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한 컵에 위스키 한잔을 톡 떨어트려 만드는 폭탄주. 두 가지 술이 섞이며 오르는 거품이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같대서 지어진 이름만큼이나 거친 술. 패가망신은 물론 종종 목숨까지 앗아가지만 뿌리치기
힘든 마력을 지닌 '치명적인 유혹'. 언론 인사평란에 "폭탄주 0잔, 두주불사" 따위 고정 문구를 쓰게 만든
한국인의 '애음(愛飮)식품'. | |
폭탄주 문화 한국 상륙
폭탄주 '제조법'은 1980년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폭탄주가 "일찌감치 한국인
고유의 술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등장은 30년이 채 안됐다는 얘기다.
사실 폭탄주가 만들어진 과정은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60-70년대의 요정정치가 그랬던 것과 같다.
정상적이지 않은 힘의 움직임과 그 안에서 내연한 파워게임의 산물이었다.
유신과 긴급조치로 짓누르던 ‘박정희 18년 정치’가 끝날 무렵, 술자리'방석' 문화는 '의자' 문화로 돌아서고
있었다.
졸부들이 행세하고 밤의 유락지가 요정에서 룸살롱으로 변했으며 맥주 소비량은 소주를 앞질렀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양주를 즐기고 있었다.
83년경 강원도 춘천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지역 기관장 모임에 참석하는 멤버들- 안기부와 검찰
경찰의 고위직, 그리고 군 장성들은 만날 때마다 위스키를 즐겼다.
폭탄주 천국 위스키 왕국 1996. 7. 9 [경향신문] 1면
남성들, 특히 권력을 쥔 사람들 모임에선 술을 마시는 것도 종종 승부로 번진다.
상대에게 힘과 능력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맡은 일은 다르지만 지역에선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며
다른 기관의 장은 한 수 아래로 보는 유지들 모임이라면 더욱 그렇다. 뭐든 지지 않으려 하고 호방한
남자다움을 자랑하려고 한다. 그래서 마시는 술의 양도 경쟁의 대상이 된다.
권력층에 한정되었던 폭탄주
폭탄주의 유래는 당시 기관장 모임에 나온 군인들이 민간인 기관장 기를 꺾으려고 제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남전 때 군인들이 철모에 맥주를 가득 붓고 '조니 워커' 위스키를 병째 담아 마신 걸 본뜬 것이란 설이다.
물론 다른 주장도 있다. 군인들이 맥주 컵에 물 따르듯 양주를 채워 돌리는 데 질린 민간인 기관장이
"맥주와 양주를 섞어 마시자"고 제안했는데 술술 잘 넘어가 이후 회식 때마다 애용했다는 얘기다.
어느 주장이 옳건 일단 폭탄주의 시초는 권력층이 끊은 셈이다.
애초 구미에선 탄광 노동자들이 비싼 위스키를 조금만 마시고도 빨리 취하려고 싼 맥주에 위스키를 섞은
'보일러 메이커(boiler maker)'를 만들어 마셨다.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고 맥주로 입가심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한국에선 "독한 위스키를 순한 맥주에 말아 마시는" 형태로 변한 것이다.
물론 구미의 것을 본뜬 게 아니라 배움 없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 다르다면 달랐다.
폭탄주에 '폭탄'맞은 검찰 1999. 6. 9 [동아일보] 23면
부드럽게 마실 수 있되 마시면 이내 취기가 도는, 그래서 웬만한 술꾼도 오래 버티기 힘든 '폭탄주의 발명'은
술꾼들을 즐겁게 했다.
춘천 지역 기관장들은 각자의 모임에 나가 제조법을 전파하고 또 마시는 '법도'도 교육했다.
"더도 덜도 없이 똑같이 마시는 민주적인 술" "높은 사람이 참석자들로부터 일일이 잔술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리적인 술" "위스키 독성을 중화시켜 부드럽게 넘기기 좋은 술"이란 예찬론이 높아졌다.
그래도 한동안 폭탄주의 전파는 검경과 정치권 언론계 고위공무원 등 특정세력에 한정돼 있었다.
이중 검찰은 폭탄주를 마치 부서 고유문화라도 되듯, 거기서 조직원의 동질감을 찾기라도 하듯 열광적으로
탐닉했다.
서열이 분명한 '기수문화'인데다 회식이 잦고 스폰서도 대기 쉬운 이들은 폭탄주를 잘 만들고 잘 마시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나중 그것이 조직 전체를 망신시키고 수많은 검사의 옷을 벗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
국방위 회식으로 입방아 오른 '폭탄주'
폭탄주 과음이 말썽을 빚고 처음으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른 것은 86년 봄, 이른바 '국방위 회식 사건'을 통해서다.
3월26일 저녁 국회 국방위원 10여명과 육군참모총장 등 장군 8명이 모인 술자리에서 대판 싸움이 벌어진 것. 전해 2.12총선을 통해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확인되자 군도 국회의원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 여야 국방위 위원들을 초청해 한판 거하게 산다는 것이 멱살잡이와 피 흘리는 혈투로 변질되고만 것이다.
사건 7년 후 동아일보에 군 시리즈를 연재한 김재홍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접대하는 장군들은 모두 제 시간에 왔으나 국회의원들은 시간 맞춘 사람이 적었다.
게다가 늦게 도착한 신민당 김동영 총무가 여당의 이세기 총무도 오지 않은 걸 보고 '허, 거물은 안 나오고
똥별만 먼저 모였네!'라고 농담한 것이 분위기를 싸늘하게 냉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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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위 회식사건
1993. 4. 1 [동아일보] 5면
모욕당했다고 생각한 장군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고자 연신 술을 돌렸다.
