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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대들의 부끄러운 사색당파싸움이 몽고군의 침략이 있어서 항복을 했고
그 뒤에도 정신 못 차리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임진 왜란이라고 있었고 이런 혼란 속에서
왜구는 차근 차근 전쟁준비를 해서 조선은 일사천리로 처들어 왔는데도 정치인들과 위정자들은
부끄럽게도 도성을 버리고 피난이라는 명분을 세워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치인들 어떤가요? 완전 6색당파입니다. 한술 더 뜨는 거죠.
이순신 장군이 다시 태어나시면 몰라도 나라가 어지러울 것 같습니다.
지금 아니 오늘도 북한은 무었을 하고 있나요?
<붕당과 사색당파>
붕당이란 결론적으로 자신의 학문 성격이나 이념적 성격에 따라서 파가 갈리는 거죠.
지금의 정당정치와 비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물론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랑 조선의 정치는 다릅니다만) 개인적으로 조선이 망한 이유가 붕당정치 때문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색당파는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을 싸잡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당파의 계보는 대략 이렇습니다.
서인=>1683년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
영조 때 사도세자의 처형을 둘러싸고 벽파와 시파로 갈려 대립.(서인, 특히 노론이 사실상 조선 후기의 정치 주도권을 완전히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동인=>1591년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
북인은 광해군 폐세자론을 둘러싸고 대북과 소북으로 분파.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대북은 몰살, 소북은 자연 소멸.
남인은 인조반정 당시 서인의 파트너로서 정권에 참여하여 서인과는 신경전을 벌이면서 공존하기도 했고, 숙종 이후로는
서인과 피비린내나게 싸웠습니다. 정쟁에서 패한 서인의 주요인물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청남과 탁남으로 갈리게 되는데
청남이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갑술환국(1693)에 의해서 정치주도권을 영원히 잃게 됩니다.
주된 흐름은.......
동인VS서인: 당시 중요한 관직이었던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싸움, 그리고 선조의 외척이었던 기성세력인 심의겸에 대해서
진보적인 선비들이 정치적 공세를 시작하면서 붕당이 생깁니다.)
남인VS북인(동인이 두갈래로 분당됨)VS서인: 1589년에 벌어진 기축옥사(정여립 반역 의혹 사건) 당시 정여립과 친했던 많은
동인계 인사들을 처벌한 서인의 주요인물인 송강 정철의 행동에 대해서 동인에서는 맞대응해야한다는 쪽과, 정여립이 모반한
것은 사실이니 그냥 자숙하자는 의견이 대립. 정철은 2년 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 고 선조에게 진언했다가
밉보이고 강화도로 유배당하는데 이 당시 정철의 처벌 강도를 둘러싸고 동인이 두 패로 갈려서 대립함으로서 북인/남인으로
선이 그였죠.)
대북VS소북(북인이 분당됨):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이 실각하면서 수많은 의병장을 배출한 북인이 실권을 잡게 됩니다.
선조 말년에는 서자인 광해군의 세자자리를 빼앗고 이를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물려주려던 소북과 이를 저지하려는
대북이 대립했으나 선조가 갑자기 죽으면서 대북이 승리하게 됩니다. 광해군 즉위 이후 소북은 광해군에게 숙청당하죠.
이 당시 정치 주도권은 완전히 대북이 쥐고 있었습니다.)
남인VS서인 <공존기>: 인조반정(1623년)에 의해서 대북은 제대로 말살, 도살당합니다. 소북은 얼마간 근근히 명맥 유지하
다가 자연소멸합니다.(북인 몰락) 남인과 서인은 한동안 평화적으로 공존했으나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이 서인이었으니
만큼 실권은 서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인VS서인 <대립기>: "효종의 계모가 죽은 효종을 위해서 몇년 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시작한 현종 때의
예송논쟁. 얼핏 보기엔 별 것 아닌 문제이지만 이것은 [왕은 특별하다]는 남인과 [왕도 신하랑 다를 게 없어야 한다]는
서인의 이념적 대립이 숨어있는 것이었고, 효종 같은 경우는 형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소현세자를 미워
했던 아버지 인조의 개입으로 인해 정식 상속자인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젖히고 새치기로 왕위에 오른 만큼 정통성에
대해서는 극히 민감했습니다. 그것은 효종의 장남이었던 현종에게도 공통되는 문제였죠.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이
승리합니다만 2차 예송논쟁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여 남인의 발언권이 강화됩니다.
