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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7대불가사의 [사진첨부] - - World Seven Wonders
(마추픽추 사진)
고대 7대 불가사의
(헤로도투스의 7대 불가사의)
그리스의 시인 안티파트로스가 지은 시 안에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나온다. 이 목록에 나온 것들 중 바빌론 성벽(이슈타르의 문)은 6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로 교체되었다.
대피라미드 (→ 이집트 문명)
바빌론의 공중 정원 (→ 바빌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 알렉산드리아 → 파로스등대) 이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 에페소스)
마우솔로스의 영묘 (→ 할리카르나소스)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 올림피아, → 제우스)
로도스의 거상 (→ 로도스)
이집트 피라미드(The Great Pyramids)
(pyramid - from Greek "πυραμίς" – pyramis)
문명 : 이집트 문명 고왕국 제4왕조
건립연대 : 기원전 2550년
건립자 :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
이집트 제 4왕조의 세 피라미드, 가장 북쪽에 있는 것이 두 번째 왕 쿠푸의 것으로 최고 규모이다.
밑변 평균 길이 230.4m에 원래 높이는 147m , 가운데 있는 4번째 왕 것도 밑변 216m 에 높이 143m이며, 남쪽 끝에 가장 마지막으로 세워진 6번째 왕 멘카우레의 것 역시 밑변 109m, 높이 66m에 이른다.
(위키백과사전 설명)
피라미드(pyramid)는 일반적으로 정사각뿔 꼴의 고대 유적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앙아메리카 등 많은 문명권에서 피라미드 형태의 유적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태왕릉이나 장수왕릉등도 정사각뿔 형태이므로 피라미드의 일종이다.
그중에서 고대 이집트의 유적, MAk Did he 특히 기자의 3대 피라미드가 가장 유명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대체로 국왕, 왕비 등 왕족의 무덤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무덤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피라미드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피라미스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80여 기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90킬로미터인 나일 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
수단의 나파타와 메로에에도 피라미드가 있다. 전자는 기원전 8~7세기의 나파타 왕국의 것으로 18 기, 후자는 기원전 3세기 이후의 것으로 약 50 기가 있다.
피라미드에 대해 남아있는 최고의 기록은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의 《역사》2권에 있다. 거기에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피라미드는 높이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화재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피라미드는 갑자기 나타난 건축 양식이 아니라 이전의 마스타바라는 벽돌식 단층 무덤에서 발전하였다. 마스타바는 무덤으로 이곳에 왕을 매장하였다. 마스타바는 아랍어로 직사각형의 벤치라는 의미이다.
그러던 중 파라오 조세르(Djoser) 시대에 이 마스타바를 더 높고 웅장한 형태로 변형하여 다층 마스타바 혹은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이 계단식 피라미드는 임호테프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이후 파라오 스네프루(Sneferu, Snefru)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피라미드의 형태의 건축물을 건설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당대의 피라미드 건축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붕괴하고 만다.
스네프루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피라미드를 지었는데 피라미드의 각이 너무 예각이었던 탓에 다시 붕괴 위험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공사 중에 각도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굴절 피라미드라고 한다.
그러나 스네프루는 굴절 피라미드로 만족할 수 없었고, 더욱 상징적이고 미적으로 완성된 피라미드를 짓기 위한 재차의 노력을 했으며, 이 건축 사업은 성공적으로 끝나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이미지와 같은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다음의 파라오 쿠푸(Khufu)는 이미 완성된 선대 파라오의 피라미드에서 그 규모를 극대화하여 대규모의 피라미드를 완성했다. 이러한 거대한 피라미드는 이전까지 고대 이집트인들의 끊임없는 노력, 건축 기술의 개량과 발전이 바탕이 된 것이며 단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이후 거대한 피라미드가 정점을 이루고, 평민들까지 피라미드를 세울 수 있게 되면서 사람 크기 정도의 작은 피라미드들도 만들어졌다.
