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10대 산상왕 = 연우, 이이모 (재위 197년~227년)>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고국천왕의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다.
우 왕후는 산상왕의 아내가 되어 다시 왕후에 올랐다.
이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 풍습이 남아있는 것이며, 우씨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산상왕의 형이었던 발기(發岐)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3일 동안 산상왕이 농성하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에서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자 발기는 요동으로 망명하였다.
뒤이어 발기가 요동 태수 공손도에게 군사를 빌려 쳐들어오니 왕은 동생 계수를 보내 막게 하였다.
계수가 발기의 군대를 물리치자 발기는 자살하였다.
198년에 환도성을 쌓았고 203년에는 국상 을파소가 죽어 고우루를 후임 국상으로 삼았다.
209년에는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208년 겨울 음력 11월에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일어났다.
제사 담당자는 돼지의 뒤를 쫓아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후녀라는 20세 가량의 여인의 도움으로 돼지를 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산상왕은 후녀를 몰래 찾아가 하룻밤을 보냈다.
왕후는 이를 알고 분노하여 그 후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후녀가 산상왕의 아들을 잉태하여 죽이지 못하였으며,
후녀는 아들 교체(=11대 동천왕)를 낳았다. 후녀는 소후로 봉해졌고 213년에는 후녀의 아들 교체가 태자에 책봉되었다.
217년에는 후한 평주의 하요가 1천여 가(家)를 거느리고 투항하였으며, 왕은 책성에 이들을 안치하였다.
227년에 서거하니 산상릉에 장사지냈다.
* 부왕=신대왕 * 모후=?
* 왕후=왕후 우씨
* 후궁=소후(주통촌 출신의 평민 여인) * 아들=고우위거(11대 동천왕)
<형사취수>
형사취수 또는 취수혼은 형이 죽은 뒤에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함께 사는 혼인 제도이다.
형사취수는 유목 민족에게서 자주 나타났으며, 일례로 흉노와 고구려 그리고 부여에서 나타났다.
이 제도는 형이 죽으면 재산이 형수가 물려받게 되고, 형수가 혈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혼인하게 되면
원래 혈족의 것이었던 재산이 혈족의 바깥으로 유출하게 됨을 염려하여 나타난 제도이다.
또한 형수에게 상속권이 없을 경우에는 형수에게 생활능력이 없게 되므로 그 형수를 혈족이 부양해 준다는 의미도 있게 된다.
<계수>
고국천왕 6년인 184년에는 후한의 군대와 맞서 싸웠지만 졌으며, 산상왕 1년인 197년에는 발기(신대왕의 셋째 아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발기를 사로잡았다. 발기가 수치심에 자살하자, 계수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이에 산상왕이 노하여, "어찌 발기의 죽음을 애통해 하느냐?"고 따졌으나, 계수의 형제애에 감복하여,
왕례로서 발기의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후의 삶은 전해지지 않는다.
<고구려 11대 동천왕 = 동양왕, 우위거, 위궁 (재위 227년~248년)>
산상왕과 소후의 사이에서 태어나 아명은 ‘교체’라고 하였다.
교제(郊祭)에 쓸 돼지와 관련된 사건으로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위궁이라는 이름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본 것이 태조왕 궁과 닮았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서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213년에 태자가 되었고, 227년에 왕위에 올랐다.
치세 초기에는 위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는데, 234년에 위와 화친한 이래 236년에는 오왕 손권의 사신 호위를 처형하고
목을 위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238년에는 위나라가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하자 군사 1,000여 명을 보내 위나라를 도왔다.
그러나 공손연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하였다.
242년에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244년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동천왕은 관구검의 군대를 비류수, 양구에서 격파하였고, 남옥저 부근에서 현도태수 왕기를 사살시켜 관구검의 위군을 패퇴시켰다.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는데 246년에 이르러 동천왕은 유유(紐由)의 계책으로 왕기를 죽이고
왕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수도로 귀환한 동천왕은 환도성이 전화를 입어 도읍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여겨 247년 평양성을 쌓고 수도를 옮겼다.
248년에 왕이 죽었으니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 아버지=산상왕 * 어머니=소후
* 왕후=? * 아들=고연불(12대 중천왕) / 고예물 / 고사구
* 후궁=? (동천왕 19년 3월 동해사람이 미녀를 왕에게 바친다. 동천왕은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 들였다.)
<고구려 12대 중천왕 = 중양왕, 연불 (재위 248년~270년)>
243년에 태자가 되었고, 248년에 왕위에 올랐다.
같은 해 음력 11월에 동생 예물과 사구 등이 모반하였다가 처형되었다.
