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문신, 가장 원초적이며 인간적인 화장술[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22-09-30 03:00
#문신의 색소는 숯검정 : 150년 전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이 “세계에 문신이 없는 민족은 없다”고 선언할 정도로 문신은 전 세계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사람의 피부는 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언제부터 문신이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 그 흔적을 추정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1만 년 전부터 만들어진 아무르강 중류의 사카치알리안 암각화에도 문신을 한 인면상이 많다. 비슷한 문신은 최근까지도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아이누족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으니, 수만 년을 이어온 전통이다. 그리고 구석기시대부터 바늘귀가 없는 바늘들이 종종 발견되고 하는데, 아마 색소를 찍어 피부를 찌르는 문신도구로 썼을 것이다.
문신의 기원은 바로 인간이 입는 상처에서 기원했다. 인간의 살갗은 다양한 상처를 치유하면서 흔적을 남긴다. 상처가 깊게 나면 사람들은 다양한 약초를 문지르거나 살균 성분이 있는 숯검정을 문지른다. 이러한 치료의 과정에서 그 색소가 침잠하여 흔적이 남아 있게 되는 것에서 문신은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연히 시작되었다. 실제로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문신에 쓰는 색소는 숯검정이었다. 문신의 또 다른 특징은 한번 새기면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는 것이니, 사람들은 개인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자기가 속한 부족, 신분을 표현했다. 알프스 빙하에서 발견된 5000년 전의 미라인 ‘외치(¨Otzi)인’도 자신만의 독특한 문신을 남겼는데, 그의 몸 곳곳은 마치 지금의 바코드를 연상시키는 기호들로 덮여 있었다. 신분증이나 제복이 등장하기 전부터 문신은 각자의 인격을 대표한 증표인 셈이었다.
#신분 높아질수록 커지는 문신 : 문신은 왕이나 샤먼과 같은 최고위 계급의 상징이기도 했다. 신라의 금관과 유사한 出자형의 관이나 문신을 한 장식들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다. 서기 5, 6세기 키르기스스탄 샴시에서 출토된 여성 사제가 쓰던 황금 마스크에는 신라 금관에 보이는 나무가 뺨에 표시되었다. 아마 이 여성은 생전에 왕관 대신에 왕관 모양의 문신을 했을 것이다. 2000년전 남부 시베리아의 사람들은 ‘데스마스크’를 만들었는데, 그 얼굴에는 화려한 문신이 새겨져 있다. 지금은 남미나 태평양의 소수민족들 사이에서만 보이는 얼굴 문신은 사실 고대 유라시아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문신은 유목 전사들에게는 계급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러시아 알타이지역에서 2500년 전에 살았던 유목 전사들이 남긴 파지리크 문화의 고분들에서 다양한 전사들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미라가 된 전사의 어깨와 허벅지에 하늘을 나는 사슴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남아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고분이 클수록 문신도 더 많았다. 공을 세우고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문신은 늘어났으니, 일반 전사는 어깨에만 했지만, 최고위 왕족의 경우 상반신은 물론이고 하반신 곳곳에도 빽빽이 문신을 했다. 제대로 된 글자를 남기지 않았던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부족과 계급을 상징하는 특정한 기호로 자신들이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살갗에 표시한 것이다. 이 계급장과 같은 문신 하나하나의 이미지는 그들에겐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과 신화들로 세심하게 선택된 이미지였다. 몽골의 초원 일대에는 ‘사슴돌’이라 불리는 독특한 거석기념물이 있다. 2∼3m 높이의 선돌로 그 겉이 하늘을 나는 듯한 사슴으로 빽빽이 채워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정작 왜 사슴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파지리크 고분의 미라에서 사슴의 문신이 발견되면서 그 기능이 밝혀졌다. 전장에서 죽은 전사의 자랑스러운 계급장 문신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사슴돌은 몽골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최종 단계를 남겨두고 있다. 세계 최초의 문신을 기념한 세계문화유산을 볼 날도 머지않았다.
신령한 의미를 담는 고대인의 문신이니 그 색소도 그냥 쓰지는 않았다. 알타이 파지리크 고분의 고대 유목민의 문신에 남겨진 색소를 분석한 결과 고기를 끓이던 솥에서 떼어낸 숯검정임이 밝혀졌다. 즉, 의식에 사용하는 고기죽을 끓이던 청동 솥의 겉에 붙어 있는 숯검정을 특별히 긁은 것이다. 마치 재에서 부활하는 불새 신화나 불을 신성시하는 조로아스터교처럼 불타고 남은 재는 그들의 힘을 상징했고 또다시 부활을 의미하기도 했다.
#침술처럼 치료 역할했을 가능성 : 문신의 과정은 침술과도 비슷하여 치료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파지리크 미라의 허리 밑부분에는 양쪽으로 마치 침을 놓은 듯 일렬로 점을 찍은 문신이 남아 있다. 공교롭게 말을 타고 다니면 가장 통증이 심한 요추 부분이다. 기마인들에게 요통은 피할 수 없는 고질병이었으니, 반사요법으로 허리 통증도 줄이고 신령한 힘을 몸에 불어넣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문신은 바늘로 수백 번, 수천 번을 찔러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고통을 동반하여 우리 몸을 도화지 삼아 만들어진 문신이야말로 고대의 정신문화가 담긴 USB메모리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문신은 근대 이후에는 어두운 이미지로 점철되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몸의 털을 밀고 표지를 하는 대신에 신분과 계급에 맞는 옷과 화장으로 자신의 몸을 가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문신은 근대화하지 못한 야만의 상징이 되었고, 이질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고학이 증명한 문신은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자신의 지위와 아름다움을 표현한 가장 원초적이며 인간적인 화장술이다. 자신의 몸을 바늘로 찔러 가면서 얻어낸 나만의 시그니처에 대한 갈망은 바로 인간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문신 언어’ : 종이책의 소멸과 무한한 데이터의 소통으로 사람들은 텍스트 대신에 이미지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한 의미의 전달은 인간이 지난 수만 년간 문신을 통하여 소통을 한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디지털과 달리 사람의 문신은 복제가 되지 않고 지우기도 어려우니, 바로 자신만의 NFT를 몸에 만드는 셈이다. 흔히 정겹다는 표현을 ‘살갑다’고 한다. 사람의 피부는 단순히 외부의 자극을 방어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 사이의 정을 느끼고, 사회와 소통하는 매체라는 뜻이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따라 사람 사이의 비대면이 급격히 많아진다. 그렇다고 해도 수십만 년간 자신이 가진 오감으로 느끼고 표현해온 인간의 몸과 마음은 바뀐 것이 없다. 아무리 가상현실의 세계가 발달되어도 몸으로 기억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문신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다. 인간들 사이에 실제 몸을 맞대고 이야기를 할 일이 거의 사라지는 21세기에 문신이 더욱 유행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낸 디지털 시대의 반작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