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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에베소서 1:7-10
제목: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함이라
일시: 2014. 12. 21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을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소원해진 관계를 다시 화목케 하기 위해서 등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오늘은 주님이 오신 이유를 좀 더 다르게 표현하고자 한다. 에베소서 1장 10절 말씀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말씀의 핵심구절이자 말씀의 제목이다. 저의 설교제목 중 가장 긴 제목인 것 같다. 이 말씀을 다 암송하기 바란다.
II. 경계선은 인간이 만들고 그 속에 갈등이 있다.
첫 번째 사람 아담과 하와는 흑인인가 백인인가 황인인가? 창조과학회 김명헌교수님의 말로는 잡종이었다고 한다. 인종의 경계선이 없는 인간이었다. 에덴동산은 어떠한가? 그곳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함께 거닐었다. 하늘나라인지 땅의 나라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곳에서는 독사와 사자와 노루와 토끼가 함께 공존해 있었다. 비록 피조된 이 땅에 속한 곳이었지만 그곳은 마치 천국과 같이 지상낙원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한 이후 경계선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죄로 인한 경계선이 생겼다. 약속은 깨어졌고 믿음은 불신으로 변했다. 그 지상낙원과 같았던 에덴동산에서 사람들은 추방되었고 화염검이 그들로 하여금 다가서지 못하게 했다. 범죄한 이후에 책임을 묻는 하나님 앞에서 아담도 아내를 향해서 선을 분명히 긋고 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한다. 그 전에는 아내를 향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 하지 않았던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과 선을 긋고 하와와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선, 바로 이 경계선을 긋는 역사는 인류의 역사 속에 계속 흐르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라는 교만 아래 이방인을 개 취급하며 선을 그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진 자냐 율법이 없는 자냐? 할례를 받은 자냐 할례를 받지 않은 자냐? 아브라함의 자녀냐 이방인이냐로 구분하였다. 또한 그들 안에서도 바리새인들과 같이 거룩한 자들이냐 아니면 죄인과 세리 창기같은 형편없는 자들이냐로 구분했다.
심지어 초대 초대교회 안에도 선긋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볼로파이다. 나는 바울파이다. 나는 베드로파이다. 나는 그리스도파이다라고 해서 고린도교회는 분열이 극심하였다.
사람을 구분할 때는 그 기준이 있다. 사람을 황인 백인 흑인으로 구분을 하면 피부색갈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다. 한국이냐 독일이냐 미국이냐 러시아냐? 패스포트를 가지고 결정을 한다. 선진국이니 후진국이니 혹은 잘 사네 못사네 하는 구분은 돈과 물질로 구분하는 것이다. 무식하고 유식하고 배우고 못 배우고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학위를 가지고 구분하는 것이다. 잘생기고 못생기고? 미모를 가지고 한다. 어느 도시 어느 지역 출신임을 가지고 선을 그을 때는 지역을 가지고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다. 원래 이러한 선은 없었는데 인간의 죄와 욕망이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는 성스러움과 속됨의 구분이 없었다. 전에는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스러움과 속됨의 구분이 있고 하늘과 땅의 선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러한 선들은 서로 간에 갈등을 일으킨다. 갈등은 경계선에서 일어난다. 국경을 통과할 때는 언제나 긴장되지 않는가? 무슨 꼬뚜리를 잡거나 혹 거부당하면 어떻게 하지 등 너네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갈등이 첨예하게 존재하는 곳이 국경이다. 대한민국의 휴전선은 언제나 우리에게 긴장을 준다. 비행기를 탔을 때 팔걸이가 네 것이냐 내 것이냐? 어릴 때 책상에 금을 긋고 넘어오면 찢는다고 위협하는 개구쟁이들도 있었다.
집안 경제살림을 어떻게 하는가? 한국에 있을 때는 아내가 했다. 그러나 이곳 독일에 와서는 제가 했다. 집안의 일은 아내가, 은행일을 포함한 집밖의 일은 제가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가 재정이 필요할 때마다 찔끔찔끔 내게 타다 쓰니 얼마나 혀굳는 어려운 말을 해야 하고 짜증이 나겠는가? 그렇다고 자기를 위해서 쓰는 것도 아니고 식비와 살림으로 들어가는데... 어느 날 화가 되게 났다. 그래서 돈을 절반을 내게 주라. 은행구좌를 내 것을 만들어라고 했다. 아내가 화가 났을 때 저는 바짝 기면서 만들겠다고 하고 먼저 절반을 떼어서 주었다. 하지만 화가 가라앉은 다음에는 은행구좌 여는 이야기는 없어지고 그저 월초에 늘 절반씩을 꼭 준다. 주로 나는 헌금과 자동차 유지비에 들어간다. 아내는 살림살이이다. 문제는 식당에 갈 때이다. 식비이냐? 대외적인 것이냐? 식사를 집에서 하는 대신 밖에서 하는 것이니 아내가 내야 한다? 밖에서 발생하는 일이니 남편이 내야 한다? 어느 것이 맞는가? 요지는 경계선이 생긴 이후로 갈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을 대 놓고 언쟁을 벌인 적이 없는데 서로의 머릿속으로는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소위 신발끈을 묶는다든지 하면서...