문명 : 메소포타미아 문명
건립 연대 : 기원전 605~562년
건립자 : 네부카드네자르 2세
발굴자 : 로베르트 콜데바이
현 소재지 : 바그다드 남쪽 90m
BC 500년경 서아시아 바빌론의 성벽에 있었다는 신비한 정원
신 바빌로니아의 네무가드 네즈르 2세기 메디아 출신의 왕비를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에 흙을 쌓고 나무와 꽃을 심어 놓아 멀리서 보면 삼림이 우거진 작은 산 같았다고 한다. 문제는 비가 오지 않는 이곳에 이 높이까지 물을 끌어 놓는 것.
왕은 정원의 맨 위에 큰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물을 펌프로 길어 올린 다음 각 층에 대도록 했다고 한다.
(위키백과사전에서)
바빌론의 공중 정원은 세미라미스의 가공정원으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비잔티온의 휘론이 선택한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조물의 하나인 옥상정원이다. 이름으로 보면 중력에 역행해서 공중에 떠있는 정원이 연상되지만, 사실은 높은 단에 만들어진 정원이다.
현재의 바그다드 교외에 약간의 유적이 남아 있다. 기원전 600년경에 신바빌론 왕국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메디아 출신의 왕비 아뮈티스을 위로하기 위해(식물이 있는 메디아에서 자란 아뮈티스 왕비는 건조한 사막의 나라인 바빌론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바빌론에 건조한 정원이다. 기원전 538년에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궁전 안에 만든 높이 25미터, 1단이 넓은 장으로 5단 계단으로 되어 있는 테라스에 흙을 묻고, 물을 위에까지 끌어 올려 밑으로 흘리고, 수목과 꽃등을 심었다. 매우 큰 정원이어서 멀리서 보면 흡사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가장 위의 면적은 60평방미터로 추정한다.
고대 로마의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는 언급되어 있지만,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니네부에에 있었다고 하는 다른 정원과 혼동되고 있다는 설도 있다. 스토라본의 기록에 따르면 기둥과 지하실은 연기와로 만들어져 있고, 네 모퉁이를 기둥으로 받혀져 있는 높은 곳에 자리잡은 입방체의 테라스에 흙을 묻고 정원을 구성해서, 그 위에 아치지붕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매달려 있는 정원」이라는 오역이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어에서 kremastos또는 라틴어의 pensilis를 부정확하게 옮긴 탓으로 보인다. 물을 위에까지 끌어올린 방법에 대해서는 끝없이 물을 공급하는 기계,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식 펌프 등의 설명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알렉산드리아 파로스의 등대(Lighthouse of Alexandria/Pharos of Alexandria)
Pharos Lighthouse of Alexandria
문명 : 헬레니즘 문명
건립 : 연대 기원전 250년
건립자 : 소스트라토스
발굴자 : 프랑스 국립 조사연구 센터
현 소재지 : 부서졌음
BC 280 ~ 247 BC 이집트의 프틀레마이오스 2세가 알렉산드리아 항구 근처의 작은 섬 파로스에 세운 등대. 대리석으로 된 등대의 높이는 135m. 꼭대기에는 점화 장치가 있어 이집트를 정복했던 아랍인들에 따르면 램프뒤쪽의 반사경으로 비피는 타오르는 불길은 43Km정도 떨어진 바다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하며, 맑은 나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도 반사경이 비쳤고, 햇빛을 반사시키면 160Km 정도떨어져 있는 배도 캐울 수 있었다고 한다.
1100년과 1307년의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키백과사전에서)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또는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그리스어: o Φάρος της Αλεξάνδρειας)는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에 세워진 거대한 건축물을 말하며 모든 등대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지만 지금은 파괴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파로스 섬은 알렉산드리아에 면한 작은 섬으로 헵타스타디온이라 불리는 인공적인 1km의 제방으로 알렉산드리아 항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집트 해안선은 매우 단조로와서 항구를 찾는 것이 어려웠는데 아마도 이 파로스의 등대는 항해의 편의를 위해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에 횃불과 거울을 설치하여 밤에 불을 밝힌 것은 1세기 경 로마 시기부터였으며, 그 이전의 시기에는 주간에 항구의 위치를 알려주는 주간 항로표지로서 기능하였다.
