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칭 딘 소장의 일화
임병식 rbs1144@daum.net
어떤 기념물이 어느 한 곳에 세워진 건 장소 적으로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그냥 단순하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기 때문에 택한 예도 있다. 그런데 어느 순직비는 이 두 가지를 두루 갖추고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하면 1962년에 철도청이 대전역 광장에다 세워놓은 순직비를 일러 말하는 것이다. 현장성도 있고 잘 드러나고 있어서 최적지가 아닌가 한다.
이 철도기관사 순직비에는 ‘기적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모두 3인인데 맨 앞쪽은 김현 기관사, 중앙은 현재영 보조기관사, 좌측에는 황남호 기관사가 부조되어 있다. 이 조형물은 보기에 매우 역동적이다. 부조상이 각각 전방을 주시하거나 열차 화구에다 석탄을 퍼 넣는 장면, 그리고 동표를 들고 전해주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세 사람은 6‧25 남침 시 적군이 대전에 진입할 때 미 육군 24사단장 딘 소장(51세)을 구출하기 위해 현장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특공대로서 물불 가리지 않고 미카 3-219를 몰고서 뛰어들었다. 물론 그 직전까지 군수물자를 실어 나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때 딘 장군은 대전에서 지연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부로부터 상황이 급박하니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장군은 끝까지 그곳을 사수했다. 물밀 듯이 들어오는 적 탱크에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적극적으로 저지했다. 그렇지만 수적 열세에 놓인 딘 장군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한편, 세 기관사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고군분투하였으나 적이 무차별 쏘아대는 탄환에 그만 두 명이 순직하고 말았다. 나머지 한 명도 총을 맞고 겨우 적진을 빠져나왔다. 그런 만큼 세 기관사의 헌신은 충분히 기릴 만하다.
한데, 그런 임무와는 달리 직접 딘 장군을 확실하게 구출해낸 역사적인 인물이 존재한다. 그 사람은 바로 완도 고금면 농상리 출신 김기운 일등병. 그는 중공군의 대 공습 시 백마고지 전투현장에 투입되었다. 아군과 적군이 서로 한 치의 양보 없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때였다.
김기운 일등병은 최전방에서 초병 근무를 하다 피곤한 나머지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사이 소속 부대는 화력에 밀려 후퇴를 해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있던 그는 한참 후에야 자기가 고립된 사실을 깨닫고는 칠흑같이 어둠을 뚫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런데 자기 앞에 위장 막사가 나타났다. 앞뒤 가리지 않고 들어갔다. 안을 살펴보니 사람은 없고 수류탄이 놓여 있었다. 그는 수류탄 주어서 막사를 폭파하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누가 권총을 빼 들고 그의 머리를 겨냥했다. 어둠 속에서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몰랐지만, 머리카락이 뾰족 섰다. 얼떨결에 그는 총을 쏘려는 것을 한 손으로 총을 뿌리쳤다.
순간 총은 발사되고 저지하던 손가락이 날아갔다. 그 상태에서 김 이등병은 온 힘을 다해 총을 빼앗아 던져버리고는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비탈 아래로 굴러 내렸다.
천우신조일까. 그곳에 아군이 주둔해 있었다. 상대는 붙잡아 놓고 보니 그는 중공군 3성 장군이었다. 그러니까 중공군 장군은 병력을 배치해 두고 막사 안에서 쉬고 있다가 난데없는 수류탄 세례를 받고 뛰쳐나온 이었다.
마침내 3년간 이어온 전쟁이 멈추고 포로협상이 진행되었다. 아군 측에는 사로잡은 중공군 3성 장군이 있고 적군에는 붙잡힌 딘 소장이 있었다. 두 포로는 서로 교환이 되었다. 이후 김기운 일등병은 중공군 장군을 붙잡은 공로로 미 금성훈장을 수여 받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전수한 수상 자리에서 소원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른 것은 다 필요 없고 어서 집에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상이용사의 몸으로 전역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금성훈장을 목에 걸고 목포 여객선부두에 도착했다. 이때 검문을 나온 헌병이 그 훈장을 보고는 욕심내어 탈취해 버렸다.
전역을 딘 소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자기의 은인 김기운 일등병부터 찾았다고 한다. 연락을 받은 김기운 씨는 옷을 단정히 입고서 장군 앞에 섰다. 장군은 반가워하며 포옹부터 했다. 그러면서 미국으로 가서 같이 살자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거절했는데 장군은 금성훈장을 잘 간직하고 있는지를 물었단다.
이때 탈취당한 사실을 이야기하자 군에서는 비상이 걸렸고 수사를 하고 보니 그 헌병은 그것을 금방에다 팔아버린 뒤였다. 문제는 그것만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금성훈장 수여자에게 연금을 지급했는데 확인해 보니 그것도 담당 공무원이 절반을 착복한 것이었다. 씁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김기운은 고향 돌아와 농사꾼으로 살다 62세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는 배운 것이 없어서 변변히 민원도 넣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인동에서는 평생 ‘딘 장군’ 이라는 별칭을 들으며 살았단다.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세월이 흘러 그 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갔다. 그렇지만 그 실화는 영원히 기억되지 않을까 한다. 비록 세워진 기념물은 없지만, 철도청 기관사의 그 기념비처럼 오래도록 빛나지 않을까 한다. (2022
첫댓글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기관사 이야기와 우연찮게 중공군 장군을 사로잡아 결국 딘 장군의 은인이 된 김기운 병사의 일화가 이채롭습니다 최근들어 역사의 그늘을 조명하여 인문학에 천착하시는 선생님의 탐구와 기록정신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김기운씨는 엄청난 전과를 세웠는데도 고향에 기념비가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최근에야 그런 저간의 이야기를 듣고 기념비하나 없이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인으로부터 무궁훈장을 탈취당한 장소, 나중에 고향에서 농사꾼으로 살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기록에 하나라도 보태야겠다는 생각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