250년 국상의 권한을 확대하여 수도와 지방의 군권까지 겸하게 하였다.
251년에 측실 관나부인이 왕후 연씨를 시기하여 모함을 하자 왕이 분노하여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수장하는 처벌을 하였다.
254년에는 국상 명림어수가 죽어 음우를 국상으로 삼았으며, 255년에 왕자 약로를 태자로 삼았다.
259년 위나라 장군 위지해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자 왕이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양맥에서 싸워서 이들을 무찌르고
8천여 명을 목베었다.
260년에는 시조묘에 제사하였으며 270년에 서거하여 중천의 들에 장사지냈다.
* 부왕=동천왕 * 모후=?
* 왕후=왕후 연씨 * 아들=?, 고약로(13대 서천왕), 고달가, 고일우, 고소발 * 공주: ? 미상 * 사위=명림홀도
* 후궁=관나부인
<사구>
동천왕의 아들이며, 중천왕의 동생이다.
248년 중천왕이 즉위하자 역시 왕제(王弟)인 예물과 더불어 모반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이 사건은 고구려의 왕위계승방법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왕제들의 반발로 간주되고 있다.
<관나부인>
장발의 미인으로, 왕후 연씨가 질투 끝에 자신을 제거하려 하는 것을 알고 중천왕에게 왕후를 모함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왕이 사냥을 나갔다 돌아오자 가죽주머니를 내어 보이고 울면서 왕후가 가죽주머니에 자기를 넣어
바다에 던지려고 하니 집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인 것을 안 중천왕에 의하여 251년 4월 가죽주머니에 넣어져 바다에 던져졌다.
<고구려 13대 서천왕 = 서양왕, 약로, 약우 (재위 270년~292년)>
255년에 태자가 되었고, 270년에 중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271년 정월에 서부 대사자 우수의 딸을 왕후로 삼았으며, 7월에 국상 음우 가 죽자 음우의 아들 상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280년 숙신이 쳐들어오자 동생 달가를 보내 이를 격퇴하게 했다.
달가는 단로성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6백여 가구를 부여 남쪽의 오천으로 이주시켰으며 부락 예닐곱 곳을 복속시켰다.
서천왕은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아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고,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286년에는 동생 일우와 소발이 반란을 획책하여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입조하지 않았다.
이에 서천왕은 이들을 재상으로 삼는다고 속여 입조한 두 사람을 체포, 처형하였다.
서천왕은 276년과 288년, 두 차례에 걸쳐 신성으로 순행하였다. 이는 신성이 서쪽 변경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288년의 순행은 3월에서 11월에 걸친 장기간의 순행이었다.
292년에 왕이 죽자 서천에 장사지냈다. 서천왕릉은 296년에 모용외가 쳐들어왔을 때 도굴당했는데,
이때 도굴하던 자들이 갑자기 죽고 무덤 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와 이를 두려워한 적군이 퇴각하였다고 한다.
* 부왕=중천왕 * 모후=왕후 연씨
* 왕후=왕후 우씨 * 아들=고상부(14.봉상왕), 돌고 * 손자 : 고을불(15.미천왕)
<고구려 14대 봉상왕 = 치갈왕, 상부, 삽시루 (재위 292년~300년)>
292년, 서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봉상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숙부인 안국군 달가를 음모로 살해하였다.
또한 293년에는 동생 돌고에게 역모죄를 씌워 자살하게 하였으며 도망친 돌고의 아들 을불을 추격하게 하였다.
음력 8월에 모용외가 침입하였다. 이에 봉상왕은 신성으로 대피하려 하였으나 적이 추격해 왔다.
이때 신성의 재인 북부 소형 고노자가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모용외의 군을 만나 격파하였다.
봉상왕은 고노자를 대형으로 삼고 곡림을 식읍(=나라에서 공신이나 왕족에게 내리던 토지와 가호)으로 주었다.
296년 음력 8월 모용외가 다시 침입하여 고국원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돌아갔다.
294년에는 국상 상루가 죽어 남부의 대사자 창조리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296년, 모용외가 물러간 후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아 모용외를 방비하게 하였다.
298년 음력 9월에 흉년이 들었으나 궁궐을 증축하는 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봉상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을 살피지 않았다.
300년에도 흉년이 들었으나 다시 궁궐을 증축하니 백성들이 흩어졌다.
이에 국상 창조리가 왕에게 백성을 돌볼 것을 간언하였으나 봉상왕은 오히려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하며 창조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봉상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 자결하였다.
봉상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봉상이라 하였다.
* 부왕=서천왕 * 모후=왕후 우씨
* 왕후=? * 아들=장남, 차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