불과 1시간이 안 돼 모두가 대취했다. 이런 판에 여당 이총무가 뒤늦게 나타나자 장군들은 화풀이하듯,
"후래자 삼배"(늦게 온 사람은 벌주 세 잔을 마심)를 외며 그에게 술을 강권했다.
마셔라, 못 한다 거친 말이 오갔다.
군인들이 술이 취해 행패를 부린다고 생각한 한 의원이 결국 맥주잔을 벽에 내던졌다.
잔이 깨지며 튄 파편에 장군 한명이 피를 흘렸고 흥분한 그는 발차기로 그 의원을 공격했다.
의원도 입에서 피를 흘렸다.
당시 사건내용은 정확히 보도되지 않았지만 국회의원과 장군들이 폭탄주를 마시고 난투극을 벌였다는
소문은 금세 시중에 퍼졌다.
물론 국회의원들이 막무가내로 맞았다는 얘기였다.
이 때문에 국회는 공전하고 여야 대치상태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시중에선 묘한 일이 벌어졌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듯 국회의원과 군인들을 싸잡아 비난하면서도 폭탄주 돌려 마시기가
대유행한 것이다.
"높은 놈들이 마신다는 술, 우리도 먹어보자"는 심리가 발동한 것이었다.
국방위 회식사건…여야 악수 강요가 반감불러
1993. 4. 15 [동아일보] 5면
전국민이 사랑하게 된 술 '폭탄주'
이후 폭탄주는 전 국민이 애용하는 술이 되었다.
86년 말 신문들은 일제히 그해의 단어로 폭탄주를 꼽았다.
망년회에서 폭탄주를 적게 먹는 법과 부득이 폭탄주를 마실 때 좋은 안주를 소개하는 기사가 봇물을 이루었다. 물론 술자리 일을 기억 못할 정도로 폭탄주를 마시면 어느 정도 뇌손상을 당하는지,
폭탄주 한잔이 간에 미치는 영향 등의 건강기사도 쏟아졌다.
폭탄주가 정치적으로 다시 문제가 된 것은 89년이었다.
9월 국회법사위의 법무부 국정감사장에서 몇몇 의원들이 폭탄주를 마시고와 실실 웃고 욕을 하거나
정부의 답변을 중단시키는 등 주정을 부렸다.
일각에선 국감 무용론을 폈고 정당에는 폭탄주 의원을 제명하라는 항의전화도 걸려왔다.
그래도 정치인들은 폭탄주를 즐겼다.
심지어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민주당 김영삼 총재조차 국회대표연설을 마친 후 당직자들과 폭탄주를 마시는
장면이 보도되기도 했다.
92년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술 소비량은 맥주 58병, 소주 46.7병, 막걸리 13.1 리터, 위스키 반병이었다.
세계 10위.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섞어 마시고 '노털카'(잔을 놓지도 마신 뒤 털지도, 카 하지도 말 것)
'찡떼오'(찡그리거나 떼거나 오래 갖고 있지 말 것) 식으로 마셔 사회적으로도 후유증이 적잖았다.
처음 폭탄주를 '발명'했던 군이나 검찰이 폭탄주 안 마시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한번 길들인 음주문화는
좀체 잡히지 않았다. |
'하나마나' 국감
1998. 8. 3 [경향신문] 5면
수많은 사건사고의 시초가 되기도..
그러던 95년 8월. 서석재 총무처장관은 여당 출입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신 자리에서 "전직대통령 것으로 보이는 비자금 4천억 원에 대한 설이 시중에 떠돈다."며 고급정보를 흘렸다.
뒷날 박계동 의원의 국회대정부 질문을 통해 사실로 밝혀진 이 이야기는 그러나 당시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측 거센 항의를 받고 서 장관이 사퇴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폭탄주와 관련해 장관이 사퇴하는 첫 번째 사례가 된 것이다.
1999년6월. 이번엔 대검 진형구 공안부장이 점심때 폭탄주를 마시고 기자들을 만나 "한국조폐공사의 파업은 공기업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해 검찰이 유도한 것"이란 '자뻑성' 발언을 했다.
검찰이 노조를 꾀어 파업을 유도했다는 엄청난 말에 정국은 들썩였고 진 부장은 끝내 구속됐다.
뿐만 아니라 당시 법무장관도 인책 사퇴하는 대형사고로 진전됐다.
이 사건은 후일 "양주는 독하므로 맥주에 씻어 먹는다."는 웃지 못 할 항변을 만들어냈고
지금도 애주가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폭탄주 취해 '폭탄발언'
1999. 6. 9 [경향신문] 5면
정치인이나 검찰 등 권력 쥔 사람들의 폭탄주 사고는 그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검찰 법원 인사들이 관련된 법조비리는 터졌다 하면 술자리 폭탄주 비사를 쏟아냈다.
고위층이 관련된 여기자나 여종업원 성추행 사건 등도 대부분 폭탄주가 몇 순배 돈 후에 일어났다.
최근의 검찰 스폰서 비리도 룸살롱 폭탄주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학에서 신입생 환영회 도중 폭탄주를 마시고 숨진 학생이 나오고 음주운전 사고의 상당수도 폭탄주
때문이라는 조사결과도 있다.
올해 연말엔 또 어떤 대형사고가 터질런지, 숱한 사고와 패가망신을 보고도 사람들은 여전히 폭탄주를 만든다. 그 시절 그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이야기로 이어져 슬픈 것이 폭탄주 문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