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3. 주일예배설교(요한복음 강해 73)
요한복음 20장 30~31절
난데없이 요한복음의 목적을 말씀하심
■ ‘난데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분위기에 맞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갑작스런 고함이나 행동에 어리둥절할 때 쓰는 말입니다. ‘난데없이?’ 오늘 본문의 등장이 그렇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 본문이 왜 등장하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은, 오늘 본문의 등장이 마치 신나게 달리던 자동차가 이유 없이 급브레이크를 밟는 듯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유 없이 행동하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난데없이 급브레이크를 밟으시는 데는 명백한 이유가 있으십니다. 무엇일까요?
■ 오늘 본문에 이르기 전까지, 예수님을 향한 고발, 심판, 처형,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필두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이 몰아치듯 숨가쁘게 서술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인 21장의 클라이맥스로 넘어가려는 찰나에 오늘 본문이 급브레이크 작동하듯 등장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30절과 3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목적 환기’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놓치지 말라고 주의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이 정도만 기록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오히려 다 기록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여기까지만 기록하거라!’ 하신 것입니다. 이유인즉,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사건 그 자체에 몰두함으로 기록 목적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표적을 행하시는 데는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와 목적을 놓치고 표적 그 자체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를 어렵지 않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소위 신유의 역사, 이적의 역사가 나타나는 현장에서 이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지를 잊어버리고, 그 역사 자체에만 몰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사람의 역사로 착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우상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챕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표적 그 자체를 소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표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하여,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표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서술 목적은 ‘구원’이고,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요한복음은 매 사건의 메시지가 ‘구원’과 ‘생명’에 맞춰져 있습니다. 아예 1장부터 이 메시지가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8장의 길거리의 여인과의 대화에서, 10장의 양과 목자의 비유에서, 11장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에서, 14장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말씀에서, 15장의 포도나무와 농부 비유 등등에서 ‘구원’과 ‘생명’의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는 요한복음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성경 66권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그렇기에 성경 읽기와 이해, 그리고 적용의 초점이자 중심은 ‘구원’과 ‘생명’이어야 합니다. 당연히 기독교의 모든 관심도 ‘구원’이고 ‘생명’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생명’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습니다. ‘구원’과 ‘생명’을 말해야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입니다.
그런데 놀랍고도 감사한 것은 바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엄청난 사실을 기대하도록 합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에는 반드시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을 때,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어둠이 광명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불안이 평안으로, 불평이 감사로 바뀌는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힘이고, 복음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것은 그 어떤 신앙 행위보다 중요한 행위입니다. 복음에 기대는 것 또한 그 어떤 신앙 태도보다 중요한 태도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복음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참으로 읽고 또 읽고, 붙잡고 붙잡혀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힘이 생기고, 그래야 믿음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 이렇게 우리의 삶의 중심과 관점은 <구원>과 <생명>에 있어야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것의 실천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첫째, 우리의 삶의 중심과 관점은 <구원>에 있어야 하는바, ‘영혼’ 구원과 ‘사회’ 구원입니다. 먼저는 모든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구원 얻는 일에 수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책임지어 주신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역사하여 사회 곳곳이 구원 얻는 일에 수고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삶의 중심과 관점은 <생명>에 있어야 합니다. 이는 살리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강조하건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언어, 살리는 행동, 살리는 표정, 살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는 사람에게만 국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게 가져야 하는 태도이고 행동이어야 합니다. 동물과 식물은 물론이고, 땅, 하늘, 바다, 강 등에 대해서도 동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구원과 생명 사역에 적극적이어야 하는 본래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청지기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세상의 관리자로, 보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강조하건대, 지배자로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권력자로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섬기는 자인 청지기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체인 사람과 동식물과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고, 성경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혹시 요한복음을 읽고, 성경을 읽을 때, 삶에 갈등이 올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좋지만 현실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과 사는 것을 이원화시키려고 하실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진심입니다.
그렇더라도 성경 말씀에 삶을 맡겨 보십시오. 삶이 확 뒤집히겠지만, 삶이 살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태풍 효과 같은 것입니다. 바다가 뒤집힐 정도로 태풍이 불면 피해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바다가 청소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청소로 인해 오히려 생명력이 풍성해집니다.
이처럼 말씀이 삶에 역사할 때, 이런 영혼 청소의 역사와 풍성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참으로 거룩한 하늘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바라기는 이 거룩한 경험을 우리 모두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시절이 하 수상합니다. 제 정신이 아닌 언행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곳곳에서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과 생명의 역사를 방해하는 적그리스도적 행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이를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혼탁한 영이 활개 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어둠의 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과 생명의 역사를 방해하는 적그리스도적 행태에 짓눌려 있는 세상을 구원해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 수상한 이 시절,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바라기는 성경 말씀을 붙잡고 이 사명에 주저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구원과 생명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