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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한 신앙에서 탈출합시다.
본문/롬5:17절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본문의 말씀은 실로 엄청난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예수 믿고 천당이라는 곳에 가보자, 하는 것쯤으로 기독교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영접한 우리 각 사람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다스리는 능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간단하지 않는 인간의 삶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이 인생에서 승리할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다스려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영이 특별한 사람되자.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현 상태를 깨고 나와야 합니다. 마치 고치에서 애벌레가 나와 나방이 되듯이 말입니다. 삶을 더 이상 매일 일하고 월급받고 읂퇘하고 적당하게 교회 출석하다가 내 몸이 식어지면 육신이 죽어 영혼은 안식처로 들어가는게 우리의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깊고 넓은 차원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며, 위에만 잇고 아래에 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하사는 사람들디 외어야 합니다.(신28:13절/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우리는 삶 속에서 불리한 상황을 딛고 일어서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맺지 않은 사람들보다 뛰어나야 합니다. 무지한 세상 한가운데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의 모든 면에서 추종자가 아닌 지도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들이 교사라면, 은혜의 선물을 통해 항상 다른 교육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롭고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교육방법을 고안해 내야 합니다. 기준을 높게 잡고 다른 사람이 경탄할 만큼 우리의 학생들을 감회시켜야 합니다. 동료 교사들은 자기들끼리 “저 선생님은 저런 훌륭한 생각을 도대체 어디어 얻은거지?”라고 궁금해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의학 분야에 있다면, 은혜의 선물로 질병을 치료하는 새롭고 더 효율적인 방법들을 생객해 낼것입니다. 동료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저런 혁신적인 생각을 도대체 어디서 얻는 것까?”라고 감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디자이너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넘피게 받은 우리로서는 참신하고 독창적인 디자인을 고안해 낼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트렌드는 정하면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찾으며 유행을 창조하는 사람으로 알려질 것입니다.
또한 정치 분야에 일한다면 은혜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우리들로서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겼던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지햬를 나타낼 것입니다.
이땅에 사법부에 있다면 우리에게 임한 은혜의 선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모두 힘들어했던 상황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수님이 나귀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아셨던 것처럼, 우리는 범죄자들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사건 해결에 필요한 증거들을 다른 형사들보다 더 빨리 찾아내어야 합니다. 사건 해결에 필요한 증거들을 더 빨리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업가라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우리로서 시대에 앞서가는 독창적인 상품들과 영업 기법들을 개발해 내어야 합니다. 무엇이 수익이 되고 안되는지 감지해 낼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 사야 하고 언제 팔아야 하는지 잘 알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고상하고 비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의 모델들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각기 다른 분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어느 삶의 영역에서든 탁월한 지도력과 책임감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헤로 능력을 부여받은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두각을 나태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을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단6:3)
이것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뛰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뛰어나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유진피터슨의 성경을 보시면 다니엘이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지도자였다고 표현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출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창조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모든 사람이 그러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시면 다니엘의 마음이 몸이 특별했던 게 아니라. 그의 영이 특별했다. 영이 특별하면 마음과 몸, 창의성, 독창성, 지혜 지식 등 삶의 모든 면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은 바로 우리의 영입니다. 우리에게 은헤가 주어졌다는 것을 진정으로 안다면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막9:23)기 때문에 우리에게 한계가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에 다니엘은 자기가 환경을 다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그들의 작은 나라에서 쫓겨나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보내졌습니다. 바벨론의 힘과 영광에 비하면 미국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벨론은 그 당시 알려진 모든 세상을 지배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과학 지식적으로 최고였습니다.
하지만 “왕이 그들에게 여러 가지 지혜와 지식에 관한 모든 문제를 물어보고 그들(다니엘과 세친구)의 지혜와 판단력이 전국에 있는 어떤 마술사나 주술가보다 열배는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1:20/ 20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다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다른 번역본을 보시면 이 네 사람이 열배 더 탁월하고, 열배 더 지혜롭고, 열배 더 이해력이 뛰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들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의 말씀을 읽거 보십시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눅7:28) 이것은 세례요한이 다니엘보다 더 위대 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한 일로 두 사람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왜냐하면 요한은 목회영역에서 사역했으며, 다니엘은 시민정부 영역에서 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요한을 ”더 큰자“라고 소개하셨고, 계속해서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눅7:28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다니엘이나 요한보다 더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니엘이나 요한이 활동하던 때는 예수님이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지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에게는 거듭난 영이 없었습니다. 요한은 아직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요한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세례요한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도 요한보다 큽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로 이 세상에 약 20억명의 그리스도인들 살다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능성이 희박하긴 하지만 만일 우리가 수억명중에 ”가장 작은자“라고 하더라도 세례요한보다 큰 자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다니엘보다 큰 자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정말로 뛰어난 인물인가?