탁남VS청남(남인이 분당됨):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 그 후로도 서인 쪽에 불리한 스캔들이 거듭되어 터지면서
서인을 몰아내고 완전히 정권을 장악. 서인의 처벌문제(특히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을 죽이느냐, 봐 줄거냐)를 둘러싸고
온건파인 청남과 강경파인 탁남으로 갈라집니다. 청남은 허적이, 탁남은 윤휴와 허목이 우두머리였죠. 이 싸움에서는
온건파인 청남이 승리합니다. 덕분에 송시열은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노론VS소론(서인이 분당됨): 1680년에 숙종은 장인인 김석주의 도움을 받아 남인에 대한 기습공격을 가합니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이라고 부르는데, 청남의 허적, 탁남의 윤증이 처형당함으로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은 하루
아침에 작살나버립니다. 서인은 송시열을 비롯한 원로들의 주도하에 숙종의 브레인이었던 김석주와 손을 잡고 정국을
주도합니다. 당시 김석주의(왕권강화를 위했다고는 하나) 역모날조사건과 공작정치,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놈은 모두
<사문난적>이다"는 식으로 남인들에 대한 보복을 정당화하는 송시열의 독단성에 반발하여 서인 온건파였던 윤증을
중심으로 당파가 쪼개져 나갑니다. 이것이 소론으로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기존서인들은 노론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당시 소론의 힘은 약했고 남인은 식물인간 상태였기에 노론은 완벽하게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노론VS남인: 남인계의 후궁이었던 장옥정이 숙종의 아이를 임신하자 크게 기뻐한 숙종은 그 아이(훗날의 경종)를 원자로
책봉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에 노론 쪽에서는 서인계의 인현왕후 민씨가 아직 젊어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서두르지 말라고 집요하게 태클을 걸었고, 숙종은 이를 무시하고 장옥정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옥정을 장희빈
으로 봉했습니다. 이 때 노론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은 숙종의 행동이 그릇되었다는 논지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가
숙종을 미치도록 노하게 만듭니다. "한 나라의 원로라는 놈이 끝난 일을 가지고 불씨를 지핀다"고 노한 숙종은 남인들을
기습적으로 등용, 송시열을 탄핵케 하여 제주도로 귀양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처형하고, 그 후속조치로 노론계 대신들을
몰아냈으며, 노론계 왕비였던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후에 봉했습니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고 합니다.
이 때 남인들의 노론에 대한 보복은 경신환국 못지 않게 잔혹했습니다.(이로서 남인이 다시 정국 장악)
5년 후, 서인계에서 일어난 폐비민씨 복위운동을 남인들이 탄압하는 데에 태클을 건 숙종은 남인들을 조정 요직에서 모두
쫓아내거나 몰아내고 그 자리에 소론의 중심인물들인 박세채, 남구만 등을 등용합니다. 그리고 왕비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다시 복위시킵니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고 하는데요. 이 사건에서 숙종에게 제대로 밟힌
남인은 다시는 예전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합니다.(남인 쇠퇴)
노론VS소론: 노론과 소론은 인현왕후 저주혐의로 심판대에 오른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게 됩니다.
노론은 장희빈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의 입장을 고려해서 장희빈을 살려줘야 된다고
주장했는데, 결국 노론이 승리하여 장희빈은 사약을 받습니다.
숙종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1721년) 장희빈의 아들.경종에 대해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를 후계자로
책봉하도록 압력을 넣고, 자신들이 지지한 연잉군에게 실권을 주어 경종을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에 소론이 노론을 [불충한 무리] 로 탄핵하고 경종이 소론의 편을 들어 노론인사 일부를 축출함으로서 정국 주도권이
소론 쪽으로 기웁니다. 이를 신유옥사라고 합니다. 1722년 소론은 공작정치를 벌여 목호룡의 고변사건을 일으켜 노론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노론의 우두머리 4명을 처형합니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1724년 사망) 연잉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서 정국은 다시 노론이 장악하게 됩니다.
영조의 탕평책: 영조는 붕당정치를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탕평책을 시행하여 노론, 소론, 남인들을
고루 등용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영조의 지지기반이 노론에 있었기에 시작부터 한계가 있었다고 봅니다.
특히 소론 강경파가 일으킨 이인좌의 난(1728)은 소론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난의 된서리를 정면으로 받은 영남 지방
(경상도)선비들은 과거 응시를 금지당했습니다. 그리고 1755년에는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벼슬길이 끊긴 소론
강경파가 일으킨 역적모의사건이었는데, 이 사건도 소론을 난감하게 했죠.
벽파VS시파(사도세자 사건): 영조의 의향을 받들어 사도세자를 처형해야 한다는 벽파(노론 강경파)와 사도세자를
살려줘야 한다는 시파(노론 온건파, 소론, 특히 남인)의 대립입니다. 결국 벽파의 입장이 우세하여 사도세자는 죽음을
당합니다.(사실 사도세자의 처형 당시에 벽파와 시파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이 된 이후에 생긴 단어로서, 정조의 대對 사도세자 정책에 찬동하는 사람을 (시류에 편승하는 부류라는 비앙조에서)
시파라고 불렀고, 정조의 사도세자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을 벽파라고 부른 거죠.
정조의 탕평정책과 개혁정책이 좌절되고, 정조가 의문사한 이후 노론 벽파가 재집권하여 시파를 대청소하면서 조선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노론이 권력을 잡게 됩니다.(세도정치의 시작이며, 붕당정치는 여기서 사실상 종막을 맞이한다고
보셔도 무관합니다. 반대당이 없어지고 노론이 벼슬자리를 독차지하니까요. )
환영합니다.즐거운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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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읍니다
멀리까지 갈것도 없고 해방후 3-4년동안의 상황과 지금이 똑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