건설과 붕괴
파로스 등대는 기원전 3세기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장군이자 헬레니즘-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에 의해 건축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스스로 이집트의 왕으로 즉위하여 자신을 소테르(구원자 라는 뜻)로 칭하고 알렉산드리아 항구 부근의 파로스 섬에 등대를 건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등대의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2세 대에 이르러 완공되었다. 정확한 완공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28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치세에 크니도스의 소스트라투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등대는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높이가 약 130 미터에 달했으며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맨 아랫부분은 정사각형의 거대한 성채, 중간 부분은 팔각형 맨 윗부부은 원형으로 만들어졌는데 맨 윗부분에서 빛이 나와 불을 밝혔다고 하며, 맨 꼭대기에는 신의 조각상이 있었다. 불빛이 나오는 부분에는 거다란 거울같은 반사경이 있어 밤에 빛을 반사했으며 건물자체는 워낙에 커서 군대의 막사 역할도 했다. 이 등대의 불빛은 머나 먼 43 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일 만큼 밝았다고 한다.
등대 건물은 매우 견고하게 지어져서 1183년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주바일의 기록에도 등장하지만 1303년과 1323년의 대지진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480년 이집트의 술탄 카이트베이가 그 잔해로 카이트베이 요새를 만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로 등대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으며, 바다 속의 잔해물들도 발견되었다.
파로스는 여러 언어에서 "등대"를 뜻하는 낱말의 어원이 되었다. 그리스어(φάρος), 불가리아어(фар)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의 phare, 이탈리아어의 faro, 포르투갈어의 farol, 에스파냐어의 faro, 루마니아어와 카탈루냐어의 far과 같이 로망스어군의 많은 언어에서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영향
파로스 등대의 건축 형태는 후대의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파로스 등대와 같은 시기에 지어진 아부키르의 무덤과 로마 시대 히스파니아(에스파냐)에 세워진 헤라클레스의 탑은 명백히 파로스 등대의 모습을 본 뜬 것이다. 정방형의 하단과 팔각형의 중단, 그리고 둥근 모양의 상부가 그것이다.
아르테미스 신전 (그리스어: Ἀρτεμίσιον, 아르테미시온) 디아나 신전
에페수스(Ephesus)의 Artemis 신전 [로마 신화의 달과 사냥의 신인 Diana]
기원전 550년 경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의 에페소스에 있던 신전으로 그리스 신화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모신 신전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며, 현재는 신전의 토대와 조각 파편만이 남아있다. 신전이 세워졌던 흔적은 청동기 시대 초기부터 이곳이 신성한 장소였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에페수스 시는 소아시아에 있는 고대 이오니아 지방의 열두 개 도시 중 하나로서 B.C 6세기 경에 이미 서아시에서 상업의 요충지로 번영하여 가중 부유한 도시로 알려졌다. 이 곳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이 신전은 당시 최고 부자였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B.C 560∼B.C 546)때 세우기 시작하였다. 높이 20미터 정도의 훌륭한 이오니아풍의 백색 대리석 기둥을 127개나 사용한 이 신전은 완성되기 까지 120년이 걸렸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에페수스를 방문하여 이 신전을 돌아보고는,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에도 떨어지지 않는 걸작으로 묘사하면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헤로도토스가 에페수스를 방문한 지 1세기 정도 지난 뒤 그 훌륭하고 아름다운 신전은 어리석은 한 인간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B.C 356. 10월 "어차피 나쁜 일을 하려면 후세에까지 알려질 수 있는 악행을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한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자가 신전을 계획적으로 불태워 버린 것이다.
그 후 디노크라테스가 불타 버린 신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에페수스의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을 팔았고, 왕들은 크로이소스 왕을 본받아 기둥을 기증하기도 했다. 더욱이 아시아 원정 길에 올랐던 알렉산더 대왕은 한층 완성중에 있던 아르테미스 신전의 장대함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았겨 "만일 에페수스인이 이 신전을 나의 이름으로 세워준다면 모든 비용을 내가 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페수스인들은 다른 나라의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야심이 강한 에페수스인들은 자신들의 신전을 지금까지 어떤 신전보다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여, 그 당시 가장 훌륭했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파르테논은 길이가 69m. 폭이 30m, 높이 10정도로서, 대리석 기둥을 58개나 사용한 신전이었다. 에페수스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정도의 규모로 만들기 시작했다. 높이 18m짜리 기둥을 127개나 사용했고, 길이는 120m, 폭은 60m로 했다. 또한 신전의 건축용 자재는 가장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중앙의 넓은 홀에는 네 방향으로 대리석 계단을 딛고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그 규모나 화려함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260 ∼268년 유럽에서 아시아로 침입해 온 고트인에 의해 약탈되었으며 이 때의 방화로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J.T 와트가 대영박물관의 원조와 11년동안의 노력으로 마침내 지하 7m 지점에서 대신전을 발굴해 냈다. 발굴한 건축용 석재, 기둥, 조각을 토대로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꽤 정확하게 신전의 본래 모습을 복원할 수 있었다.