우리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보다 열배 더 영리하고, 착하고, 지혜롭고, 직관적이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가? 함께 일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열배 더 인내심이 강하고, 사랑이 많고, 절제하며, 친절하고, 대접을 잘하고, 긍휼함이 많고 관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열배 더 능숙하지 못합니까? 정말로 우리 중에는 우리의 타고난 능력을 초월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고 다니엘처럼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진짜 몇 명 안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우리는 세상의 빛“(마5:14)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불행하게도 세상의 빛이되는 것을 상냥하게 행동하고, 어딜 가든지 성경책을 갖고 다니고. 요한복음3:16절을 자주 인용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일 다니엘의 목표가 바벨론 시청에 취직을 하고, 사람들을 잘 대해부며, 동료들에게 ”바벨론의 지도자 여러분, 시23편에 보시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니엘이 점심시간에 기도를 하기 위해 사무실을 빠져나갈 때마다 통독과 관원들이 서로 뭐라고 했을까요? 아마 이런 식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저 광신도가 사무일에 없으니 좋군, 오후 내내 기도하면 좋겠어, 정망 이상한 사람이야”
왜 그들은 다니엘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했을까요?(단6:6-8/6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7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나이다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8 그런즉 왕이여 원하건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다니엘이 그들보다 열배 더 똑똑하고 지혜로우며, 더 혁신적이고, 창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불평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로 이해가 안갑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교사들과 과학자들과 지도자들에게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보잘것없는 식민지 나라 출신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우리보다 더 탁월할 수가 있습니까? 이게 다 기도 때문인게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씩 자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가? 더 이상 그가 우리보다 빛나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합시다.”
다니엘이 어두운 문화 속에서 빛을 발했던 것은 그가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은 다니엘을 시샘하였습니다. 하지만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다니엘의 능력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보았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탁월함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었으며, 지도자들도 다니엘의 하나님을 공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빛과 관련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절)
주님은 명확하게 우리 행실이 비신자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그것을 단지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축소시킵니까?
큰 그릇을 준비합시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쓰여있는 대로 믿지 못합니까? 우리와 하나님의 언약을 이와 같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은혜)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3:20절)
주기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능력이 아니고 특별한 사역의 읂사를 갖고 잇는 사람을 발견함으로써 오는 능력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서입니다. 이 구절의 뒷부분을 특별히 주목합시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능히 모든 것을 하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세게의 특정 지역에 심한 기근이 닥쳤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서 지구 다른 족에 있는 애무 자비로운 나라에서 어려움을 당한 지역에 자기네 군사들을 보내주고, 또 배와 수송기를 통해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줍니다.
그 군대의 장군이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가져가실수 있을 만큼 양식을 드리겠습니다. ”
첫 번째 남자가 소풍 바구니를 들고 나와 이틀 동안 두 사람이 먹을 양식을 담아갔습니다. 그 다음 사람은 커다란 자루를 들고 와서 자기 가족이 5일 동안 먹을 양식을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사람은 커다른 트럭을 몰고 와서 자기 가족과 몇몇 굶주린 이웃들이 한달 동안 먹을 만큼의 양식을 넉넉하게 실어 갔습니다.
소풍바구니를 가져왔던 사람이 1톤이 넘는 양식을 싣고 자기 집앞을 지나가는 트럭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을 “혼란스럽다”라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격분했다.! 이웃 사람들에게 또 자기 이야기를 들어 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았고 급기야 그의 불평은 장군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 장군은 그 사람을 불러놓고 물었습니다.