III.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기준과 생각으로 선을 긋고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 자기의 욕망과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그 경계선을 철통같이 사수하고 있다. 결코 양보하지 못하는 이러한 경계선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다. 이러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는 한 갈등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한다. 만일 목회자도 이러한 선을 가지고 있다면 그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교인들을 볼 때 돈 많은 돈 없는 사람,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재능이 많은 사람 없는 사람등으로 사람을 구분해서 본다면 늘 갈등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경계선에는 언제나 긴장이 흐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은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이에는 갈등이 있고 불화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 성경본문은 그 구분선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사람들의 구분선은 갈등과 반목을 가져오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성경적인 구분이요 우리가 가질 유일한 선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라. 끊임없이 나오는 표현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수많은 방법으로 사람을 이리 자르고 저리 나누기도 하지만 성경 안에는 다른 구분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를 따질 뿐이다.
우리는 유월절을 알고 있다. 그 유월절의 하이라이트는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다. 그 집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주의 천사들이 심판하시는 그날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집 밖에 있는 사람들은 심판을 당하였고 구원에서 소외된 자가 되었다. 무엇이 경계선인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인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유월절 어린양이다. 우리의 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 구원을 얻느냐 밖에 있어 구원을 얻지 못하느냐가 유일한 것이다. 주님 안에서는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창기나 병자나 죄인들의 구분이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서냐 밖에서냐 하는 구분을 가장 잘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은 오늘 말씀을 로마 감옥에서 쓰신 사도바울이다. 사도바울은 이미 주 안에 있기에 감옥에 있으나 집안 안방에 있으나 별 차이가 없었다. 그의 고백을 보라. “주 안에서 갇힌 내가”(엡4:1)이라고 한다. 그는 비록 옥에 갇혀 있었으나 하나님께 매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9절에서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최선의 삶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경계선을 허물어가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유대인의 경계선을 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아갔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로서 나아갔다. 종에게는 종의 모습으로 자유자에게는 자유인의 모습으로 나아갔다.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라”(빌립보서 4:12-13)고 한다. 그는 경계선을 깼던 사람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깰 수 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사도바울의 고백 중 위대한 것은 죽음까지도 그에게는 경계선이 되지 못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14:8)
하늘과 땅은 나뉘어진 것이다. 그 사이에는 카오스가 있고 갈등이 있다. 하늘에 속한 것들과 땅에 속한 것들은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선들은 사라져 버렸다. 흑인 백인 황인, 잘 살고 못 살고, 배우고 못배우고, 심지어 죽음과 생명까지도 우리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한 선들이 없어졌기에 주 안에서는 갈등이 없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이 선들을 없애는 작업을 하신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은 하나하나의 죄보다 죄를 죄되게 하는 율법을 처리하신 것이다. 죄와 사망을 가져오는 그 갈등의 선을 없애신 것이다. 그래서 범하려고 해도 범할 선이 없어진 것이다.
70-80년대에는 재미난 법이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었다. 저녁 9시만 되면 방송이 나온다.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라고 하면서... 어른들은 12시가 넘으면 거리를 다닐 수 없었다. 걸리면 유치장에 가야했다. 또한 장발이면 걸렸다. 뒷머리가 뒷깃을 덮으면 안 되었고 옆에는 귀를 덮으면 안 되었다. 아버님도 걸린 적이 있다고 들었다. 여자들은 치마길이를 재었다고 한다. 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미니스커트 가수 윤복희가 67년도에 해외공연을 다녀와서 미니스커트를 소개했을 때 파격적이었다. 그것이 유행되어 1973년부터는 치마길이로 경범죄선고를 내렸다. 무릎위 20cm 올라가면 시정조치 되었다. 이제는 이러한 법이 없다. 새벽에 아무리 돌아다녀도 잡는 사람도 없고, 머리를 아무리 기르고 염색을 아무리 하고 치마를 아무리 짧게 해서 하의 실종이라는 말이 나와도 아무도 잡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갈등이 없어진다. 하늘과 땅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기 때문이다. 율법의 경계선이 없어지고 이제 은혜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망도 힘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사망과 생명 사이를 넘나들면서 그 경계선을 없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선들을 다 그 안에 품고 가신다. 그러기에 그는 평강의 왕이요 은혜를 주는 분이요 화목케 하는 분이시다.
VI. 크리스마스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갈등을 일으키는 경계선을 없애기 위해 오셨다. 그는 하늘과 땅의 경계선도 없애셨다. 하늘에 있는 것은 거룩한 것이다. 땅에 있는 것은 속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이 구분이 없다. 그리스도는 이원화된 것을 일원화시키신다. 우리가 새벽기도를 드릴 때 기도의 제목들을 보라. 기도는 영적인 일인 것 같은데 기도의 내용은 다 육적인 것들 아닌가! 시험을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결혼을 위해서, 출산을 위해서... 하지만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면 그것은 다 거룩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계선을 없애라. 나의 기준과 생각으로 선을 그어서 각을 세우지 말라. 오늘 주일이 내일은 내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드리는 예물이 내일 내가 쓰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평일과 주일의 구분이나 십일조나 시장에서 콩나물 두부를 사는 것이나 거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이다.
이번 주는 크리스마스가 있다. 2014년 크리스마스이다. 그 의미가 바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 즉 갈등이 있던 모든 경계선들을 허무는 통일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삶에서의 모든 갈등과 반목과 나뉘어졌던 우리의 경계선들과 나의 고집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력한 사랑과 은혜 가운데 녹아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