로마의 남쪽 25 km에 위치한 아리키아 부근 네미 호숫가에 있는 디아나 네모렌시스는 가장 유명한 신역(神域)으로서, 이곳에서는 디아나가 여성의 수호신으로 신앙되고 있다. 로마의 유명한 디아나 신전은 아벤티누스 언덕에 있다. (http://php.chol.com/~park0067/7artemis.htm)
마우솔로스의 영묘(The Mausoleum at Halicarnassus)
마우솔로스의 영묘는 할리카르나소스에 있는 (현재는 터키의 남서쪽 해안 도시 보드룸)에 있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마우솔로스의 영묘에는 BC 350년 무렵 할리카르나소스의 통치자였던 소아시아의 페르시아인 총독 마우솔로스와 그의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안치되었었는데 그 당시에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뺀다면 무덤건축물중엔 최고규모였다. 마우솔레움이라고도 하는데, 마우솔레움은 거대한 무덤건축물의 명사가 되었다.
건축가는 피티우스(또는 피테오스)였고 4명의 뛰어난 그리스 예술가 스코파스·브리악시스·레오카레스·티모테오스 등이 조각을 맡았다.
로마의 저술가인 대(大)플리니우스(23~79)에 따르면 이 영묘는 거의 정4각형으로서 그 둘레가 125m에 이르렀다고 한다.
36개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고 24단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꼭대기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4두마차가 올려져 있었다.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유적의 단편으로는 그리스인과 아마존족의 전투장면을 새긴 프리즈와 마우솔로스 상으로 보이는 높이 3m의 조상 등이 있다.
이 영묘는 아마도 11~ 15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무너진 돌은 이 지방의 건물을 짓는 데 다시 사용되었다.
마우솔레움은 그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으며, 그 유품은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있다.
현재에 이르러 마우솔레움은 무덤건축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위키백과사전에서)
건설 배경
마우솔로스는 공식적으론 소아시아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령 카리아의 사트라프였지만, 사실상 군사와 내정권을 모두 장악해서 그 지방에선 왕이나 다름없었다. 마우솔로스는 헬레니즘 국가였는데, 할리카르나소스로 천도한뒤 헬레니즘식의 건축물을 많이 건축하였다. 그가 죽기전 영묘를 건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완공되기전 죽고, 그의 왕비이자 여동생이였던 아르테미시아가 계속 진행하였으나 영묘는 그녀가 죽은 뒤인 BC 350년 후반쯤에 완공된것으로 추정된다.
파괴
마우솔로스의 영묘는 11~15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것으로 보이며 파괴된 후 그래도 형태는 남아있었는데 십자군 원정때 보드룸 요새로 쓰이기 위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렇게 1900년간 원형이 보존되었던 영묘는 완전히 사라지게된다. 일부 파편들은 남겨져 대영박물관에 소장되고있다.
올림피아 제우스상(The Statue of Zeus at Olympia)
제우스상 상상도
기원전(BC 457) 457년경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 앨리스 지방의 제우스 신전에 있던 신상.
신들의 왕인 제우스를 금과 상아로 장식한 높이 12m의 신상으로 당대 최고의 조각가인 페이디아스가 8년여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그 위엄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460년 경 화재로 파괴되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에는 뛰어난 건축가와 조각가들이 많았었다. 아테네 화가 카르미데스의 아들인 페이디아스도 그중 한 사람이다. 기원전 570년 이후에는 스파르타
426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이교. 신전 파괴령에 의해 신전이 헐렸고 이후 수차례의 지진과 하천 범람 등으로 신상은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스미쏘니언 미국역사 박물관의 위의 워싱턴 상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올림피아 제우스상을 본따 만든 것이다.