“이것 보세요, 우리는 분명히 당신이 가져갈수 있을 만큼 양식을 줄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작은 바구니를 가져온 겁니까? 왜 트럭을 몰고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의 그릇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3:20절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안에 있는 나의 은혜(능력)는 네가 어느 그릇을 가져오더라도 넘치도록 채워 줄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그릇이 우리가 그 무한한 공급을 얼마나 누릴 것인가를 성경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신다고 봅니다.
“너는 왜 근근이 먹고 사는 것만 걱정하느냐? 왜 겨우 너와 네 가족만 생각하느냐? 왜 내가 네 안에 둔 잠재력을 모두 발휘하지 않고, 다니엘처럼 네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느냐?”
바울이 “믿는 우리 안에 또 우리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이 헤어릴수 없고 무한하고 지극히 크다는 것을(엡1:19/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우리가 알고 깨닫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바울은 엡1:19절에서 사용한 단어들은 헤라릴 수 없고, 무한하고, 지극히 크다. 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이 단어들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이 그날 기분이 좋으시면 선택된 사역자로부터 주기적으로 받을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안에 잇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수 있도록 권능을 부여하는 ”우리를 위한 능력“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남보다 뛰어나서 다른 사람이 에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의 증거를 볼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치르신 그 비싼 대가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 라고 할수 있습니다. 스스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삶으로는 우리의 잠재력을 충분하게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신실하지 못한 세상의 길에 그토록 자주 굴복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불경기가 오면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두려워하며 불안해 합니까? 때때로 이런 모습을 보면, 빌4:19절 말씀을 우리가 다시 써야 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세상의 경제 형편이 어떠한지에 따라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리라.“ 지금은 더 불경기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낸 진리에 의하면 힘든 시기에 우리는 모등 때보다 더 밝은 빛을 나타내야 합니다. 불황기에도 세상에서 자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디어를 못 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어두운 시기에 하나님의 백성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수백억짜리 아이디어를 낼 것입니다.
경기침체는 정상적인 경제적 수로가 막혀서 새롭고 창의적인 수로와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수로와 아이디어들을 생각해 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창조적인 능력의 근원은 결코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예수 믿고 받은 은혜가 우리 의 죄를 용서해주고 천국에 들어가게만 해 준다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끈질긴 믿음의 싸움을 요구하지 않는 쉽고 간편한 메시지를 전하려 할 때 하나님은 틀림없이 한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디 네 지혜로 한번 망신당해 봐라“
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조건을 단순히 믿지 않을까요? 왜 우리 삶이 하나님의 진리에 질면할 때 나타나는 철저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 삶에 뭊추려고 합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 때, 약점이 있습니다. 육적으로 약점이 잇는가 하면 공부할때도 다른 분야보다 안되는과목이 있을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자신이 형편 없거나, 안된다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그 은혜에 대하여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절) 리거 말합니다. 지혜롭고 강하고, 학벌좋은 사람들은 은혜를 의지하는 대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반대로 학문도 없고, 약점도 많은 사람들은 되래, 자신의 무능함을 의지합니다.
바울은 일찍이 지혜롭고 문벌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육체적으로 보면 나 스스로를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더욱 많이 갖춘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쉬운 성경으로 빌3: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은혜를 의지하기로 했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네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잇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빌3:7쉬운성경)
왜 이런 인간적인 자질을 쓸모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빌3:10)자신의 타고난 능력보다 거저 얻3은 부활의 은혜 안에서 행하기 원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는 인정받기 위해 부지런히 공부햇으며, 모든 지혜와 영적인 깨달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 충만해지도록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우리 모두에게 본이 될 만큼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인간적인 노력이 거룩한 능력을 부여받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학생이라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항당 우리 자신의 지식으로는 생각할수 업고 성취할수 없는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낼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운동선수라면 열심히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해야 합니다.
첫시간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각 사람의 전기를 쓰셨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시편139:16절에서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저와 여루분의 인생 전기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이 쓰신 전기를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조금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전기를 나의 힘으로 완성하록록 만드셨다면 그 영광을 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일부러 저와 여러분의 전기를 쓰실 때 우리의 타고난 능력으로 이룰수 없도록 쓰셔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드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간다.
