 선의 본지가 따로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 사유가 선의 언어적 진술에 담긴 생태적 상상력을 억압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도원선사는 이 같은 언어적 진술을 자연에 대한 사실적 기술로 수용함으로써 자연은 다시 생명을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선의 언어에 담긴 생태적 상상력은 과학기술과 자본의 이익이라는 물질적 가치관에 매몰된 우리들에게 생동감 있는 생태적 상상력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문화사학자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는 종교야말로 교육, 기업, 정부와 함께 세계 변화의 중요한 사회적 원동력 중의 하나라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자연환경에 대한 최근의 저작들 역시 개인의 형태 변화를 초래하는 핵심적인 원천 가운데 하나로 종교를 꼽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생태위기라는 상황에서도 종교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환경문제와 종교가 건설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생태적 사유를 뒷받침할 수 있는 종교적 교리를 개발하고, 생태적 삶을 지지하는 종교적 실천윤리를 확립하는 것이다. 종교인의 도덕적 권위, 교단이 가진 물적 자산, 지역사회를 조직하는 능력 등은 이 같은 교리적 당위로부터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자연생태계와 이를 보전하려는 운동의 지원군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의 교리를 생태철학에 맞게 재해석하여 녹색의 교리와 윤리를 확립해 내는 것이다. 선사상에 나타난 자연관과 선사들의 생태적 상상력을 다시 검토하는 작업의 의미도 여기에 근거한다. 따라서 불교와 선사상에 내포된 생태적 상상력과 전통을 다시 살려내고자 하는 것은 인류가 처한 환경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서재영(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