올림피아 상를 바탕으로 한 모조 제우스신상
(위키백과사전에서)
본체는 삼나무로 만들어졌고 표면을 상아올리브유금, 상아, 흑단, 보석니케의 조각상이 있었으며 왼쪽에는 지팡이를 든 손에 독수리
기원전 2세기 경 로마의 장군인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만들고나서 800년 후인 394년에 제우스 상은 올림피아에서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1958년에 제우스상을 만들 때 사용되었다고 여겨지는 작업장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에 의해서 제우스상의 모든 모습에 대한 것이 진척되었다.
로도스섬의 거상(The Colossus of Rhodes)
문명 : 그리스 문명
건립 연대 : 기원전 304~ 기원전 292년
건립자 : 카레스
발굴자 : -
현 소재지 : 파괴됨
로도스의 거상(크로이소스의 거상)은 로도스
BC 292~ 280 년경 소아시아 인근 로도스섬에 세워진 청동상.
BC 407 년 경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로도스는 마케도니아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높이 36m의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청동상을세웠다. BC225년 경 지진으로 파괴된 후 1000년 가까이 방치돼 있다가
AD 654년 로도스를 침공한 아랍인들이 부서진 거상의 나머지를 불리하여 시리아의 유대인에게 팔았다고 전해진다.
(위키백과사전에서)
기원전 407년경 로도스섬은 도시국가연합(Rhodo-Egyptian)의 수도로 건설되어 상업적으로 번성하고, 그들의 주요한 동맹국(Ialysos, Kamiros, Lindos)과 함께 지중해 유수의 무역중심지였다.
기원전 305년 마케도니아의 데메트리오스 1세는 동맹을 깰 방법으로 도시를 관통할 수 없게 로도스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도시국가연합은 마케도니아를 무찔렀고, 그들의 단일성을 축하하기 위하여 장비를 팔아 모은 돈으로 높이 36m의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청동상(철로 보강하고 돌로 무게를 더함)을 세웠다. 이 거상은 후일 로도스의 거상으로 불리게 되었다.
상상에 의해 만든 한 돋을새김 작품이 표현하듯이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항구 입구에 양다리를 벌리고 서 있기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은 중세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거상의 건설은 린두스 시(市)의 찰스가 12년에 걸려 기원전 282년에 끝마쳤다. 이 거상은 기원전 225년경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고, 거의 한 천년간동안, 상이 파괴된 채로 놓여 있었다.
기원전 654년 아랍인이 로도스를 침범하여 부서진 대거상의 나머지를 분해하고, 그들은 시리아의 한 유대인에게 팔았다. 거상 조각이 시리아로 900마리의 낙타 등 위에 실려 운송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 현존하는 것도 많으나 모두 기념비적인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지금 고대 불가사의 중에서 현존하는 것은 이집트 피라미드 뿐이다.
보통 현대 7대 불가사의는 잘 알지만 고대 7대 불가사의는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자세히 알게 공부하게 되었답니다.
[후에 선정한 현존하는 건축물 위주의 7대 불가사의]
1.쿠푸왕의 대피라밋
2.피사의 사탑
3.콜로세움
4.스톤헨지
5.만리장성
6.성 소피아 사원
7.알렉산드리아의 피로스의 등대
(7번 알렉산드리아 등대를 빼고 모두 현존하는 건축물입니다.)
[학자였던 코트렐이 선정한 7대 불가사의 목록]
1.클라크 데 슈발리에 요새
2.바위의 돔 사원
3.하트샤푸스트 여왕의 장제전
4.팔미라 고도
5.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6.미노스의 궁전
7.이집트 왕가의 계곡
[현대 7대 불가사의]
치첸이차 피라미드
로마 콜로세움
페루 마추픽추
브라질 그리스도상
고대도시 페트라
중국 만리장성
인도 타지마할
첫댓글 세계7대불가사의 [사진첨부] - - World Seven Wonders
[현대 7대 불가사의]
치첸이차 피라미드
로마 콜로세움
페루 마추픽추
브라질 그리스도상
고대도시 페트라
중국 만리장성
인도 타지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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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고
느끼고 십다