우리가 말하는 이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우리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할 하나님의 자녀가되고, 구원얻는 밷성이됩니다. 이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엡2:8절 이하에 보시면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롬5:2절에서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갈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열심히 하는 것, 선한 삶을 사는 것, 하루에 두시간이상씩 기도하는 것, 한달에 몇 번씩 금식기도하는 것, 그 어떤 인간적인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이은혜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단순하게 믿기만 하면 됩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물이 마른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깨끗한 물이 없으면 우리와 가족들은 건강한 삶을 추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에 좋은 물이 나오는 급수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급수탑으로 가는 관정이 우리 집앞을 지나간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나라에서 수도관이 있듯이 시청에 허가를 받아서 관을 사 가지고 와서 앞마당을 지나가는 배관에 구멍을 뚫어서 연결할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한 물을 얼마든지 먹을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믿음이 은혜의 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롬5:2절 말씀을 다음과 같이 잀을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관을 통새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의 물을 얻을수 있게 되었다“간단합니다. 능력을 주는 은혜를 누릴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을 통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히4:2절에서,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그가 말하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 즉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후사들이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하늘나라의 모든 능력과 양식이 바로 그들의 집 또는 천막을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거저 공급해주시는 것으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관“을 연결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을 주는 은혜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른다면 어떻게 우리가 믿을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것을 이런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로마서10:14절에서,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우리는 모르는 것을 믿을수 없습니다. 이 은혜에 들어갈 관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틀림없이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니엘과 세례요한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할수 있도록 즉 주님의 풍성한 생명의산본보기가 되게 하시려고 엄청난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메시지를 지나치게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죄 사함과 화재보험정도로 받아들였다. 정말 중요하고도 놀라운 선물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지금의 삶에 적용하고 놀라운 선물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지금의 삶에 적용하고 주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끈질기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을 주는 은혜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다면 어떻게 우리가 믿을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롬10:14절에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우리는 모르는 것으 ㄹ믿을수 없습니다 .이 은혜에 들어갈 관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네일과 세례요한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할수 잇도록 즉 주님의 풍성한 생명의산 본보기가 되게 하시려고 엄청난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메세지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죄 사람과 화재보험 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정마롤 중요하고 놀라운 선물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지금 삶에 적용하고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고 끈질기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결국 이렇게 소리 치릅니다.
요6:28절에서,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들도 하나님의 을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자신의 본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몸시 흥분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당신이 하시는 일을 합니까?“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했습니다.”믿으라“(요6:29절)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으면 그 은혜에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그 말씁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절)라는 말로 에베소 교인들에게 요기를 복돋워 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자들과 작별을 고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이 세상에서 그들의 마지막 대화가 되리라는 것으 ㄹ알았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말을 담긴다면 단어 하나하나르 ㄹ매우 신경 써서 고를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은 하나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부탁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다음과 같이 좋은 말을 하는 것을 을을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은 신뢰해야 합니다.”라든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세요”라고 말입니다. 이런 충고는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료신자들을 하나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에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는 세워 주며 우리에게 “기업”을 줍니다. 여러분의 기업은 무엇입니까? 그 기업이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여러번 분에게 대해 써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에 대한 가르침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충분히 기도하고 금식기도 하거나, 봉사를 열심히 하거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불완전한 시각이 문제는 “충분히”가 얼마만큼인지 모른다는 것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맏습니다. 갈3:5절에서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부단한 도덕적 열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힘과 노렷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의 교훈은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들어가는 것에 있어서 결정 적인 요소는 오로지 여러분을 믿고, 의지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 구원받을 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어떻게 말합니까? 갈3:2절에서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우리가 처음에 단지 믿고 응답함으로써,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제는 계속해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놀라운 일들을 내 내야 합니다.
이제 본문의 제목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끈질기게 믿고 추구할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치와와인가 ? 아니면 회색 곰입니까?
앞에서 삵펴본 설견 본문들을 깊이 묵상해 본 후 우리는 본문의 말씀과 오늘 주어진 말씀을 마음에 잘 간직한채 게속해서 끈질긴 삶이 떤 것인기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오늘 들은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한번 본문의 말씀 그대로 우리가 은혜 안에서 왕노릇한다는 것에 더 집중해서 기도합시다.
은혜를 받은 자들은 이 능력을 받은 자들입니다. 지혜로 이 말씀을 깨닫고, 세상에서 셋방의 빛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그런 능력을 사용할 힘을 주시도록 믿음으로 다함께 부르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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